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주인공 오리캐. 설양 루트(일 수가 없는데).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만 읽은 상황이며 이해부족으로 원작 설정이 미세하게 뒤틀릴 수 있음. 일부러 뒤트는 일은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하지 않습니다. 아 씨바 출신지며 나이며 죄다 불명이잖아. 의도치 않게 부산 사람을 대구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임. 오리캐 말투는 아저씨라고 생각하세요. 걸람의 자아는 34세입니다.
가까스로 배달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왔을 적엔 이미 하늘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거의 내던지듯 지게를 내려놓은 뒤, 내 몫이랍시고 남겨놓은 간장 주먹밥 두 덩이를 손에 쥔 채 그리운 ‘마이 스위트 홈’으로 향했다. 몸이고 마음이고 다 너덜거리는 상황이라 게으름 그만 피우고 빨리 좀 다니라고 야단치는 채소가게 주인 송씨의 말은 귓등으로 흘려보냈다. 땅만 쳐다보며 걸으며 대꾸를 안 하자 송씨가 화를 냈다. 무시하고 뒷간 옆에 붙은 작은 창고 문을 열었다.
원래는 장작을 말리는 용도로 쓰였다는 창고가 송씨의 은혜로 구한 내 침소다. 이모부네 계단 밑 벽장에서 살았다던 유명 판타지 소설 주인공보다 더 못한 신세라고나 할까. 모든 창고가 그러하듯 습기만 막으면 되었기에 얇은 마룻장에 지붕이랍시고 널빤지 기와를 얹은 게 전부인 누더기였다. 덕분에 얼마나 웃풍이 심하던지 새벽이면 입이 돌아갈 지경이라 틈새에 꼼꼼하게 진흙을 채워 넣어 지금은 널빤지 사이로 뜬 별을 구경하는 일은 없다. 그래봤자 아늑하다는 느낌은 일절 들지 않고 침상 하나 놓지 못할 좁은 구조여서 다리를 쭉 펴고 누울 생각도 못한 채 벽에 기대어 무릎을 세웠다.
오늘은 정말 향불 올리는 날인 줄 알았다. 아첨하며 내뱉은 말들 중 무엇이 설양의 심기를 건드린 건지는 알 재간이 없다. 쓰레기 같은 그 인간의 감정은 좌로 우로 멋대로 널뛰기를 했으니까. 아무튼 저승 갈 뻔했다는 건 확실했다. 삼도천에 발목까지 담갔다가 겨우 발을 뺐다고 보면 되었다.
‘소문으로는 선동요 사람들이 약양 상씨 세가에 도움을 요청할 거래요.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약양의 상씨 세가밖에 없으니까요.’ 그때 설양의 입가가 뒤틀렸다.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건 약양 상씨밖에 없다, 라...’ ‘으아앗~!!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물론 신묘하신 설 공자도 요괴를 잡을 수 있겠죠. 암요. 공자의 능력이라면 한 손으로도 충분할 겁니다. 아니. 손가락 하나로도 충분합니다. 새끼손가락만 있어도 됩지요. 그렇지만 설 공자의 호의는 매우 값진 것이지 않습니까. 바위를 가르는 칼로 닭을 잡지 마라, 그런 것이지요.’ ‘그렇다는 건 약양 상씨는 닭 잡는 칼이라는 거야?’ ‘아이고, 공자도 참. 꼭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요. 무슨 오해를 그렇게 하세요. 상씨 사람들이 들으면 제가 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타박할 거 아닙니까. 제가 드린 말의 뜻은 공자가 바위를 가르는 칼이라는 뜻으로... 컥!’
목을 움켜쥐어 잡은 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검지를 들어 내 목의 한 가운데, 정확하게는 목울대를 지그시 눌렀다. 먹은 것이 부실하여 2차 성징이 더디게 온 내 몸은 변성기를 겪으면서도 목젖이 그리 도드라지게 나오지 않았다. 설양은 무슨 흔적기관처럼 희미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하는 그 목젖 바로 아래를 눌렀다.
세게 누른 것도 아니니 장난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목에 구멍이 뚫렸다는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손가락으로 눌렀을 뿐이라고?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살갗을 찢고 들어가는 느낌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칼날은 목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한 바퀴 회전하며 연약한 안쪽 살을 썩둑 베어냈다.
‘이러지 마세요.’ 나는 눈빛으로 애원했다. 입술에 침을 바르는 설양은 약간 흥분한 눈치였다. 더러운 개새끼. 목 한 가운데 살갗을 손가락으로 훑고 내려오면서 놈의 눈동자 동공이 좁아졌다. 제일 더러웠던 건 설양의 사타구니 한 가운데 자리한 양물 크기가 커졌다는 점이었다.
‘몰라. 생각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푹 내쉬다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예전부터 나는 고민거리가 많으면 이불을 머리 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곤 했다. 예전이 아니라 전생이라고 해야 정확하겠지만, 은행 융자금 만기가 다가온다거나. 원룸 보증금을 떼먹힐 상황이라던가. 중고거래 사기로 노트북이 아닌 벽돌을 택배로 받았다던가.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만 원짜리 암막커튼을 치고 싸구려 조립 침대에 누워 잠에 빠지면 그 순간만이라도 고민거리에서 해방이었다. 사람을 죽일까 말까 망설이며, 그것도 목에 구멍을 낼까 말까 저울질하며 성적으로 흥분하는 정신이상자에게 아무래도 제대로 찍힌 거 같다고 백날을 고민해봐라. 양팔을 감싸 안은 자세로 스프링 매트리스가 아닌 한 겹 나무 바닥에 누워 숨을 골랐다. 몸이 고단했던 탓인지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자 의식이 흐려졌다.
“밤새 끙끙거리더구나.”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퍼주는 밥 양이 많았다. 주시가 나온다고 하여 발걸음이 끊긴 길로 강제로 배달을 보냈으니 내심 미안한 감정이 들었던 모양이다. 살짝 부운 눈을 꿈뻑거리자 송씨 부인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신 보리밥을 한 주걱 더 올려줬다. 기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래도 반찬도 없이 밥만 올리니 그게 꼭 제사상에 공양 올리는 느낌인지라 참 뭐 했다.
눈치껏 젓가락으로 절인 무를 집어 입에 넣으면서 운을 뗐다. “저, 송 부인. 어제 말인데요.” “한 번 더 다녀 오거라.” 아이 씨! 진짜 이러기야! 주시 이야기는 꺼낼 생각도 없었어. 도중에 설영을 만났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송씨 부인은 아예 고개도 돌려버렸다. 내가 뭐라고 하던지 듣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이었다. “오늘 당장 다녀오라는 건 아니다. 하루는 쉬고 내일 가거라.” 그 이상은 안 된다며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지금까지 널 보살펴준 우리 부부에게 은혜를 갚아야 할 거 아냐. 못 하겠다는 말을 주둥이에 담기만 해봐!” 송씨 부인은 예전 우리 외숙모를 닮았다. 덩치도 우람하고 팔뚝도 우람했다. 솥뚜껑 같은 손바닥이 어떤 손바닥인지 잘 알고 있는 나는 눈을 곱 뜨는 대신 시선을 무릎 아래로 깔아야 했다.
“설양을 보았다고? 어디서.” 하루는 배달 일을 쉬게 되었기에 결국 내 이야기 상대는 채소가게 셋째 송만희가 되었다. 재미 삼아 썩은 과일을 먹여 날 골로 보내려 했던 그는 어느새 장성하여 결혼도 했고 코찔찔이 아이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명이었다. 제 어미에게 늘 그러듯 명이는 어부바를 해달라고 떼를 썼다. 내가 짐짓 모르는 척하자 명이는 내 정강이를 발로 찼다. 그런 아이의 난폭함을 접하고도 송만희는 아들이 참 씩씩하다며 매우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말리기는커녕 어째서 빨리 업어주지 않는 거냐고 눈총을 주는 건 덤이었다.
“쯧. 그 망할 것이 명문 세가의 객원으로 신분이 상승했다고 들어 기주로는 다신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건만.” 소산에서 그간 설양의 폭거에 데지 않은 자가 없었다. 고아인데다 채소가게 밥풀떼기인 나조차 돈을 뜯겼을 정도다. 설양은 딱 한 가지, 강간만 안 했다. 강간을 빼고 폭행, 협박, 살인, 강도, 방화, 납치, 금품강탈, 그동안 저지른 짓을 열거를 하면 리스트가 끝이 안 났다. 셋째는 머리가 아프다는 걸 숨기지 않으며 신음했다. “그래. 설양 그 자가 뭔 짓을 하더냐.” 제 목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거시기를 바짝 세웠습니다, 사실을 말하기는 뭐해서 최대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얼굴을 본 송만희는 지레짐작하고 다시 끌끌 혀를 찼다. “문제네, 문제야.” 설양은 그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재앙이라서 그가 소산으로 다시 활동 영역을 바꾼다면 우리로선 바짝 긴장할 필요가 있었다. “어디 맞진 않았고?”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예전부터 설양에게 자주 괴롭힘을 당했으니 등허리라도 한바탕 걷어차였을 거라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퍼뜩 깨달았다며 눈을 크게 떴다. 등허리가 아작난 자가 자기 아들을 업고 있었다. 송만희는 나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땅에 떨어뜨릴까 두려워하며 명이를 떼어내 얼른 자기 무릎에 앉혔다.
“셋째 나리. 죄송합니다만 좀 나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때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가 문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우리를 불렀다.
Posted by 미야
2021/10/15 17:40
2021/10/1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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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던데. 어머, 풀피리를 불면 주시가 얌전해져요.
설양은 잔뜩 으스대는 표정으로 코를 세웠다. 그 유치한 모습에 속으로 투덜거렸다. 전생 34년, 빙의 10년을 더한 입장에선 그가 하는 짓이 꼭 삼촌 앞에서 포켓몬 스티커를 잔뜩 가져와 자랑하는 어린 조카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묘하게 썩어가는 내 표정을 봤는지 그가 이마로 흘러내린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뒤로 쓱 넘기며 인공감미료 팍팍 버무린 후후 웃음소리를 내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배트맨 없는 세상에서 조커가 웃고 있다. 재빨리 태세를 바꿔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구조조정 희망퇴직을 언급하던 부장님 앞에서 온갖 재롱을 떨던 내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이었다.
“신묘하군요. 설 공자. 선술인가요?” “별 거 아냐. 잡기지.”
말은 그렇게 해도 더 칭찬해달라는 눈빛을 한 설양은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성격만 좋았으면 여인들 심장마비로 죽어나갔을 귀여운 덧니였다. 웃음을 머금은 설양은 다시 길게 찢은 잎사귀를 입에 물고 아까와는 달리 제법 날카로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사람 아닌 것들의 귀에는 다르게 들리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호루라기 소리를 들은 훈련병처럼 반응하며 같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전원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얌전해졌다. 허옇게 변한 눈을 여전히 뜬 채였어도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뻣뻣하게 굳어버리자 이제 그것들은 걸어 다니는 송장이 아니라 할로윈 데이를 맞아 대문을 장식한 허수아비처럼 보였다. 빗자루로 턱턱 치면 뿌연 먼지가 솟구치는 구제불능의 장식품들 말이다.
도대체 이런 흉악한 것들은 어디서 튀어나오는 건지. 채소가게 송씨의 말에 따르면 원한을 품은 시신을 제대로 장례 치루지 않으면 시변을 한다 했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니고 달의 기울기에 따른 음기의 양이라던가, 죽은 장소 등 여러 조건이 맞아야 했다. 당연히 그 조건들이 딱딱 들어맞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곳이 아무리 판타지 세상이라도 대낮에 주시가 돌아다니는 일은 결코 흔치 않았다. 그런데 소산은 음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곳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네크로맨서가 암약하는 중이라서 그런 건지, 배달을 하러 갈 적마다 주시가 발에 걷어차였다.
‘이유가 뭐지. 요 몇 년간 작황이 좋지 않아서인가.’ 소산(小産)은 ‘산출이 적다’ 라는 뜻 그대로 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전생에 내가 살던 곳과 달라 쌀이 주식이 아닐지언정 아무튼 비가 적으면 밭농사도 꽝일 수밖에 없다. 먹을거리가 부족해지자 산 사람을 상대로 한 도둑질은 당연하고 부장품을 노린 무덤 도굴이 판을 쳤다. ‘덕분에 도굴당한 무덤에서 이것저것 튀어나오는 눈치이기는 한데...’ 풀피리에 반응하여 off 상태가 된 주시를 지긋이 쳐다봤다. 글쎄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들의 수의가 너무 남루했다. 다듬지 않은 숭한 수염을 달고 있는 주시는 심지어 신발을 얻어다 신겼는지 좌우의 짝이 맞지 않았다. 허리띠는 무명이었다. 저들은 저승 가는 노잣돈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주인 따라 순장당한 아랫사람들이거나, 고귀한 분이 묻힌 장소는 명당일테니 좋은 기운을 얻으려고 가족들이 몰래 가묘를 쓴 시신이라는 건데... 무덤 하나에 몇 명이 들어가는 거야, 진짜.
잡생각이 너무 길었던 듯하다. 입 다물고 있는 시간이 길다고 느낀 설양이 맨질거리는 얼굴을 쑥 들이밀었다. 아이고 우리 빌런님! 반사적으로 침 바른 혀를 나불거렸다. “이런 능력을 두고 겨우 잡기라뇨. 그럴 리가요. 선사의 말씀으로 겸양도 도가 지나치면 기심이 생긴다고 하잖습니까. 결코 잡기가 아닙니다. 걸람은 이런 거 처음 봅니다. 부럽습니다. 대단한 능력이에요.” 멈추지 않고 부럽다, 멋지다, 놀랍다, 갖은 양념을 다 쳤다. 근사하다 다음으로 어떤 미사어구를 덧붙이면 좋을까 전전긍긍하는 사이, 설양이 쥐고 있던 풀잎을 툭툭 날려버렸다. 그는 내 입바른 말을 한쪽으로 듣고 한쪽으로 흘렸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아걸은 주시가 그다지 무섭지 않은가봐. 다른 년놈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느라 바쁜데 용감하게도 주먹으로 머리를 후려치다니. 대단해.” “어, 뭐...” “혹시 아는 얼굴이었나?” “에? 아뇨.” “괜찮아. 난 다 이해 해. 언젠가 걸레라고 손가락질하며 널 때린 적이 있었던 거겠지. 그러니까 저 새끼 얼굴을 알아보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머리부터 쳤겠지. 암, 암.”
오해다. 하지만 바로 잡기가 참 뭐했다. 저쪽 세상 좀비를 떠올리고 일부러 머리를 노렸어요, 라고 할 수는 없잖는가. 그런데 이 이야기를 빼면 냅다 머리부터 갈긴 걸 설명하기가 참 그렇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급소라고 여기는 부분을 공격하기를 회피하는 법인데 목, 머리, 심장, 사타구니처럼 민감한 부위를 주저함 없이 노렸다는 건 애초에 상대에게 큰 원한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곁눈질로 머리 망가진 주시를 훔쳐봤다. 알던 사람인가? 동네 사람이었나? 잘 모르겠다. 게다가 흙과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상태다. 여인이 붓으로 눈썹만 그려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던데 이런 조잡한 눈썰미로 나 때린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것 같나. 그리고 평소 괴롭히며 밥 안 준 사람이 어디 한 둘이어야지.
“그런 거 아니에요, 설 공자. 그저 짜증이 나서... 저런 게 길을 막고 있음 배달이 늦어지잖아요.” “오, 그래?” “배달이 늦어지면 뜨신 밥 먹기 힘들단 말예요. 나 하나 때문에 일부러 국을 데워줄 사람들도 아니고. 것보다 요즘 주시가 많이 돌아다니네요. 위험하게. 설 공자님도 그렇다고 느끼죠?” 가자, 말 돌리기. 희극적인 분위기를 더하고자 일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과장님 컴퓨터에 음란 동영상 들어가 있어요. 무슨 대단한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일주일 전에도 채소를 배달하다 주시가 돌아다니는 걸 봤었거든요. 이쪽이 아니라 선동요 방향이었어요. 자세히 본 건 아니지만 비틀비틀 걷는 모습이 여느 술주정뱅이와는 달랐기에 똑똑히 기억이 나요.” “저런.” “진짜라니까요, 설 공자. 가는 길목에 누군가 큼지막하게 부적도 붙여놨더라고요. 얼마나 잔뜩 붙여놓았던지 벌레가 잔뜩 앉은 모양새였어요. 아무튼, 소문으로는 선동요 사람들이 약양 상씨 세가에 도움을 요청할 거래요. 이 부근에서 요괴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약양의 상씨 세가밖에 없으니까요.”
남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알고 있을 뿐이다. 나는 상씨 집안의 대문도 본 적도 없다. 가솔의 숫자만 무려 7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그런 대단하신 분께서는 송씨네 구멍가게에서 채소를 주문하지 않는다. 그러니 따로 배달을 갈 일도 없고, 호기심에 기웃거렸다가 얻어맞을 수도 있으니 상씨 세가 앞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들은 얘기가 있었다. 가주의 성품이 난폭하여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음 노인이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고 때린다는 거였다. 뼈를 부러뜨리고 근육을 상하게 만든 뒤 사거리 한 가운데 내던진다며 객잔 주방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락랑이 말해준 적이 있다. 그게 정말이냐고 묻자 락랑은 ‘그럼 가짜겠니?!’ 라며 앙칼지게 말하고 내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아파하며 눈물을 글썽이자 ‘뚝 그치지 못해?!’ 야단치며 엿기름을 바른 누릉지를 주었다. ‘먹던지 울던지 하나만 해!’ 락랑은 내 귀도 잡아당겼다. 손맛이 매웠다.
잠시 그렇게 누릉지의 맛을 떠올리고 있는데 설양이 예고도 없이 내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공자의 초록색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입안이 말라붙는 기분이다. 누릉지는 사라지고 대신 자리를 차지한 건 크립토나이트 – 초록색으로 빛나는 수퍼맨의 약점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1/10/14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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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아이의 이름은 걸람(乞襤)이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은 거지라는 걸 굳이 먹물 냄새 풍겨가며 그렇게 불렀다.
처음 소산 거리에 나타났을 적에 아이는 산 채로 파묻혔다가 기적적으로 흙을 파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심하게 더러운 옷을 걸쳤고, 머리는 흙투성이였다. 예닐곱 정도 된 외모에 왜소한 체구로 짧게 어, 어, 소리만 내곤 했는데 목을 다친 건지 입을 열면 듣기 싫은 쇳소리가 났다. 부모가 누구고 집이 어디인지 덕분에 그 누구도 알 재간이 없었다. 심지어 성별도 알 수 없었다. 소산 주민들은 아이가 부모와 같이 길을 가다 강도를 당한 모양이라 추측만 했다.
넋을 잃고 길거리를 방황한지 열 아흐레가 지났을 때 채소가게 셋째가 심심풀이랍시고 상한 과일을 던져주며 어서 먹으라 하였다. 배를 곪던 아이는 허겁지겁 주워 먹고 단단히 탈이 났다. 사람들은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묽은 똥을 허벅지 사이로 줄줄 싸고 있는 걸람의 모습을 보고 조만간 송장 치우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걸람은 똥물에 파리가 앉았을지언정 명줄이 쉽게 끊어지지 않았고, 보다 못한 막꾼이 코를 쥐곤 열이 펄펄 끓는 아이를 주워 의장에 던졌다. 혹시라도 시변하여 주변을 돌아다니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이는 죽지 않고 살아나 채소가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 어린아이가 죽어 원념이 되면 아들을 반드시 죽일 거라 믿은 채소가게 주인 송씨가 서슬 퍼런 얼굴이 되어 생각 짧은 셋째를 크게 꾸짖고 모대신 사당에 가 향을 올려 사죄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파! 아버지!’ ‘인석아. 원한은 그 대단한 상세도 망하게 하는 법이야! 저 아이가 죽어 밤마다 관을 두드리며 널 찾으면 어쩔 생각이냐.’ ‘관 위에 큰 돌을 올려놓으면 되잖아요!’ ‘산으로 누르면 모를까, 바위로 귀신을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멈추지 않고 채소가게 송씨는 걸람 또한 멱살을 잡고 끌고 와 모대신에게 억지로 고두배를 올리게 만들었다. 엎드려 이마를 흙바닥에 세 번 찍은 뒤 걸람은 따뜻한 죽 그릇을 받았다. 이때 벌겋게 변한 이마를 문지르던 걸람은 고소한 죽 냄새에도 풀어지지 않는 굳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WTF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250근, 그러니까 150kg에 달하는 배추를 짊어지고 포장되지 않은 산길을 걷는 일은 힘들다. 예전의 내 몸이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전염병에 걸려 한 번 죽었다 깨어난 탓인지 가능했다. 근육이 붙은 몸도 아닌데 액션 배우 드웨인 존슨처럼 무엇이든 번쩍번쩍 들었다. 벌레를 잡겠다며 온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벽을 후려쳤을 적에 흙벽이 후드득 무너진 적도 있다. 단단한 벽돌을 쌓은 벽이 아니니 가벼이 무너질 수도 있는 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재와 돌가루를 섞어 반죽한 흙은 물을 상당수 먹지 않은 이상 대단히 단단해 구멍을 내려면 쇠로 만든 도구를 써야 했다. 더하여 이곳 소산은 큰 비가 자주 내리지 않는 곳이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작은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힘이 장사면 뭘 해. 궂은 일을 도맡아 하여 거칠었어도 크기는 여인의 것처럼 작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순전히 못 먹고 자란 탓이다. 소산 사람들은 인심이 그다지 너그럽지 않아 나 같은 고아나 비렁뱅이에게 냉혹했다. 매질을 하여 쫓아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하루 종일 마당 쓸기, 물 나르기를 시키고 찬 밥 한 덩이를 줬으니 말 다 했다.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엄연히 학대였는데 이 시대 사람들에겐 어린이 노동이 불법이라는 생각 이전에 그게 왜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인식도 없었다. 뭐. 범죄자 잡는 관아도 안 보이고 글을 가르치는 서당도 없는 눈치니 많은 걸 바라서는 안 되었다.
‘하나라, 조나라... 은나라? 삼국지는 아닌 것 같고.’ 확실히 삼국지는 아니다. 근심하며 채소가게 송씨에게 황건적을 언급했더니 ‘무슨 두건. 노란 두건? 난릉 금씨가 언제부터 두건을 썼지?’ 라는 신묘한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아니, 황건적이고 난릉 금씨이고 전에... 좀비가 지척으로 굴러다니는 세계가 삼국지겠냐고.
“아, 씨발!” 너도나도 옆 마을로 배달 가기 싫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다 까닭이 있는 거였다. 언덕 너머로 비틀비틀 걷고 있는 주시의 형태가 다섯은 되었다. 하나 둘 정도면 건강한 어른들은 주시를 발로 뻥뻥 걷어차고 지나갈 수 있겠지만 아무리 약한 것도 숫자가 많으면 충분히 위협적이다. 비루먹은 들개도 다섯이나 모여 있으면 돌아가는 게 순리다. 발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쳐다봤다. 고개를 숙여 땅도 쳐다봤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냐? 꼭 그렇지는 않다. 그래도 귀찮고, 성가시고, 짜증나는 상황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여기서 길을 돌아서 가면 두 시향이나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 그러니까 배달을 완료하기까지 최소 1시간이 더 걸린다는 얘기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해 그림자를 가늠했다. 시계라는 현대 문명이 없어도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주시를 피해 돌아서 가면 배달을 완료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해가 질 거다. 곤란하다. 어둠이 내리고 음기가 강해지면 이지 모드는 순식간에 헬 모드로 바뀐다. 그럼 뭐다?
“꺼져!” 아무래도 선입관이 좀 있다 보니 다짜고짜 주먹 쥔 손으로 주시의 얼굴을 가격했다. 원래 살던 세상에서는 좀비는 머리를 날려버려야 한다는 게 상식이었고,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두개골을 부수는데 주력했다. 퍽 소리가 나며 주시의 머리통이 찌그러졌다. 그러나 이곳의 주시는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된 존재가 아니었고 그보다는 마력, 신묘한 영기, 사악한 주술 같은 것에 영향을 받은 거라 머리가 상한 정도로는 움직이는데 별 지장이 없었다. 나에게 얻어맞은 주시는 꾸룩, 소리를 내더니 하얗게 변색된 눈동자로 날 지긋이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왜 때리느냐 항의하는 것처럼 팔을 앞으로 내밀며 허우적거렸다. 주시는 힘이 세지도 않아 잡혀도 뿌리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나의 어깨엔 배달을 마쳐야 하는 배추가 무려 250근이나 올라가 있었다. 주시가 배추를 건드리지 않도록 재빨리 거리를 벌리고 오른발을 들어 주시의 배를 걷어찼다. “꺼져!” 벌렁 넘어뜨리고 난 뒤에야 깨달음이 왔다. 이곳의 좀비는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는 게 최고다.
“여어, 아걸. 배달 가는 중이니?” 머리를 노리는 걸 관두고 주시의 다리를 집중 공략하는 중인데 분위기 파악 못하고 한가롭게 시시덕거리는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시선을 돌려 나무 위를 쳐다보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마침 딱, 소리를 내며 주시의 아래턱이 코앞에서 맞물렸다. 물려봤자 좀비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법은 없노라 느긋하게 굴면 큰 코 다친다. 기본적으로 저것들은 시체다. 입안에 온갖 박테리아가 우굴 거린다는 얘기다. 물린 상처로 균이 들어가면 패혈증 걸리기 십상이다. 여기엔 의사도 없고 항생제 같은 건 더더욱 없다.
허리에 힘을 꽉 주고 오른다리를 크게 들었다. 불꽃 회오리 슛~!! 딱딱한 나무토막 같은 느낌의 것들이 주르륵 쓰러졌다.
머리 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걸, 너 내 말 무시하냐.” “죄송합니다, 설 공자.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바쁘다보니.”
설양은 성격이 매우 안 좋다. 음... 그러니까 모양은 예쁘지만 속은 썩은 인간 쓰레기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안 좋으냐면, 언젠가 지고 가는 물통이 너무 무겁다고 푸념하자 그 물통을 부숴버렸다. 얼빠진 표정으로 산산조각 난 물통을 쳐다보고 있자 도움을 주었으니 가격을 치루라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에게 삥 뜯으면 좋은 사람이에요, 나쁜 사람이에요? 나는 그날 품삯을 설 공자에게 건네주고 망가진 물통 값은 별도로 주인에게 변상해야 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객잔에 앉아 음식을 먹다 벌떡 일어나 탕에서 머리카락이 나왔다며 가게를 부수었다. 빈정이 상했으니 성의를 다해 보상하라며 돈도 뜯어갔다. 이를 항의하면 반드시 보복을 하였는데 그게 많이 미친 수준이었다. 개를 죽여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가게 안에 던져놓는 건 그나마 약소한 수준의 보복이었고... 심하면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화마를 피해 맨발로 도망 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물이 아닌 기름을 끼얹었다.
악마다. 동양인의 핏줄에선 구현될 리 없는 선명한 초록색 눈을 번들거리며 신나게 웃어 젖히는 모습에 나는 DC 코믹스의 빌런 조커를 떠올렸다. 이름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신 양반! 여기 조커는 있는데 배트맨이 없으면 어쩌라는 거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옆 마을에 배추를 배달하러 가는 도중이에요.” 주시를 피해 빠르게 걸으며 꾸벅 인사했다. 사실 설양이 나보다 더 연상인지 연하인지는 잘 모른다. 나는 고아였고, 마찬가지로 설양도 고아다. 생일축하를 해줄 가족이 없으니 생일도 모르고, 당연히 나이도 모른다. 나는 작년에도 열 세 살이었고 올해도 열 세 살로 셈했다. 의도하지 않은 쫄졸 굶는 수행으로 키가 자라지 않은 탓이다. 설양은 나와 달리 많이 먹고 그랬는지 벽곡을 한 나보다는 손바닥 두 뼘이 더 컸다. 그래서 순전히 키만 놓고 내가 동생이었고 자기가 형이라고 했다. 따지기가 귀찮았던 나는 마음대로 그러라고 했다.
휙 소리를 내며 설양이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좋지 않아. 나는 재빨리 눈동자를 굴려 쓰러지지 않은 주시의 숫자를 헤아렸다. 설양이 여기서 재는 체를 하며 한 마리를 쓰러뜨리면 배달 값의 절반이 날아간다고 생각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호의는 공짜가 아니라고 늘 주장했다. 헐값도 아니라고 덧붙였다. 주시 두 마리면 배달 값 전부를 내 놓으라 요구할지도 모른다. 아 진짜, 그건 정말 아니야.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면 설양이 나뭇잎을 길게 찢어 입에 물었다. 삐잇, 가느다란 풀피리 음색이 흐르자 그 즉시 주시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잣 됐다. 배추값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이제 몸을 팔아야 할 처지에 몰린 것이다.
Posted by 미야
2021/10/13 13:00
2021/10/13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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