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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장 키보드가 급한 상황이라 만원짜리 삼보 키보드를 가격만 보고 덥썩 주문했는데 키감이 노트북... 아놔. 이런 실수! 모양은 무척 예쁜데 자판이 납작해서 계속 잘못 누르고 있네요. ※

문득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눈에는 저 자가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궁금해졌다.
밝은 햇빛 아래 선 락연은 그림자마저 옅었는데 이상하게도 마부는 그와 매우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었고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기까지 하였다. 오히려 사람이 아닌 말들이 민감하게 굴어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앞다리를 번갈아 움직이며 연신 푸르륵 푸르륵 콧구멍을 떨어 소리를 내었다.
말이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하자 마부는 말의 목덜미를 반복하여 문질러 달래려 했다.
『이놈아, 오늘 아침 밥도 많이 먹었잖느냐. 왜 배가 고픈 척하고 그래.』
마부는 그걸 다른 방향으로 착각했다. 먹보로 착각당한 말은 심히 억울할 것이다.
『아무튼 사정은 잘 알아들었수다. 허나 우리 도련님이 허락을 하실지 모르겠군요.』
『일단 소주인께 여쭈어 주시겠습니까.』
『큰 기대는 하지 마시오. 저어, 송주 도련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마차의 주인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내가 화급히 외쳤다.
『송주라고? 안 돼!』
열린 창문으로 고개를 내민 마차 주인도 나에게 지지 않으려 애쓰며 크게 외쳤다.
『안즈잖아. 안 돼!』
마부와 락연은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헤에, 서로 잘 아는 사이십니까? 묘하게 두 분이서 죽이 잘 맞는데요.』
『내가 버선이냐? 죽이 잘 맞게.』
나는 허겁지겁 달려가 락연의 팔을 끌어당기며 마차에서 떼어냈다.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송주의 마차를 얻어 타자는 거냐. 이쪽에서 사절이다. 차라리 오래 걸어 물집 잡힌 발바닥 껍질이 홀랑 벗겨지는 편을 선택하겠다.
『왜 그러십니까?』
『알 필요 없고. 이리 와.』
『혹시 마부석이라서 싫으신 겁니까. 그래도 그 먼 길을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좋을텐데요. 지금 체면이니 창피니 하는 걸 가릴 때가 아니라고요. 정 부끄러우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면 되잖아요.』
우리가 하는 대화를 마차 안에서 고스란히 엿들은 송주는 콧대를 세우며 재빨리 외쳤다.
『좋았어! 허락한다! 마부석에 타도 좋다!』
남의 불행을 즐기며 깔깔 웃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제기랄, 망했어요. 나는 손바닥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쓸어내렸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마부석에 나까지 포함하여 세 명이 나란히 앉으려니 좌불안석이었다.
락연은 내 몸을 번쩍 들어 가운데 앉히고 자신은 엉덩이를 극히 일부만 걸쳤는데 그러고도 힘들거나 불편하다는 시늉도 없이 그저 편안하였다. 정면에서 보면 대단히 기이한 모습이었으리라. 체중을 걸칠 의자도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앉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데 사람이었다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다 단 2분도 못 버티고 무너졌을 것이다. 허벅지 굵기가 아가씨 허리만큼 두꺼운 무관들도 기마 자세를 그토록 오랫동안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몰래 훔쳐보는 내 시선을 느끼고 그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안즈 님.』
『불편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감수해야지요, 뭐.』
이를 드러내며 웃는데 뾰족뾰족하게 튀어나온 이빨이 부담스럽다. 나는 무릎의 천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내문의 경계를 지나기에 앞서 마부가 질문했다.
『혹시 도련님도 새 옷을 구하러 외궁 밖으로 나가시는 겁니까?』
『옷?』
『사무월 축제에서 입을 옷이요.』
오호라, 그렇게 된 거였군...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날씨가 더운 탓에 마차의 창문이 활짝 열려 있어 마부석에서도 송주의 얼굴이 잘 보였다. 녀석은 흥흥 콧김을 내뿜으며 마부의 말을 부정했다. 심지어 손바닥을 폭풍 속 갈대처럼 흔들어댔다.
『저 녀석이 새 옷을 사러 갈 리가 있겠냐. 저 녀석은 내재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알거지야.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낯 두껍게 남에게 빌려 입은 거라고.』
『아이고, 작은 주인님. 그래도 배움을 같이 하는 친우분께 그런 말씀은...』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변방국 출신 거지와 친분을 쌓아 무엇에 써먹겠다고. 차라리 부뚜막 집게와 친구를 하겠다. 집게는 타고 남은 숯이라도 치워주지. 저건 그야말로 아무 쓸모도 없다고.』
그러면서 나 보라며 고개를 픽 돌린다. 우와, 무지 얄밉다.

나도 모르게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아무 쓸모없어 정말 미안하다! 귀신대부 무섭다며 북어포를 내던지고 줄행랑을 친 누구처럼 간이 큰 것도 아니어서 나란 녀석은 그야말로 휴지통의 쓰레기! 잡동사니 쓰레기여서 미안하구나! 사과하마!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내 사과의 말에 송주는 놋그릇을 부러진 수저로 긁어대는 듣기 싫은 목소리로 야단을 했다.
『야! 그때 일을 지금 왜 끄집어내! 시끄러워!』
『그 북어포는 잘 처리했니? 제대로 못하면 반대로 부정 탄다.』
『시끄럽대도!』
머리를 마차 밖으로 내민 채 아웅다웅 싸우고 있자니 다리를 지키고 선 수문장이 도깨비처럼 인상을 썼다. 신원을 확인하고 마차를 통과시키는 건 나중이다. 큰 소리를 낸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뜻이고, 문제가 있음에도 다리를 그대로 통과시킨다는 건 업무상 큰 실책이다. 아니나 다를까, 창을 들어 제자리에 서라는 신호를 보냈고 명령에 따르던 마부는 짧게 다듬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도련님들, 이제 그만 좀 진정하시죠.』
마부가 곤란해 하는 표정을 지었음에도 마차 뒷좌석에서 송주는 허공 발차기까지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덕분에 마부석까지 좌우방향으로 들썩들썩... 붙잡을 것이 마땅치 않아 나는 눈앞에 보이는 줄을 잡아당겼다.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자 줄에 매인 말이 보내진 신호를 착각하고 빠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헷갈려 하는 말을 다시 조정하면서 마부는 식은땀을 흘렸다.
『에라이, 그만들 하시라니까요!』
머리 나쁜 말을 다시 똑바로 걷게 만드는 일에는 수문장까지 손을 걷어붙여야 했다.

쭉 뻗어나간 오대문로를 향해 마차를 돌리기가 무섭게 송주와 나는 다시 영양가 없는 입씨름을 시작했다.
『네 얼굴에 보라색이 어울릴 것 같냐. 절대로 무리!』
『내 피부는 하얗단 말이다. 고귀한 색이 절대로 어울리고말고! 게다가 최신 유행!』
『차라리 연두색 옷을 입지 그러냐. 축농증에 걸린 썩은 콧물 색이라고 다들 좋아할 거다.』
『미친. 그러니까 네놈의 미적 감각은 촌놈의 단계를 넘어 구제불능이라는 거야. 진짜지 변방인들의 감각은 형편없다니까. 지금 뭐라고 했냐. 연두색 옷? 진심이야?』
『그러니까 내 말은 보라색은 어둡고 연두색은 밝다는 거야. 그리고 네 얼굴에는 어두운 색이 안 어울려.』
『그래서 밝은 색 옷으로 골라라? 그걸 조언이랍시고 거기 마부석에 앉았냐. 야, 인마. 공짜로 태워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당장 여기서 내리거나 아님 삯을 내.』
송주가 다시 발차기를 해보였다. 자기 소유의 마차이니 그 내부를 발로 걷어찬다고 해도 내가 무어라 할 수는 없는데 등받이 부분이 충격을 받으니 마부석에 앉은 입장에선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너한테 상담한 내가 병신이지. 당장 안 내려?』
『물어봐놓고 왜 자기가 성질이야. 그리고 내가 뭐라고 하든, 넌 결국 보라색 옷을 고를 거잖아!』
『물론이지. 그 색이 가장 나에게 어울릴 테니까.』
『두고 볼 것도 없다니까, 송주. 진짜지 보라색은 아니야.』
『멋대로 지껄여. 사무월 축제임에도 새 옷도 못 지어 입는 거렁뱅이 주제에. 흥!』
이젠 나도 못 참는다. 작정하고 뒤돌아 앉아 송주를 노려봤다. 노려보기만 했던가, 그 좁은 창으로 팔을 집어넣고 녀석의 옷깃이라도 잡으려고 기를 썼다. 물론 마차 내부는 의외로 넓어 속으로 짧은 팔을 뻗어봤자 허공에서 물갈퀴질이나 할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이었다면 마차가 다시 심하게 요동을 쳤다는 거랄까, 송주가 꽥 소리를 지르며 팔걸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덕분에 락연이 마부석 밖으로 튕겨나갔으니 더하기 빼기 남는 거 아무 것도 없음.
요괴는 여전히 차분한 몸가짐이었지만 오른쪽 다리만 가까스로 걸쳤을 뿐, 몸 전부가 허공에 붕 뜬 상태였다.

Posted by 미야

2015/07/17 20:21 2015/07/1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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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급형 기계식 키보드 망가짐... 5월 9일에 구입한 녀석인데 F8키가 자동으로 눌려짐... 한글에서 F8키가 눌려진다는 건 자동 맞춤법 검사 진행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망했어요? ※

더위를 식혀줄 한줄기 시원한 비 소식을 기다리는 와중에 집에서 소식이 당도했다.
속으로 가만히 손가락을 헤아린 나는 짐작했던 것보다 무려 엿새나 빨리 도착했음에 깜짝 놀랐다. 에둘러 협박하기가 그렇게도 효과적이었던 걸까, 그렇다고 하기엔 아버지 성격과는 안 맞는다. 아무래도 내가 보낸 편지의 답장이 아니라 엇갈려서 먼저 소식하였다 여기는게 옳을 것 같았다. 더욱이 받는 사람이 지리가 안즈가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평범하지 않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당신 춘부장께서 자식 놈에게 보내야 할 걸 왜 이렇게 보낸답니까.』
정확하게는 자식 놈이 아니고 내재원 부석상위에게 보낸 편지였다. 그런데도 숙희 숙사감대부는 그걸 멋대로 뜯어보고 개인 사생활 보호라는 걸 멋지게 뭉개버렸다. 어차피 내 신분이 빈사국에서 보낸 인질이라 할 수 있으니 내재원 담당 관리가 편지를 검열하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었지만 부석상위보다 급이 두 단계 낮은 숙사감이 이를 멋대로 뜯어본다는 건 의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들 항의할 입장이 아닌 나는 짐짓 뒷짐을 진 자세에서 고개를 길게 빼어 내 앞으로 왔다는 편지를 구경했다.
편지는 연두색 고급 비단지에 포장되어 흡사 높이신 이가 처녀에게 보낸 연서처럼도 보였다. 내 아버지라는 사람이 화려한 걸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봉투만 봤음에도 낯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외관이 화려하다고 구색을 갖췄다고 할 수는 없는데 이 양반은 무릇 귀족이라면 이 정도의 사치가 당연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내용이 뭔지 읽어보셨어요?』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받는 사람이 지리가 안즈님 앞이 아니었다니까요.』
숙희 숙사감대부는「내 탓이 아님!」을 느낌표 붙여 강조한 뒤에 나에게 편지봉투를 건네주었다.
그리고는 삐죽삐죽 수염이 튀어나온 아래턱을 쓸었다. 변비에 걸린 표정 또한 빼먹지 않았다. 이는 곧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읽지 않고 무작정 주머니에 넣으려 하자 숙희의 눈썹이 꿈틀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손을 휘저어 주머니에 넣으려는 날 말렸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서 읽으라고요?』
『아무래도. 받는 이가 안즈 님이 아니라서요.』
그는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뺨 위에 돋아난 거스라기를 손톱으로 뜯었다.

『그럼 읽겠습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었기에 안부를 묻는 내용은 당연히 한 줄도 섞여 있지 않았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사무적인 말투였는데 내용 또한 팥 알갱이로 죽을 쑨 것처럼 간결하기 짝이 없었다.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사실 관습에 대해 아는 내용이 부족하여 일이 서툴렀습니다. 미리 챙기질 못한 것은 제 과오입니다. 요청컨대 나의 아이더러 소극 상은에 들러 필요한 금전을 찾으라 하십시오. 동봉한 것은 증서입니다.

뒷장에 글자가 더 적혀져 있지 않을까 싶어 뒤집어 보았다. 그러고도 소득이 없자 봉투를 거꾸로 들고 흔들어 혹시라도 남아있을 내용물의 추가를 기대하였다. 허나 돌조각이나 먼지 알갱이도 아닌데 글자가 봉투 속에서 떨어질 리가 없었다.
『간결하네요.』
『그러게요.』
편지를 다시 원래대로 접어 봉투에 넣으며 질문했다.
『여기에 적힌 소극 상은이라는 건 뭔가요.』
『소극은 상호명이에요, 안즈 님. 루은에선 그다지 큰 상은은 아닌데... 그 전에 먼저 안즈 님에게 상은이라는 걸 설명드려야 하겠군요. 상은은... 뭐랄까. 많은 금전을 직접 품에 넣고 먼 길을 가야하면 강도에게 빼앗길 염려가 있잖아요? 그래서 갑이라는 마을에 있는 상은에 돈을 맡기고 대신 증서를 받는 겁니다. 그리고 목적지인 을이라는 마을에 들려 거기에 있는 상은에서 소정의 수수료를 물고 맡긴 돈을 찾고. 이해가 가죠? 원래는 대규모 무역 상인을 상대로 은화를 사고파는 거래로 시작하다가 점차 돈을 예치하는 서비스로... 아! 여기서 서비스라 함은 사람에게 편리함을 제공하는 걸 상품으로 판매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거 참, 더 헷갈리겠군. 서비스라는 건 머리에서 지워버리세요.』
동대륙에서 은행이라 불리우는 것과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종류다.
『그렇군... 대금업이군요.』
『맞습니다. 헌데 여기 증서에 대리인을 가정하지 않았기에...』
『제가 직접 가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건가요?』
『그렇게 되었습니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직접 가서 돈을 찾아오게 시키다니. 벽서국 인간들은 지독하구먼, 숙희는 혼잣말을 하며 장부를 뒤적거렸다. 나 혼자 내재원 밖으로 내보낼 수 없으니 동행을 시킬 시간이 남는 숙사감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무월 축제가 코앞이라 손수건을 흔들며 오늘 나는 무진장 한가해요, 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종이의 낱장을 뒤적거리던 그는 끙 소리를 내뱉고는 다시 내 눈치를 읽으려 했다.
『이거, 당장은 어렵겠는데. 안즈 님.』
『하지만 이 증서에는 유효 날짜가 적혀져 있어서.』
『미친.』
이런 경우는 없다며 숙희는 화를 냈다.
『사람 일이 그렇게 일사천리로 흘러갈 줄 아는 감! 오늘 당장, 내일 당장, 이러면 나더러 어쩌라고!』
같은 말을 그대로 되갚아주고 싶었다. 나더러 어쩌라고.

외출 준비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얼굴을 깨끗하게 씻고 약식 하리건을 모자처럼 머리에 쓰는게 전부, 신에 묻은 먼지를 털고 있는데 숙사감대부의 명령을 받았다며 내 시중을 들 하수가 문설주를 두드렸다.
『락연이라 하옵니다. 오늘 하루 동행을 명 받았습니다.』
『낯익은 자로군. 그대는 소방의 직원이지 않은가. 밥 준비는 어쩌고.』
저번에 나에게 물이 든 죽통을 건네주었던 자였다. 이빨이 뾰쪽뽀족, 톱니처럼 생겨 아무래도 사람 같지 않은 인상을 처음부터 남겼던지라 나는 그의 등장이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안으로 들이지 않고 밖에 세워둔 채로 그와 대화했다. 창고라고 해도 엄연히 잠자리로 쓰는 공간인데 그 안으로 요괴라 추정되는 이를 들이기는 죽어도 싫었다.
사내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공손했다.
『식사 준비는 안 해도 됩니다. 원래 제가 하던 일도 아니었고요.』
『원래 하던 일은 뭐였는데.』
락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수호(守護)입니다.』
『야! 너, 나에게 너무 솔직하게 말하는 거 아냐?! 그런 건 좀 숨겨! 암살자가「제가 원래 하는 일은 암살이에요」이러는 거 봤어? 봤냐고! 이럴 적엔 세탁물을 담당합니다, 이러는 거야. 변명할게 생각이 나지 않으면 그냥 심부름을 합니다, 이래도 되잖여!』
이쪽에서 버럭 고함을 질러대자 락연은 그런가요, 이러며 시치미를 잡아뗐다.
망할 요괴 같으니. 이놈은 나에게 정체가 들켜도 큰 문제가 없다 가벼이 여기는 것이다.

『나를 감시하라고 명 받았냐.』
탈 것을 구할 수 없었던 우리는 내재원 밖으로 나가기 위해 두 다리를 이용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다면 오래 걸어야 한다는 내 말에 불만을 표현했겠지만 상대는 요괴라서 무어라 야단하지 않았다. 한 달 내내 걸어야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하자며 수긍했을 것이다. 인간과 요괴는 체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감시까지는 아니고...』
『왜? 듣자하니 장차 내가 이사실 제국을 멸망시킬 거라던데. 이 소악당이 무슨 작당을 하는 건 아닌가,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런 말이 있기는 하죠. 하지만 제국 멸망이요? 음... 그 전에 공부를 열심히 하셔야 할 것 같아요.』
『야! 말이 너무 심하잖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남의 입으로 그 이야기를 직접 들으니 울컥 감정이 솟구친다.
『게다가 맨날 땡땡이를 치는 건 아니란 말이야!』
락연은 걸음을 멈춘 채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정색하며 이리 말했다.
『안즈 님은 요괴인 저보다 거짓말을 참 잘 하시네요.』
『이놈이!』
『사람은 원래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거라고 하지만.』
『누가 그딴 말을 하든!』
『누가 그 말을 했는지가 중요합니까?』
내 질문을 회피한 그는 출입구 앞에 선 사물 마차에 시선을 주었다. 사물 마차라는 건 귀족이 사용하는 개인 마차다. 마침 내재원에서 허가를 받아 외출을 하려는 자가 있는 모양이다.
『물어보고 방향이 같으면 태워달라고 합시다.』
요괴는 나보다 요령이 좋아 얼른 마부가 있는 곳으로 바삐 움직였다.

Posted by 미야

2015/07/15 17:41 2015/07/1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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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7/15 18:07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7/16 11:08 # M/D Permalink

      그러게 말예요... 뽑기라는 말이 있었지만 이 정도 수준일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데 말입니다. A/S 접수는 해놨지만 업체 신용이 팍 깎이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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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대부가 나오는 창고의 문을 박살내고 그 내부로 개선장군처럼 당당히 들어가 어딘가로 숨겨져 있는 유골을 빼내어오는 상상을 해봤다. 전후좌우의 정황을 고려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보면 정말로 그곳에 내 뼈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만... 흉악한 몰골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정체가 뭐든 조만간 해결을 봐야 할 것이다.
더하여 나는 내 거처의 지붕 위를 돌아다니는 기분 나쁜 것들의 머리 위로 시퍼런 번갯불을 내리꽂는 장면도 즐겁게 꿈꿨다. 굉음과 같이하여 부정한 것들이 전부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이다. 꼴좋다. 상상 속의 나는 벼락을 자유자재로 조정하면서 비릿한 미소를 짓곤 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 안즈는 크게 주눅이 든 채 매번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걸었다.
따라붙는 기척이 두려워 감히 얼굴을 들어 나무 위를 쳐다볼 생각도 못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크게 불면 식겁했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특이체질이라고 간덩이가 커지는 건 절대 아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지켜봄을 당한다는 건 나머지 한 방울의 피까지 빨리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죄를 짓지 않아도 죄인이었고, 앞으로 몹쓸 죄를 지을 죄인이었다. 이래선 무릎을 꿇고 어서 빌어라 강요받는 기분이었다.

『미간에 또 주름이 졌어, 너.』
『향수병.』
『그런가.』
린청은 향수병을 앓아서 그렇다는 내 설명에 그럭저럭 납득하고 넘어갔다가 돌연 표정을 바꿔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의심은 타당했다. 본국에서 애물단지 취급을 받던 내가 집이 그리워 향수병을 앓는다는 건 영 어색했다.
『향수병이 아니고 누가 또 괴롭히고 그런 거 아냐? 혹시 송주가 또 못된 짓을 하고 그러든?』
『괴롭힘이라...』
나는 턱받침을 하고 앉아 이글거리는 한 여름의 햇빛을 넋 놓고 쳐다보았다. 노인네처럼 한숨도 나왔다.

물론 어제도 한바탕 골탕을 먹었다.
물론 그 상대는 송주가 아니다. 녀석은 자기 패거리들과 군무 연습이 바빠 나 같은 건 안중에 없다.
「여어, 꼬맹이.」
다람쥐, 꼬맹이, 도토리, 이런 거 말고 슬슬 이름으로 불러줘도 좋으련만. 최소한 부르는 호칭을 하나로 통일이라도 해주던가. 속으로는 불평했지만 겉으로는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나란 녀석도 참으로 속이 시커멓다.
「천세, 천세, 천천세.」
그래도 억지로 웃는게 티가 역력하니 쓸데없는 짓이었을지도.
「이 녀석은 어찌된게 늘 빈상이야. 마음에도 없는 인사는 되었고 더워 죽겠다. 목도 말라. 냉수를 가져오렴.」
그러니까 내가 왜. 어째서. 당신 주변엔 시중을 드는 이들도 없는 겁니까.
빈사국의 졸부인 우리 아버지도 손바닥만 치면 하인이 다섯은 나타났단 말입니다!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목덜미를 문질렀다. 왜냐하면 마실 물을 뜰 우물까지 가려면 위치한 자리에서 일각(15분)은 족히 걸어야 했고, 거기다 다시 돌아와야 하니 왕복 걸음이다. 물을 대접에 뜬 상태로 바삐 뛸 수는 없는데다 엎지르면 낭패. 그야말로 고된 심부름이다.
하지만 자손은 정말로 더워보였고 의복은 단정치 않게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땀 냄새에 섞여 말분 냄새도 강하게 풍겼다. 값비싼 좋은 향기 이런 건 맡아지지 않아서 나는 그가 지금껏 뭘 하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연무장에서 검술 실력을 닦기라도 했던 걸까? 하지만 군장 차림새도 아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서 무얼 하시었기에?」
「궁금하냐? 엎드려서 나를 모시는 내관이 되겠다고 약조하면 가르쳐주지.」
 궁금증이 그 즉시 사라졌다.
「저 같은 하찮은 자에게 마실 물을 구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래선 안 되는 까닭을 나열해 봐.」
「행여 물에 이상한게 섞이기라도 하면...」
「왜? 심술이 난 나머지 내게 배앓이가 나는 약이라도 먹이고 싶으냐? 괜찮다. 허락한다. 어지간하면 다 마셔주마. 갈증이 심해서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구나.」
「저어, 그보다 제게는 급히 수업이... 다른 사람에게 시키시면.」
「네놈이 여차하면 땡땡이를 친다는 거 다 안다. 수업 핑계는 안 통해. 맨날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제가 걸음이 느려서... 오래 걸릴 텐데요.」
「100년까진 안 걸리잖아. 말대답 따박따박 할 시간에 후딱 다녀와!」

나는 징징거리며 우물가로 뛰어갔다...가 요구한 상대가 그 누구도 아닌 황족인데 우물에서 바로 떠서 마실 물을 올려선 안 된다는 걸 깨닫고 허둥거렸다. 그렇다고 정궁까지 가서 높으신 이가 마실 물이 필요하니 달라고 해보랴. 한바탕 곤장질을 당할 터, 그보다 내 걸음으로는 정궁은 멀어도 너무 멀었다.
「크아악! 실수했다. 이를 어쩌지! 」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 어지간하면 다 마셔주겠다는 자손의 말을 떠올리고 얼른 손뼉을 쳤다.
「소방! 그리로 가자!」
소방에 이르러 물을 달라 크게 외치니 머리에 두건을 쓴 이가 문간에서 바로 튀어나와 내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투로 물이 가득 든 죽통을 내밀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미칠 지경이었음에도 궁금한 걸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너는 천리안이라도 가졌느냐?」
「눈은 안 좋습니다. 대신 귀가 아주 좋지요.」
예의 이가 뾰족뾰족 드러나서 나를 무진장 겁먹게 만들었던 하수였다.
나는 뚫어져라 그 자의 입을 주시했는데 이번에는 특별나게 톱날처럼 튀어나온 건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 자의 이빨 모양에 정신이 팔려 내가 영 움직이려 하질 않자 그는 쓰게 웃으며 채근했다.
「서두르셔야지요. 그분을 기다리게 하면 안 됩니다.」
「아, 그렇지.」
「피로하실 것 같아 안에 과일즙을 조금 섞었다 고하여 주십시오. 독은 안 들었습니다.」
「설사약을 넣었다고 해도 상관없는데.」
「섞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안 듣습니다.」 사내는 단정히 말하고는 부드럽게 내 어깨를 밀었다.

다시 왔던 길을 힘들게 달려 죽통에 든 물을 자손에게 올렸더니 수고했다는 말도 없이 한 입에 쭉 들이켰다.
그런데 다 마시고 퉷 하고 뱉었다.
「에이. 뒷맛이 달아 영 개운치 않군.」
미간을 찡그리며 혀를 길게 내밀어 불평하기에 사실을 고하였다.
「죽통을 준비한 자가 말하길 피로하실 것 같아 과일즙을 섞었다고 하였습니다.」
「누가.」
나는 당황했다. 그 자의 이름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솔직히 소방에서 일하는 자가 맞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저어... 이름은 잘.」
「짜증나. 그러니까 뭐냐, 방금 이 몸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가 준 물을 마셨단 말이지. 그거 불쾌하군. 나는 네가 뜬 물을 원한다. 차가운 물! 다시 가져와.」
「에엑?!」
「직접 떠와!」
왜 나만 갖고 그래요오오오오~!! 비명을 질러대며 다시 소방으로 차박차박 뛰었다.
어유, 제기랄. 빈사국에서도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한 적은 없었는데.
다시 물을 가지고 돌아오니 누구처럼 땀 투성이에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여 더위를 먹은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어유, 옷 좀 갈아입고 그래라. 어린놈이 몸에서 쉰내가 막 나고 그럼 되겠냐.」
이게 다 누구 탓인데 자손은 짐짓 자기 코를 막고 나쁜 냄새가 난다며 나를 골렸다.
「어쩔 수 없잖습니까. 뛰어온 걸요.」
「그래서 땀이 났다?」
「예.」
「그럼 나와 같이 사이좋게 목간이라도 같이 할까?」
「...... 천지가 개벽한다고 해도 사양하겠습니다.」
이상. 무릎으로 얼굴을 파묻고「괴롭힘을 당하다」회상을 종결하였다.

오전 내내 달궈진 흙으로부터 비읏한 내음이 피어올랐다. 물을 뿌리면 달군 금속이 내는 치익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너무 뜨거워 풀들도 기운을 잃었다. 이런 비정상적인 열기에 신이 난 건 벌레들뿐이다.

Posted by 미야

2015/07/13 19:48 2015/07/13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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