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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시체는 물론이고 신발 하나 나오지 않았으니 경찰관들로서도 더 이상 할 일이 없었을게다. 조 와이저의 차는 일찌감치 견인된 상태였고, 술주정뱅이가 둘씩이나 땅으로 꺼진 장소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정리를 마쳤다. 주의깊게 좌우를 살피던 샘이 이쯤이라고 미리 언질을 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나칠 뻔했다.

차에서 내린 딘은 무슨 의식을 치루듯 주머니에서 꺼낸 코인 하나를 던졌다가 손등으로 그걸 받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자유의 아줌마가 - 여신이 위를 향해 있었다.
우리에게 행운을. 아무 것도 아닌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숨을 가다듬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한 번 쳐다보고는 도로를 따라 100m 가량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간선 도로의 평범한 일상은 끝도 없이 길게 펼쳐졌다. 담배 꽁초와 같은 약간의 쓰레기, 그리고 흙먼지가 전부다.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을 따라 한동안 빗물 구경을 못해 누렇게 타들어간 잡풀들이 제풀에 지쳐 벌러덩 누웠다. 간혹 녹색을 띄고 있는 부분도 보였지만 상태는 그리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죽어가는 풀에서 자동차 배기 가스 냄새가 심하게 났다. 아무래도 부근으로 비 소식이 끊긴게 제법 지난 모양이었다. 씻겨 내려간게 없을 터이니 증거를 찾는 사람 입장에선 반가운 소식이었다. 딘은 동생에게 계속 걷자는 신호를 했다.

설마 이대로 발품을 팔아 주 경계선을 벗어나려는 건 아니겠지. 임팔라에 기댄 채 손가락에 담배를 끼고 돌리던 리는 그들이 생각 외로 꽤 먼 곳까지 걸어가자 지친 듯한 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들~! 어디까지 가려고 그래. 여기선 히치하이크가 위법이라우~』
간혹가다 딘은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뭔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곤 했는데 그때마다 강아지처럼 따라붙은 샘이 쭈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흙을 만졌다. 의견을 교환하며 주의깊게 돌을 고르는 모습이 어쩐지 바닷가에서 조개 껍질을 줍는 아이를 연상시켰다. 두 사람 다 표정이 그리 즐거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한낮의 소풍을 즐기는 정겨운 가족이었다.
리의 부르는 목소리에 반응하여 샘이 뒤를 돌아다 보았다. 스프링 장치가 달린 장난감 목각 인형처럼 갸웃거리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어쩐지 손을 흔들어 주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리는 본능에 따라 재빨리 팔을 들었다. 허나 괜한 짓이었다. 그 즉시 샘의 표정이 잇몸을 드러낸 살쾡이가 되었다. 행실 고약한 의붓 엄마따윈 필요 없다며 얼른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자기 형에게 바짝 다가갔다.
『그라요. 나는 마음씨 고약한 신데렐라 계모예요. 맘대로 미워하라지.』
어색하게 팔을 내리면서 리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덤불 속으로 몇 발자국 들어갔다 나온 딘이 겉옷 주머니 속으로 깊숙이 손을 찔러넣었다.
『어디를 봐도 급정거를 한 흔적이 안 보여. 공갈 자해단처럼 지나가는 차량 앞으로 무작정 뛰어들지는 않았나봐.』
계속해 보라는 시늉을 하며 리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딘은 그녀가 의외로 담배를 자주 피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코틴의 악취가 전혀 나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달콤한 화장수를 아무리 많이 뿌려도 체취에 섞인 담배 냄새는 그렇게 쉽게 감추어지지 않는 법이다. 그녀의 살 냄새는 맑았다.
『왜 빤히 쳐다보는...』
『미안, 리. 별 것 아니야.』
딘은 서둘러 대꾸하고 다시금 정신을 집중했다.
『흡혈귀 서너마리가 합동해서 길을 가로막은 것 같지도 않아. 시골에선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이 도시보다 되려 더 강하지. 술에 엉망으로 취하긴 했어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몰랐을 리 없으니까 차에서 결코 내리려 하지 않았을 거야. 오히려 눈치껏 후진해서 뒤로 내빼려 했을 걸. 그랬다면 어느 정도의 실랑이가 있었을 것이고, 세워진 차는 문짝이 박살났어야 옳아. 하지만 발견된 차량의 외견은 깨끗했지.』
『좋아, 탐정 나으리. 지금까지 추리한 내용을 토대로 범인이 누구인지만 지적해줘.』
『사내 자식 둘이 자진해서 차에서 뛰어내릴 일이 뭐가 있겠어. 뻔하잖아. 여자야.』
미인계... 꽤나 고전적인 방법이다. 동시에 실패할 확률이 적은 작전이기도 하다.
리는 동의를 표시하며 연기를 깊게 빨았다.

딘이 반대편 차선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본네트 뚜껑을 올리고 선 가공의 차량을 상상해보는 것 같았다. 설명하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자동차가 움직이지 않는다, 내지는 기름이 떨어진 것 같다 하면서 수척해 보이는 젊은 여자가 도와달라고 하는 거야. 조 와이저는 별 생각 않고 차를 세웠고 여자에게 접근했겠지. 여긴 외지고 어두운 곳이니까 곤경에 처한 아가씨를 순수하게 도우려는 선의만이 아니라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갔을 수도 있어. 십중팔구 전화가 있는 주유소까지 태워다주겠다고 하면서 슬그머니 엉덩이를 문질렀을 걸.』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 여자의 얼굴에서 겁에 질린 표정이 사라지고 대신 교활한 사냥꾼의 본성이 드러난다. 아차 하는 사이에 분위기 역전이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공격 자세를 취하는 뱀파이어 앞에선 키와 몸무게의 이득은 그다지 도움이 되어주지 않는다. 술에 취해 반사신경이 느려졌다는 핸디캡도 있겠다, 혼비백산한 다니엘 크로포드와 조 와이저는 그리 멀리 달아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제압당하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다. 홈런 한 방 치려다 졸지에 저승 사자와 통성명 절차에 들어간다.

리가 담배를 든 손으로 둥글게 원을 그렸다.
『오케이. 만약 네 말대로라면 공격에 가담한 그룹의 인원수는 그리 많지 않았을 거야. 여긴 사방이 확 트여서 아무리 밤이라고 해도 몸을 낮추고 매복하기엔 그리 썩 좋은 장소는 아니거든. 도로 가장자리로 배수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수풀로 뒤덮힌 가파른 비탈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미끼 역할의 여자 말고 기껏해야 두 명 정도 더 있었을 거야. 그보다 숫자가 많으면 바로 의심을 샀을테니 상대를 속이기 어려웠을 거다. 뭐, 그래봤자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이 모든 건 정황에 불과한 것이고... 이빨은 찾아봤어?』
바야흐르 숙제 검사의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필통에서 빨간 색연필을 꺼내들었고, 딘은 이거겠거니 하고 모은 잡동사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보여주었다. 두 개는 짙은 갈색이었고, 나머지 셋은 밝은 황색이었다. 모양은 모두 뾰족하고 단단했다. 딘의 얼굴로 얼핏 불안의 빛이 스쳤다.

그녀는 립스틱이 가장자리에 묻은 담배를 구석으로 던지며 짧게 말했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모두가 꽝이라는 소식에 딘은 아무 말 없이 손바닥을 털었다.
그의 아버지가 순찰차가 우굴거리는 장소를 더듬어 뽀얗게 빛나는 이빨을 찾아냈던게 생각났다. 날고 기어도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라는 건 바로 이런 걸 가리키는 것일지도. 딘은 손바닥으로 콧잔등 아래를 문지르며 애써 실망감을 감췄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걸까. 집중력? 판단력? 그것도 아니라면 압도적인 경험의 차이?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뱀파이어 이빨 하나 제대로 찾지 못하는데 과연 샘을 안전하게 보호해줄 수 있을까. 아버지도 돌아가셨으니 샘을 지키는 건 온전히 그의 일이다. 지금과 같아선 안 된다. 보다 더 잘 해야 한다. 정말 잘 해야 한다.

리가 은근슬쩍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그 정도로 실망할 건 없다. 제대로 하고 있어, 넌.』
짐짓 밀어내며 강하게 반박했다.
『멋대로 짐작하지 마. 내가 언제 실망했다고 그래.』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Good. 좋은 자세다.』

뾰족한 부츠 뒷굽으로 땅바닥을 푹푹 헤집으며 밝게 말했다.
『어쨌거나 이게 다 흡혈귀들의 소행이라고 치자. 녀석들이 이곳에서 한 탕 해치우고 다른 주로 떠났다면 그건 곧 나의 일이지. 반대로 놈들이 버려진 농장 같은 곳으로 숨어들어가 한동안 은둔을 하려 한다면 그건 너희들과 어떻게든 관련되었을 일이 되어버려. 자, 어떠냐, 샘? 넌 어느 편이 마음에 들지?』
샘은 아빠가 좋으냐, 아님 엄마가 좋으냐는 질문에 단호히《럭키 참스》라고 대답할 아이다. 그리고 엘모와 빅 버드 (* 세서미 스트리트의 캐릭터) 중에 뭐가 더 마음에 드냐는 질문엔《형》이라고 답할 거다. 딘은 동생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 대답이 무슨 내용일지 짐작이 갔다. 아니나 다를까, 샘은 배반하지 않았다.
『둘 다 싫어요. 전 이게 정신 나간 술주정뱅이가 도랑에서 굴러 다리를 분질렀다는 줄거리였음 좋겠어요.』
리는 흙을 이리저리 걷어차는 동작을 멈추고 쯧쯧 혀를 찼다.
고의는 아니겠으나 얼마쯤 비꼬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그거 미안하게 됐군, 샘. 네 희망은 아무래도 물 건너간 것 같거든.』
허리를 짐짓 구부리고 진한 홍차 빛깔의 작은 조각 하나를 주워들었다. 햇살에 이리저리 돌려보자 뱀의 독니처럼 반투명하게 자르르 윤기가 돌았다. 가운데로 구멍을 뚫어 줄에 묶으면 그대로 장신구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물론 그 전에 기분이 나쁘다는게 문제겠지만 말이다.
『가엾은 술주정뱅이들... 어딘가에서 피를 좍좍 빨리고 있겠군.』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리는 종업원에게 팁 건내어주듯 발견한 이빨을 샘의 셔츠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피해자를 살려두는 건 아무리 길어봤자 사나흘이다. 피에 대한 갈증과 굶주림이 심하면 짧게는 하루만에 시체로 만들기도 한다. 리는 가만히 날짜를 헤아렸고, 고개를 조용히 가로저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그 모습에 샘은 안달이 났다.
『잠깐만요. 그러지 마요. 우리가 서두르면 구할 수 있을 지도 몰라요.』
『샘? 이걸 아셔야지. 우리는 왕 모기를 때려 잡는게 아니야.』
『왕 모기가 아니니까 그러는 거예요. 아직 그 두 명은 살아있을지도 모르잖아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라고요. 그러니 어서 뱀파이어 소굴에서 무사히 구해낼 궁리를 해야죠!』
『이봐. 넌 그 두 사람의 목숨이 네 목숨보다 소중하든? 꼬맹아,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것 하나를 반드시 지켜야 해. 그게 뭔지 알아? 그건 내가 위험에 처하지 않아야 한다는 거야. 남에게 밥을 먹이기 위해 내가 굶주려서야 되겠니.』

순간적으로 얼굴을 어찌나 찡그렸던지 샘의 얼굴이 주름 투성이로 변했다.
『그게 어떻다는 거죠. 우리들이 하는 일은 푹신거리는 방석에 앉아 달콤한 과자를 먹는 종류의 일이 아니예요. 제기랄! 우린 헌터라고요!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늘 그렇게 해왔어요.』
『오호, 그러셔.』
대꾸하는 리의 목소리가 협박조로 낮아졌다. 뱀이 머리를 쳐드는 속도로 손가락을 세웠다. 너무 빨라서 움직임이 잘 보이지도 않았다. 신장이 거의 2m에 달하는 샘을 노려보며 지시하는 태도를 갖췄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렇게 하시겠다? 예전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안돼. 잊지 마. 뱀파이어에게 보복 위협을 받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너희들이야. 너희 두 사람은 지금 당장 차를 몰고 주 경계선을 넘는게 좋겠다. 나는 하루나 이틀 정도 이곳에 남아 다른 뱀퍼에게 이곳의 일을 인계하기 전까지 상황을 살피마. 자! 빨리 움직여!』

행동의 차이는 두드러졌다. 딘은 명령에 반응하여 곧장 임팔라를 향해 돌아섰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샘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제 자리를 지켰다. 이마 정 중앙엔 푸른 힘줄이 사정없이 솟아 있는 상태였다.
딘은 조금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 동생을 향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샘.』
『어째서야? 왜 형은 저 여자가 하자는대로 하는 거야?』
『그녀가 전문가니까.』
『형! 우리도 전문가야!』
『그만 둬. 확률적으로 그 두 사람은 이미 시체가 되었을 거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야. 그까짓 숫자로 그들의 생사 여부를 성급하게 결론짓지 말아. 게다가... 이런 말 하긴 진짜 싫지만 형은 산수도 잘 못 하잖아.』
산수도 못 한다는 말에 딘은 울컥했다.
『왜 이래. 5 더하기 8의 답이 13이라는 걸 내가 모를 걸 같냐?! 이러지 마. 우리가 이곳을 떠나는게 좋겠다는 리의 말은 대단히 합리적이야.』
『흥. 그럼 내 행동은 비합리적이고?』
『새미! 그렇게 똥 밟은 소처럼 뒷걸음질 치지 말고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네가 위험에 빠진 사람 전부를 구원하고 싶어 안달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난 이건 아니라고 봐. 일에는 우선 순위라는게 있어. 그러니까 내 말은...』
다 듣지 않고 샘은 악을 썼다.
『형에게 실망이야!』

딘은 심한 불쾌감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나에게 실망이라고? 지금 나에게 실망했다고 그랬어?
판단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힘을 완전히 잃어버리기 전에 딘은 동생을 다그쳐 보기로 했다.
『샘! 닥치고 차에 타. 빨리!』
여기서의 문제.
샘은 그 대단한 존 윈체스터마저 어쩌지 못한 고집불통 아들이라는 거였다.
역시나. 동생은 도리질했다.

Posted by 미야

2007/06/28 01:29 2007/06/28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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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즈 2007/07/04 11:09 # M/D Reply Permalink

    ㅋㅋㅋ강아지처럼 따라붙은 샘이 쭈그리고 앉아 맨손으로 흙을 만졌다. 아...상상만 해도 귀엽습니다...형에게 바짝 붙어서 강아지처럼 따라 다니는 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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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생일 기념으로 어제 안경을 새로 맞췄습니다. 세피아색 안경테를 하고 싶었는데 요즘 유행하는 색이 와인색이라고 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푸른빛이 도는 회색으로 타협봤어요. ※


그로부터 불편한 침묵이 약 5분간 계속되었다.
샘은 귀를 긁었고, 딘은 책상을 더듬거리며 없어진 볼펜 뚜껑을 찾는 시늉을 했다. 리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각자 딴 짓을 하는 척하며 상대의 분위기를 탐색했다. 그리고 자진하여 뭔가를 말해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리가 고개를 들었고,「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의 의미로 마스카라를 짙게 바른 속눈썹을 깜빡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변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 세 명은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 직업적 헌터였다. 수십 겹의 껍질을 벗겨봤자 어제와 똑같은 양파 껍질이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봤자 소득 하나 없을 거라는 걸 깨닫자 리는 탐색하는 시선을 곧 거두어 들였다. 포기는 산뜻했다. 대신 극단적 동작으로 - 마치 2만 볼트의 전기 충격기라도 꺼내는 식이었다 - 핸드폰 폴더를 열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렸고, 그 짧은 사이에 준비 자세를 갖추며 단숨에 숨을 들이마셨다. 시작! 키프리아누스는 델포이 신전에서 배운 그대로 뱀을 역사했다. 깐따삐아 까죠봉 어쩌고.《여보세요?》이후로 리가 신나게 떠들어대는 말들은 신들린 제사장들이 발로 땅을 박차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부르는 노래 가사와 비슷했다.

윈체스터 형제들 입장에선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문화인의 에티켓은 단돈 25센트에 팔아치운게 분명하다. 조곤대며 설명하던 목소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차 악을 쓰는 것처럼 커졌다. 발음 또한 곱절로 빨라졌다. 안단테에서 메조 포르테의 박자로, 부드러운 알토 하모니카에서 마침내 트럼펫으로 악기 품목이 변경되었을 즈음의 그녀는 강 건너편으로 옮겨간 사공에게 잃어버린 봇짐 내놓으라 호통을 치는 마쿰 도깨비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화성인과 텔레파시 교신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캘리포니아 아에테리우스회 중간 간부의 발악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저 여잔.』
『글세다, 샘. 아마 아프리카에 사는 전 남편에게 이번 달 이혼수당을 독촉하는 모양이다.』
귀는 열려져 있는지라 리가 경고조로 손가락 하나를 세워보였다.
나는 아무 말 안 했어요.
샘은 퉁퉁 불어터진 표정으로 펼쳐놓은 신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넋 놓고 있지 말고 빨리 소지품이나 챙겨, 형.』
『왜?』
『휴우... 장담하는데 앞으로 1분 뒤에 우린 여기서 쫓겨날 거야.』

침묵의 미덕을 모르는 자는 지식의 방주에서 메뚜기처럼 뛰어내릴지어다.
열람실을 잔잔한 호숫가처럼 완벽하게 통제하기 원하는 도서관 직원이 이를 수수방관할 리가 없었다. 테가 검고 네모난 안경을 쓴 관리자가 단단히 화가 난 얼굴로 달려나와 세 사람을 노려봤다. 거만하면서도 음침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38인치 허리로 - 어쩌면 복부일지도 모르는 장소로 손을 얹었다.
리는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그녀는 수화기 저편의 사람과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고, 손가락으로 출구를 가리킨 남자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따라서 소란을 피워 미안하다 사과하는 일은 온전히 윈체스터 형제들의 몫이 되었다.
『억울해요. 난 아니예요. 내 핸드폰은 진동 모드로 되어 있단 말예요!』
『시끄럽소! 공공장소에선 휴대폰 사용 금지라는 것도 모르오?! 닥치고 세 사람 다 퇴실하시오.』
직원은 샘의 정중한 사과를 온전히 받아들이며 안녕히 가시라 인사했다.

그렇게 건물 밖으로 쫓겨난 뒤에도 뱃속이 뒤틀리는 감각은 계속되었다. 용케 살아서 위장에까지 도달한 오징어가 빨판이 달린 여덟 개의 다리를 휘둘러대며 난동을 부려댔다.
딘이 자동차 키를 들고 임팔라의 잠금 장치를 풀자마자 리는 이때다 하고 샘을 옆으로 밀쳤다.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조수석 쪽으로 냉큼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문을 잠궜다.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한 샘은 격노하여 소리쳤다.
『이봐요!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리는 계속해서 전화통에 대고 억양이 괴상한 외국어로 떠들어댔다.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된 채였다. 자동차의 손잡이를 양손으로 쥐어뜯으며 끙끙대는 샘은 관심 밖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텅 빈 일회용 컵을 내밀며 신호 대기 중인 차량을 향해 구걸하는 사람 취급이다. 샘이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두드려도 못 본 척했다.

『형! 저 여자에게 뭐라고 해줘!』
그렇게 요구해봤자... 딘은 난감했다. 내리라고 해서 내릴 여자가 아니다. 당연하다며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한마디로 막무가내다. 잠시 통화를 중단한 채 의아해하는 표정을 짓는 걸 봐라.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출발 안 해?』
『아직 동생이 차에 타지 않았어.』
『굼벵이처럼 꾸물거리긴. 서두르라고 그래.』
첩첩산중이다.

힘껏 붙들린 조수석 손잡이가 위태로운 달각달각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딘은 동생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자기 자리를 빼앗은 리를 강제로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이라는 것도 알았다.
샘이 유리창 너머로 호소하는 눈빛을 발사했다. 차마 마주 쳐다볼 용기가 안 난다. 묵직한 돌에 등짝이 짓눌리기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냉장고에서 막 꺼낸 달걀에서 살아있는 병아리를 튀어나오게 만들 수 없다. 차에 치어 죽은 강아지를 되살려낼 수도 없다. 역겨운 콩 스프를 달콤한 럭키 참스의 맛으로 바꿀 수도 없다. 헌팅밖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를 구슬러 침대 머리맡에서 매일 밤 동화책을 읽어주도록 만들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샘은 형이 마법을 부려주길 원했고, 눈부신 기적이 일어날 걸 믿으며 조용히 숨을 죽이곤 했다. - 나는 멀린의 후계자가 아니란 말이다. 지팡이로 반석을 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할 수는 없다고 - 내부에서 바퀴벌레를 닮은 혐오스러운 뭔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튕겨오르려 했다. 딘은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었다. 아더는 반석에서 보검을 뽑아냈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는 것 정도밖에 없었다.

『샘... 제발.』
『딘은 알잖아. 그치? 알잖아.』
『그래. 나는 알아.』
그렇게 말하며 허벅지를 탁탁 소리내어 두드렸다.
『그치만 난 지금 시동을 걸었고, 너는 여기서 이런 식으로 나를 추궁해선 안돼. 알겠니?』
딘은 다시 한 번 더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어떠한 애원도, 부탁도 담지 않고서 말이다.
『샘.』
급기야 뒷자석 문이 벌컥 열렸고, 날카로운 가시를 잔뜩 세운 샘이 그 커다란 몸을 구겨 넣었다.

절묘한 타이밍으로 리가 폴더를 닫고 길었던 통화를 끝냈다.
솔직히 말해 일부러 그랬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딘은 냉담하게 쏘아붙였다.
『그래, 우간다에 사는 남편이 이번 달 양육비를 보내주겠대?』
그런 싸구려틱한 도발은 어금니로 두 번 씹어 목구멍 속으로 삼키면 그만이었다. 편안한 운동화를 신고 줄넘기를 하는 것처럼 쉬웠다. 리는 땀도 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지금 조 와이저와 다니엘 크로포드 행방불명 사건을 살피러 갈 거지?』
딘은 능숙하게 거짓말했다.
『아니.』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며 크게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리는 표지판을 살피며 다음 번 갈림길에서 좌회전을 하라고 일러주었다.
『풀밭에 떨어진 뱀파이어 엄니는 초보자가 발견하긴 힘들어. 요령이 필요하거든.』
『그리로 가는 거 아니래도.』
『언뜻 봐선 끝이 뾰족하게 잘려나간 조약돌로 착각하기 쉬워. 잘게 부숴진 짐승의 배설물처럼 보일 때도 있고. 뱀파이어 엄니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황갈색으로 변색되니까.』
송곳니가 변색한다는 건 처음 듣는다. 딘은 자신도 모르게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피에 담궜다 빼내면 일시적이긴 해도 도로 하얗게 반짝거려. 며칠 지나면 다시 땀에 절은 런닝 셔츠 색깔이 되어버리지만. 아마 그래서일 거야. 속설에 뱀파이어의 잿가루에 피를 뿌리면 다시 부활한다는 말이 있잖아? 세인트 자일즈에서 매장된지 80년이 된 뱀파이어의 뼈를 파낸 적이 있는데 여기다 피가 뿌려지자 도로 하얗고 말랑말랑한 상태가 되더군. 되살아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쨌거나 그건 무척이나 인상적인 광경이었어.』
『뭐? 소금은 안 뿌리고 피를 뿌렸어?!』
『오해하진 마, 딘.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사고였어.』
그렇게 대꾸하며 리는 팔 안쪽으로 길게 그어진 흉터 자국을 가리켰다. 성형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쳐 지금은 그 모양이 희미했지만 당시엔 꽤나 심각했을 거라는 걸 짐작해볼 수 있었다. 길이가 거의 12cm에 이르는 자상이다. 출혈이 만만치 않았을 거다.
『일을 마무리하는 도중에 습격을 받았거든.』
『뱀파이어에게?』
『차라리 뱀파이어였다면 모조리 잡아 죽였지. 우습게도 귀부인의 무덤에서 귀금속을 파헤치려는 도굴꾼 일당이었다우. 젠장이었지. 그래선 목을 베고 싶어도 자를 수가 없잖아? 죽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내쪽이 죽을 뻔했다고. 아, 다음에 잊지 말고 좌회전.』
딘은 영리하게도 하고자 하는 말을 자제하고 운전에만 집중했다. 이제 그들은 시의 외곽지역에 도달했다. 깜빡거리는 신호등 불빛을 확인하고 좌회전했다. 이후로부터는 한참동안 잡목림 지대다. 마지막 문명의 흔적이랍시고 찌그러진 맥주 깡통이 타이어에 밟혔다.

『리, 당신은 우리와 굳이 같이 갈 필요가 없어요.』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앉은 샘이 무서운 기세로 으르렁댔다.
『다음 휴게소까지 데려다 줄게요. 거기에 가면 얻어탈 수 있는 차편이 분명 있을 거예요.』
리는 가소롭다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봐? 너희들이 아직 안전한지 아닌지 정확히 판명이 나지 않았어. 나는 엉터리 의사가 아니란다, 꼬맹아. 환자가《기분이 좋아졌어요. 이게 병은 다 나은 것 같아요, 선생님.》 이렇게 꼬장거렸다고 퇴원 허가서를 낼름 써줄 것 같아? 바랄 걸 바라.』
샘은 물러서지 않았다. 왕년에 존에게 대들던 실력은 어디로 가지 않았다.
『당신, 돈 때문에 그러는 거죠. 그래서 시간을 질질 끌고 있는 거예요.』
돈 귀신 취급에 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직까지는 낮고 온화한 목소리였지만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빛났다.
『유치하게 굴지 마, 샘. 내가 지금 치료비를 더 받으려고 아프지도 않은 환자를 강제로 병원에 입원시키고 있다는 거니?』
『글세요. 당신 생각은 어때요.』
『당연히 아니지! 넌 나를 삼류 취급하고 있는데 말이야...』
기분이 상했던 것 같다. 리는 손가락을 뚝뚝 소리내어 꺾었다.
『솔로몬의 잠언엔 이런 말이 있지. 미련한 자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이런 말도 있죠.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훈계받기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교만이 오면 욕도 올 것이라.』
상대가 누구던지간에 말다툼에서 지려 한 적이 없는 녀석이다. 고집불통인 녀석은 한치도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딘은 속으로「아이고 맙소사」를 외쳤다.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이여. 건너편 차선으로 두 대의 트럭이 연거푸 지나갔다.
그리고 리는 육중한 트럭의 엔진 소리 이상으로 커다랗게 씩씩거렸다.
『딘! 저 싸가지 없는 녀석을 내가 잠깐 손 봐도 괜찮을까.』
『폭력으로 설득하려고? 관둬. 해봐서 아는데 그건 그다지 효과가 없어.』
『알았어. 그럼 펠라치오를 하는 건?』
『될 거 같냐~!!』
제발 사이좋게 좀 가자. 딘은 신경질적으로 라디오 버튼을 눌렀다. 쾅쾅거리며 시끄러운 전자 기타 연주가 들려오자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 본문에 나온 잠언입니다.
*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언 18 : 6)
*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오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6 : 16)
*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은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잠언 15 : 32)
*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11 : 2)

Posted by 미야

2007/06/24 13:05 2007/06/2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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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즈 2007/06/24 14:17 # M/D Reply Permalink

    ㅋㅋ샘이 리에게 조수석을 순식간에 빼앗겨서 단단히 삐쳤군요...아니면 조수석이 아니라 형 옆자리를 빼앗겨서 그런가?? ㅋㅋ

  2. 미야 2007/06/24 17:45 # M/D Reply Permalink

    스포일러처럼 루비와 벨라가 나오면 샘이 저렇게 되는게 아닌가 걱정되는 겁니다. 나름 크립키에게 항의하는 방법...;; 은 아니고 당분간 샘은 찬밥입니다. 크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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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정확히 닷새만에 형제들 앞에 나타난 여자는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좌중을 훑어보았다.
『왜들 그래. 귀신이라도 본 표정이네.』
아닌게 아니라 귀신 맞다. 그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다. 화장이 들뜬 피부는 푸석푸석했고 눈두덩이까지 부어올라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입술이 터서 아파 보인다. 길게 기른 손톱 중 세 개가 부러졌다. 커다란 핀을 아무렇게나 꽂은 머리카락은 잔뜩 뒤엉켜 더 이상의 빗질이 불가능할 지경이다.
난리가 난 사막에서 선인장을 마주보고 국민 체조를 열심히 하고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고개를 길게 빼고 굵은 모래가 파우더처럼 뿌려진 신발을 살폈다. 그리곤 다시 턱을 쳐들었다.
설마, 코흘리개 아이들과 어울려 놀이터에서 모래탑 쌓기에 열중했던 건 아닐테고. 구릿빛 피부를 연출하기 위해 플로리다 해변가를 산책했다고 가정하기엔 굽 높은 부츠가 마음에 걸렸다. 저런 부츠를 신고 모래사장을 멋대로 걸어다녔다간 다리가 푹푹 빠져 결국엔「사람 살려!」고함을 지르게 된다.

뭐, 먼지 투성이로 변해버린 멋쟁이 신발은 그렇다 치고.
연극적인 몸짓으로 어깨를 으슥였다. 만사가 수수께끼다. 이곳은 그들이 먼젓번 만났던 동네로부터 약 180km 가량 떨어진 곳이다. 딘은 자신들이 어디로 갈 거라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애쉬나 앨런, 바비 아저씨에게조차 행선지를 말한 적이 없다. 형제들 몰래 위치 추적기를 달아놓았다고 하지 않는 이상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은 그 무엇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그녀가 앞으로 100년 뒤의 미래까지도 예언할 수 있는 용한 점쟁이라면 그 즉시 게임 오버. 하지만 그런 줄거리라면 에르큘 포와르의 조수로 헤이스팅스가 아닌 나이 120세의 중국인이 등장하는 변칙적인 탐정소설이 되어 버린다.
의문을 표현하며 손등으로 테이블을 콩콩 찍었다.

『재주도 좋군.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지?』
『그냥 알았어.』
성의 없게 대꾸한 리는 정작 중요한 건 따로 있다며 샘의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찰싹 후려갈겼다. 그것도 살짝 때린게 아니다. 눈알이 튀어나온다 싶을 정도로 세게 때렸다.
『아윽!』
쓰라린 뒷통수를 부여잡고 신음을 토했다. 검정색 크레용이 도화지에 새카맣게 발라졌다. 만화책에서나 나옴직한 통통 별이 콧잔등 주변을 팽그르르 돌았다. 그것도 토성처럼 띠를 두른 별이었다. 흉폭한 수탉이 부리로 쪼았다고 해도 이보단 덜 아팠을 거다. 리는 손맛이 대단히 매웠다.
『고백해봐. 너, 자기 전에 양치질도 대충하고 그러지!』
『뜬금없이 그게 뭔 소리예요.』
『게을러 빠진 녀석! 뱀파이어의 코를 속이려면 하루에 한 번은 크림을 발라야 한다고 말했잖아. 그동안 얼마나 발랐어. 앙?! 보아하니 하나도 안 발랐군. 네 형은 제대로 하고 있는데 넌 그게 뭐야. 변한게 전혀 없잖아. 맨손으로 바르는 시늉만 했냐?!』
『.......... 시늉만 한 건 아니예요.』
변명조로 대꾸하는 샘의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작았다.
그치만 리의 지적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지저분한 고양이 똥을 재료로 해서 만든 크림 따윈 절대로 바를 수 없다 - 아침마다 투덜대며 뚜껑을 열었다 닫은게 전부다. 벼룩의 뒷다리 정도만큼만 덜어 손등에 찍고는 그 즉시 수도꼭지를 열고 흐르는 물로 씻었다.
샘이 그렇게 한 건 일차적으로 혐오감이 컸기 때문이었지만 리에 대한 신뢰가 적었다는 점도 한 몫 거들었다. 그는 여전히 - 아직까지도 리가 달갑지 않았다.

『샘. 지금 리가 한 말이 사실이야?』
추궁하며 쳐다보는 딘의 시선을 애서 외면했다. 손가락으로 귓불을 뭉기적대며 입맛을 다셨다. 궁지에 몰렸다 싶으면 보이는, 어릴 적 버릇 그대로의 행동이었다.
『양이 좀 적었던 것뿐이예요. 음... 앞으론 잘 할게요.』
『후회하면 늦어, 꼬맹아. 젱킨스 영감처럼 되고 싶어?!』
호되게 야단치며 리가 또다시 손을 들려 했다.
이크, 또 맞겠다. 얼른 고개를 가슴팍에 파묻고 소련의 핵 공격시 주민 대피 요령을 답습했다.

『우리 못난이 그만 괴롭혀.』
『쳇! 앞으로 동생 감독을 더 잘 하셔야겠어, 딘 형씨. 용변 후에 변기 물을 잘 내리는지만 살피지 말고 다른 것도 꼼꼼이 보고 그래.』
『동생아? 지금 여사님께서 하신 말씀 잘 들었냐. 속옷은 하루에 한 번씩 갈아입는 거다.』
『형! 무슨 소릴 그렇게 해! 딘보단 내가 더 자주 갈아 입...』
휙 소리가 나게끔 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다. 리의 얼굴은 창백하고 진지했다. 그리고 딘은 그보다 열 배쯤 더 심각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내가 죄인입니다. 지금은 잠자코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할 시간이었다. 샘은 미처 소리내어 발음하지 못한 나머지 단어들을 잘 녹지 않는 사탕인양 혀로 감싸 한참을 입속에서 우물거렸다.

남의 머리통을 울퉁불퉁한 자갈밭으로 만드는 건 도중에 때려치웠다. 대신 그녀는 나무 의자를 끌어다가 옆으로 해서 앉았다. 그리고는 중요한 거라며 날짜가 제법 지난 신문을 한 부 던졌다.
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기사는 제5면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서의 문제. 가방끈이 짧아 슬프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와 보름달처럼 살집이 통통하게 오른 여자의 증명 사진 위로 인쇄된《desaparición》라는 단어를 뭐라고 발음해야 좋은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만 어림짐작 해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지금으로선 손을 무릎 위로 올려놓고 얌전히 추가 설명을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중고차를 세일즈하던 안토니오 구데라토와 그의 아내 세릴냐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기사야. 주변 사람들 말로는 4월 13일이 그들의 결혼 기념일이었대. 그래서 저녁 6시 무렵에 4살짜리와 두살바기 아들을 데리고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외식을 하러 나갔다고 하더군. 그걸 마지막으로 이들 부부는 실종되었어. 폐차 직전의 고물 자동차는 외딴 마을 국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상태로 발견되었고.』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다. 아니, 방금 전에 동생에게 설명한 사건과 완전히 똑같다.
『뭐, 치안이 극도로 나쁜 나라인만큼 여기까진 그렇다 치자. 어느 날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외계인 납치 부대가 도시의 스모그 구름 위로 상주하고 있다는 우스개 소리까지 있을 정도니까.』
여기까지 말한 리는 누가 엿듣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람들이 경악한 건 다른 문제 때문이야. 차량 트렁크에서 아이들이 허기져 잠들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거든.』
순간 윈체스터 형제들의 얼굴이 굳었다. 딘과 샘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쪽 지역은 전반적으로 기온이 높으니까 찜통 같았을 트렁크 속에서 의식을 잃는 건 잠깐이지. 미리 말해두겠는데 공식적인 아이들의 사망 원인은 탈수증이야.』
『부모들은?』
『요술처럼 휘리릭. 글세다. 어린 자녀들을 포기하고 자기들끼리 도망쳐버린 걸까?』
그녀가 여기서 의문형을 사용한 건《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뜻의 완곡한 표현이다.

그 새끼들도 피를 빠나니, 살륙당한 자 있는 곳에는 그것도 거기 있느니라...

등받이로 몸을 기대면서 리는 단호하게 주장했다.
『낙태를 죄악이라 믿고, 자녀를 신이 주신 크나큰 축복이라 믿는 사람들이야. 핏줄이라면 꿈뻑 죽지.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팔 다리를 잘라버릴 인간들이 사방에 널렸어. 부모가 일부러 아이들을 트렁크에 가둬둘 리가 없다고.』
『그렇담 제3의 인물이군.』
『악질적인 제3의 인물이지. 그리고 대단히 유능해. 운전 중인 차를 세우고, 그 속에서 부모를 끌어내고, 아이들을 트렁크에 가두면서 어떠한 흔적도 안 남겼어.』
『기관총으로 위협했나 보지.』
『농담이 아냐, 딘 윈체스터! 이들 부부는 솔직히 하층 부류였고 결혼 기념일에 겨우 햄버거를 사먹을 수준이었단 말이야. 그런 사람을 뭐하러 기관총으로 위협을 하지?』
『고물차 판매는 표면적인 직업이고 마약과 관련된 일에 손을 댔을 수도 있잖아. 자동차 실린더에 코카인을 가득 채워 콜롬비아까지 배달했다면 어쩔래. 자동차 바퀴에 공기가 아닌 하얀 가루를 주입했을 수도 있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구먼.』
『아닌게 아니라 멕시코 경찰은 이들 부부가 마약 거래상에게 처형된 거라 추정하고 있더군.』
이쯤해서 눈치 빠르게 샘이 끼어들었다.
『하지만 마약이 아닌 거지요?』
『마약 운반책이었다면 왜 그들 부부는 찢어지게 가난했던 거지? 만약 그랬다면 결혼 기념일에 최소한 통돼지 바비큐는 뜯었어야지.』
그거 말 된다.

리는 공책에서 찢어낸 것처럼 보이는 종이를 세 장 꺼냈다.
『상태가 썩 좋지 않다는 걸 감안하고 이걸 한 번 봐주겠어?』
근육질의 흑인 남자가 하나, 백인 여자가 둘. 아마추어 실력으로 그린 몽타주였다. 길거리 초상화가를 데려다 돈을 주고 설득해 한 번 그려보게 한 모양이다. 나름대로 애는 썼는데 결과물은 영 탐탁치가 않아 어딘지 모르게 만화 분위기였다. 입술에 피어싱을 세 개나 한 흑인 남자는 다음 페이지에서 스파이더맨과 정식으로 한 판 붙게 생겼다. 말풍선을 구석에 그려넣고「뉴욕이 어둠에 잠기는 건 잠깐이다.」라는 협박성 발언을 적어놓으면 딱일 것 같다.
나머지 여자 둘 역시 의상을 벗고 편안한 청바지로 갈아입은 캣 우먼이었다.

억지로 수학 공식을 푸는 기분이 들었다. 딘은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만졌다.
『상태 정말 안 좋네. 사진은 없는 거야?』
『없어.』
딱 부러지는 대답에 한숨을 내쉬며 딘은 다시 그림 감상에 몰입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게중에 한 여자가 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이는 약 30대 초반. 눈매가 날카롭고 계란형의 얼굴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카락이 깡마른 어깨를 덮었는데 미용 상태가 썩 좋지 않아 보인다. 인상이 나쁘다. 표정이 신경질적이다. 크게 휘어지게 해서 그린 가느다란 눈썹은 유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염병할.』
제대로 미술 공부를 하지 않은 화가의 투박한 표현력은 그렇다치고 이미 아는 얼굴이다. 더 보시고 할 것도 없었다. 딘은 몽타주 그림을 거의 내던지다시피 해서 리에게로 다시 돌려주었다.

『루더의 짝짓기 암캐잖아.』
『바로 맞췄어. 이 여자의 이름은 카밀이야. 안토니오 구데라토와 세릴냐 구데라토의 살해 혐의를 받고 지금 멕시코의 뱀퍼 그룹이 열성으로 추적 중이지.』
『에엑?』
그림들을 도로 주섬주섬 치우며 리가 말했다.
『죄질이 나빴어. 어른들은 먹이로 잡고 아이들은 죽게끔 내버려두다니. 애들을 그딴 식으로 다뤘다는 점에서 이미 사형 선고는 내려진 셈이야. 최소한 한 달 뒤엔 목이 잘릴 걸. 감정적으로 분노한 뱀퍼가 많아서 포위망을 뚫고 무사히 달아나긴 힘들 거야. 멕시코와 콜롬비아쪽의 뱀퍼들은 미국 뱀퍼와는 차원이 달라. 실력이 아주 좋지. 그리고 자비심이 없어. 무지막지하지.』
『잠깐만!』
『끝장났대도, 윈체스터. 이 여잔 미국으론 다신 못 돌아와.』

의외의 소식이었다. 딘은 잠깐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며 타임 아웃을 외쳤다.
『안토니오 부부가 뱀파이어에게 붙잡힌게 4월 13일 밤이지? 그렇다면 그때 카밀은 - 루더의 암캐는 멕시코에 있었다는 거잖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러고보니 너희들, 루더의 가족이 노린다는 경고는 언제 받았나.』
『올해 2월 중순. (* night-traveling 편 참조)

이래선 순서가 거꾸로 뒤집힌다. 사람을 잡아 죽인다고 해놓고 외국으로 날랐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리와 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끄응 소리를 내며 팔짱을 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릴 수 있는 합당한 결론은 둘이다.
루더의 가족이 그들 형제들을 노린다는 정보는 애초부터 틀렸다.
그게 아니라면 카밀 말고 루더의 다른 가족이 남았는지를 처음부터 다시 알아봐야 한다.

『이상하네. 젱킨스 영감이 루더의 가족을 모조리 잡아죽인 걸로 알고 있는데.』
리는 후자가 아닌 전자 쪽으로 무게를 두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니엘 젱킨스와 루더와의 악연은 제법 알려진 편이다. 그들 패밀리는 서로를 못 죽여 안달이었고, 안달한 만큼 양편에서 희생자가 속출했다.
『젱킨스가 루더의 아버지를 죽였고, 루더의 어머니가 젱킨스의 누이동생 둘을 죽였어. 젱킨스는 다시 루더의 어머니를 잡았고, 루더의 형이 사촌 다섯을 참살했지. 그 형을 10년에 걸쳐 추적하여 죽였고, 루더는 부리나케 달아났어.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복수가 잠시 소강 상태를 맞았던 건 루더가 의식적으로 친형의 복수를 포기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그의 짝짓기 상대였던 카밀이 젱킨스의 목을 가져갔고, 너희들 아버지가 루더에게 콜트를 쐈어. 아이고, 복잡해. 자, 그럼 다음 순서가 어떻게 되는 거지?』
딘은 눈을 뒤집었다.
『내가 알게 뭐야. 카밀 말고 생존한 다른 식구는 없나.』
『내가 알기론 없어. 카밀이 아니라면 도대체 너희들을 노린다는 건 누구지?』

Posted by 미야

2007/06/20 14:03 2007/06/20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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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즈 2007/06/20 21:59 # M/D Reply Permalink

    우리 못난이 그만 괴롭혀!!라니...이 대목에서 웃음이...^^;;
    미야님의 글 하나하나가 너무 재치있고 재밌습니다...기분이 좋지 않을때 읽어도 항상 웃고 간다는...^^a; 근데 정말 새미는 크림을 저리 건성건성 바르다 뱀파이어에게 잡히는거 아닌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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