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분홍빛의 묽은 스프를 억지로 삼키자 평소보다 몇 갑절 빠르게 의식이 흐리멍덩해졌다.

「평소보다 누월초를 강하게 썼군. 이거, 이래서는 치샤량 아닌가.」
숨이 멎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한 톨도 하지 않았음에도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차피 쉽게 죽지 않는 몸이다.
치사량이 문제가 아니고 결정적으로 맛이 개판이다. 식초 비슷한데다 떫었다. 퉤, 하고 뱉고 싶은 맛이다.
차라리 몽둥이로 단숨에 머리를 쳐서 기절시킬 것이지 – 그릇을 통째로 뒤집어엎고 싶은 욕구를 참고 수저를 입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눈꺼풀 아래로 무거운 납덩이가 달리자 멀리서 이를 훔쳐보던 하인이 서로 눈짓을 나누었다.
문이 열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여자가 작은 신사용 구두와 레이스로 깃이 장식된 겉옷을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서두르라고 누구 하나 입 뻥긋하여 말하지 않았음에도 여자의 보폭은 매우 컸다. 그 모양새가 흡사 불가에 오래 두고 졸아붙은 스튜를 화덕에서 내려놓기 위해 호들갑을 떠는 시골 아낙네 같아서 약간은 우스꽝스러웠다. 뛰는 것도 아니고 걷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 어디쯤 될 것 같다. 무엇보다 여자는 씨근덕거리고 있었다.

약에 취해 눈을 감았던 소년이 인기척에 반응하여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좋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고 – 나쁘게 말하자면 사람 느낌이 일절 안 났다.
옷가지를 들고 있던 여자는 초점이 흐려진 소년의 시선이 얼굴에 닿자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안전할 거라고 했잖아요!』
『약을 세 배는 더 썼어. 괜찮아.』

정확히 얼마나 더 썼는지 모른다. 허나 약을 더 쓴 건 사실이다. 그러니 세 배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이다.
약을 가져온 본가의 시종장은 한 끼 식사마다 말린 잎사귀를 두 장씩 넣으라고 지시했다.
그렇지만 정량 따윈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잎사귀는 바싹 말라붙어 조금만 건드려도 부스러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형태를 잃고 가루가 되었다. 그 가루로 「잎사귀 두 장」 정도의 분량을 추측하라고? 말도 안 되었다. 그래서 게으르고 부덕한 하인들은 티스푼을 사용해서 눈대중으로 대충 양을 쟀고, 당연히 최초의 「잎사귀 두 장」 이야기는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알게 뭐람. 얼마면 어떠랴. 요컨대 요괴가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라는 거다.

옷이 입혀진 소년은 전쟁 포로처럼 양 팔이 모두 붙잡힌 채 다른 장소로 옮겨졌다.
무릎의 힘이 풀려 거의 끌려가는 수준이었지만 하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신분이 위니악의 소공자 – 메디발의 공주가 배 아파 낳은 둘째 아들이었어도 그랬다.
『서둘러. 시간이 촉박하다.』
약에 취해 오락가락하는 소공자의 정신이 가끔씩 돌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소년은 흔들거리던 머리를 애써 세우곤 했는데 하인들은 그 때마다 히익 소리를 내곤 했다.
소문으로는 소공자가 입으로 용암을 내뿜는다고 했다.
물론 소문이다. 소공자는 용이 아니니까. 그래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어서 오세요.》
메디발의 공주는 왕가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은 한 떨기 장미꽃이었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는 장인이 만든 보관보다 아름다웠으며 피부는 백옥 같았다.
결혼을 하고, 나이를 먹고, 세 아이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그녀는 숨구멍조차 없는 완벽한 진주였다.
《오늘도 착하게 잘 지내셨나요.》
여인은 카나리아처럼 노래한다.
《어서 이리 오세요, 나의 작은 보물.》

소년은 흐려진 눈으로 여자를 응시했다. 초점이 맞지 않아 어미의 눈코입이 전부 뭉개져 보였다.
사랑스럽고 귀하다고 말하면서도 그녀는 한참 거리를 두고 서서 손깍지를 단단히 꼈다.
그 손을 내밀어 아이의 머리를 만져주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행동은 하지 않고 오로지 입으로만 노래해 그 심장에 담긴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
《사랑스런 나의 아이.》

힘들여 눈을 깜빡이자 잔상이 다소 가셨다.
그래봤자 여인의 얼굴은 다 마르지 않은 물감을 손가락으로 마구 뭉개버린 형상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그리고 사방에서 불쾌한 빛이 번득였다. 덕분에 눈이 시려 눈물이 났다.
금발, 노란색. 빨강의. 두껍게 덧칠된... 아아, 피냄새. 그렇군. 소년은 느리게 깨달았다.

당신은 이미 죽었지.

순간 참을 수 없이 두통이 심해졌다. 도끼로 머리를 찍는 수준이었다.

『약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아니옵니다. 평상시와 같사옵니다, 대공자님.』
『내 판단에는 그렇지 않은데. 앞으로는 좀 줄이게.』
주인의 말에 노인은 저어했다.
『저어, 죄송하오나 그러지 않는 편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대공자님. 약을 줄이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콧잔등에 주름을 잔뜩 만든 사내가 서있었다.
언제나의 표정이었다.

무엇이 불쾌하다는 걸까. 무엇이 짜증스럽다는 건가.
방금 전 자다 일어난 사람처럼 헝클어진 머리? 끼워 맞춘 것처럼 보이는 옷? 그나마 격식을 갖춘 겉옷 아래로는 속옷이나 마찬가지인 셔츠 차림이다. 준 왕족이나 다를 바 없는 위니악의 후계자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추태일 터, 그 사실을 잘 알았기에 목깃까지 잘 채워져 있던 단추를 주먹으로 쥐고 뜯어버렸다.

『무슨 짓이냐.』
『숨 쉬기가 답답해서.』
누월초는 원래 독초다. 중독되면 심장박동이 느려진다. 그래서 숨이 느려지고 심하면 정신을 놓는다.
그 효능만 보자면 정적을 독살하기에 안성맞춤인 종류이나 무색무취의 다른 독과는 달리 감춰지지 않는 특유의 신맛이 있다. 그래서 보통은 사람을 쓰러뜨릴 종로서가 아니고 동물을 사냥할 적에 쓴다. 사냥꾼들은 누월초의 즙을 화살촉에 발라놓고 사용한다.

『역시 복용량을 줄이는 편이 좋겠어.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
『지금은 눈이 잘 안 보여. 하지만 귀는 닫히지 않아 그 목소리는 잘 알아듣겠군. 형님.』
소년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축 늘어진 자세 그대로 고개만 까닥였다.
『한 달 보름여 만인가? 달력을 보며 세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세 달이다. 미안하구나, 일로이. 그동안 좀 바빴다.』
『전혀 미안해 할 것 없어, 형님... 덕분에 평안했으니. 매일 약에 취해 입을 벌린 채 침을 흘렸지. 정신을 차리면 밤이고, 다시 정신을 차리니 밤이더라고. 아주 달콤하고 태평한 나날이었어.』
순간 테이블에 놓여있던 장식 화병이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일로이!』
『귀 아프다고. 소리 좀 지르지 마, 형님. 어차피 싸구려 도자기잖아.』
『싸구려가 아니야. 바다 건너 대륙에서 어렵게 공수해 온... 아니다. 지금 도자기 문제가 아니잖아!』
『그럼 뭐가 문젠데.』
『...』
남자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열두 살 어린 남동생의 제어되지 않는 이능이 골치라고는 말하기 싫었다.
그래서 대화가 잠시 중단되었고, 이윽고 몇 단계를 훌쩍 건너뛰어 다시 시작되었다.

대공자가 자세를 가다듬었다.
『네게 곧 놀이상대가 생길 거다.』
『뭐?! 갑자기 웬 놀이상대?』
『아니면 개인 시종이라고 생각하던지. 어쩌다보니 사정이 있는 어린아이를 잠시 맡게 되었다. 손님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니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그동안 밥값은 해야 할 테고, 아직 팔목에 힘이 없어 본관에서 일을 시키기는 무리더구나. 그래서 생각해본 끝에...』
소년이 재빨리 말꼬리를 잘랐다.
『맙소사.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내 놀이상대나 하라고? 하아? 지금 장난해?』

대공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대가 한 배에서 태어난 동생이라 할지라도 말꼬리가 잘리는 건 무척 불쾌한 경험이다. 신분으로나 직급으로나 그의 말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자를 수 있는 자는 왕국에서 손가락을 꼽을 정도밖에 없다. 그리고 정직하게 따지자면 열두 살 터울의 동생은 대공자의 말꼬리를 자를 위치가 전혀 되지 못한다.

자신도 모르게 턱이 당겨지고 말투가 싸늘해졌다.
『아무렴 장난이겠느냐.』
눈매도 가늘어졌다.
『참고로 말해두지만 지난 번 네가 「실수랍시고」 호숫가에 거꾸로 처박아 죽인 아이의 부모에겐 사과의 의미로 농작지를 따로 떼어 내려줬다. 그런데 새로 온 아이에게는 양친이 없으니 덜 부담스럽구나. 참으로 다행이지 않느냐. 천애고아라서. 어찌나 감사할 노릇인지. 내 죽은 자식의 몸뚱이가 왜 다섯 조각으로 돌아왔느냐는 물음에 수중에 사는 짐승에게 물어 뜯겼노라 거짓말 하지 않아도 되고.』
『...』
『존재하지도 않을 짐승을 잡겠다며 기사를 풀어 들판을 쑤셔대지 않아도 될 테고.』

그때 또 커다란 유리창이 쩍 하고 굉음을 내며 세로로 갈라졌다.
『일로이!』
『어쩌라고!』
소년과 사내는 서로를 죽도록 노려봤다.

Posted by 미야

2017/10/17 15:55 2017/10/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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