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44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형장과 사추가 걱정했다.”
거기까지 말한 함광군은 묵묵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길게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손을 떨었다.
세간에서 칭송하는 명사라고 이러깁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함광군의 표정이 지나치게 근엄했다.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지장보살의 얼굴이어서 떠들기는커녕 옆에서 같이 침묵수행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백을 강요하는 압박감도 같이 느껴졌다. 고해성사! 그러니까 딱 그거다.
트레이너님, 제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야식을 주문해 먹었습니다. 참회하는 의미로 스쿼드 20회 추가하겠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손톱만 튕겼다.
그런 나를 함광군은 색이 연한 눈으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없던 위궤양 증상이 발현하기 일보 직전, 머리에 꽃 단 아이가 함광군의 부어오른 손가락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이는 생전 엄마에게 배웠던 대로 아픈 거 빨리 날아가라며 숨을 호호 불었다. 어떻게 보면 함 흐뭇한 광경인데 숨을 부는 아이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솜털이 쭈뼛 섰다.
사특한 존재라고 생각한 함광군이 지니고 있는 보검으로 베어버리면 그건 성불이 아니고 파훼다.
아무리 귀신이라지만 어린아이가 박살나는 걸 목격하긴 싫었다.
나는 계속 신호를 보내 에비, 지지, 당장 떨어지라 했다.
하지만 함광군이 매우 잘 생겼기에 내 말이 먹혀 들어갈 리 없었다. 애들은 본능적으로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미인인 유치원 선생님의 다리를 붙잡고 ‘선생님, 결혼했어요?’ 물어보는 건 만국 공통이다. 나도 어릴 적에 못생긴 아버지 버리고 잘 생긴 옆집 형 따라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얘졌다 다시 빨개지자 함광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인데 이쪽이 목이 턱 막혔다.
“저기, 손가락이 많이 부으셔서.”
“......”
“아프실 거 같은데.”
“......”
“아니, 뭐 그렇다고요.”
물집이 잡히는 것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쓰라린지 알고 있는데 본인은 그리 마음에 두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다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택무군과 남사추가 내 생사여부를 궁금히 여겼다. 그래서 문령을 반복하여 확인하러 왔다. 끝.
살려줘, 살려달라고.

이런 유형의 사람과 무인도에 단 둘만 남으면 이틀만에 입으로 피 토하고 죽는다.
조난을 당한 사람이라면 무릇 SOS 신호를 어떻게 보낼 것이며, 불은 어떻게 피울 거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식수는 어떻게 해결할 건지 옆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남은 동지가 석고 틀에 부어 만든 딱딱한 얼굴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러는 거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계속. 그럼 헬리코박터균이 없어도 위가 아파지게 된다.
심지어 그는 습격에 대해 캐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무리에서 나 혼자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수사들을 파견했는데 왜 피하고 돌아다닌 건지, 운심부지처로 돌아올 생각은 있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볼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사했음 되었다.”
“네.”
“......”
그리고 다시 기괴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아니, 진짜지. 이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려면 화술 스킬 레벨이 어디까지 올라야 하냐고.

난처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내 화술 스킬은 노멀 등급이다.
“그게, 설명이 어려운데... 진심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있어요.”
속이 답답했다. 그런데 이 답답함은 시원한 물 한 잔 마셔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있는데, 그건... 믿을 수 없어서예요.”
널 못 믿는다는 말을 듣고도 함광군의 표정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솔직히 원숭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도 모르는 척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고, 어떤 의미에선 지루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데 벌겋게 변한 손가락은 그와 상반되는 시그널을 보냈다. 고금 연주에 단련된 사람이 손가락이 저지경이 되도록 오랫동안 줄을 튕겨가며 문령을 한 거다. 온전히 날 찾기 위해서.
“괜찮다.”
이것으로 저 사람이 말하는 ‘괜찮다’ 의 무게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돌연 함광군이 들고 있던 고금을 소매 안에 넣었다.
진정한 도라에몽의 수납공간이었다. 그 커다란 물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윽 사라지는 걸 보면 게임 인벤토리 같은 기능을 가진 듯했다. 새삼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는 게 실감났다.
머리에 꽃을 단 아이가 깨달았다며 박수를 짝, 하고 치더니 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따라가 보니 나무뿌리가 엉킨 곳으로 작고 연약한 뼈가 보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누워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뻥 뚫린 두개골의 눈구멍으로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가 지나갔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쭈그리고 앉아 벌레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을 드러내며 벌레를 향해 손가락을 꾹꾹 찔러댔다.

두 팔을 걷어붙였다.
여기는 지옥이다. 지옥 같은 곳이다.
삽 같은 적절한 도구가 없어 함광군이 자신의 보검 피진으로 나무뿌리를 끊어냈다. 그 옆에서 나는 맨손으로 뼈를 정리했다. 부드럽고 작은 뼈들은 이미 다수가 소실되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일부는 들개 같은 짐승이 먹이로 인식하고 둥지로 물어갔을 것이다.
뼈에 붙은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예쁘게 정리해주고 흙을 덮었다.

“혹시 마차 몰던 마부를 조사해보셨나요.”
“그 사람은 금린대 사람이다.”
“그건 내부적으로 정보가 공유되었기에 마부에 대한 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인가요?”
“다른 가문의 일이라는 뜻이다. 염방존에게는 적이 많다.”
많이 생략된 내용이었지만 돌아가는 그림은 대충 머리에 들어왔다.
염방존은 도중에 계획을 바꿔 실력 있는 수사들과 같이 무리에서 이탈했다.
마차는 비어있었고, 마부는 암살자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운심부지처 사람이 무리를 따라가다 휩쓸려 죽었지만, 혹은 죽었다고 추정되었지만, 사건 조사는 금린대 사람들이 도맡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함광군이 질문했다.
“왜 마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나 빼고 유일한 생존자잖아요.”
“아니다. 그 사람은 죽었다.”
“엑?!”
누군지 몰라도 마부를 빨간 마티즈에 태웠다. 신속한 꼬리 자르기였다.
애초에 날 납치한 무리와 한패이기는 했을까. 그 또한 이용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용을 당했지?

약양 상씨 일족 참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설양이 음호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
효성진 도장이 그 음호부를 빼돌렸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

손가락을 접어가며 헤아려봤다. 위치가 높다. 권력이 있다. 비밀리에 사람을 죽여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
나 같은 건 언제든지 처치 가능할 거다. 그러나 건드리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함광군 같은 운심부지처 사람들이 날 부지런히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본 전제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는 짝패다. 실제로 염방존과 택무군은 서로 형님, 아우 하는 관계다.
효성진 도장은 나에게 이 두 가문을 믿지 말라고 전언을 남겼다.
그런데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어딘가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다.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권모술수에 약하고 사람의 이중적 속내를 파악하는 일에 재주가 없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아니. 이었다. 사내정치를 못했기에 양쪽에서 치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내가 음모론 어쩌고 이러고 고민해봤자 답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머리에 꽃을 단 꼬마가 눈치를 보더니 내 이마로 손을 댔다.
아픈 거 훠~어이 날아가라.

“어쩌죠, 함광군. 계속 도망쳐야 할까요?”
함광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언을 해줄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판단을 마칠 때까지 종용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제7장 나라카(地獄),  끝.

Posted by 미야

2021/12/21 11:08 2021/12/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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