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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쌍둥이 형제처럼 보였다.

여기서 부연설명을 좀 해야겠다. 일부 일란성 쌍둥이들은 부모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는데 사실 이런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든 경우이고 대다수의 일란성 쌍둥이들은 미묘한 차이를 보여 개인 구분이 가능하다. 동생 쪽 눈썹이 더 처졌다던가, 형 쪽의 입술 아래로 점이 있다는 식이다. 턱에 살이 더 붙은 것만으로도 인상이 달라진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을 뿐인데 웃는 모습이 다르다. 보조개 위치가 정 반대인 경우도 있고, 입가 주름 깊이가 차이 나기도 한다.

『우리 둘은 같은 모델입니다. WS-GL645 시리즈입니다.』
도넛 모양의 LED 링이 파랗게 반짝반짝 빛났다.

여기서 제임스는 말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같은 모델의 안드로이드들은 붕어빵 틀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실제로 그들은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종류였고 따라서 나름 섬세하게 표현했다는 주근깨의 위치까지도 전부 똑같았다. 설정 변경으로 머리카락 색에 변화를 주고 긴 생머리를 정수리까지 올려 묶는 식으로 차이를 낼 수는 있다. 그러나 스티커를 표면에 붙여봤자 대량생산된 물건일 뿐이다. 기본적으로 모델명이 같은 안드로이드는 개체 구분이 안 된다.

이 둘은?
구분이 잘되었다.

홈디포 철물점 로고는 보다 얼굴선이 둥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콧대가 뾰족하고 눈매가 도톰해서 말 안 듣는 고양이 인상이었다. 단지 입맛에 맞지 않은 간식을 내놓았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의 종아리에 시뻘건 오선지를 마구 그려대는 얄미운 고양이 말이다.
뻗어버린 제임스의 뺨을 찰싹 쳤던 쪽, 그러니까 어린 동생의 옷을 억지로 빌려 입은 쪽은 광대뼈가 더 도드라졌다. 눈매도 깊어서 음영이 또렷했다. 아주, 진짜, 진짜, 조금의 차이였지만, 그런 사소한 차이가 한데 모여 남의 옷 빌려 입은 쪽이 더 억센 인상이었다.

안면 커스텀은 어디까지나 불법이 아니다.
자동차를 튜닝하듯 안드로이드의 얼굴을 성형해도 법적인 처벌은 받지 않는다.
단, 안드로이드의 외모는 저작권 등록을 모두 마친 상태라 개인 취향에 맞게 코나 입을 고치려면 일단 제조사인 사이버라이프사의 동의부터 먼저 구해야 했다. 이를 다시 풀어 적자면 귀찮은 법적 전자문서 작업과 그에 따른 변호사 고용 같은 부가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는 얘기다. 그저 얼굴을 약간 손보는 일에 말이다.
돈이 남아돌다 못해 썩을 지경의 부자들이 돈 지랄의 의미로 안드로이드 안면 성형을 잠깐 유행시켰지만... 북극해에 작은 인공 섬을 띄우고 그 위에 땅콩 별장을 짓는 것으로 관심이 옮겨가면서 유행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그 북극해 별장 만들기도 지금은 인기가 식어 우주관광 산업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달의 분화구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어야 한다며 다들 난리다.
이 마당에 같은 모델이면서 인상이 다른 얼굴을 가진 안드로이드 두 대라니.

남의 옷 주워 입은 쪽이 자기소개를 했다.
『조지입니다.』
뒤편에서 철물점 로고가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마이클.』
맨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제임스가 웅앵댔다.
『제임스 무어입니다.』
희극이 따로 없었다.

『거실 유리창이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보안에 더 신경을 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벽을 타고 기어 올라와 남의 집에 무단 침입한 입장에서 할 말이던가.
제임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음에도 조지는 당당하게 자기 할 말을 이어갔다.
『많은 분들이 높이가 있으면 침입이 불가능하다 생각합니다만, 피지컬이 좋은 도둑들은 경이로운 절도행각을 종종 보여주곤 하지요. 12층 높이까지 가스배관을 타고 기어 올라간 경우도 있으니 앞으로는 외출 시 창문의 걸쇠를 잠그고 확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무단침입을 감지하는 센서를 별도로 설치하여...』
『잠깐만요.』
『전자기적 장치인 만큼 해킹의 위험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현재 거주지의 보안환경을 고려하자면 몇 가지 안전용품을 추가 설치할 것을 권고....』
『저기요?』
『아, 그렇군. 사과하겠습니다.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군요. 아무래도 찬 바닥에 오래 누워있으면 몸에 부담이 되지요. 늦게 알아채서 미안합니다.』
『일으켜달라는 게 아니라... 저기, 갑자기 팔을 그렇게 잡아당기면! 아악!』
『어지럽습니까? 그렇다면 의자에 앉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마이클? 가서 식탁의자를 가져와.』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의자에 앉으니 느낌이 더 안 좋았다.
안드로이드 마이클과 조지는 제임스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컸다. 그 상황에서 키 작은 사람이 의자에 앉은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당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건 뭐란 말인가. 머리를 박박 민 조직 폭력배가 교도소에서 새긴 해골 문신을 보여주며 자랑하는 걸 억지로 지켜본다는 그런 느낌... 형님, 문신이 현대 예술이네요 입 발린 칭찬을 하며 다른 한편으론 도망칠 구멍을 찾아 눈동자를 도록 굴리는 풋내기가 되어 의자에서 주춤주춤 엉덩이를 움직였다.

말로 합시다.
제가 가장 못 하는 일이 말 하는 거긴 합니다만.


『변명이 아니고, 저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둔감합니다. 안드로이드의 인권이나 이번 해방운동에 대해 이렇다 할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최근 벌어진 사건에 보탤 제 개인 의견이 없습니다. 존엄성과 권리, 희망 이런 거 필요하시면 마음대로 가져가시고, 부탁이니 그냥 돌아가 주셨으면.』
진짜 싫었지만 무릎 꿇고 빌 의향도 있었다.
『아니면 제가 가방 들고 나가겠습니다. 처음부터 나갈 작정이었고요. 그러니 두 분은 여기 그냥 계시지요.』
천박하게 웃기도 했다.
『안드로이드를 노예처럼 부린 적 없습니다. 제가 직접 공과금 납부하고, 청소하고, 세탁합니다. 안드로이드는 쓰지 않습니다.』

횡설수설하는 와중에 마이클이 도중에 말을 끊었다.
『그런 것 같더라. 개수대 주변이 엄청 지저분했어.』
아무래도 마이클의 주인은 안드로이드의 말투를 「양아치」로 세팅한 듯하다.
『당신이 제 머그컵을 만졌군요.』
『맞아. 처음엔 내버려둘까 했는데 거슬려서 그냥 닦았어.』
『꼭 그러지 않았어도 됐어요. 집에 돌아와서 치우려고 했습니다.』
『바퀴벌레 생겨.』

처음부터 지금까지 대화의 초점이 자꾸 비켜간다는 느낌이다.
제임스는 양아치로부터 시선을 돌려 이번에는 조지를 쳐다보았다.
『저는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혹시... 누군가 저더러 안드로이드를 때린다고 주장하던가요? 그래서 확인 차 찾아오신 건가요? 그랬다면 모함입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조지의 대답에 제임스는 충격을 받고 헐떡거렸다.
『예?! 제가 안드로이드를 때렸다고요? 아닌데요!』
『오, 그게 아니라.』
조지가 입매를 끌어올렸다.
『당신은 안드로이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죠. 당신은 안드로이드를 일종의 야생순록처럼 대하는 사람이라고 캐머런 님으로부터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순간 사레가 들었다.
『켁. 뭐요?! 캐머런?!』

Posted by 미야

2020/06/11 13:47 2020/06/11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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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이 넘을 무렵, 결심이 섰다.

도시를 떠나자.

그렇게 하자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제임스는 서랍장을 열어 여분의 속옷과 깨끗한 양말을 챙겼다. 짐을 싸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 순서가 어색했지만 많이 가져가면 가져갈수록 좋은 것이 속옷과 양말이라고 배웠다. 그는 총 일곱 개의 양말과 여덟 장의 팬티를 꺼내 차곡차곡 접었다.

다음으로는 거실로 가서 종이로 된 책을 책장에서 꺼내들었다. 제목이 맥베스였다.

「마음속에서 슬픔의 뿌리를 캐고 기억에서 뿌리 깊은 근심을 캐낼 수는 없는가. 상쾌한 망각의 약을 써서 마음을 짓누르는 독소를 일시에 제거하란 말이다.」

겉표지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속지에 책의 맛보기 구절이 그럴 듯한 로마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종이는 오래되어 누랬고 좀약 비슷한 냄새가 났다. 좋은 말로도 상태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필수 교양서적들 중 하나여서 뒤편에는 열람카드를 꼽는 봉투가 풀을 발라 덧붙여진 상태였다. 전자도서로 대체되면서 대량으로 폐기되던 걸 청소업무 근로자를 꼬드겨 몰래 하나 빼내왔다. 덕분에 구닥다리 방식의 열람카드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카드의 맨 아랫줄에는 어린아이가 힘을 줘서 정자체로 쓴 제임스 모어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파기 예정이던 책을 빼돌린 뒤에 썼다. 이렇게 해두면 책을 훔친 게 아니고 영구 대여중 상태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 제임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열람카드를 빼냈다. 책은 제자리에 돌려뒀다. 아쉽지만 책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다.

열람카드를 일종의 메모지처럼 사용하여 하단부에 글자를 적었다.

나는 떠납니다.

지나치게 간결하여 어쩐지 유서 같은 느낌이 풀풀 풍겼지만 제임스는 여기서 더 길게 쓰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갈 거라는 목적지를 적으려니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고, 주변관계가 형편없는 탓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대신 갚아달라는 부탁을 할 것도 없었다.
카드 표면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제임스는 그걸 식탁 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두었다.

주방으로 간 김에 냉동고 칸을 열어 아이스크림 통을 꺼냈다.
두 개 중 하나는 바로 해체했다. 비닐로 싼 현금뭉치 내용물은 꺼내어 네 뭉치로 나눴다. 몇 장의 지폐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 양말 속에 넣었다. 나머지는 적당히 바지나 점퍼 안주머니에 숨길 작정이었다. 용도를 끝마친 아이스크림 포장용기는 잘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보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다른 아이스크림 통은 박스테이프로 꼼꼼하게 둘러 감았다.
강물에 빠지더라도 한 방울의 물도 통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되었다. 여러 번 감고 나선 손톱으로도 긁어보고 문질러도 보았다. 그렇게 여러 번 확인을 한 뒤에야 비로소 만족하고 여행용 배낭에 집어넣었다.

바지와 셔츠는 하나씩.
군청색 카고 바지와 라운드 넥의 회색 티셔츠를 꺼내기 위해 붙박이장 앞에 섰다. 가슴팍에 오렌지 주스 얼룩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다소 흉한 모양새지만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맨 앞에 걸려있던 엉뚱한 분홍색 꽃무늬 셔츠를 옆으로 밀고 회색의 옷을 잡으려고 팔을 죽 뻗었-

『...............!!!!!』

어릴 적 벽장 너머에 부기맨이 숨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부기맨 또한 존재할 것이다.
부기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제임스가 부기맨의 생김새를 궁금해 했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라 조언했었고, 구글은 15세 연령제한을 이유로 이미지를 차단해버렸으니까.
나이를 먹고부터 더 이상 부기맨의 생김새가 궁금하지 않게 되었건만...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부기맨의 손가락은 길었고, 하얬으며, 피아노를 오래 친 사람처럼 관절이 도드라져서 보기에는 좋았다.
다만 그 손가락 다섯 개를 전부 사용하여 사람 입을 틀어막았다는 점에선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았다. 숨도 쉬지 못하게 콧구멍까지 덮어 막았다는 부분은 매우 유감이기도 했고.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되고 난 뒤부터 30초가 지나면 절반은 미친다. 이후로 3분까지는 잔여산소를 태워가며 충분히 버틸 수 있으나 실상은 1분만 넘어가도 꼴딱 넘어간다. 돌고래 유전자를 가진 숨 오래참기 세계기록 보유자들이 아닌 이상 발악, 발광, 발버둥의 단계를 거쳐 착실히 정신줄을 놓는다.

제임스는 얼굴의 반을 덮은 손가락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상할 정도로 미끄럽고, 기이할 정도로 온기가 없는 부기맨의 손가락은 그러면 그럴수록 제임스의 얼굴에 철썩 들러붙었다.
들숨과 날숨이 겨우 두 번 생략되었을 뿐인데 공기를 필요로 하는 폐가 속수무책으로 짜부라 들었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났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검은색 셔츠가 보였다. 정확하게는 검은색 바탕 위로 인쇄된 로고가 보였다. 홈디포. 흔하게 볼 수 있는 체인 철물점 가게 이름이었다. 「당신이 할 수 있으면 우리는 도울 수 있다.」글귀도 있었다.

『마이클, 그가 숨 쉬기 어려워하고 있어.』
또 다른 누군가가 부기맨을 만류했고, 부기맨은 짧게 아 소리를 내며 수긍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임스가 숨을 몰아쉬기 위해 허겁지겁 입을 벌리자 잠시 떨어졌던 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며 코와 입을 도로 틀어막았다.
비명 지르는 건 꿈도 못 꾸고 그저 숨만 쉴 생각이었던 제임스는 마냥 억울할 뿐이었다.

『마이클, 그러다 그 사람 죽어.』
사람 죽이는 걸 말리는 것치고는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엄살은. 사람은 이 정도로 질식사하지 않아.』
『심장박동수가 높아. 분당 100회 수준까지 올라갔어.』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네.』
『그만둬. 그에게 상해를 입히려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야.』
『뭐, 그렇기는 하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반 기절상황에 빠진 제임스를 바닥에 눕혔다.
홈디포 철물점 가게 로고가 들어간 셔츠를 입은 쪽이 물러서자 다른 쪽이 몸을 수그려 쓰러진 제임스의 안색을 살폈다.
굿윌 헌옷가게에 들러 아무거나 집어온 게 분명한 – 소매가 터무니없이 짧은 탓에 손목이 드러났다 – 체형과 맞지 않는 후드티를 입은 그가 눈 감고 있던 제임스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숨 막히게 하고, 얼굴 때리고.
제임스는 화가 났다.
『제발, 그냥 아무 거나 가져가세요.』
이에 「거 봐 내가 뭐랬어, 멀쩡하잖아.」철물점 로고가 한 마디 거들었고,
얼굴을 톡톡 때리던 쪽은 「눈 떠보세요.」요구하며 제임스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Posted by 미야

2020/06/09 13:31 2020/06/0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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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Detroit: Become Human 팬픽입니다. 오리지널 성향이 많습니다.

별 거 아니라고, 단순한 착각일 뿐이라고 긍정적으로 여기기로 했다.
하지만 긍정적인 건 긍정적인 거고, 뼈 핥아먹는 야생동물로부터 멀어지듯 뒤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마침내 거실 벽으로 바싹 붙어 텔레비전을 등지고 서게 되었을 적에 제임스는 서부의 총잡이처럼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911 번호를 찍었다.

《긴급조치 71조 발령 이후 디트로이트 IT 종합 통신망 운영이 전면 중지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긴급을 요하는 전화연결이 신속히 되고 있지 않으니 이점 양지하여 주시고, 도움이 필요하신 분은 다음의 안내에 따라 연락할 전화번호를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디트로이트 소방서 313-555-》

미리 저장된 안내멘트에 마시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느낌이다.
제임스는 허겁지겁 종료버튼을 눌렀다.
911에 연락해서 우리 집 머그컵에 발이 달렸습니다, 라고 말할 작정이었나. 그건 아니지.
침착함을 되찾고자 노력하며 집안을 다시 살폈다.

최근 들어 주택가 좀도둑질이 극성이다. 상점을 털다간 군인에게 총 맞기 딱 좋게 생긴지라 상대적으로 만만한 이웃집에 들어가 치약이나 휴지 같은 생필품을 훔치는 거다. 어디까지나 생존이 목적이기 때문에 비폭력주의를 표방했고, 도둑들은 피난 등의 이유로 거주자가 모두 떠난 빈집을 주 목표물로 삼았다.

글쎄다, 모든 물품이 제자리에 반듯하게 정리된 그의 집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먹다 남은 과자 부스러기라도 어질러져 있었다면 그럭저럭 인간미가 느껴졌을 터인데 쿠션이나 그림액자 따위의 인테리어 가재도구 숫자가 부족한 탓에 전반적으로 냉랭한 느낌이었다. 일단 보통 잘 보이는 장소로 가족사진을 걸어놓는 법인데 그의 집에는 액자가 전혀 없었다. 청소를 마치고 임대로 내놓은 집 같았다.
이러니 좀도둑이 들어왔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라 생각하고 다짜고짜 냉장고 문부터 열었을 것 같다. 냉장고의 정상 작동을 확인시켜줄 목적으로 임대업자들이 콜라나 맥주 따위를 한 두 개쯤 미리 넣어두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이쯤해서 제임스는 냉장고 문을 얼었다.
생수가 든 PET 용기와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진공 포장 오렌지 주스 팩이 열중차렷 자세로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한 박자 쉬고 이번에는 냉동고 문을 열었다.
역시나 두 개의 바닐라 아이스크림 통이 남의 손을 타지 않고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다.
제임스는 유통기간이 2030년 1월 2일자로 찍힌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속에는 유통기한을 8년이나 넘긴 식중독균 아이스크림 대신 비닐로 돌돌 만 현금이 들어 있었다.

마른세수를 하고 아이스크림 뚜껑을 도로 닫았다.
좀도둑이 아이스크림 통을 놓치고 머그컵만 들고 달아났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 머그컵이 러시아 황실에서 쓰던 1890년대 금장식 임페리얼 로마노소프 티팟 세트였다면 또 모를까 – 옹이눈이 아닌 이상 박물관에나 있음직한 도자기와 2달러짜리 싸구려를 구분 못할 리가 없다.
식탁의자에 주저앉은 그는 주먹으로 이마를 통통 때렸다.
무의식중에 그릇세척을 하고 제자리에 돌려놓은 걸 잊은 거다. 그럴 것이다.
고질적으로 앓아온 신경증이 재발한 건 결코 아니다.
오늘은 2038년 11월 13일 토요일, 그는 날짜를 정확하게 세었고 무슨 요일인지를 기억했다.
이제 다섯 시간 정도 뒤면 14일, 일요일이다.
신의 존재를 거부하는 제임스는 평일과 마찬가지인 하루를 보내게 될 것이다.

《워렌버핏의손자 : 상원이 표결 거부함. 월요일에 다시 보자고 말하고 자리 박차고 나감.》
《바나나를털어라 : 당연하지. 최고급 플라스틱 진공청소기에 인권이 뭔 말이냐.》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 플라스틱 진공청소기가 키스를 할 줄 알든? 미친놈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안드로이드들도 인간의 감정을 가진 존재야. 진공청소기가 아니고.》
《바나나를털어라 : 난 인정 못 해. 고작 키스에 *플라스틱과 시민의 권리선언 Declaration of the Rights of Plastic (원래는 Man) and of the Citizen 을 채택하라고? 나는 반댈세. 로베스 피에르가 길로틴에 내 목을 집어넣겠다고 협박을 해도 플라스틱은 인간이 될 수 없어.》
《곰이재주를부린다 : 으이그, 그 대머리 캔터기주 상원의원과 똑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워렌버핏의손자 : 재산권과 자유거주권 이런 건 괜찮잖아. 투표권만 안 주면 되지 않아?》
《바나나를털어라 : 아는 게 없으니 그딴 소리를 하지. 안드로이드에게 인간과 같은 기본권을 준다는 건, 앞으로 무단횡단 하는 플라스틱과 자율주행 자동차가 마주치면 플라스틱을 치지 않기 위해 자동차가 인도에 선 사람을 향해 돌진할 수 있단 얘기야.》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건 너무 극단적인 예잖아. 걍 차가 멈추면 되는데!》
《바나나를털어라 : 선셍님. 혹시 관성의 법칙이라고 들어보셨쎄요? 움직이는 것은 그 운동을 계속한다는 운동의 제일 법칙입지요. 중등학교는 나오신 건 맞죠?》
《곰이재주를부린다 : 씨발아! 내가 너랑 같은 날 졸업장을 받았어!》

텍스트 단말기 화면을 검지로 밀어 올리자 아침나절에 보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글자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의 긴급조처로 모든 통신회로가 마비되자 죄다 이쪽으로 들러붙은 눈치다.
스크롤을 이리저리 움직여 현재 대화방 참여자로 누가 있는지 살폈다.
화면은 닉네임 곰이재주를부린다와 바나나를털어라가 서로 의견충돌을 보이며 뱉어놓은 글자들로 어지럽게 도배가 되어 있어 기존의 대화방 참여자들은 불가피하게 잠수를 탄 눈치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단추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터치에 초록색으로 색이 바뀌면서 어렵지 않게 대화방 참여가 가능해졌다.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손가락을 움직였다.

《레트로타자기 : 외출하고 돌아오니 현관 자물쇠는 그대로인데 물건의 위치가 바뀌어 있었다.》
《워렌버핏의손자 : 아이쿠! 레트로타자기 님 오셨어요. 오랜만인데도 제3자 소설체 말투는 그대로네.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음?》
《곰이재주를부린다 : 도둑?》
《바나나를털어라 : 스탠드 갓 더듬어봐. 도청장치 달렸음 FBI 다녀간 거임. 껄껄.》


진지하지 않은 친구들 반응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짜증이 치솟았다.
동시에 자기혐오가 휘몰아쳤다.
스탠드 갓을 더듬으라는 장난 같은 말에 정말로 더듬었으니까.

《레트로타자기 : 도청장치로 의심되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곰이재주를부린다 : 뭐야... 썰렁해. 춥다고. 얼어 죽겠어.》

한 번 타박을 하더니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냉큼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 버렸다.

《워렌버핏의손자 : 재산권을 인정해준다면 앞으로 안드로이드들도 세금을 내야 하겠지?》
《곰이재주를부린다 : 그렇지.》
《워렌버핏의손자 : 의외로 경제가 활성화될 거 같지 않아? 경제활동 인구가 하루만에 1억 2천만이 증가하는 거야.》
《곰이재주를부린다 : 어-이. 초를 뿌리게 되서 미리 미안하다 사과하마. 안드로이드가 인간처럼 밥을 먹기를 해, 잠을 자기를 해. 애초부터 의식주가 필수가 아닌 것들이라서 우리처럼 경제활동을 할 일이 없다고.》
《워렌버핏의손자 : 뭔 소리야. 정기점검을 받아야 하잖아. 부품도 갈아야 하고. 너넨 안드로이드 부품이 얼마나 고가인지 모르지? 전갈독이 리터당 400달러면 안드로이드의 블루 블러드는 650달러가 넘어. 아무래도 내 생각으로는 폭락하고 있는 사이버라이프 주식을 사둬야 할 것 같다.》

예전부터 깍두기 취급을 받던 제임스다.
끼워주는 것도 아니고, 끼워주지 않는 것도 아니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그에게 심지어 반갑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던지는 이가 없다.

《레트로타자기 : 다들 반가워.》

입술을 깨문 채 무난한 끝 문장을 입력했다.
그래봤자 아는 체 해주는 친구들은 한 명도 없었지만... 새삼스러운 거 없는 일이다.

손가락을 좌우로 밀어 단말기를 대기모드로 전환시켰다.

Posted by 미야

2020/06/08 14:08 2020/06/08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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