- Posted at 2019/01/15 13:33
- Filed under 끄적끄적
소 유님을 만났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다. 슬비는 그 날 내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나간 줄 안다. 더운데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이라 대답했고, 헤진 운동화 대신 굽 낮은 갈색 에나멜 단화를 신었을 뿐인데 그렇게 착각했다. 물론 나는 이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어서 열심히 하고 오겠다는 의미로 방긋 웃어주었다.
아마도 내 어머니 – 소 유의 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 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아무런 능력이 발현되지 않은 까닭에 오래 전에 밖으로 내친 딸이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더군요, 지금에 와서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난감하게 되었지 뭐에요, 난잡하게 몸을 굴린 나머지 급하게 임신 중절 비용이 필요해진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수다를 떨진 않았을 거다. 가문의 수치, 혈통의 배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일체 입을 열지 않는 그녀다. 개인비서에게 스케줄을 조정하라 지시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연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소 가 내부에 몰래 심복이라도 심어놨나.」 10대 가문들끼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은 예전부터 유명해서 운전기사나 집사 같은 고용인을 포섭하여 정보를 빼내는 일은 제법 흔하다. 「하지만 요금 같은 시대에 세작은 너무 고전적이지... 어쩌면 CCTV를 해킹했을지도.」 포섭 상대가 이중첩자의 가능성도 있는 만큼 요즘엔 사람이 아닌 첨단장비의 힘을 빌린다. 공공장소 CCTV 해킹이 불법행위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면 인공위성도 띄우는 마당에. 그만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데 수단을 마다하는 게 이상하다.
「그래봤자 소 가는 아픈 손가락이잖아.」 열 손가락 중에 깨물면 가장 많이 아파하는 손가락이 소 가라는 우스개 얘기가 있다. 3대를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부터 피가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불륜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던 젊은 후계자가 자동차 전복 사고로 사망한 게 기폭제였다. 상상력이 오지게 훌륭한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명망 높은 집안의 후계자 죽음은 어느새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살로 둔갑했고, 가쉽지 기자들은 그가 왜 자살했는지를 두고 쉬지 않고 똥을 배설해냈다. 그 많고 많은 똥 중의 똥, 숙변 중의 숙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게 혈통의 약화다. 대한민국의 내놔라 하는 열 손가락 가문에 들기엔 저들의 피가 옅어졌고, 이에 견딜 수 없는 압력에 시달리던 소 가의 후계자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며 방황을 하다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나야 간통을 저지르던 여배우가 헤어짐의 대가로 알토란같은 골프장 소유권을 요구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자동차가 급발진 하도록 조작을 했다는 쪽이지만, 알게 뭐람. 어느 쪽이든 구린내가 진동하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튼 가볍게 콜록 기침했다. 『누구에게 들었어? 내가 소 유 님을 만났다고.』 『들었다기 보다는 봤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민이 천장을 향해 짐짓 손가락질 했다. 그러니까 가게 안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봤다는 얘기다. 범죄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 당당하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봤는데.』 『음...... 어쩌다보니?』 인마 너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이 이 모양 이 꼴이다.
뺨에 바람을 집어넣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민이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진짜로 돈 문제? 앞으로 다신 귀찮게 구는 일 없을 테니 돈을 주세요, 이런 거야?』 『알겠어요, 댁의 아드님과 헤어져 드릴게요, 거기서 내가 그랬을 거 같냐?』 『나야 모르지.』 이쯤해서 나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진짜 뭘까, 얘는. 표정으로 보면 단순 재미로 이러는 것도 아니다. 아침 드라마에 푹 빠져서 다음 줄거리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시청자라면 이보다는 조금 더 흥분한 모습이어야 한다. 민은 반대로 법률 조언이 필요해 변호사 사무실을 노크한 사람 같았다. 즉,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엔 돈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 『하루 5천만 원 호텔 투숙비에 벌벌 떠는 네 주제에 100억을 불렀을 거 같지가 않아. 기껏해야 10억 정도겠지. 근데 10억이면 솔직히 말해 푼돈이나 마찬가지거든. 그 걸론 강남 아파트 한 채 못 사잖아. 그런데 그 푼돈 요구에 듣고 있던 소 유 님 반응이... 뭐랄까.』 극적인 효과를 내고자 함인지 한 박자 쉬고 말했다. 『30cm 칼날의 흉기로 배가 쑤셔진 거 같더군.』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입은 웃었다. 직업 배우 앞에서 나 같은 민간인이 가짜 웃음을 지어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와... 진짜 오랜만에 보네, 데드맨 스마일.』 말로는 감탄하는 것 같지만 행동은 정 반대다. 민은 검지와 엄지를 잘게 구부려 좁쌀을 묘사했다. 콩도 아니고 좁쌀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훨씬 작은 겨자씨던가. 『그런데 무지 형편없어. 동공이 그렇게 커지는데 누가 속아.』 민은 티끌을 묘사하는 손가락을 눈앞으로 훅 들이밀었다. 『딱 요~ 만큼.』 그리고 후, 입김을 불어 있지도 않은 먼지를 날려버렸다. 『이 정도라고.』
나는 속으로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소 유 님을 만나서 뭐라고 했어? 나기.』 나에게는 교감신경을 조정하는 능력 같은 건 없다. 얇은 가면처럼 덧씌운 얼굴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웃었다. 그리고 삼 곱하기 팔은 이십 사. 『네가 왜 그걸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어, 민.』 『응, 계속해.』 『사생활이라고. 사. 생. 활.』 『그래서 소 유 님에게 뭐라고 했다고?』 『아... 진짜! 시덥지않은 얘기만 했어. 날씨라던가, 더위라던가... 자외선 차단제라던가.』 『과연.』 『진학에 대해서도 얘기했어. 그럴 필요를 못 느껴 대학교에는 가지 않겠노라 말씀드렸지. 공부를 잘 했던 것도 아니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아직 없고 하니까.』 『그리고?』 『에어컨 냉방병과 레지오넬라균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또.』 『허리 아픈 사람의 수면 자세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로운 비타민 세 종류...』 『시시하군.』
말꼬리를 자르며 민이 혀로 쯧 소리를 냈다. 『나기. 내 판단에 의하면 너는 머지않아 곧 죽을 목숨이야. 네가 무슨 엉뚱한 사고를 쳐서 명줄이 짧아지게 되었는지, 솔직히 나는 그리 알고 싶지 않아. 하지만 물비린내 진동하는 우중충 네 친구들은 나와는 사정이 달라서 그 이유를 반드시 알고 싶어 할 거다. 어째서냐고, 무엇 때문이냐고.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하게 될 거야, 나기. 허리 아픈 사람의 수면 자세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로운 비타민 세 종류 탓이라고.』 『...』 『그럼 그 두 사람 반응은 어떨까. 상상을 해봐, 나기.』 민의 목소리가 사막의 그것처럼 건조해졌다. 『그 중에서도 슬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을 해보라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슬비느ㄴ.』 여기까지 제법 심각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Posted by 미야
2019/01/15 13:33
2019/01/15 13:33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osted at 2019/01/12 10:52
- Filed under 끄적끄적
민을 처음 보았던 건 중등교육과정 시절이다. 「모두 주목. 오늘부터 새 친구가 생겼어요.」 당시 나는 학기 중 전학을 온 소년의 이름이 창 연민인 줄 알았고, 귀화한 중국인일 거라고 자기 멋대로 착각했고, 이름 그대로 소년에게서 연민을 느꼈고,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쥐어뜯어야 했다. 열한 살 소년은 끔찍스러울 정도의 토쟁이였다.
「미친 거야. 소화기관이 어떻게 된 게 분명해. 아님 십이지장 대신 달팽이이관이 달렸던가.」 시리도록 찬 물에 걸레를 빨면서 이를 갈아대던 기억이 선명하다. 교실이라는 작은 정글 안에서 먹이사슬 최하층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나는 또 다른 최하층인 전입생이 소화가 되다 만 음식을 게워낼 적마다 청소를 도맡아 해야 했다. 나는 급우들이 편하게 누르면 되는 부저와 다를 바 없었다. 속 뒤집어지는 웩 – 소리가 나면 교실의 모든 눈동자가 곧장 나에게로 향했다. 모르는 척하고 노트 필기를 하고 있자면 독촉의 의미로 고무지우개가 날아 들어와 머리를 건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그냥 이 말만 하겠다. 인간은 때로 한계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다.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빗자루와 걸레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업 중임에도 교실 밖으로 나가도 그 누구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올라온다 싶으면 빨리 화장실로 가란 말이야.」 내가 녀석더러 귀화한 중국인일 거라 착각한 건 아무리 애원하고, 윽박지르고, 구슬려 봐도 일절 대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꾸만 안한 게 아니라 고무찰흙으로 빚은 인형인양 표정 변화조차 없었던 걸 봐선 아예 한국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닌 샹 쩐머 쭤 터우파? (좀 더 싼 것은 없습니까?)」 간단한 생활 중국어 몇 마디에도 반응이 없던 걸로 봐선 그조차 아닐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녀석은 학교에서 딱 세 가지밖에 안 했다. 밤새 게임 삼매경에 빠졌던 사람처럼 흐느적거리기. 만사 귀찮다며 눈을 감고 있기. 토하기. 책걸상에 들러붙은 토사물 찌꺼기를 하도 문질러 치우다보니 없던 알통이 새로 생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근육이 붙어 두꺼워진 팔뚝을 이유로 전학생을 점점 꺼려하게 되었고. 불안정한 사춘기 소녀의 짜증은 소년의 이름이 창연 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정점을 찍고 폭발했다.
「뭐? 한국말을 모르는 귀화 중국인?」 마철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나중엔 너무 웃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배가 아프다며 히꺽히꺽 소리를 냈다. 「녀석은 창연이야. 알파 창연 씨라고. 어떻게 그걸 몰랐을 수가 있어. 푸흐흙, 진짜 걸작이야. 중국인 창 씨... 푸흐륵! 아이고, 배야!」
0.05%의 알파들은 이차성징과 함께 감각과잉 증상을 겪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대포의 굉음으로 들리고 1킬로미터 밖의 참새가 재크와 콩나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된다. 뭐, 그 정도야 눈 감고 귀 막아 참는다 해도 약간의 상처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이 몰아닥친다는 게 가장 문제다. 작은 생채기만 생겼을 뿐인데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람처럼 울부짖는다. 광란을 일으킨 통각 탓에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다. 가뜩이나 성장기라서 몸의 변화가 많을 시기인데 그 전부가 고통이다. 다행히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으나... 알만카로젝은 일반 멀미약의 50배 강화판이다.
「미친놈들. 감각 과잉인 알파 새끼를 약에 절여서 일반인 학교에 던져놓다니.」 나는 즉각 소년으로부터 연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내 분신과도 다를 바 없게 된 걸레도 바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안 해! 이딴 짓 앞으로 절대 안 한다고!」 이성이 끈이 뚝 끊겨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화장실에서 똥 싸고, 방귀뀌는 소리까지 쟤 귀엔 전부 다 들릴 거 아냐!!」 그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왜 그걸 가장 끔찍하게 여겼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또 딴 생각하고 있군.』 대리석 조각처럼 잘 생긴 얼굴이 코앞으로 불쑥 들어왔다. 『깜짝이야!』 거 깜빡이 좀 켜고 다닙시다. 백만 관객을 몰고 다니는 배우의 맨 얼굴은 심장에 매우 나쁩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 혼자 꽃밭으로 가버리는 거, 무진장 실례 아냐?』 『아닌데요. 엄청 집중! 집중 했거든요? 진짭니다.』 재빨리 영업 모드로 들어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오늘의 추천 제품은 화이트 소보로 밀크 크림빵입니다, 고객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두 달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제과점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외치던 멘트가 자동으로 혀에 감겼다. 이런. 눈이 부릅떠졌다. 천만다행으로 자동재생 1초 전에 혀를 꽉 깨물 수 있었다. 『아부버머어!』 아픈 혀를 내밀고 있자니 민의 표정이 가관이다. 해석하자면 이런 병신을 다 봤나. 점프에 실패하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혀를 재빨리 갈무리하고 아무렇지도 않음을 증명하고자 테이블 위에 놓인 냉수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지면 본인만 손해라고 생각한 듯하다. 가느다란 은색 실반지가 끼워진 검지로 의자 팔걸이 부분을 톡톡 치다가 이내 자세를 바꿨다. 『아무튼 생일 축하한다.』 『땡. 대상이 틀렸네요. 난 아냐. 오늘은 마철의 생일.』 『그게 상관있나?』 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내 앞에서 평등한 버러지들이야. 벌레1, 벌레2, 벌레3. 그러니 누구의 생일이든 내 알 바 아니고. 인심 후 하게 쳐서 축하는 해드릴게.
나는 삐쳐서 외쳤다. 『생일 선물 정도는 내 놓고 축하한다고 말해.』 녀석도 지지 않고 외쳤다. 『누구처럼 슬리퍼 찍찍 끌고 빈손으로 잔칫집에 오는 싸가지는 없거든? 프린스턴 로얄 호텔 VIP 이그제큐티브 룸을 우중충 패밀리 이름으로 예약해뒀어. 하루 숙박료 5천만 원 짜리야.』 『하루에 5천만 원?! 인기 배우라서 돈이 썩어 나냐?! 차라리 과자 사먹게 돈으로 줘!』 『네 생일도 아니라며 뭘 이래라 저래라 야.』 『아까워서 그러지!』 뺨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불만을 표현했다. 영화가 대박을 칠 때마다 돈을 갈퀴로 벌어들이는 녀석에게 5천만 원은 있으나마나 한 돈이겠지만 우리 같은 바닥 인생에겐 작지 않은 돈이다. 사성급 호텔 하루 이용료로 쓰기엔 너무 아깝다. 차라리 저금을 해뒀다가 다음 학기 마철의 대학 등록금으로 쓰는 게 훨씬 이롭다.
속이 쓰렸다. 『아이고, 억울해. 누구는 돈이 없어 파마도 못 하고 한 여름에 선풍기도 마음껏 못 트는데...』 『돈이 없어?』 『그게 팔자라서 그렇다. 금수저인 너는 평생 이해 못 하겠지만 센터에서 독립해서 나오면 대부분 거지가 되어버려. 죽어라 저금한 돈도 방 하나 구하면 다 없어져 버리니까. 심하면 끼니 걱정도 해야 해. 깍두기나 단무지 없이 라면만 먹어야 한다고.』 『흠... 그래서 돈을 얻어내려고 소 유님을 만났던 건가.』 『뭐?』
순간 숨 쉬는 걸 잊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9/01/12 10:52
2019/01/12 10:52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osted at 2019/01/10 15:42
- Filed under 끄적끄적
보육교사의 잔소리도 한쪽 귀로 흘렸던 놈이니 징징거리는 내 말 쯤이야 밟히는 껌이었다.
『나는 사람 많은 곳이 싫어, 마철아.』 《어, 그래.》 『싫다고~!!』 《응, 그래.》
마철의 생일파티는 항상 북적거렸다.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녀석의 꿈은 생일날 커다란 체육관을 빌려서(...) 친구들과 다 같이 전국구 규모의 대 운동회를 여는 것이다. 유치찬란하면서도 묘하게 현실감이 있는 이 소원은 나의 비웃음을 사는 것과 동시에 불안의 원인이기도 했다. 디테일이 확실해서 슬비는 변신 마법소녀 복장을 한 응원단장으로「생일 축하해, 장 마철~♡」플래카드를 들고 관중석을 들었다 놓았다 해야 했고, 나는 중앙 단상에 올라 만장하신 가운데 개회식을 선포하게 되어 있었다. 씨발. 낯 뜨거워서. 제22회 장 마철 군의 생일을 맞이하여 이 자리에 모여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승리를 향해 뜨거운 땀을 흘림으로 모두가 한 마음으로 인류화합의 장을 만들어 나갑시다, 이딴 말을 내뱉으라는 거지. 씨발.
핸드폰 너머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마철의 경제력으로는 체육관 대여는 아직까진 무리라서 – 하느님 감사합니다 - 올해는 카페를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허나 배경음만 들어선 커피와 간단한 먹거리를 파는 그런 가게가 아니었다. 쿵쾅거리며 뭔가가 날뛰었고 누군가 소리 질렀다. 구와악 구와악 미친 것들이 뿔난 짐승의 언어로 환호했다. 나는 질려서 핸드폰을 귀에서 약간 떼어냈다.
『슬비는.』 《옆에.》 『바꿔줘.』 《음... 무리.》 『어째서?』 《우리 지금 그거 하려고.》 『야! 이 미친놈아!』 그거?! 그거가 뭔데! 그거가 뭔데 왜 갑자기 목소리 내리깔고 소곤거려. 소금물로 눈을 씻은 기분이다. 사람들 잔뜩 모아두고 애인이랑 둘이서 뭘 하려고?! 너희 두 사람이 이런 짓 저런 짓을 해도 돼는 성인이라는 걸 나도 아는데 말이야... 내가 꿀꺽 침을 삼키다 못해 버럭 화를 내자 저편에서 마철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우리 나기. 너 지금 야한 상상했지.》 『안 했어. 하나도 안 했어.』 《두 번 반복해서 부정하는 건 긍정이라고 하더라.》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마철은 껄껄 아저씨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부터 슬비랑 듀엣으로 노래 부를 거야. 다 부르기 전까지 후딱 와. 더 늦으면 1분에 5,000원. 오케이?》
7부 청바지 차림에 삼선 슬리퍼,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인데다 양손은 텅 비었다. 그래도 어려서부터 죽마를 같이 타던, 아니. 죽빵을 날려대던 친한 친구의 생일축하 파티인데 립스틱 정도는 바를 걸 그랬다고 후회하며 약도에 그려져 있던 장소로 발걸음을 서둘렀다. 카페 베브 론 (BeV loan) 베브는 10억 전자볼트인데, 그걸 대출해준다 라. 통통 튀는 소립자들이 나노사이즈 커피를 마시는 이미지라서 그런지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파짓 하고 팔뚝으로 독특한 아픔이 느껴졌다. 따끔한 정도가 아니라 쓰라릴 정도다. 어둠 속에서 봤으면 새파랗게 불꽃이 튀었으리라. 아무래도 기분 좋은 느낌일 수가 없어서 양 미간을 왕창 찌푸리며 자극을 받아 털이 곤두선 팔뚝을 쓸어내렸다.
『여, 이게 누구신가. 나기 님 아니신가. 이걸로 우중충 시리즈가 모두 납시었군.』 출입구를 정면을 바라보는 좌석으로 환영의 박수를 치는 인간이 앉아 있었다. 근데 이게 짝짝짝 리듬이 아니라 중앙위원회 당 간부 짝, 짝, 짝 리듬이다. 이것만으로도 재수가 털리는데 녀석은 화려한 깃털을 뽐내는 수컷 공작새처럼 좌우에 여자들을 끼고 온갖 서비스를 받고 있었다. 부채질은 기본이고 – 냉방 중이다 이년들아 - 손질한 과일 조각을 꽂이로 집어 입에 넣어주려는 여자애도 있었다.
『창연?』 아는 얼굴이다. 사실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화려해서 잊어먹기도 힘든 얼굴이다.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영화관에도 나온다. 그래서 자동반사로 이름이 툭 나왔다. 『실례야, 나기. 나는 널 성으로 부르지 않았어.』 어미 새처럼 그의 입에 사과조각을 물려주고 싶어 기를 쓰는 여자애를 가볍게 옆으로 밀면서 그가 말했다. 몰라, 몰라, 오빠 몰라, 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을 것처럼 생긴 여자애가 장난처럼 앙탈을 부렸다.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인가. 고민하며 고쳐 불렀다. 『민.』 그제야 녀석은 고개를 쓰윽 치켜 올려 조공으로 받쳐지는 과일을 얌전히 받아먹었다.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로 고정한 채 말이다. 과즙 탓에 녀석의 입술이 번들거렸다.
닭살 돋았어. 돋았다고. 부지런히 팔뚝을 어루만지며 어딘가에 있을 슬비와 마철을 눈으로 찾았다.
어쩌다 우연히 용변이 급한 사람이 화장실을 찾아 가게 문을 열었더라도 마철은 두 팔 벌려 환영할 것이다. 생일파티 장소로 대여가 되었다는 걸 모르고 커피를 마시러 온 손님이라 해도 괜찮았다. 인류화합의 대 운동회를 꿈꾸는 마철은 지갑을 분실했다며 차비를 핑계로 약간의 돈을 뜯으려는 사기꾼마저 자신의 생일파티로 아무렇지도 않게 끌어당겼을 것이다.
하지만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창연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녀석은 마철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 아니, 우리 우중충 시리즈 세 명 중 아무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민은 대한민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창연 가의 일원이고, 태어나 울음을 터뜨릴 때부터 개화를 한 진성 알파다. 깍두기 취급을 받다 결국에는 시설에 버려진 우리들 짝퉁과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있어「친구」라는 단어로 관계를 정의하는 게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어느 누가 사자와 토끼가 친구 먹을 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런 세계는 허구다. 구렁이와 쥐가 베프라면 먹이사슬이 붕괴한다. 지금도 우월종 알파라는 걸 숨기지도 않고 제왕처럼 의자에 앉아 하찮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저 녀석을 보아라. 만약 민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이 안에 있는 사람 전부가 파리 목숨이다.
다시 파직, 하고 정전기 아닌 정전기가 튀었다. 썅! 절대로 부러 그랬어. 질색하며 피부가 노출된 양팔을 감쌌다.
『하지 마! 아프다고!』 『너는 늘 딴 생각을 많이 해서 탈이야, 나기. 사람이 얘기하면 좀 들어. 아까부터 앉으라고 하고 있잖아.』 어느새 그 많던 계집들이 사라지고 성질 나쁜 공작새 하나만 4인용 소파 한 가운데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19/01/10 15:42
2019/01/10 15:42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1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Recent Comments
Site Stats
- Total hits:
- 1022430
- Today:
- 118
- Yesterday:
- 301
Calendar
«
2024/12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