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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가 차서 입김이 나왔다. 귀를 덮는 모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걸 생각하며 방향을 가늠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소는 강 건너편의 캐나다 윈저, 그리고 크랜브룩 대피소이다.
문제는 지도를 바닥에 내려놓고 큰 직선을 그렸을 적에 윈저와 크랜브룩은 각각의 끝점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수중에 동전이 있었다면 앞면과 뒷면을 골라 결정을 내렸겠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고 하면 없는 법이라고 가진 건 지폐 몇 장이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손바닥에 침을 뱉은 뒤, 검지와 중지로 이를 튀어 방향을 점치는 고전 방식도 있다.
그리스의 게오르기네스 장군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진격하면서 이 방법으로 적병의 매복을 점쳤다. 장군은 직진하는 길이 아닌 우회하는 길을 선택했고...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병사들은 산중턱으로부터 쏟아져 내리는 주먹돌에 얻어맞으면서 게오르기네스 장군의 침이 주술사의 농간으로 오염된 게 분명하다며 화를 냈다.

손바닥에 침을 뱉으려다 관두고 오른쪽 신발을 벗었다.
어릴 적에도 지저분하다 여겨 하지 않던 짓을 구태여 나이 먹어 할 필요는 없다.
신발을 수직으로 던진 후, 바닥에 떨어진 신발코가 향하는 방향으로 가 보기로 결정을 봤다.

『제임스!』
영험한 수작을 부린 신발을 도로 주섬주섬 신고 있는데 조지가 다급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제임스는 말간 얼굴을 들어 조지를 쳐다봤다. 정확하게는 주름진 그의 이마를 보았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명령을 받는 존재로 설계되었다. 스스로 판단하여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을 내릴 수는 있지만 이에 따른 극심한 프로그램 과부하가 생긴다. 생산된 지 오래된 저성능 모델일수록 눈에 띄게 긴장 상태에 빠진다고 들었다. 스트레스는 다시 프로그램 과부하를 일으키고, 안정성 저하는 다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악순환이다.

『정 뭐하면 3층으로 올라가 있으세요. 거긴 오랫동안 빈집이었습니다. 수도가 끊겼고 난방도 되지 않지만 안드로이드 둘이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을 겁니다. 인기척이 나면 창문을 통해 2층인 제 집으로 내려가 몸을 피하세요. 벽을 타고 올라왔으니 벽을 타고 내려가는 건 어렵지 않겠죠.』
안드로이드를 빼앗기지 않겠다며 공갈 산탄총까지 쥐었다던 캐머런이 저 둘을 본체만체할 리 없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들을 찾고 있을 터이고, 그동안 조지와 마이클은 안전한 장소에 숨어 기다리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렵지 않게 그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그게 아니라 방금 전 단말기요. 텍스트 채팅을 하던.』
일반적으로 사람은 자기보호 개념으로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둔다. 보통 큰 보폭으로 발걸음을 두 번 떼는 정도의 거리이고, 서로에게 팔을 내밀면 악수를 나누기 알맞다.
조지는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그 거리를 일방적으로 무시한 채 제임스에게로 훅 접근해왔다.
『네트워크에 접속이 된 거 맞죠? 그걸 저희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내용은 요청이지만 표정이나 몸짓은 강압에 가까웠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습니까.』
얼굴이 지나치게 가깝다고 느낀 제임스가 짐짓 피하자 작정하고 더 들이댔다.
『그 단말기를 꼭 써봐야겠습니다.』
이 안드로이드는 으쓱한 골목길에서 어깨에 힘 줘가며 애들 푼돈 떼먹은 경험이 매우 풍부한 것 같았다. 최소한 제임스가 판단하기에는 그러했다.

소용없을 텐데 작게 혼잣말하며 가방을 열어 텍스트 단말기를 꺼냈다.
기대감을 가지고 쳐다보기에 검지로 화면을 밀어 전원이 켜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제3자가 만지는 순간 화면은 다시 검게 변하고 그 어떤 명령에도 응답하지 않는다. 동영상 재생이라던가, 영상통화, 캐주얼 게임 같은 기능은 일절 없고 오로지 텍스트 채팅을 위해 만들어진 구닥다리 물건임에도 탑재된 생체인식 보안기능은 요즘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보안만큼은 훨씬 더 뛰어난 것 같기도 하다. 닉네임 스타스키와허치의 말로는 실리콘으로 엄지손가락 본을 떠서 보안인식을 뚫어보려 한 적이 있었는데 전혀 통하지 않았다고 했다.
지문을 뜰 생각을 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실리콘 가짜로 인식이 되지 않았다는 부분은 더 의외였다. 진짜 지문과 가짜 지문을 정확하게 구분해낼 정도가 되려면 상당히 높은 수준의 판독 기술이 필요하다. 10년 전인 2028년에도 이미 그러한 기술이 구현되어 있기는 했으나... 웨인주립대학교 의문의 재학생이 심심풀이로 만들었다던 텍스트 단말기였다. 방수기능도 없는 전자 손목시계에 뜬금없이 나사의 우주공학 계산기가 달려있는 셈이라서 그 괴리감에 다들 어리둥절해한 기억이 있다.

조지의 손이 닿자 역시나 화면이 검게 변했다.
제임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도와달라고 해도 설정 변경 이런 건 할 줄 모른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조지는 간단한 턱짓만으로 양해를 구한 뒤, 중앙처리장치가 있을법한 부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티리움으로 구현한 피부색이 서서히 지워지는 걸 보고 제임스는 그동안 몰랐던 소소한 점 한 가지를 깨달았다.
안드로이드 손가락에는 손톱이 없었다.
조지가 가만히 눈을 감자 순간 텍스트 단말기 화면으로 무지개 색 노이즈가 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날카로운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것처럼 소스라치며 단말기에서 손을 뗐고, 그 즉시 화면에서 무지개 색 노이즈가 사라졌다. 조지는 놀라서 자신의 손가락 끝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손을 쥐었다. 그것의 방호벽을 건드렸을 때, 그가 느꼈던 건 분명히 따끔거림이었다. 통각을 모르는 신체가 반응했다.

『거부당했습니다.』
『원래 그런 물건입니다. 그것과 똑같은 걸 캐머런도 가지고 있을 텐데요.』
『그렇기는 한데.』
침실 협탁 아래서 두 번째 서랍이 정해진 자리였다. 캐머런이 그걸 소파 테이블에 올려둔 채 방치해두면 잊지 않고 제자리에 돌려놓는 것이 조지의 할 일 중 하나였다. 다시 말해 하루에도 여러 번 만져봤다는 얘기다. 물론 중앙처리장치에 지금처럼 강제 접근한 적은 없지만.

조지는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엔니나르(eninaR) 라는 로고를 봤습니다.』
『그게 이름입니다.』
『이름도 있습니까?』
문단속이나 할 줄 아는 지능형 홈 네트워크에도 애칭을 붙이는 마당에 엉뚱한 소리였다.
『말레이폴리네시아어로 엔니나는 여섯을 의미합니다.』
『예?』
『다만 뒤에 대문자 R을 붙인 건 무슨 까닭에서인지 거기에 대하여 들은 내용이 없습니다.』
지금껏 대문자 R의 의미를 궁금하다 여긴 적 없다.
다만, 말레이폴리네시아어로 엔니나가 여섯을 의미한다는 얘기를 해주면서 노먼 조교수는 풋내기 대학생 제임스의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대문자 R을 썼다.
간질간질한 그 촉감을 간직하기 위해 제임스는 오랫동안 손을 씻지 않았다.
식중독에 걸려 뒤질 작정이냐 꾸지람을 들었지만, 원래 호르몬 과잉으로 고통 받는 20대의 남자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친 짓을 저지르는 법이다. 자위한 손으로 밥을 먹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막판에 이르러 기숙사 룸메이트 릭 도슨이 투덜거렸다.

단말기를 돌려받은 제임스는 배낭을 고쳐 메고 큰 길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잠시 옥신각신하느라 원래 신발코가 가리켰던 방향이 아닌 엉뚱한 쪽으로 걷게 되었다는 건 지금의 그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리스의 장군 게오르기네스도 진짜가 아니라 가상의 인물이었고, 제임스를 인도하는 진짜 길잡이는 충동이었으니까.

Posted by 미야

2020/06/17 16:21 2020/06/1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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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물점에 몰래 들어가 훔친 수도관 테이프를 붕대처럼 사용해 응급조치를 마치자 날이 밝았다.
가게를 떠나기 전, 조지는「홈디포의 역사 since 1978」명패가 붙은 유리장식장에서 골동품으로 보이는 셔츠를 꺼내 마이클에게 입혔다.
플라스틱 표면의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셔츠만 걸친 마이클은 담당자의 실수로 옷이 갈아입혀지다 만 마네킹처럼 보였다. 양손에 톱과 망치를 손에 쥐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철물점 입간판 장식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거 같았다.
강제로 집에서 끌려나와 안드로이드 수용소로 이송된 이후 처음으로 웃음이 터졌다.
「그래, 웃어라.」
마이클은 투덜거리며 15달러짜리 쇠지레를 챙겼다. 손가락 끝에서 팔꿈치까지 정도 크기를 가진 이 단순한 도구는 사람을 때리기에도 적합하고 문짝을 뜯는 일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사람의 눈을 피해가며 몸을 가릴 옷을 수중에 넣는 일에는 꼬박 하루가 낭비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둑질에 진땀을 빼는 사이 돌아가는 분위기는 심상치 않게 악화되어서 도심 한 가운데로 탱크가 등장했다.
방향을 잃었을 적엔 무조건 직진이라 큰소리치던 마이클도 탱크 앞에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지상에서의 탱크는 무적이다. 무엇으로도 이길 수 없다.

쇠지레로 맨홀뚜껑을 열고 아래로 내려간 둘은 머리를 쥐어 싸맸다.
통신망 터널을 기어서라도 라파옛 애비뉴까지 가보자고 마이클이 주장했다. 하지만 통로를 기어가기엔 내부가 지나치게 좁았다. 통신망 통로는 직경이 60cm에 불과했다. 몸통에서 두 팔을 모두 떼어내면 통과가 가능하겠지만 대신 기어가는 동작이 무리일 터다. 설령 무리를 해서 기어갔다고 쳐도 지상으로 올라가는 순간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고급 주택단지 인근은 약탈에 대비하여 경계가 더욱 삼엄해졌을 것이고, 감시용 무인드론이 쉴 틈 없이 날아다니고 있을 터였다.

『운 좋게 감시망을 뚫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캐머런 님을 다시 뵐 수 있을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튼 저희가 강제 회수되면서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건 이마가 바닥에 닿은 상태에서 두 팔을 등 뒤로 돌리고 있는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순찰경찰이 와서 캐머런 님께 수갑을 채웠습니다.』
『아니, 왜...』
『장식용 산탄총을 꺼내 와서 모두 다 꺼지라며 위협했거든요.』
『그니까, 왜...』
『공이가 빠진 장식용 물건이라고 순찰경찰에게 설명 드렸지만 좇만한 놈들이라 욕한 것만으로도 공권력에 대항하는 행위라며 얘기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뭐...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좇만한 놈들이라는 것보다 표현이 훨씬 거칠긴 했습니다.』

제임스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그러니까 캐머런이 모욕죄로 연행되었다는 겁니까?』
『그보단 명령 불이행이죠. 아마도?』
자신 없어하며 조지가 말했다. 산탄총으로 경찰을 위협한 게 마음에 걸렸지만 장전된 납탄은 당연히 없었고 공이가 빠진 물건이니 사람을 다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다. 살면서 음주운전 딱지를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니 이 얘기를 듣고 마음 너그러운 판사가 아량을 베풀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억울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니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
캐머런이 체포되었고,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탈출했고, 통행금지 명령이 떨어졌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와 옷장에 숨었고, 옷장 문이 벌컥 열리니까 얼떨결에 사람 입을 틀어막았고 –
항의를 퍼붓기 위해 숨부터 들이마셨다. 그런데 혀가 뻣뻣했다. 답답한 마음에 콧김을 내뿜었지만 단어들이 한데 엉켜 제대로 된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와중에 마이클은 주인에게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옷장에서 연회색 맨투맨 티셔츠를 꺼내들고 품에 대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잘 어울리느냐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힐끔거렸다.
튀어나온 못에 걸려 옆구리 부근으로 작은 구멍이 난 뒤로 잘 입지 않던 옷이었다. 헐렁하게 입는 종류이니 크기는 잘 맞을 것이다. -
이게 아니라.

『캐머런의 일은 유감이지만 그 셔츠는 빌려드릴 겁니다. 변호사가 알아서 잘 처리했을 것이고, 월급을 받았다면 솔직한 마음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싶지 않습니다.』  
서둘렀더니 대참사였다.
『애초부터 적합한 다른 사람을 찾아야 했습니다. 능력 없는 이에게 부탁을 하면 민폐가 되어 청바지의 기장이 맞지 않을 겁니다.』
흥분했더니 더 꼬였다.
『경찰에게 물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겁니다. 네, 그 청바지는 당신이 입기엔 길이가 짧습니다. 아니, 경찰에게 물어보자는 의미가 아니라, 아니. 물어보자는 의미가 맞습니다. 그러니까 캐머런을 찾아 제 옷장에 숨어서는 안 되었던 겁니다. 제 말의 뜻을 아시겠습니까?』
조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오.』
머리를 움켜쥔 제임스는 어딘가에 있을 막연한 누군가를 향해 저주를 퍼부어댔다.

비상조처 71조에 따라 안드로이드를 회수하겠다며 경찰관이 들이닥치자 캐머런은 공이가 빠진 장식용 산탄총을 겨누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다행히 경관 살해위협은 성립되지 않았지만 욕설을 퍼부은 게 문제가 되어 체포되었다.
분쇄하기 위해 수용소로 보내어진 캐머런의 안드로이드는 자력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캐머런에게 돌아가고 싶어 했으나 거리에서 탱크를 목격하곤 겁을 집어먹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선택지 대신 남에게 도움을 구한다는 선택지를 골랐다.
평소 캐머런에게 좋은 직장을 가진 부자 친구들이 많았을 텐데 어째서인지 조지는 도움을 구할 대상으로 실업자, 패배자, 낙오자, 제임스를 골랐다. 왜냐하면 제임스 무어는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캐머런이 평소 입방정을 떨어댔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집으로 소포를 보낸 적이 있는 조지는 주소를 암기하고 그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좋아, 정리 되었어.

그러나 내용만 정리되었을 뿐으로 옷장에서 튀어나온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허공으로 증발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굉장한 골칫덩이를,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둘을 떠안게 되었음을 깨달은 제임스는 천장을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혹자는 말했다.
감당할 수 없다면 피하라.

마이클이 셔츠자락을 젖꼭지 부근까지 들어보였다.
『저기, 총알자국 보여줄까?』
분위기 파악하는 능력이 제로이거나, 아니면 프로그램이 고장난 게 분명한 안드로이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들어 엔니나르에 접속했다.
늦은 시간이라 다들 잠자리에 들었는지 대화방 참여자는 닉네임 응급실당번은너, 곰이재주를부린다 두 명만이 남은 상태였다. 그나마 사람다운 대화는 진작에 끊긴 눈치이고 하품하는 테디베어의 애니메이션 클립이 떠억 올라와 있었다. 사실상 파장 분위기였다.

《레트로타자기 : 명예의전당-행크그린버그의 분실물 2점 발견하였습니다. 집. 연락요망.》

짤막하게 내용을 남기고 배낭을 들쳐 메었다.
캐머런이면 보석금을 내고 금방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엔니나르에 남겨진 이 메시지를 읽게 된다면 그 다음부터는 본인이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다.
식사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온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그동안 안드로이드들은 고장 난 괘종시계 흉내를 내어가며 그의 집안에 숨어있으면 되었다.

입만 열면 재앙이었기에 고개만 끄덕여 작별인사를 했다.
마이클과 조지가 눈에 띄게 동요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이제 진짜로 떠날 시간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5 16:51 2020/06/1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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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한 자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캐머런 건은 사람을 골라 사귀었다.
철저히 이득관계를 따졌고, 인격의 흠결 유무에 엄격했다.
그런 면에서 캐머런 건과 제임스 무어가 일정 수준의 친분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은 의외였다고 할 수 있다.

제임스 무어의 아버지 로널드 무어는 고등학교 교사였다. 정확하게는 정년은퇴를 코앞에 두고 예산감축을 이유로 잘려나간 기간제 계약 근로자였다.
미국 중산층 몰락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읽고 싶다면 로널드 무어를 표본으로 삼으면 되었다.
교육수준이 높았고, 뒷마당이 있는 집을 보유했고, 신용카드 신용점수가 높았지만 실직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생활이 점차 궁핍해지면서 각종 공과금이 체납되기 시작하고, 의료보험이 취소되었고, 차를 팔아야 했다. 미국 중산층 42%가 앞서 걸어간 길이었다.
싸구려 여성용 거들과 팬티를 팔아 연명하던 10년 고난의 역사를 뒤로하자 그 끝은 자살인지 사고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제임스는 아버지의 사망사고 합의금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하지만 낭떠러지에서 지푸라기 몇 가닥 붙잡는 것과 비슷했다. 시대는 암울했고 대학 졸업장은 청년들에게 더 이상 낙관적인 미래를 약속해주지 못했다.
마른하늘의 단비 같던 보험금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하자, 졸업학기 무렵 제임스는 도서관 입구에 자리를 잡고 샌드위치를 구걸했다고 한다.

노숙자처럼 보였을 남학생과 고가의 경호 안드로이드를 대령하고 다니던 콧대 높은 여학생의 교차점이 무엇이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조지는 제임스가 매우 잘 생겼던 건 아닐까 지레짐작했다.
전설의 미남모델 션 오프라인처럼 생겼다면 사흘간 머리를 감지 않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더라도 캐머런은 아이고 오빠 이러면서 난리쳤을 것이다.

그녀는 후후 웃었다.
『잘 생긴 얼굴과는 거리가 있지. 멀건 밀가루 반죽에 새카만 콩 두 개 올라간 그런 얼굴이야. 강의실에 앉아있으면 파묻혀서 잘 보이지도 않았어.』
『그럼 체격이 훌륭했다거나.』
『구걸한 닭 가슴살 샌드위치로 잘도 몸짱이 되었겠다.』
『목소리가 좋았거나.』
『걔, 혀를 안으로 집어넣고 웅앵거리는 나쁜 버릇 있다?』
『그럼 어떤 점이 좋았는데요?』
『하나도.』
캐머런은 1초도 걸리지 않고 「하나도 없었다.」고 잘라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제임스 무어와 캐머런 건이 친구가 되었나.
캐머런은 이렇다 할 대답 대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했고, 곤란한 것 같기도 했다. 눈썹을 찌푸린 채 브랜디 한 모금을 입에 담고 124층 건물 유리창 밖으로 뇌우가 치는 걸 지켜봤다.
헤라에게 바가지를 긁힌 제우스신이 화풀이 겸 사방으로 천둥을 날리고 있었다.

『그래도 친구니까 직접 고른 선물을 보내시려는 거 아닙니까?』
아마존 열대림이 바짝 말라비틀어진 이 시대에 양장본 종이책은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다.
상태가 좋은 건 당연히 값도 나갔다.
조지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허클베리 핀의 모험」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포장박스에 담은 뒤, 잊지 않고 메시지 카드도 끼어 넣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글자가 큼직하게 인쇄된 카드는 특수한 기능이 있어 하단부의 하트 부분을 누르면 2분 30초 정도 길이로 목소리를 녹음할 수 있었다.
캐머런은 진정성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로 happy birthday to you 노래를 불렀다. 그나마 귀찮았던지 반절만 불렀다.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캐머런 님.』
『괜찮아. 어차피 난 걔 생일이 정확히 언제인지도 몰라. 그러니 적어준 주소로 얼른 보내버려.』
브랜디와 얼음을 더 가져다줄 것을 요구하며 캐머런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차피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 애한테 일부러 생일축하 선물을 보내는 건데 뭐.』
나는 정말이지 못된 여자야! – 크리스털 유리잔을 높게 들어 보이며 그녀가 외쳤다.
동시에 우르릉 쾅쾅 천둥이 쳤다.

제임스의 책장에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 책을 발견했을 적에 조지는 미친 것 같던 그 날의 바깥 날씨와 브랜디 향이 섞인 캐머런의 입 냄새를 떠올렸다.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던 자에게 보내어진 생일선물.
제임스는 소포로 받은 양장본, 무려 600 페이지에 달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책장의 제일 위 칸에 무슨 크로켓 경기 우승 트로피처럼 올려놓았다.
꺼내려면 까치발을 해야 했다.
무릇 책이라 함은 가까이 두고 읽어야 하는 법이건만, 평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의미다.

이들은 과연 친구 관계가 맞는가.

캐머런이 주최한 칵테일 파티에 제임스가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애초에 초대받은 적이 없으니 나타날 일이 없다.
그녀의 남편은 제임스 무어라는 이름도 몰랐다. 대학생 시절에 잠깐 데이트 하던 사내, 혹은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추종자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서에게 일임하지 않고 남의 생일선물을 본인이 직접 챙긴 건 「허클베리 핀의 모험」 양장본이 유일하다.

『입가에 눌린 자국 생겼어. 와... 금방 붓는다. 피부가 약하구나?』
마이클이 얼굴에 난 자국을 신기해하며 사과했다.
그렇다, 사과였다. 숨도 쉬지 못하게 손으로 눌러 정말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저거였다.
본인은 제5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경비가 쏜 총에 맞은 후유증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마이클의 말투는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캐머런 님이 재밌게 여겨 그냥 내버려둔 게 잘못이지. 분명 소프트웨어 오류야.」
잘못된 사과를 바로잡기 위해 조지가 대신 나섰다.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이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제5 안드로이드 수용소에서 자력으로 탈출하고 나서 캐머런 님께 돌아가려고 했습니다만, 11월 10일 체포되신 이후 어디에 계신지 행방을 알아낼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음. 일단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곳곳에 무장한 군인이 지키고 있으니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걸리는 순간 머리에 총알구멍이 뚫릴 터였다.
캐머런에게 메시지를 남길 수도 없었다. 안드로이드의 무선망 접속이 원천봉쇄 된 탓이었다.
게다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과정에서 마이클이 복부에 부상을 입었다. 다행히 중요부품의 손상은 비켜갔지만 티리움 손실이 커서 자가 수복 속도가 바닥이었다.
뛸 수 있겠느냐 묻자 마이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리움이 필요해.」
「홀딱 벗고 할 소리야, 그게? 우리 둘, 지금 알몸이라고.」
티리움이 필요한 건 정작 자신이었으면서 비아냥거리고 보는 마이클이었다.

Posted by 미야

2020/06/12 14:13 2020/06/1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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