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 107 : 108 : 109 : 110 : 111 : 112 : 113 : 114 : 115 : ... 658 : Next »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직접 버들고리짝을 옮겨준 것에 대해선 매우 고맙고 송구하다 생각한다.
기꺼이 엎드려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장도리를 들고 창문을 막은 널빤지 앞을 서성거리는 건 앞의 것과 얘기가 틀리지.」
귀하게 자란 소년은 목수들의 밥줄 도구인 장도리가 신기한 눈치였다. 그 생김새를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노루발처럼 갈라진 부분을 엄지로 튕겼다. 단단한 철의 형태를 인식하자 다음으로는 검을 다루는 요령으로(망할) 자루 끝부분을 잡고 좌우로 허공 베기를 했다.
흉기처럼 붕붕 소리를 내는 장도리의 운동 궤적을 눈으로 쫓으며 서둘러 그를 만류했다.
『그건 그렇게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야. 못 뽑기는 내가 할테니... 으악!』
못을 뽑는 일은 힘으로만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아이는 이해 못했다. 지렛대의 원리를 미리 설명해줬어야 했던 걸까, 소년은 널빤지를 박살내면 된다는 단순한 목표의식 아래서 정 가운데를 조준해 장도리를 휘둘렀다. 아니, 휘둘렀다기보다는 기합으로 찍어 넘겼다.

그려, 내 이럴 줄 알았어.
가늘게 새어나온 눈물을 닦고 - 슬퍼서가 아니라 숨을 죽여 웃다보니 눈물이 나왔다 - 튕겨 나온 나무 파편과 근사하게 짜부라진 창틀에 삼가 묵념하였다. 장도리로 찍어 널빤지를 참살한 린청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린 눈치다. 장렬하게 사망한 널빤지는 저 혼자 죽기는 억울하다며 동료를 데리고 먼 저승길을 떠났다. 창틀만 박살난게 아니다. 툭, 하고 깨진 벽돌 조각이 아래로 굴렀다. 게다가 그 파편 덩어리는 그 크기가 결코 작지 않았다.

으허어억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이윽고 파랗게 질려 내 눈치를 살폈다.
『있잖아, 안즈.』
『말해보시게.』
『네가 허락한다면 나는「내 방을 같이 써도 좋아」라고 말하겠어. 하지만 그게 네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거라면 나는 침묵할 거야.』
『너는 창문을 망가뜨린 사과를 참으로 별난 방식으로 하는구먼. 미안하다는 말은 됐고, 장도리는 그만 내려놔. 한 번 더 휘둘렀다간 벽 자체가 무너지겠다.』
『잘못했어.』
『사과는 됐다니까.』

평소와 마찬가지인 내 모습에 크게 안도해하며 소년이 다시 질문했다.
『저어, 그런데 제안은...?』
『마음을 써줘서 고마워, 린청. 하지만 난 괜찮아.』
『역시 사양하는구나.』
녀석은 내가 긍지 높은 귀족으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 타인의 도움을 거절하는 거라 착각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문제는 안즈의 성별이 여자이고 그가 남자라는 거였다. 머지않아 육신의 2차 성징이 시작될 터인데 머리냄새가 진해지면서 나도 가슴이 붕긋하게 나올 것이고, 그 또한 울대뼈가 도드라지고 고환이 커질 것이다. 이후로는 민망한 일들의 연속이다. 솔직히 말해보랴, 감당할 용기가 없었다.

아니, 이게 아니지. 그렇게나 한참 나중 일을 걱정할게 아니라.
살이 없어 안으로 움푹 꺼진 가슴을 쓰다듬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린청, 나는 여자야.』
『그래, 이것은 빗자루다.』
그러니까 왜! 어째서! 무슨 까닭으로! 아무도 귀 기울여 내 말을 듣질 않아!
원인 제공자니까 자신이 바닥을 치우겠다며 직접 빗자루를 쥔 린청은 머리털 나고 생전 처음 해보는 청소에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살인 곰을 잡으라면 잡겠지만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건 은근 어렵다?
바닥에 떨어진 벽돌 조각의 위치를 잘 봐두고 신중한 자세로 비로 밀어냈더니 이 발칙한 것들이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사방으로 굴러갔다. 당황하여 빗자루로 찍어 눌러 도망가는 움직임을 급히 차단했는데 아뿔싸, 기세 좋게 휘두른 빗자루의 움직임에 바람을 타고 먼지가 일어나 그만 재채기가 터졌다.
『린청, 나는 여자라니까.』
버럭 대마왕은 재채기 탓에 흘러나온 콧물을 닦다 말고 짜증을 냈다.
『알았다니까! 인정할게! 이건 분명 빗자루 질이 아니다! 하지만 노력하고 있다고. 맙소사, 청소라는 건 보기와는 달리 쉬운 일이 아니군. 이런 젠장!』
그러니까 녀석은「네가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청소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그런 건 감히 빗자루 질이라 할 수 없다. 양심도 없는 놈!」라는 의미로 남성인 내가 비꼬아 여자라고 말했다 여기는 듯했다.

똑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여 말하는 건 고래부터 있어 온 저주의 행위.
먼지를 들이켜서 그런지 나 또한 콜록 기침이 나왔다.
『부탁이니 창문이나 열어. 아유, 먼지...』
「나는 여자다」세 번 말하기는 그런 까닭으로 포기다.

『있잖아, 안즈.』
『응.』
『본가에서도 대략 이런 식이었어? 항상 혼자서... 그러니까. 음.』
탁자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번갈아 흔들어대던 나는 간장에서 소금기가 전부 빠져나간 말간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이 대답이 되었을까, 소년은 나로부터 짐짓 시선을 돌렸다.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는 햇빛 아래서 너울 춤추는 먼지들의 움직임을 구경했다.
나는 티끌을 잔뜩 뒤집어 쓴 그의 긴 머리카락을 힐끗 쳐다보았다.

망할 빗자루를 손에 쥔 채 의자에 앉은 소년은 번민에 휩싸여 엉덩이의 무게 중심을 좌우로 왔다갔다 이동시켰다.
다리가 부실하여 사람이 앉으면 원래 오른쪽으로 기울어지던 의자다.
여기에 산만한 동작까지 더해지자 의자는 마치 고깃간 저울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암호처럼 모호하고 그 뜻이 명확하지 않았던 질문도 덩달아 흐지부지 사라졌다.

기지개를 켜는 요령으로 상체를 뒤로 젖힌 나는 무거워진 공기에 질색하여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 뭐랄까... 익숙해져 있으니까.』
『하지만 익숙해져서 될게 있고 익숙해지면 안 되는 것이 있어, 안즈.』
소년의 투명하고도 맑은 눈동자가 온전히 나에게로 향했다.
순간 나는 그 반듯하고 순진한 눈동자가 미워지려 했다.
『너는 모른다. 익숙해지지 않으면 더 괴로워져.』
그렇다고 익숙해지면 과연 편안해지던가. 나는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서.
이것은 이형(異形)에게로 내려진 형벌, 섭리를 거슬렀으니 그 대가는 치러야겠지.

『청소나 계속 하자.』
어쩐지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탁자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Posted by 미야

2015/05/28 11:25 2015/05/28 11:25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26

Leave a comment

창고로 돌아와 닥치는대로 버들고리짝 뚜껑을 열고 그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대략 이럴 것이다 미리 짐작했던 것처럼 물품구매 청구서니 기안서 따위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잡다한 서류들이 고리짝 안에서 잔뜩 쏟아져 나왔다.
다만 대략 10년 전 무렵부터 쌓아올린 자료일 거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무려 30년 전의 야간순찰기록까지 손에 잡혔다. 년도 순차로 정리된 것도 아니어서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표지와 모서리 부근으로 비에 젖은 흔적이 남은 것으로 보아 다른 곳에서 보관하다가 여름철 장마비에 갑작스런 날벼락을 맞고 허겁지겁 옮긴 듯했다. 그래서 어떤 고리짝은 그 날짜가 위에서부터 아래 방향이었고, 일부는 반대로 아래에서 위 방향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정리 순서가 아니고... 이런 서류들이 창고에 처박혔다는 걸 아무도 기억을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규정으로 정한 폐기 순차를 까먹고 무심하게 버들고리짝에 넣어두기만 한 것 같다. 표지 제목을 쓴 필체 역시 각각 달라 언뜻 보기에도 담당자가 8명이 넘어갔고 결국 처치곤란으로 창고까지 흘러와 오랜 낮잠을 자게 되었다고 보면 되었다.

종이뭉치 가장자리를 한손으로 잡고 낱장을 파라락 넘겨보았다.
먼지와 좀벌레들이 기세 좋게 쏟아졌다.
『다들 게을러 빠졌구먼.』
죄다 불쏘시개로 써먹어야 할 것이다.

끈으로 묶어 하나 둘 마당으로 옮기는데 힐끔거리는 눈들이 따가웠다.
《귀족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고 원래 천출인가. 허드레 일을 직접 하네.》
《그러게나 말이야. 게다가 쓰레기를 나르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해 보이는 걸.》
익숙하긴! 이미 손가락은 잡다한 상처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익숙하다면 피부를 베일 리 없다.
저 밑바닥에서 정제되지 않은 여러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걸 참으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무거운 걸 옮기자 몸이 비명을 지르려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리가 아파왔다.

『그러고 보면 안즈도 제법 편한 삶을 살았네.』
전생의 기억 탓에 끈 매듭을 묶는 법을 알아도 손가락은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이 어린 몸은 육체노동이라는 걸 모른다.
정서적으로는 학대를 받은 건 맞지만 힘든 일을 한 기억은 없다.
겨우 그 정도의 노동으로 껍질이 벗겨져 쓰라림을 호소하는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일반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일곱 살 무렵부터 물을 길고 밭에 나가 잡초를 뽑는다. 여자아이라면 부엌으로 내려가 요리를 돕거나 마른 땔감을 준비해야 한다. 일은 고되어 그 작은 고사리 손은 이윽고 온통 굳은살로 덮인다. 겨울에는 얼음을 깨가며 빨래를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피부가 터서 갈라진 틈으로 누런 빛깔의 체액이 흘러내린다. 덤으로 동상에도 걸린다.
『아아, 늦을 가을 날 마을 우물에서 물을 퍼다 실족하여 빠져 죽은 적도 있었지.』
그건 언제였을까.
꽤나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흐릿하다. 단지 아홉 형제 중 막내였었다는 것만 생각난다.
집중하면 더 많은 걸 떠올릴 수 있겠지만 진이 빠진 지금은 그러기가 귀찮다.
아울러 우물에 빠지고도 나는 금방 죽지 않았다. 사흘 정도는 구조를 기대하며 분명 살아 있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허리를 펴보았다. 거짓말처럼 뿌득 소리가 났다.
『삽시간에 나이 든 아저씨가 된 것 같구나... 오늘도 날씨 참 좋다.』

4할 정도 꺼내놓으니 발 디딜 틈도 없던 창고 안으로 그럭저럭 공간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처박힌 고물들 속에서 탁자와 의자도 나왔다. 바로 세워두고 일부러 흔들어보니 다리가 아주 망가진 건 아니어서 먼지만 닦으면 요긴히 써먹을 듯했다. 칠이 벗겨진 낡은 물건이어도 나 혼자 사용할 가구를 얻었다 생각하니 기뻤다.
반색하며 의자에 앉아보았다. 오른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점만 빼면 만족스러웠다.
『헤에~ 괜찮네.』
흡족해하며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냐, 이런 쓰레기장에서.』
『여어, 린청. 수업은 어쩌고 여기까지?』
여어, 린청 - 이런 한가한 말을 할 때가 아니지! 넌 배알도 없냐!』
지금 같아선 느긋하게 인사를 할 처지가 아니지 않느냐며 그는 진심으로 화를 냈다.
하여간 처음 봤을 적에도 벌컥 화를 내더니 지금도 여전히 벌컥 화를 내고 있다. 그러지 말고 저 녀석 별명을 벌컥 대마왕이라고 지어줄까, 나는 웃으면서「너, 화났구나?」의미로 검지를 귀 옆으로 나란히 세워 뿔 모양을 만들어 보았다.

장난 비슷하게 보였을 그 동작이 그를 더욱 기막히게 했나 보다.
『이 바보야! 당연히 화가 났지. 이런 건 아랫것들이 할 일이잖아. 네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 쓰레기장은 또 뭐냐. 우와, 이 먼지. 지독해. 여기서 진짜로 기거할 생각이야? 미쳤어?!』
『안 미쳤어.』
『그럼 숙사감에게 가서 따져야지!』
허리에 손을 얹은 자세로 고함을 질러대는데 이거 정말 누구와 판박이다. 자세히 보니 코 모양도 오똑하게 솟은 모습이 비슷하게 생겼다. 같은 핏줄도 아니면서 저럴 수도 있나, 은근 신기하다.
『숙사감대부에게 얘기는 해뒀어, 린청.』
『아이고, 안 봐도 뻔하군. 얌전하게 손 모으고 앉아「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요~」이러고 말았겠군. 이 바보야, 그러니까 제국 놈들에게 얕보인 거라고. 거기선 치를 떨며 책상이라도 내리쳤어야지.』
『싫어. 책상을 치면 손이 아파.』
『으이그! 말을 말자! 너와 입씨름을 하자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훌쩍 뒤돌아 서기에 나는 린청이 이대로 돌아가려나 보다 생각했다.
잘 가라 인사를 하려는데 엉뚱하게도 그는 크기가 제법 되는 버들고리짝을 번쩍 들어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상당히 무거울텐데 걷는 보폭이 평상시와 똑같다.
아니, 것보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자, 잠깐 기다려! 린청!』
그래봤자 남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는 성큼 대마왕이었다. 창고 밖으로 나온 마왕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어디로 가져가면 되는 거냐. 저쪽이냐.』
『그게 아니라...!! 기다려! 왜 네가 옮기는 거야. 아까는 하수들이 할 일이라고 화를 냈으면서.』
『그냥 보고 있기엔 갑갑해서 그런다. 이래야 빨리 끝날 거 아니야.』
『저어, 일부러 도와주지 않아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쳐다봐.』
하찮은, 쓰레기, 천한, 등등의 단어가 가슴을 콕콕 찔러댔다.
나 때문에 린청까지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 나는 버들고리짝을 어서 바닥에 내려놓으라며 그를 다그쳤다.
『흥! 그 잘난 제국놈들이 힐끔거리면 하고 싶다 생각한 일도 도중에 멈추고 관둬야 할까? 그건 내 성격에 맞지 않아. 차라리 나는 그 녀석들 눈깔을 뽑아버릴 거야.』
『그건 곤란해!』
『나도 곤란하다, 안즈. 슬슬 팔이 저리는데 이걸 어디다 버리면 좋을지 가르쳐줬음 좋겠는데.』
소년은 막무가내였다.

Posted by 미야

2015/05/26 15:43 2015/05/26 15:43
Response
No Trackback , a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25

Comments List

  1. 비밀방문자 2015/05/27 01:24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Leave a comment

『머리를 밀고 벽을 등지고 앉아 도를 닦는 건 의지만 갖고 있음 누구나 할 수 있죠. 하지만 지식을 배우는 건 의지만으로는 할 수가 없고 금전이 들어갑니다. 그것도 제법 비싸게 들죠. 국가사업으로 농부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농업 기술조차 어디까지나 무료가 아닐진대 인문학이나 사회학 같은 고급 지식을 배우는 자가 농부보다 적은 학습 비용을 기대해선 곤란, 일단 책값 자체가 장난이 아니어서. 강사에게 지출되는 월급도 그렇고.』
『아, 예... 그럼.』
『물론 교양 학습 방침에 따라 무료로 제공되는 기초 수업이 몇 가지는 있어요. 그런데 그게 뭐랄까... 모양새만 그럴 듯할 뿐으로 그저 형식적이랄까, 아님 쭉정이 같다고나 할까.』
벅벅 문질러대는 머리에서 그 정체를 알기 싫은 하얀 가루가 올라오려 하고 있다. 그 사실을 미처 모르는 숙희는 두피 기름이 옮겨 묻은 손가락을 내려 이번에는 입가를 문질러댔다.
아무래도 꺼려졌다. 특히 어깨부근을 눈 여겨 보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숙사감대부의 의복이라는게 짙은 감색이다보니 아무래도 차갑지 않은 하얀 눈이 소복히 내리면 싫든 좋든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기본 서대륙 역사학과 기초 문학론, 기초 산술과 기초 예절 강론, 기본 체력보강 - 체육.

숙희는 의미불명의 음, 하고 한 마디를 내뱉은 뒤 팔짱을 꼈다.
숫자를 세어 겨우 다섯 과목에 불과했다. 그야말로 딱 하루치밖엔 안 된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잘라 말했다.
『별 재주가 없네. 알차게 놀아야겠군요.』
나는 대놓고 당황했다. 혹자는 신 난다 반색하겠으나 할 일 없이 놀아 제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시간을 허비하다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마음에서 시커먼 빛깔의 곰팡이가 자라나게 된다. 그 결과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빈둥거리는 체질이 되어버린다. 집안의 원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 경제적으로도 무능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줄 아는 것이 전혀 없는 - 재주라고 할 것도 없어 쓸모는 요만큼도 없는 인간으로의 전락만이 정해진 수순이다.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시간이 남아돌아 그 지루함에 접시에 코를 박고 죽고 싶어지겠지만... 또 압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남의 사정이라고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답답한 심정에 조르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혹시 장학금 제도를 활용할 수는 없겠습니까.』
『호오, 그러니까... 어디보자. 배움에 써먹을 수 있게 나라에서 돈을 융통해 달라?』
『예.』
『에이, 민망하게. 안즈 님은 외국인이잖소. 기본적으로 장학제도라 함은 머리는 똑똑한데 환경이 어려운 자들에게 양질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여 그 출세의 길을 열어주자는 것 아니겠소. 출세라는 건 다시 말해 이사실의 관료가 된다는 얘긴데, 아쉽지만 우리나라는 외국인을 관료로 채용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장학금 이전에 정식으로 귀화부터 하셔야 하는데... 어디보자. 귀화 절차를 알려드릴까? 내가 관련 서류를 어디에 뒀드라.』
고지식한 숙희의 말엔 에누리가 없었다.
『자, 그래서 더 궁금한 건 없으신가요.』

물어보라 하여 마음속에서 제일 궁금하게 여기던 걸 물어보았다.
『황제폐하께선 보위에 오르신지 얼마나 되었는지요. 적손께선 강녕하신가요.』
당시 친구는 나보다 세 살 연상이었다. 노쇠를 이유로 부친이 사양하자「겨자를 먹는다」는 표현을 사용하며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가만 셈을 해보니 올해로 일흔다섯이다. 조만간 희수(77세) 잔치를 할 나이로 내가 불타 죽은 때로부터 38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천하를 집어 삼킬 듯했던 위풍도 대장간에서 쇠가 담금질을 당하듯 망치로 두드려 맞고 그 형태가 다르게 바뀌었을 거라 생각한다. 곧았던 허리도 구부정해지고 허벅지는 말랐으리라. 근력도 제법 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예순 나이에 아들을 봤던 부친의 정력을 감안하면 신체의 노화를 부정한 채 지금도 펄펄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나는 앞으로 나올 이야기를 기대하며 상체를 보다 앞으로 내밀었다.
『어떠신가요? 적손께서는 올해로 연세가...』

숙희는 두 눈을 실처럼 가느다랗게 하고 날 쳐다보았다. 노려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런 당돌한 질문을 던지는 내 용모를 더 자세히 보려고 그런 것 같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시력이 많이 약한가 보다. 안경이 필요할 만큼 눈이 침침해지면 저렇게 이상하게 눈을 뜨는 버릇이 생긴다.
『높으신 분의 이야기는 나 같은 미생자에겐 뜬 구름 위의 누각이죠. 눈에는 보여도 신기루와 같아 감히 알고 있다 여길 수 없소. 안다고 해도 그게 사실일 거라 확신할 수도 없고... 뭐, 우리가 굳이 신경 안 써도 황실은 신룡의 은덕으로 지금부터 영원토록 만세만세 만만세니까 다행이지. 것보다 왜요.』
『왜라니...? 그냥 알고 싶으니까 그러죠.』
『혹시 그쪽도 거서가니를 노리는 거우?』
『거서가니?』
숙희는 손바닥을 흔들어 훠이훠이 동작을 해보였다.
『거시기 말이요, 거시기! 팔자를 펴려면 내명부에 들어 후정의 어처 자리라도 노려봅세다, 그런데 폐하께선 건강이 어떠하신가 - 그런 거냐고요. 예당국에서 왔다는 발랑 까진 계집... 콜록, 아니, 그러니까 예당국 옹주도 그걸 궁금해 하던데 듣던 입장에서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어린 분들이 공부 말고 그런 걸 궁리하면 절대 안 되죠! 황제께서 여전히 첩실을 거느릴 만큼 정력이 있으신가 아니신가 이런 속물적인 거 말고 보다 현실에 입각하여 궁금한 걸 물어보란 말이오. 이를테면 땀에 젖어 변색된 빨래엔 무엇을 넣어야 하얗게 되는가! 빙판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양이는 진짜로 목숨이 아홉 개인가! 내일의 식단은 무엇인가! 누구의 손으로 만들어 오이파무침은 왜 그리도 짠 것인가!』
그저 황제의 안부만 물어봤을 뿐인데 별난 꾸중을 듣고 말았다.

숙희가 다시금 눈을 가늘게 떴다.
『자! 그래서... 궁금한 건 무엇?』
『내일 나올 반찬은 무엇입니까.』
『좋은 질문이오. 진작에 그럴 것이지.』

수확이라 할 것도 없이 빈손으로 밖으로 나오자 - 그래도 내일 반찬이 감자 조림이라는 건 알아냈다 - 이른 더위로 창문을 열어둔 교당으로부터 낭랑하게 책을 읽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서 읽거나 음식을 먹으며 책을 읽어서는 아니된다. 그 대신 찬물로 얼굴을 씻고, 의복 또한 단정히 한 뒤에 올바른 정신적 자세를 표면화하여 책을 읽어야 할 것이다. 문장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책속에 자신을 던져놓고 그 의미를 포착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을 시켜야 마땅하니, 우리는 읽는 행위로 인해 그 내용을 자신에게 연결시키고 개인적인 관점에서 사색하여야 한다. 사색은 우리를 보다 자유롭게 하여 우리의 정신의 표현을 위한 출구를 찾는 일에 큰 도움이 되어주며...》
오랜만에 듣는 윤 가의 독서술이었다.
기웃거리니 인기척을 알아채고 안쪽에서 야리고 노려봤다.
야박하구나, 야박해.

한숨을 푹푹 내쉬며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뭐, 청소부터 하는게 좋겠지.』
숙희는 다락방이라도 정리하여 내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런 종류의 일이라는게 하루아침에 뚝딱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관료로 일해본 적이 있어 돌아가는 속도는 대충 짐작이 갔다. 신속한 일처리라는 것은 최소 열 번의 직인이 찍히는 과정을 고루 거침을 의미한다. 그러니 창고 신세를 그렇게 빠르게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여 낡은 폐품을 정리하여 버리고 때에 찌든 바닥을 쓸고 닦는 일이 급했다. 마음만 앞섰지 나는 아직 창문을 막은 널빤지조차 해결을 못한 상태다.
『과연, 세월 좋게 빈둥거릴 틈은 없겠군.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게 이렇게 산더미여서는... 공구부터 빌려볼까.』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기운이 빠져 터덜터덜 걸으면서도 어쨌든 마음가짐은 그렇게 하고 보았다.

Posted by 미야

2015/05/25 12:36 2015/05/25 12:36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924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07 : 108 : 109 : 110 : 111 : 112 : 113 : 114 : 115 : ... 658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4332
Today:
72
Yesterday:
298

Calendar

«   2025/0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