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16 : Next »

[마도조사] 풀피리 45

제8장 어린아이는 사고를 쳐야 어른이 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운심부지처가 그 자체로 산이었다면 금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이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여의도 63빌딩 처음 보는 시골뜨기가 되어 입을 벌렸다. 건축기술의 한계로 하늘을 찌르는 높이까지 지붕을 올리지 못한 관계로 규모를 옆으로 늘려 크기가 무지막지했다. 화려하고도 웅장한 기세가 그냥 한 나라의 왕궁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기를 꺾는 건 정문의 모양새였는데 정문 입구까지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며 세어보면 무려 108개나 된다던데 이건 사람의 무릎 뼈를 갈아버리는 미친 지랄이었다.
질려하는 내 반응을 곡해하고 길을 안내하던 수사가 기뻐했다. 감탄이 그 감탄이 아닌데 아무튼 좋아했다.

어쨌든 수사는 내가 정문 계단으로 올라갈 신분이 되지 못했기에 이참에 실컷 구경이나 하라며 이곳저곳을 끌고 다녔다. 멀리서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손님들의 모습이 확실히 장관이기는 했다. 비단 옷을 입고 다들 강제 유산소 운동 중이었는데 근엄한 척하고 있어도 겨드랑이에 땀이 차고 있었다.
수사의 말로는 청담회처럼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엔 가마를 사용한다고 한다. 염방존이 친히 입구에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황금 가마가 훨훨 날아다니고, 금색으로 옷을 입은 수사들이 주변을 엄호하여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나.
아무튼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 수사는 나를 데리고 별관처럼 생긴 옆 건물로 들어갔다.

“눈에 붕대는 왜 그런 건데.”
“다쳤습니다.”
“어쩌다?”
“강도에게 당했어요.”
궁예처럼 한쪽 눈을 붕대로 가렸더니 거리 감각이 떨어져 걷는 게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헛디디고 주룩 미끌어졌다. 난간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뻔했다. 한쪽 눈으로만 사물을 보는 훈련을 더 해야겠다 생각하며 이쪽을 흘깃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목 인사를 했다.
안내역할의 수사는 그런 식으로 하다간 해가 져도 끝나지가 않을 거라며 발걸음을 독촉했다.
한참을 빙빙 돌아 호텔 로비 같은 곳에 당도하자 지배인 분위기의 남자가 나를 맞았다.
배가 많이 나와 스스로 발을 닦을 수 없는 풍채의 사내였는데 몸집이 비대해도 동작이 재빨랐다.

“그래서 누구라고?”
“안선준입니다.”
“어디 안씨인가.”
“죽산 안씨입니다.”
“죽산이 어디야. 들어본 적도 없군.”
접힌 종이를 펼쳐 뭐라 적힌 글귀를 읽더니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며 끙 소리를 냈다.
이어지는 건 형식적인 주의사항이었고, 앞으로 당분간 간단한 잡일거리를 하게 될 거 말하며 파리를 쫓는 시늉을 했다.
“유수관! 나는 바쁘다. 나 대신 얘 좀 데려가!”
그러더니 연회용 소반 2천개를 창고로 옮기는 일에 다짜고짜 날 투입했다.
그렇게 금린대에서의 첫날은 짐 나르기로 시작해서 짐 나르기로 막을 내렸다.
다행히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드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입 갈구기는 딱히 없었다.

“그래서 누구라고?”
“죽산 안씨 안선준입니다. 먼 시골에서 왔습니다.”
“숫자는 셀 줄 알아? 자루 마흔둘을 가져가면 된다.”
다음 날에는 식자재가 든 자루를 주방까지 옮기는 일을 했다. 무가 가득 들어 제법 무거웠는데 다섯 번을 왕복하기도 전에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요령부리지 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자루 운반을 시작했다.
“무가 마흔둘이라고? 너는 무가 그렇게 좋디? 내일도 모레도 뭇국 먹고 싶어?”
자루가 너무 많이 왔다고 한다. 그러더니 주방으로 옮겨놓은 자루 마흔 둘에서 열다섯을 빼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했다.
“뺄셈은 할 줄 알지?”
어제 연회용 소반 나르던 일은 순전히 맛보기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후임 갈구기였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양손으로 자루를 하나씩 들었다. 전생에서 쓰던 빨간색 고무코팅 장갑이 너무나 그리웠다. 뒤에서 음흉하게 쿡쿡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왜 이렇게 굼떠!”
어제 봤던 사람이었다. 유수관... 그게 직책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알 재간이 없었다.
“너, 그리고 너! 따라와라.”
그가 나 말고도 다섯 명의 하인을 데리고 연무장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저 앞으로 활 과녁이 있고 풀을 베어 단정하게 정리한 모양이 더도 말고 연무장이었다.
여기서 돌을 주우라는 건가? 나 혼자 어리둥절해 하는데 다들 과녁으로 뛰어가 꽂힌 화살을 뽑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발선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한참 되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크고 무거운 화살을 품에 안고 세 번 왕복하니 진이 빠지려 했다.
한 시진 뒤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이 되자 다들 개처럼 헐떡거렸다.
나 또한 힘이 부쳤는데 모두가 단합하여 눈치를 줘서 마지막 왕복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졌다.
“걷지 말고 뛰어!”
악마 교관이 따로 없었다. 유격, 유격, 구호를 붙이면 딱이다 생각하며 보다 빨리 걸었다.
한쪽 눈을 가린 상태라 뛰는 건 무리였다. 거리 감각이 둔해진 상태에서 뛰면 십중팔구 넘어질 거다.
“못 봐주겠네. 엉덩이 흔들며 뒤뚱거리는 거 봐라.”
소리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성격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든 말든 과녁으로 가서 화살을 뽑았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 쏘았는지 박힌 간격이 일정했다.

다섯 개의 화살을 품에 안고 돌아서는 순간 쇄애액 공기를 찢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사람이 과녁 앞에 서있는데 어느 미친놈이 활을 쏘았다.
“아, 미안. 미안.”
말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소년이 어서 비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시 활에 화살을 걸고 줄을 당겼다. 내가 비키지 않아도 바로 쏠 기세였다. 실제로도 망설이지 않고 쐈다.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명쾌한 탁, 소리가 나면서 과녁 한 가운데로 화살이 박혔다.

“도련님, 그러다 사람이 다치겠습니다.”
유수관이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며 소년을 만류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실수라도 할 것 같으냐?”
“도련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놈은 실수를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이게 무슨 일요일 저녁 시트콤인가 싶었다. 유수관은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비비며 ‘저놈이 놀라 화살 앞으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낭패다.’ 라고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별 거지 같은 말을 다 들어봤어도 저 주장은 정말이지 신박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얼른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금린대에서의 두 번째 날, 금씨 가문의 방계 도련님 금목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나, 하는 짓 없이 미움 받는 부류인가.”
《글세. 운심부지처에 있을 때보다 취급이 더 안 좋은 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밥은 여기가 더 맛있어. 반찬 가짓수도 많고.”
《밥 먹으려고 금린대에 온 것도 아니면서.》
“아냐. 반찬이 맛있으니 섭섭하던 것들이 다 용서가 된다. 간이 알맞게 잘 들었어.”
온서염과 대화를 나누며 버섯조림을 입에 넣자 옆에 앉은 하인이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이러고 쏘아봤다. 모르고 보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이니 미쳤다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룻밤이 지나기도 전에 눈만 다친 게 아니라 머리도 다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빗자루 질을 하면서 온서염과 대화를 나눴더니 소문은 한층 더 빠르게 퍼졌다.

“야, 얼굴에 붕대 감은 놈!”
금목현이 자기를 닮은 사촌들을 데리고 나를 콕 찝어 괴롭히러 왔다.
다들 금색으로 옷을 입었고 미간에 붉은 단사를 찍은 소년들이었다.
나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용무이신가요.”
“연 날릴 줄 알아?”
“아니오.”
“어릴 적 뭐하고 놀았기에? 됐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거기서 연을 날려봐.”
그렇게 말하며 각자 활과 화살 통을 챙겼다. 훈련을 하는 김에 이번에는 연을 날려 움직이는 표적으로 삼을 생각인 것 같았다.

금목현의 실력이라면 빗나간 화살에 맞을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같이 온 사촌이라는 녀석들은 어쩐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슨 놀이라도 하는 분위기로 왁자지껄 떠들며 깔깔 웃느라 바빴는데 무기를 다루면서 집중하지 않는 태도만 봐도 앞날이 구만리였다.
“나란히 쏴서 누가 먼저 연을 떨어뜨리는지 내기를 하자.”
“내기가 되겠어? 여기서 활솜씨가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군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척 봐도 제일 실력이 떨어질 것처럼 생긴 소년이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난 아직 움직이는 건 맞추기 힘들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 움직이는 걸 맞추기 힘들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활을 다루는 것 자체가 서투른 아이였다. 시험 삼아 줄을 당겨본다면서 뺨에 붉은 세로줄을 긋는 걸 봐선 확실하다. 잘못 튕겨나간 줄에 얻어맞고 악! 비명을 지르자 금목현이 웃겨 죽는다고 난리를 쳤다.
“웃지 마! 재미없어!”
“알았어. 더는 웃지 않을 테니 넌 거기서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나머지 소년들이 제각각 활을 걸고 연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벌레를 형상화한 것 같은 연이었다. 바탕이 짙은 녹색이었고 가슴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활쏘기 연습용으로 쓰기엔 가격이 있어 보였다.
그런 연을 들고 바람을 등진 채 이리저리 뛰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나 연을 다루려면 나름 요령이 필요했다.
“느려 터졌어!”
참을성이 부족한 소년이 발을 동동 굴렀다. 발을 구르는 데 멈추지 않고 위협조로 한 발 쐈다.
근처에도 오지 않고 멀직히 떨어졌기에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비신사적 행위였다.

‘더 늦어지면 표적으로 내 머리를 맞추려 들겠군. 거 참.’
바람을 타고 연이 본격적으로 날아오르기도 전에 금목현이 활을 들고 목표물을 조준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눈 먼 화살에 맞겠는데?’
금목현을 따라하는 소년들을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집중하지 못한 소년이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않고 줄을 놓았다.
폼은 엉망이면서 힘은 펄펄 솟는지 화살은 제법 멀리까지 날아갔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온서염의 경고와 거의 동시에 발치 앞에 푹 소리를 내며 화살이 박혔다.

Posted by 미야

2021/12/21 17:11 2021/12/21 17:1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42

Leave a comment

[마도조사] 풀피리 44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형장과 사추가 걱정했다.”
거기까지 말한 함광군은 묵묵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길게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손을 떨었다.
세간에서 칭송하는 명사라고 이러깁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함광군의 표정이 지나치게 근엄했다.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지장보살의 얼굴이어서 떠들기는커녕 옆에서 같이 침묵수행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백을 강요하는 압박감도 같이 느껴졌다. 고해성사! 그러니까 딱 그거다.
트레이너님, 제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야식을 주문해 먹었습니다. 참회하는 의미로 스쿼드 20회 추가하겠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손톱만 튕겼다.
그런 나를 함광군은 색이 연한 눈으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없던 위궤양 증상이 발현하기 일보 직전, 머리에 꽃 단 아이가 함광군의 부어오른 손가락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이는 생전 엄마에게 배웠던 대로 아픈 거 빨리 날아가라며 숨을 호호 불었다. 어떻게 보면 함 흐뭇한 광경인데 숨을 부는 아이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솜털이 쭈뼛 섰다.
사특한 존재라고 생각한 함광군이 지니고 있는 보검으로 베어버리면 그건 성불이 아니고 파훼다.
아무리 귀신이라지만 어린아이가 박살나는 걸 목격하긴 싫었다.
나는 계속 신호를 보내 에비, 지지, 당장 떨어지라 했다.
하지만 함광군이 매우 잘 생겼기에 내 말이 먹혀 들어갈 리 없었다. 애들은 본능적으로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미인인 유치원 선생님의 다리를 붙잡고 ‘선생님, 결혼했어요?’ 물어보는 건 만국 공통이다. 나도 어릴 적에 못생긴 아버지 버리고 잘 생긴 옆집 형 따라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얘졌다 다시 빨개지자 함광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인데 이쪽이 목이 턱 막혔다.
“저기, 손가락이 많이 부으셔서.”
“......”
“아프실 거 같은데.”
“......”
“아니, 뭐 그렇다고요.”
물집이 잡히는 것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쓰라린지 알고 있는데 본인은 그리 마음에 두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다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택무군과 남사추가 내 생사여부를 궁금히 여겼다. 그래서 문령을 반복하여 확인하러 왔다. 끝.
살려줘, 살려달라고.

이런 유형의 사람과 무인도에 단 둘만 남으면 이틀만에 입으로 피 토하고 죽는다.
조난을 당한 사람이라면 무릇 SOS 신호를 어떻게 보낼 것이며, 불은 어떻게 피울 거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식수는 어떻게 해결할 건지 옆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남은 동지가 석고 틀에 부어 만든 딱딱한 얼굴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러는 거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계속. 그럼 헬리코박터균이 없어도 위가 아파지게 된다.
심지어 그는 습격에 대해 캐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무리에서 나 혼자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수사들을 파견했는데 왜 피하고 돌아다닌 건지, 운심부지처로 돌아올 생각은 있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볼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사했음 되었다.”
“네.”
“......”
그리고 다시 기괴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아니, 진짜지. 이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려면 화술 스킬 레벨이 어디까지 올라야 하냐고.

난처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내 화술 스킬은 노멀 등급이다.
“그게, 설명이 어려운데... 진심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있어요.”
속이 답답했다. 그런데 이 답답함은 시원한 물 한 잔 마셔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있는데, 그건... 믿을 수 없어서예요.”
널 못 믿는다는 말을 듣고도 함광군의 표정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솔직히 원숭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도 모르는 척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고, 어떤 의미에선 지루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데 벌겋게 변한 손가락은 그와 상반되는 시그널을 보냈다. 고금 연주에 단련된 사람이 손가락이 저지경이 되도록 오랫동안 줄을 튕겨가며 문령을 한 거다. 온전히 날 찾기 위해서.
“괜찮다.”
이것으로 저 사람이 말하는 ‘괜찮다’ 의 무게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돌연 함광군이 들고 있던 고금을 소매 안에 넣었다.
진정한 도라에몽의 수납공간이었다. 그 커다란 물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윽 사라지는 걸 보면 게임 인벤토리 같은 기능을 가진 듯했다. 새삼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는 게 실감났다.
머리에 꽃을 단 아이가 깨달았다며 박수를 짝, 하고 치더니 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따라가 보니 나무뿌리가 엉킨 곳으로 작고 연약한 뼈가 보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누워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뻥 뚫린 두개골의 눈구멍으로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가 지나갔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쭈그리고 앉아 벌레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을 드러내며 벌레를 향해 손가락을 꾹꾹 찔러댔다.

두 팔을 걷어붙였다.
여기는 지옥이다. 지옥 같은 곳이다.
삽 같은 적절한 도구가 없어 함광군이 자신의 보검 피진으로 나무뿌리를 끊어냈다. 그 옆에서 나는 맨손으로 뼈를 정리했다. 부드럽고 작은 뼈들은 이미 다수가 소실되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일부는 들개 같은 짐승이 먹이로 인식하고 둥지로 물어갔을 것이다.
뼈에 붙은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예쁘게 정리해주고 흙을 덮었다.

“혹시 마차 몰던 마부를 조사해보셨나요.”
“그 사람은 금린대 사람이다.”
“그건 내부적으로 정보가 공유되었기에 마부에 대한 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인가요?”
“다른 가문의 일이라는 뜻이다. 염방존에게는 적이 많다.”
많이 생략된 내용이었지만 돌아가는 그림은 대충 머리에 들어왔다.
염방존은 도중에 계획을 바꿔 실력 있는 수사들과 같이 무리에서 이탈했다.
마차는 비어있었고, 마부는 암살자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운심부지처 사람이 무리를 따라가다 휩쓸려 죽었지만, 혹은 죽었다고 추정되었지만, 사건 조사는 금린대 사람들이 도맡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함광군이 질문했다.
“왜 마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나 빼고 유일한 생존자잖아요.”
“아니다. 그 사람은 죽었다.”
“엑?!”
누군지 몰라도 마부를 빨간 마티즈에 태웠다. 신속한 꼬리 자르기였다.
애초에 날 납치한 무리와 한패이기는 했을까. 그 또한 이용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용을 당했지?

약양 상씨 일족 참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설양이 음호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
효성진 도장이 그 음호부를 빼돌렸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

손가락을 접어가며 헤아려봤다. 위치가 높다. 권력이 있다. 비밀리에 사람을 죽여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
나 같은 건 언제든지 처치 가능할 거다. 그러나 건드리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함광군 같은 운심부지처 사람들이 날 부지런히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본 전제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는 짝패다. 실제로 염방존과 택무군은 서로 형님, 아우 하는 관계다.
효성진 도장은 나에게 이 두 가문을 믿지 말라고 전언을 남겼다.
그런데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어딘가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다.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권모술수에 약하고 사람의 이중적 속내를 파악하는 일에 재주가 없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아니. 이었다. 사내정치를 못했기에 양쪽에서 치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내가 음모론 어쩌고 이러고 고민해봤자 답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머리에 꽃을 단 꼬마가 눈치를 보더니 내 이마로 손을 댔다.
아픈 거 훠~어이 날아가라.

“어쩌죠, 함광군. 계속 도망쳐야 할까요?”
함광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언을 해줄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판단을 마칠 때까지 종용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제7장 나라카(地獄),  끝.

Posted by 미야

2021/12/21 11:08 2021/12/21 11:08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41

Leave a comment

[마도조사] 풀피리 43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언젠가 부터인지 혼자 걷고 있는 게 아니라 옆에 한 명이 따라붙었다.
사실 한 명이라기보다는 한 귀신이라고 해야 정확하다. 오른쪽 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왼쪽 눈으로 봤을 적엔 머리에 꽃 장식을 한 어린 소녀가 보였으니까. 병원에서 시력검사 할 때처럼 잎맥이 넓은 나뭇잎으로 한쪽씩 눈을 가려가며 시험도 해보았으니 착각은 아니다.
예쁘장한 아이였다. 그리고 너무 작아 덜컥 겁이 났다.
‘귀신이라도 부모가 있을지 모르는데, 이러다 약취유인 유괴범 취급 받는 건 아니겠지.’
아이는 가끔씩 콧노래를 불렀고 옹알옹알 알아듣기 어려운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바짝 붙어 날 따라왔다.

“도와줘, 온서염!”
온서염은 들은 척도 안 했다.
흉살스런 종류도 아니고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내버려 두라는 의미인 듯했다.
그것보단 나에게 단단히 화가 난 것도 같았다.
아니, 그런데 이건 많이 억울했다. 왼쪽 눈에 비친 나루터의 모습이 더러운 마포걸레가 덕지덕지 붙은 모양새라 저리로는 가지 않겠다고 한 것뿐이다. 척 봐도 그건 좋지 않은 것들이었다. 세탁기 속에 넣어두고 30년 동안 존재를 잊어먹은 가발 느낌인데 그게 사람에게 이로운 존재일 것 같진 않았다.
어차피 배 삯도 없고, 그래서 돌아 나왔다.
그런데 온서염은 엄마와 살던 집에 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일종의 태업 중이었다.
이쪽에서 세 번 부르면 한 번 대답하는 걸로, 그것도 단답형으로 짧게 대답하는 것으로 복수를 하고 있는데 진짜 찌질한 성격이었다.
그가 걸람이고 내가 온서염이니 누워 침을 뱉는 것과 마찬가지이긴 한데, 아무튼 찌질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내면의 짝꿍으로부터 도움을 얻는 건 포기하고 왼쪽 눈으로 어린애를 관찰했다.
아이는 전반적으로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입에 담기도 역겨운 흉악한 일을 당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오른 외모로 보아 굶어 죽은 것도 아니었다. 아이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 베시시 웃자 윗니가 없었다. 이갈이 중이었다.
“아니, 이렇게 어려서 귀신이 되면...” 성불은 언제 하는 거냐고.
따라오지 말라고 손짓발짓으로 설명하며 턱에 힘을 주고 으음! 소리를 내었더니 웃기만 한다.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알아듣지 못했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키며 따.라.오.지.말.라.고. 모양을 잘 보라 설명해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쟤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애기야. 나랑 여기에 있음 안 돼. 엄마 어딨어, 아빠 어딨어?”
물어봐도 장난을 치며 마냥 노느라 바빴다.

죄 지은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쨌든 나는 결백하다. 나는 맛있는 거 준다한 적 없고, 같이 놀자 꾀지도 않았다.
턱을 괸 자세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수풀 속에 주저앉자 애기도 따라 옆에 앉았다.
“뭐야, 이번엔 소꿉장난이야?”
풀을 잘게 조각내고 꽃잎을 하나하나 따서 흙과 섞더니 그걸 나뭇잎에 넣고 만두를 빚었다.
그 모양이 하도 웃겨 나뭇잎 만두를 집어 들어 입에 넣는 척하고 냠냠 소리를 내었더니 까무러치며 좋아했다.
그래, 음식 솜씨가 좋구나. 나중에 만두장사를 해도 대성을 하겠어.
아이의 웃는 모습이 좋아 만두를 하나 더 집어 입에 넣는 척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어 정말 다행이었다. 남들이 이런 내 모습을 봤음 단단히 실성했구나 여겼을 거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나 스스로도 내가 미쳤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고 있었다.
입안으로 흙 맛이 돌고 어금니 틈새로 풀이 끼고 있는데 귀신을 부추겨 만두 하나만 더 달라고 하고 있으니 제정신이 아닌 거 맞다.

《저걸 궁기도까지 데리고 갈 거야?》
온서염이 성가신 걸 끌고 다닌다며 잔소리를 했다. 도와달라며 내 쪽에서 애원했을 적엔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이제 와서 딴소리다.
“얘기가 안 통하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분명 쟤더러 따라오지 말라고 말했다.”
나 또한 시큰둥하게 반응하며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소꿉장난에 심취해 있던 아이가 재빨리 반응하며 벌떡 일어나 내 옆으로 가까이 붙었다.
마음대로 하라지. 어깨에 올라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으로 여기기로 했다.

궁기도는 지명으로 찾으면 나오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상고시대부터 궁설, 혹은 궁기도라고 불린 옛길로 그런 이름이 붙은 연유는 궁기라는 괴물이 살았던 곳이었기 때문이라나. 그래서 궁기(窮奇) 괴물 이름에 길 도(道)를 붙여 궁기도가 되었다.
궁기가 뭐냐는 내 질문에 온서염은 개의 울음소리를 내는 날개 달린 호랑이라고 했다.
‘또 호랑이냐. 지긋지긋하게 호랑이가 얽히네.’
궁기는 불효를 조장하고, 악한 사람에게 보물을 선물하며, 착한 사람을 잡아먹는 악신이라서 고대의 영웅이 무려 여든하루 일에 걸쳐 퇴치를 했다고 한다. 그 궁기를 죽이고 천제께 제사를 드린 곳이 궁설이고, 몇 백 년 전까지는 일종의 관광명소처럼 인식되었던 듯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농사가 불가능한 척박한 지형이라 마을이 형성되지 않았다.
온서염의 말로는 바위와 자갈이 가득인 곳이라고 했다. 땅이 그 정도로 척박해진 이유는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남은 궁기의 독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 서염 오빠가 하는 말 들었니? 거긴 꽃이 없대.”
아이가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나는 무당이 아니라서 귀신과의 대화에는 소질이 없었다. 절대 상대가 여자아이여서가 아니다.
“풀도 자라지 않아 아까처럼 소꿉장난 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은데. 어쩔래. 그래도 따라올래?”
아이는 빠진 이를 자랑하듯 헤실 웃기만 했다.
에라, 나도 모르겠다. 제풀에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그보다는 지도에도 안 나온다는 곳을 온전히 온서염의 오래되어 빛바랜 기억에 의존하여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 문제다. 솔직히 내 생각으론 미션 성공 확률은 바닥이었다.

“차라리 배를 타고 외국에 가보고 싶다.”
이 시대에도 해상무역은 있을 거다. 이 세상이 역사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확신은 없어도 – 좀비가 있으니 내가 아는 실제 역사가 아니라 십중팔구 판타지다 – 외국으로 소금이나 도자기를 팔러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봤다. 담이 작은 탓에 거상이 된 내 모습은 상상이 가질 않았고, 침침한 눈으로 물건의 개수와 포장된 상자를 하나하나 세고 있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배 멀미를 하면 어쩌지.
서른네 살 회사원 안선준은 멀미를 안 했다. 멀미를 했다면 그토록 장시간 대중교통을 타고 출퇴근을 하지 못했다. 제주도 가는 비행기를 탔을 적에도 괜찮았다. 하지만 걸람은 얘기가 다르다.
“서염은 혹시 바다를 본 적 있어?”
《없어.》
그렇다면 버킷 리스트로 만들어두자. 해변에서 모래장난도 하고 배도 타야지. 이 시대에 해상으로 유럽까지 가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말레이시아나 베트남이라면 가능할 - 여기까지 생각하다 의식의 흐름이 뚝 끊겼다.

어떤 의미에선 장관이었다. 그러나 억새풀이 장관인 그런 풍경은 아니었다. 비비면 덧난다는 걸 알았어도 눈을 세게 문질렀다. 그런들 사라질 종류는 아니었다만, 어째서인지 들판 가득 혼백들이 바다 거품처럼 일렁였다. 마치 무허가 공장들이 오염수를 무단으로 방류하여 강이 포말로 뒤덮였다던 해외토픽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오래되어 부서지고, 그러다 바람에 떠오르고, 마지막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가라앉고.
물결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속이 메슥거렸다.
《가까이 가지 않는 게 좋겠어.》
격하게 동감한다.
허공에 밧줄이 늘어져있고, 그 밧줄마다 시커먼 인영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숫자가 서른을 넘어갔다. 그들의 정체가 무고한 사람들인지, 붙잡혀 벌을 받은 도적들인지는 알 재주가 없다. 너무 오래 전에 죽었고, 마냥 곱씹고 있기엔 세월이 길었다. 나무조차 뿌리가 썩어 쓰러졌건만 나뭇가지에 묶인 몸은 계속해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그것들과 시선이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사방이 지뢰밭이다.
안달을 내며 공중에 매달린 것들에게 팔을 뻗는 여자아이를 향해 지지는 만지는 거 아니라고 주의를 주고 길에서 벗어났다.

Take me home, Country roads.

옛날 노래 가락을 흥얼거리며 저무는 해와 노을이 지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집에 가고 싶다.”
내게는 집이라고 떠올릴만한 곳이 없는데도 막연히 그리웠다. 이 드넓은 천하에 누울 곳 하나 없다.
“누나 보고 싶다.”
택배로 김치 보냈다고 전화해주던 누나가 그립다. 돈은 언제 모을 것이며, 여자 친구는 언제 만들 거냐고 윽박지르던 목소리가 듣고 싶다. 눈물은 나오지 않는데 코가 고춧가루 버무린 것처럼 맵다.
“국물 떡볶이 먹고 싶다.”
기왕 코가 매운 거, 혀가 얼얼한 정도로 뜨끈한 떡볶이가 먹고 싶어졌다.
고춧가루 한 스푼에 고추장 한 스푼, 설탕 세 스푼에 진간장 두 스푼. 양배추에 소시지 넣고.
지금처럼 땅속 암반 500미터 아래로 추락한 기분일 적엔 맛있는 걸 상상하면 괜찮아진다.
이참에 버킷 리스트 하나 더 추가다. 어떻게든 떡볶이를 직접 만들어 먹어본다. 여기서 고추를 재배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만약 없음 남방으로 배를 타고 내려가 직접 찾아보자. 고추는 더운 지방이 원산지라서 –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전부 쓸데없다.

옆에서 풀깍지를 만들며 놀던 작은 아이가 갑자기 환히 웃었다. 꼭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를 들은 아이처럼 굴었다. 그러더니 다섯 걸음 뛰어가 멈춰 서서 손짓하고, 다시 세 걸음 뛰어가 멈춰 서서 손짓했다.
하는 동작이 따라오라 하는 것 같아 아이가 하자는 대로 했다.
《그러다 귀신에게 홀린다.》
온서염이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간만에 듣는 웃긴 얘기였다. 누가 누굴 조심하라는 건지.

한참을 앞서 나가던 아이가 얼마 후 제자리에서 종종 뛰었다.
잔뜩 신이 난 것도 같고, 칭찬을 바라는 것처럼도 보였다. 미리 꺾어둔 꽃을 흔들며 나를 가리켰다.
그런 아이의 앞에 영하 20도 냉동창고에서 금방 빠져나온 것처럼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가 커다란 고금을 들고 서 있었다.

아이가 앞니 빠진 입을 열어 무어라 종알거리자 고금의 줄이 디잉, 딩 하고 높은 음으로 울렸다.
찾는 귀신. 여기.
문령으로 아이의 말을 알아들은 함광군이 연주를 하도 오래해서 빨갛게 변한 손가락을 줄에서 천천히 떼어냈다.

Posted by 미야

2021/12/16 19:53 2021/12/16 19:53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240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2 : 3 : 4 : 5 : 6 : ... 16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990606
Today:
63
Yesterday:
182

Calenda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