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sted at 2019/01/21 11:20
- Filed under 끄적끄적
곰 세 마리가 한 집에 있어, 아빠 곰 엄마 곰 애기 곰.
혀 짧은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로 동요가 울려 퍼졌다. 들려온 노랫가락은 순전히 환청이겠지만 – 다 큰 성인 남자의 생일잔치 자리에서 곰 세 마리 동요를 부르면 정신 나간 사람이다 – 두 발로 우뚝 일어선 곰이 팔을 뻗어 한손으로 농구공을 움켜쥔 모습만큼은 분명 환각이 아니었다. 여기서 잠깐. 민의 머리통을 농구공에 비유하는 건 사이즈 면에서 실례다. 배구공으로 고치겠다.
아빠 곰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이 슬비가 뭐.』 그리고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다 튀어나오도록 꾹 힘을 주었다.
수박 통이 작살나면서 붉은 속살이 사방으로 퍼지는 장면이 떠올랐다. 다만 여기서 박살나는 쪽은 어디까지나 민이 아니다. 영화를 봐도 이런 경우 토벌을 당하는 편은 인간이 아닌 괴수다. 킹콩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추락한다고 대본에 적혀져 있다. 그러니 녀석도 아는 거다. 실제로 곰에게 머리를 통째로 잡힌 민은 불쾌한 감정에 눈썹을 꿈틀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위협은 못 느껴도 조여진 머리는 꽤 아플 텐데, 순간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이야, 마철이 형. 정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합격했다고 들었어. 입학 축하해.』 『나 지금 2학년인데.』 『벌써 그렇게 되었나? 시간 참 빠르네. 미안.』 『괜찮아. 그런 것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암튼 축해줘서 고맙다. 그러고 보니 너도 헐리웃에 진출해서 메이저급 영화 찍게 됐다며. 잘 됐다, 인마. 무릇 사나이라면 좁은 땅덩어리에서 성공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세계로 나가야지.』 『형은 연예계 뉴스는 전혀 안 보는구나. 배역이 FBI에게 총 맞아 죽는 조연급 악당이라고 해서 두고 볼 것도 없이 취소시켰는데. 그것도 6개월 전에. 진짜지 미국 놈들 이중성은 쩔어. 인종차별은 안 된다면서 동양인 취급은 거지야.』 『영화 디렉터를 욕할 일이 아닌 것 같구나, 민아. 네 이미지로는 수사관 역이 안 어울려요.』 『이미지를 따지면 형도 유도나 레슬링 계열이지 정치외교학과는 아니야. 고릴라가 정치라니. 학점 따는데 안 어려워?』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덕담 비슷한 걸 나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좀 해보라는 뜻이다.
어쩌라고. 나는 배가 고팠다. 아침부터 먹은 음식이라고는 설탕이 들어간 커피와 유통기한을 하루 넘긴 편의점 에그 샌드위치가 전부다. 그러니 일단 밥부터. 『마철아. 쟤 머리에 힘 줘서 헤어 스타일링 했는데 그럼 왁스 묻어. 손 떼라고.』 『윽!』 『민아. 널 따라온 극성팬들이 아까부터 와이파이 찾고 있더라. SNS에 사진 올릴 것 같은데 내버려둘 거니?』 『젠장.』 뜨거운 주전자를 만졌다며 마철이 손을 떼어냈고, 동시에 눌린 머리가 된 민이 겁대가리 상실한 무수리를 잡고자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됐어, 이것으로 게임 끝. 도망치자.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거 없다고 그럭저럭 뷔페식으로 차려진 테이블 위의 음식은 한눈에 봐도 죄다 인스턴트였다. 튀김만두, 냉동잡채, 스낵과자, 도넛, 콜라, 뼈 없는 팝콘치킨... 애들 입맛이었다. 쌀밥과 잘 끓인 된장찌개를 그리워하며 전자렌지로 해동시킨 감자튀김을 하나 집어 이쑤시개처럼 입에 물었다. 김밥도 있기는 했다. 맛이 없어 보여서 문제지. 극혐으로 김밥 안에 길게 썬 오이가 들어가 있는 게 보였다. 아우성을 치던 위장이 도로 얌전해지려 했다. 나는 식빵 속의 건포도만큼이나 오이가 싫다. 『죽어라, 오이.』 그렇게 욕을 하며 일회용 나무젓가락을 써서 김밥 안의 오이라는 녀석을 푹푹 찔러 테러하고 있는데 누군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뜯어 말렸다. 『먹을 거에 화풀이 하면 못 써.』
나는 여전히 그날 아침 내리던 비의 냄새를 기억한다. 작은 체구, 하얀 원피스. 붉게 손자국이 남은 마른 허벅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무언가를 간절하게 호소하던 소녀.
『아우러우음.』 『입에 음식 넣고 말하는 거 아냐.』 『아움.』 『어휴, 진짜. 못 말린다니까.』
슬비는 나와 달리 입과 눈이 항상 같이 웃는다. 그래서 가짜라는 느낌이 없다. 슬비가 웃으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서, 행복해서 웃은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 미소가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초록 가득한 정원에서 아름답게 피어난 한 송이 작은 국화와도 같아서 모르는 새 손에 쥐어 문질러 짓이기는 일 없도록 나는 늘 신경을 쓴다.
『화풀이 같은 게 아냐. 이건 편식이라고.』 『오이 비누는 곧잘 썼잖아. 나기는 오이가 싫어?』 슬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욕실에서 맡던 비누 냄새가 떠오른 모양이다. 『이 경우 냄새가 아니라 맛이 문제지, 슬비. 오이는 쓰잖아. 그리고 비누도 굳이 좋아서 골랐던 건 아니야. 오이 비누 가격이 가장 저렴하다고. 장미향이나 라벤더향보다 30% 더 싸.』 돈이 웬수다 – 라고 후렴구를 외치려는데 손목이 잡아당겨졌다.
민은 여전히 가게 안을 방황 중이었다. 시중들던 무수리들을 일종의 창병처럼 세우고 – 여자니까 물리적으로 밀쳐지는 일은 없을 거라 판단한 듯하다 -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오려 했다. 그런데 의외로 디펜스가 만만치 않았다. 마철은 여자애들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대신 꾀를 냈다. 『유명배우 싸인 받아가세요. 이런 기회는 두 번 없어요. 감사합니다. 오늘 제 생일이에요.』 카페의 문을 활짝 열고 이렇게 말했다.
덕분에 소란이 일었다. 민을 알아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가게 바깥으로부터 꾸역꾸역 달려들었다. 생고기를 발견한 좀비 떼의 움직임이다. 몽둥이로 격파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길 지경이다.
『일단은 피하자.』 슬비가 속삭였다. 작고, 연약하고,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자의 입술이 귀에 닿았다. 귀 안이 따뜻하게 데워진 습기로 가득 차는 기분이었다.
『민이 시비를 거는 것 같더라.』 『쟤가 나에게 시비 거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신경 꺼, 신경 꺼.』
기둥 뒤편에 숨은 채 좀비 떼에게 휩쓸려가는 인기배우의 최후를 지켜봤다. 내 시선을 느낀 민이 표정으로 욕하며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려보였다. 손가락에는 손가락이다. 나는 엿 드시라며 가운데손가락을 들어보였다.
Posted by 미야
2019/01/21 11:20
2019/01/21 11:20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4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osted at 2019/01/15 13:33
- Filed under 끄적끄적
소 유님을 만났다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다. 슬비는 그 날 내가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 나간 줄 안다. 더운데 어디를 가느냐는 질문에 나는 그냥, 이라 대답했고, 헤진 운동화 대신 굽 낮은 갈색 에나멜 단화를 신었을 뿐인데 그렇게 착각했다. 물론 나는 이를 바로잡을 마음이 없어서 열심히 하고 오겠다는 의미로 방긋 웃어주었다.
아마도 내 어머니 – 소 유의 사정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 가의 피를 이었음에도 아무런 능력이 발현되지 않은 까닭에 오래 전에 밖으로 내친 딸이 갑자기 만나자고 연락을 해오더군요, 지금에 와서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지만 난감하게 되었지 뭐에요, 난잡하게 몸을 굴린 나머지 급하게 임신 중절 비용이 필요해진 건 아닐 거라 믿고 싶어요, 이런 식으로 수다를 떨진 않았을 거다. 가문의 수치, 혈통의 배반. 나라는 존재에 대해 일체 입을 열지 않는 그녀다. 개인비서에게 스케줄을 조정하라 지시하면서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했을 것이다.
여기서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연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소 가 내부에 몰래 심복이라도 심어놨나.」 10대 가문들끼리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은 예전부터 유명해서 운전기사나 집사 같은 고용인을 포섭하여 정보를 빼내는 일은 제법 흔하다. 「하지만 요금 같은 시대에 세작은 너무 고전적이지... 어쩌면 CCTV를 해킹했을지도.」 포섭 상대가 이중첩자의 가능성도 있는 만큼 요즘엔 사람이 아닌 첨단장비의 힘을 빌린다. 공공장소 CCTV 해킹이 불법행위라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필요하면 인공위성도 띄우는 마당에. 그만한 재력과 권력이 있는데 수단을 마다하는 게 이상하다.
「그래봤자 소 가는 아픈 손가락이잖아.」 열 손가락 중에 깨물면 가장 많이 아파하는 손가락이 소 가라는 우스개 얘기가 있다. 3대를 거슬러 올라간 그 시절부터 피가 옅어지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불륜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던 젊은 후계자가 자동차 전복 사고로 사망한 게 기폭제였다. 상상력이 오지게 훌륭한 인간들의 머릿속에서 명망 높은 집안의 후계자 죽음은 어느새 비극적인 사고가 아니라 자살로 둔갑했고, 가쉽지 기자들은 그가 왜 자살했는지를 두고 쉬지 않고 똥을 배설해냈다. 그 많고 많은 똥 중의 똥, 숙변 중의 숙변으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게 혈통의 약화다. 대한민국의 내놔라 하는 열 손가락 가문에 들기엔 저들의 피가 옅어졌고, 이에 견딜 수 없는 압력에 시달리던 소 가의 후계자가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며 방황을 하다 끝내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나야 간통을 저지르던 여배우가 헤어짐의 대가로 알토란같은 골프장 소유권을 요구했다가 단칼에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자동차가 급발진 하도록 조작을 했다는 쪽이지만, 알게 뭐람. 어느 쪽이든 구린내가 진동하는 건 마찬가지다.
여하튼 가볍게 콜록 기침했다. 『누구에게 들었어? 내가 소 유 님을 만났다고.』 『들었다기 보다는 봤다고 하는 편이 맞겠지.』 민이 천장을 향해 짐짓 손가락질 했다. 그러니까 가게 안에 설치된 CCTV 화면을 봤다는 얘기다. 범죄라는 걸 알면서도 진짜 당당하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봤는데.』 『음...... 어쩌다보니?』 인마 너 같은 인간들이 너무 많아 대한민국이 이 모양 이 꼴이다.
뺨에 바람을 집어넣고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자니 민이 다시 질문을 던져왔다. 『진짜로 돈 문제? 앞으로 다신 귀찮게 구는 일 없을 테니 돈을 주세요, 이런 거야?』 『알겠어요, 댁의 아드님과 헤어져 드릴게요, 거기서 내가 그랬을 거 같냐?』 『나야 모르지.』 이쯤해서 나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진짜 뭘까, 얘는. 표정으로 보면 단순 재미로 이러는 것도 아니다. 아침 드라마에 푹 빠져서 다음 줄거리가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시청자라면 이보다는 조금 더 흥분한 모습이어야 한다. 민은 반대로 법률 조언이 필요해 변호사 사무실을 노크한 사람 같았다. 즉,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내 생각엔 돈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아.』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 『하루 5천만 원 호텔 투숙비에 벌벌 떠는 네 주제에 100억을 불렀을 거 같지가 않아. 기껏해야 10억 정도겠지. 근데 10억이면 솔직히 말해 푼돈이나 마찬가지거든. 그 걸론 강남 아파트 한 채 못 사잖아. 그런데 그 푼돈 요구에 듣고 있던 소 유 님 반응이... 뭐랄까.』 극적인 효과를 내고자 함인지 한 박자 쉬고 말했다. 『30cm 칼날의 흉기로 배가 쑤셔진 거 같더군.』
나는 반사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입은 웃었다. 직업 배우 앞에서 나 같은 민간인이 가짜 웃음을 지어봤자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격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우와... 진짜 오랜만에 보네, 데드맨 스마일.』 말로는 감탄하는 것 같지만 행동은 정 반대다. 민은 검지와 엄지를 잘게 구부려 좁쌀을 묘사했다. 콩도 아니고 좁쌀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훨씬 작은 겨자씨던가. 『그런데 무지 형편없어. 동공이 그렇게 커지는데 누가 속아.』 민은 티끌을 묘사하는 손가락을 눈앞으로 훅 들이밀었다. 『딱 요~ 만큼.』 그리고 후, 입김을 불어 있지도 않은 먼지를 날려버렸다. 『이 정도라고.』
나는 속으로 구구단을 외우기 시작했다. 『소 유 님을 만나서 뭐라고 했어? 나기.』 나에게는 교감신경을 조정하는 능력 같은 건 없다. 얇은 가면처럼 덧씌운 얼굴이 깨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웃었다. 그리고 삼 곱하기 팔은 이십 사. 『네가 왜 그걸 궁금해 하는지 모르겠어, 민.』 『응, 계속해.』 『사생활이라고. 사. 생. 활.』 『그래서 소 유 님에게 뭐라고 했다고?』 『아... 진짜! 시덥지않은 얘기만 했어. 날씨라던가, 더위라던가... 자외선 차단제라던가.』 『과연.』 『진학에 대해서도 얘기했어. 그럴 필요를 못 느껴 대학교에는 가지 않겠노라 말씀드렸지. 공부를 잘 했던 것도 아니고,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아직 없고 하니까.』 『그리고?』 『에어컨 냉방병과 레지오넬라균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또.』 『허리 아픈 사람의 수면 자세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로운 비타민 세 종류...』 『시시하군.』
말꼬리를 자르며 민이 혀로 쯧 소리를 냈다. 『나기. 내 판단에 의하면 너는 머지않아 곧 죽을 목숨이야. 네가 무슨 엉뚱한 사고를 쳐서 명줄이 짧아지게 되었는지, 솔직히 나는 그리 알고 싶지 않아. 하지만 물비린내 진동하는 우중충 네 친구들은 나와는 사정이 달라서 그 이유를 반드시 알고 싶어 할 거다. 어째서냐고, 무엇 때문이냐고.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하게 될 거야, 나기. 허리 아픈 사람의 수면 자세와,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해로운 비타민 세 종류 탓이라고.』 『...』 『그럼 그 두 사람 반응은 어떨까. 상상을 해봐, 나기.』 민의 목소리가 사막의 그것처럼 건조해졌다. 『그 중에서도 슬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짐작을 해보라고. 왜냐하면, 왜냐하면 슬비느ㄴ.』 여기까지 제법 심각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목소리가 끊겼다.
Posted by 미야
2019/01/15 13:33
2019/01/15 13:33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3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 Posted at 2019/01/12 10:52
- Filed under 끄적끄적
민을 처음 보았던 건 중등교육과정 시절이다. 「모두 주목. 오늘부터 새 친구가 생겼어요.」 당시 나는 학기 중 전학을 온 소년의 이름이 창 연민인 줄 알았고, 귀화한 중국인일 거라고 자기 멋대로 착각했고, 이름 그대로 소년에게서 연민을 느꼈고, 동시에 견딜 수 없는 시큼한 냄새에 코를 쥐어뜯어야 했다. 열한 살 소년은 끔찍스러울 정도의 토쟁이였다.
「미친 거야. 소화기관이 어떻게 된 게 분명해. 아님 십이지장 대신 달팽이이관이 달렸던가.」 시리도록 찬 물에 걸레를 빨면서 이를 갈아대던 기억이 선명하다. 교실이라는 작은 정글 안에서 먹이사슬 최하층 밑바닥을 기어 다니던 나는 또 다른 최하층인 전입생이 소화가 되다 만 음식을 게워낼 적마다 청소를 도맡아 해야 했다. 나는 급우들이 편하게 누르면 되는 부저와 다를 바 없었다. 속 뒤집어지는 웩 – 소리가 나면 교실의 모든 눈동자가 곧장 나에게로 향했다. 모르는 척하고 노트 필기를 하고 있자면 독촉의 의미로 고무지우개가 날아 들어와 머리를 건드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모르는 척하고 있으면? 그냥 이 말만 하겠다. 인간은 때로 한계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잔인해질 수 있다. 이후 나는 자연스럽게 빗자루와 걸레를 가지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수업 중임에도 교실 밖으로 나가도 그 누구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았다.
「올라온다 싶으면 빨리 화장실로 가란 말이야.」 내가 녀석더러 귀화한 중국인일 거라 착각한 건 아무리 애원하고, 윽박지르고, 구슬려 봐도 일절 대꾸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꾸만 안한 게 아니라 고무찰흙으로 빚은 인형인양 표정 변화조차 없었던 걸 봐선 아예 한국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닌 샹 쩐머 쭤 터우파? (좀 더 싼 것은 없습니까?)」 간단한 생활 중국어 몇 마디에도 반응이 없던 걸로 봐선 그조차 아닐 수도 있었지만.
아무튼 녀석은 학교에서 딱 세 가지밖에 안 했다. 밤새 게임 삼매경에 빠졌던 사람처럼 흐느적거리기. 만사 귀찮다며 눈을 감고 있기. 토하기. 책걸상에 들러붙은 토사물 찌꺼기를 하도 문질러 치우다보니 없던 알통이 새로 생길 지경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근육이 붙어 두꺼워진 팔뚝을 이유로 전학생을 점점 꺼려하게 되었고. 불안정한 사춘기 소녀의 짜증은 소년의 이름이 창연 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정점을 찍고 폭발했다.
「뭐? 한국말을 모르는 귀화 중국인?」 마철은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 나중엔 너무 웃어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배가 아프다며 히꺽히꺽 소리를 냈다. 「녀석은 창연이야. 알파 창연 씨라고. 어떻게 그걸 몰랐을 수가 있어. 푸흐흙, 진짜 걸작이야. 중국인 창 씨... 푸흐륵! 아이고, 배야!」
0.05%의 알파들은 이차성징과 함께 감각과잉 증상을 겪는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가 대포의 굉음으로 들리고 1킬로미터 밖의 참새가 재크와 콩나무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거인이 된다. 뭐, 그 정도야 눈 감고 귀 막아 참는다 해도 약간의 상처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이 몰아닥친다는 게 가장 문제다. 작은 생채기만 생겼을 뿐인데 산채로 화형을 당하는 사람처럼 울부짖는다. 광란을 일으킨 통각 탓에 앉지도 못하고 눕지도 못한다. 가뜩이나 성장기라서 몸의 변화가 많을 시기인데 그 전부가 고통이다. 다행히 치료제가 개발되어 있으나... 알만카로젝은 일반 멀미약의 50배 강화판이다.
「미친놈들. 감각 과잉인 알파 새끼를 약에 절여서 일반인 학교에 던져놓다니.」 나는 즉각 소년으로부터 연민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내 분신과도 다를 바 없게 된 걸레도 바닥을 향해 집어 던졌다. 「안 해! 이딴 짓 앞으로 절대 안 한다고!」 이성이 끈이 뚝 끊겨서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화장실에서 똥 싸고, 방귀뀌는 소리까지 쟤 귀엔 전부 다 들릴 거 아냐!!」 그 많고 많은 것들 중에서 내가 왜 그걸 가장 끔찍하게 여겼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또 딴 생각하고 있군.』 대리석 조각처럼 잘 생긴 얼굴이 코앞으로 불쑥 들어왔다. 『깜짝이야!』 거 깜빡이 좀 켜고 다닙시다. 백만 관객을 몰고 다니는 배우의 맨 얼굴은 심장에 매우 나쁩니다. 『사람을 앞에 두고 저 혼자 꽃밭으로 가버리는 거, 무진장 실례 아냐?』 『아닌데요. 엄청 집중! 집중 했거든요? 진짭니다.』 재빨리 영업 모드로 들어가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 오늘의 추천 제품은 화이트 소보로 밀크 크림빵입니다, 고객님.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에게 말씀하세요! 두 달 전부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제과점에서 하루에도 수백 번씩 외치던 멘트가 자동으로 혀에 감겼다. 이런. 눈이 부릅떠졌다. 천만다행으로 자동재생 1초 전에 혀를 꽉 깨물 수 있었다. 『아부버머어!』 아픈 혀를 내밀고 있자니 민의 표정이 가관이다. 해석하자면 이런 병신을 다 봤나. 점프에 실패하고 의자에서 굴러 떨어진 고양이가 된 기분이다. 잇자국이 선명하게 난 혀를 재빨리 갈무리하고 아무렇지도 않음을 증명하고자 테이블 위에 놓인 냉수를 꿀꺽꿀꺽 들이켰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지면 본인만 손해라고 생각한 듯하다. 가느다란 은색 실반지가 끼워진 검지로 의자 팔걸이 부분을 톡톡 치다가 이내 자세를 바꿨다. 『아무튼 생일 축하한다.』 『땡. 대상이 틀렸네요. 난 아냐. 오늘은 마철의 생일.』 『그게 상관있나?』 민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렇게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내 앞에서 평등한 버러지들이야. 벌레1, 벌레2, 벌레3. 그러니 누구의 생일이든 내 알 바 아니고. 인심 후 하게 쳐서 축하는 해드릴게.
나는 삐쳐서 외쳤다. 『생일 선물 정도는 내 놓고 축하한다고 말해.』 녀석도 지지 않고 외쳤다. 『누구처럼 슬리퍼 찍찍 끌고 빈손으로 잔칫집에 오는 싸가지는 없거든? 프린스턴 로얄 호텔 VIP 이그제큐티브 룸을 우중충 패밀리 이름으로 예약해뒀어. 하루 숙박료 5천만 원 짜리야.』 『하루에 5천만 원?! 인기 배우라서 돈이 썩어 나냐?! 차라리 과자 사먹게 돈으로 줘!』 『네 생일도 아니라며 뭘 이래라 저래라 야.』 『아까워서 그러지!』 뺨에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불만을 표현했다. 영화가 대박을 칠 때마다 돈을 갈퀴로 벌어들이는 녀석에게 5천만 원은 있으나마나 한 돈이겠지만 우리 같은 바닥 인생에겐 작지 않은 돈이다. 사성급 호텔 하루 이용료로 쓰기엔 너무 아깝다. 차라리 저금을 해뒀다가 다음 학기 마철의 대학 등록금으로 쓰는 게 훨씬 이롭다.
속이 쓰렸다. 『아이고, 억울해. 누구는 돈이 없어 파마도 못 하고 한 여름에 선풍기도 마음껏 못 트는데...』 『돈이 없어?』 『그게 팔자라서 그렇다. 금수저인 너는 평생 이해 못 하겠지만 센터에서 독립해서 나오면 대부분 거지가 되어버려. 죽어라 저금한 돈도 방 하나 구하면 다 없어져 버리니까. 심하면 끼니 걱정도 해야 해. 깍두기나 단무지 없이 라면만 먹어야 한다고.』 『흠... 그래서 돈을 얻어내려고 소 유님을 만났던 건가.』 『뭐?』
순간 숨 쉬는 걸 잊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19/01/12 10:52
2019/01/12 10:52
- Response
-
No Trackback
,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72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Recent Comments
Site Stats
- Total hits:
- 1024703
- Today:
- 443
- Yesterday:
- 298
Calendar
«
2025/01
»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