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녀석은 네덜란드어밖에 못알아 먹습니다.」 리스는 간단한 (여행자용) 회화집이 도움이 될 거라며 손바닥보다 작은 책자를 내밀었다. 이 나이에 네덜란드어로 앉아, 일어서, 엎드려, 착하지, 이런 말을 배워야 한단 말이냐 - 자유의 여신상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볼 정도로 절규했지만 그 절망의 토로는 은밀한 화장실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리스는 자신의 고용주가 변비에 걸렸다고 오해했다. 어쨌든, 용무를 끝마친 뒤 손을 씻고 밖으로 나왔을 적에는 감정을 추슬러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어른이었고, 성숙한 어른이었고, 지성은 그를 다독였다. 힘내자.
하지만 베어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지 이틀째 저녁이 되자 네덜란드어가 굳이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령으로 인식하지만 않을 뿐, 영어로 말해도 잘 알아들었던 것이다. 『착하지? 베어. 목욕을 할 시간이예요.』 순간 개껌 대신으로 실크 넥타이를 씹어대던 녀석이 귀를 세우고 그를 쳐다봤다. 개에게도 표정이 있었다. 아울러 그 일그러진 표정이라는게 가관이었다.
진짜? 진심이야? 내가 그걸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것보다 마음을 바꿔 산책을 하러 가지 않겠는가, 토실토실한 양 친구. 궁댕이를 이 훌륭한 이빨에 물어 뜯기기 싫다면 그러는게 좋을 것 같은데.
거부의 의사는 의외로 명확해서 욕실 문을 열고 저리로 들어가라 손짓했을 적에 베어는 바닥에 엎드려 꾸벅꾸벅 조는 척했다. 『베어.』 이름을 불러봤자 한쪽 눈만 살짝 뜨고 귀찮다는 투로 반응한다. 『네놈의 사료 값을 대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니. 응?!』 열이 뻗쳐 개의 엉덩이를 밀어봤지만 몸집 커다란 수캐를 힘으로 어쩌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는 수 없이 핀치는 전화기를 들어 애견 미용실의 도움을 구하기로 했다. 다행이었다. 돈은 썩을 정도로 많다. 불알을 먹어치우는 사나운 개라고 설명하고 다섯 배의 이용 요금을 제시하자 수화기 저편의 전문가는 그렇다 아니다 일절 말을 삼갔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부자에게는 욕을 하지 않는다. 《고객님. 그러지 마시고요. 최근 전자동 애견 목욕기라는 기계가 발명되었다는 건 아세요? 고가이긴 하지만 고객님께 필요한 건 우리 서비스가 아닌 것 같아서요.》 세상이 많이 편리해졌다. 인터넷으로 찾아낸 카달로그 속의 물건 사진이 세탁기를 닮았다는게 큰 부담이긴 했지만... 동물 학대가 결코 아님을 강조한 광고의 붉은색 글자를 믿어주어야 할 것이다.
『베어. 천천히 걷자꾸나. 나는 다리가 안 좋아요.』 목걸이에 줄을 채우고 앞장서라는 시늉을 했다. 개는 알겠다며 총기 있는 눈으로 거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옆에서 몸을 붙이고 걸었다. 앞장서는 법은 없었다. 특이하게 베어는 가끔씩 경고 신호를 주려는 것처럼 다리에 몸을 부딪쳐왔는데 그때마다 개의 표정이... 표정이...
위를 쳐다보고 걷지 마, 위험하다고. 너, 바보냐? 차가 오잖아. 오케이. 이제 길을 건널 거야. 한 눈 팔지 말고 따라와, 이 퉁실퉁실한 양아. 그리로 가지 말고 이리로, 오케이.
림보엔 리스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또 테이블에 발을 올려놓고 책을 보는 척했다. 커피는 이미 다 마신 후였다. 『굳모닝, 핀치.』 대답은 베어가 더 빨랐다. 개는 쏜살같이 달려가 리스에게 아양을 떨어댔다. 양을 무사히 데려왔쪄욤. 뿌잉뿌잉. 나, 참 잘 했죠? 이쪽의 복잡한 심정도 모르고 리스는 칭찬의 의미로 개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 * * 노아드롭은 연중 관련으로 2편 부분은 비공개로 돌렸습니다. 본격적으로 자판을 다다다닥 눌러봅시다, 신호가 오면 그때 가서 다시 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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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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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12/10/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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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숭이 예제는 교고쿠 나츠히코의「우부메의 여름」에 등장합니다.
질문.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새끼를 낳을 수 없는 어미 원숭이가 제법 자란 새끼 한 마리와 어린 젖먹이를 데리고 강을 건너려 한다. 도중까지는 별 탈이 없었는데 갑자기 상류로부터 큰물이 닥쳐 세 마리 모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어미 혼자 헤엄을 치는 것도 힘들어 새끼들을 전부 도울 수 없는 상황이다. 가까스로 헤엄을 치고는 있으나 물을 먹고 있는게 분명한 어린 새끼와 스스로 걷지도 못하는 젖먹이 중 한 마리만 구할 수 있다면 이때 어미는 누구의 팔을 잡아야할까.
『이 질문을 접한 다수의 사람들은 어미 원숭이가 젖먹이 새끼를 잡는게 좋겠다고 대답합니다. 당장 손을 놓으면 젖먹이는 물에 빠져 익사합니다. 그보다 조금 자란 새끼 원숭이는 서툴기는 해도 아직은 헤엄을 치고 있으니 그보다 더 급한 상대를 돕는게 도덕적인 판단이라는 거지요.』 핀치가 신경질적으로 팽개친 바구니는 비스듬히 굴러가다 옆으로 빙그르 돌아 멈췄다. 리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바구니를 주우러 가야 하나 잠시 갈등했다. 하지만 핀치의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다시 끌었다. 『저는 지금 판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미스터 리스.』 리스는 말 잘 듣는 착한 학생처럼 도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보다 자연에 가까운 모성은 전혀 다르게 반응합니다. 어미는 더 이상 새끼를 가질 수 없어요. 종족 보전의 이기적 유전자는 그래서 젖먹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생존율이 보다 높은 새끼에게로 온전히 매달리게 만듭니다. 어쩌면 운이 좋아 두 마리 전부 살릴 수 있을 것이다 - 희망이 담긴 가정 자체를 하지 않아요. 물에 빠진 원숭이 어미는 그래서 젖먹이를 포기합니다. 대신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는 새끼를 돕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연민이라는게 없지요.』 그것이 바로 인간과 짐승의 차이점이다. 하지만 인간의 판단이 올바른 것일까? 이와 반대되는 자연의 판단은 그저 난폭하고 이기적인 것에 불과한 걸까? 여기에 과연 정답이라는게 존재는 하는가. 이마를 찡그린 핀치는 손바닥을 펼쳐 무언가를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적당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주먹을 꼬옥 쥐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말입니다, 미스터 리스. 꽤 오래전 이야깁니다만, 궁금한 마음에 예비 시스템에 같은 질문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전 매우 심플한 대답을 얻었지요.』
- 연산 수식 오류
이번엔 리스가 이마를 찡그렸다. 『어떻게 된 답변이 그따위입니까.』 『시스템이 판단을 유보한 거예요. 쉽게 말해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게 좋겠다, 저렇게 하는게 좋겠다 가정을 해봤자 쓸데없다는 거지요. 흐르는 물의 유속, 건너야 하는 강의 너비, 원숭이의 건강 상태 등등의 정보가 주어지면 그 즉시 분석에 의거한 정확한 판단을 내릴 겁니다. 하지만 그 직전까지 이렇게 해야 옳다는 식의 정답은 없다는 겁니다. 젖먹이를 포기하고 강물에 빠뜨리는게 선인지 악인지, 다 같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품에 안고 계속해서 헤엄을 치는게 선인지 악인지, 시스템은 원론에 입각한 판단을 하지 않아요.』 『그런 겁니까.』 『그런 거예요.』
리스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손가락을 접어가며 정리를 해봤다. 『알겠습니다. 정리하자면, 도덕적 판단은 모두가 위기에 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젖먹이 원숭이를 구하려 하는 것이다. 반면 본성에 가까운 판단은 어쩌면 내지는 아마도 라는 가정을 일체 하지 않고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가장 안정적이고 성공 확률이 높은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프로그램 시스템은 - 주어진 정보 없이는 일절 판단을 하지 않는다. 제가 알아들은 내용이 이게 맞습니까?』 핀치가 고개를 들어 리스를 응시했다. 기묘할 정도로 유리알 같은 눈동자였다. 색은 어두웠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편이 훤히 비쳐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러자 뭔가 뻐근한 느낌- 불쾌하지는 않은 기이한 감각이 리스의 눈썹을 흔들어댔다. 『그래서 당신은 이곳에서 물에 빠진 원숭이 세 마리를 보고 있었던 거군요.』 『아하하... 비유하자면요.』 그렇게 말한 핀치는 짧게 삐져나온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는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을 빼먹고 있었다. 어미 원숭이는 저 혼자만 살겠다고 죽어가는 새끼들은 나 몰라라 외면할 수도 있었다. 핀치가 고민하는 여러 가정들 속에선 그 경우가 아예 쏙 빠져 있었지만 말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어쩐지 핀치의 내면을 살짝 들여다본 기분이다.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서 물에 빠진 원숭이는 어떻게 되었습... 아니, 됐어요. 짐작이 갑니다. 그러니 말하지 말아요. 제가 맞춰보죠. 당신은 사실에 입각한 정보들을, 그것도 최대한 많이 수집하는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거예요. 그래서 이곳으로 왔군요.』 뒤편이 훤히 비쳐 보이는 투명한 눈동자가 다시금 리스에게로 향했다. 예, 아니오 대답은 없었으나 그의 눈빛이 말했다.「그렇습니다.」 그래서 리스는 다시 금줄 너머의 벼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서 찾아낸 시체 두 구요.』 이번에도 예, 아니오 대답은 없었다. 대신 핀치는 입술을 얇게 일그러뜨려 안으로 말았다.
『카터나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가 여기에 더 있다고 보는 겁니까.』 『모르겠습니다, 미스터 리스.』 핀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정말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걸리는게 있어요. 그래서 답답합니다.』 핀치는 자신의 집에 무단침입을 했던 움무 상인을 반복하여 떠올려봤다. 남자는 글자를 알았다. 책장에 꽂혀진 책들의 제목을 읽고 그것들을 핀치 앞에서 읊었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늦길래 여기에 있는 책들 제목을 잠시 살펴봤지. 헨리 아일랜드의 문학 이해, 고전주의 소네트 전집, 정통 신미학주의 도해... 원래 하던 일이 뭐였나?」
리스의 키는 크다. 그의 얼굴을 마주보려면 필연적으로 뒷목이 땡긴다. 『리스 씨는 소네트가 뭔지 압니까.』 『전 시를 안 좋아합니다, 핀치.』 『바로 그겁니다.』 소네트는 14행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다. 『제가 후스코에게 소네트가 뭔지 알겠냐고 질문하면 그 아이는 무어라 할까요.』 꿀단지를 노리던 통통한 몸집의 소년을 떠올린 리스는 쓰게 웃었다. 『비하하는 건 아닌데 녀석이라면 그건 맛있는 거냐, 아님 맛 없는 거냐, 이렇게 물어볼 것 같군요.』 『비슷할 겁니다. 아마도요.』
핀치의 책장엔 서적들이 많다. 거기엔 순서따윈 없다. 내키는대로 꽂혀져 있다. 핀치는 지난 월요일, 전등을 들고 책장에 불빛을 비춰보았다.「헨리 아일랜드의 문학의 이해」옆으로는「식용버섯 도감」이 자리를 잡았다.「정통 신미학주의 도해」옆에는 낚시와 퀼트, 뜨개질에 관한 실용도서가 있었다.「고전주의 소네트 전집」은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은 구석에 꽂혀져 있었는데「헨리 아일랜드의 문학 이해」로부터는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시 말해 움무 상인이 입에 올린 세 권의 책들은 등을 나란히 하고 있지 않았고, 글자를 읽을 줄 알았던 움무는「문학」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서로 떨어져 있던 세 개의 책 제목들을 연결시켰다. 『그 사람은 소네트가 시라는 걸 알았던 겁니다.』 핀치가 엄지손톱을 입술 가장자리에 물었다. 『그럴 수 없어요. 떠돌이 움무가, 글자를 읽고, 소네트의 개념까지 알고 있었다?』 그는 정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정식 교육을 받았다면 움무가 아닙니다.』 그걸 깨닫고 나자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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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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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at 2012/10/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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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글을 쓰는 내가 너무 싫어 - 동네 사람들아~ 원작이 다 해 먹는다~!! 드라마가 뛰어나 덕심이 고갈되는 건 진짜지 흔치 않죠.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POI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그가 빈 바구니를 양동이처럼 쓰고 있지만 않았어도「핀치,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한참 찾았습니다」친근하게 말을 붙여봤을 거다. 그런데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접하자 웃음이 나오기는커녕 숨이 턱 막혔다. 혼자 있고 싶어 -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 날 이대로 내버려둬 - 몸짓으로 외치는 소리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몸을 안으로 말고 무릎을 감싼 채 웅크린 모습은 집을 잃어버린 어린애를 연상시켰고, 구부정한 등은 돌아갈 장소를 찾으려는 의지마저 꺾인 것처럼 보였다. 무서웠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자 손을 내밀면.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리스의 속이 불편해졌다. 머리 아프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감정은 둘째다. 저 밑바닥으로부터 덩어리가 단단하게 뭉치며 요동을 쳤다. 누군가로부터 미움 받는 대상이 되는 건 싫다.
『틀려요, 미스터 리스.』 핀치는 여전히 바구니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래도 그는 눈꺼풀을 감아도 차단되지 않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갈피를 못잡고 있는 리스의 행동을 쉽게 알아차렸다. 『이 깊은 혐오의 뿌리는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다. 이건 자기혐오라고 하는 것이다. 핀치는 옆으로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내친 김에 옛날 이야기라도 하죠.』
땅거미가 산등성이 너머까지 뻗어가려면 아직 시간은 많다. 설령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진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존재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사물을 볼 수 있고, 야생동물의 습격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로 처리해버릴 수 있다. 『주변에 야생 동물이 있습니까, 핀치.』 『들개는 흔하게 나타납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들개는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습격해요. 같은 개과 동물인만큼 늑대와 구분이 잘 되지 않죠. 간혹 불곰이 목격될 때도 있구요.』 『곰?!』 자연 상태에서 곰을 목격한 적이 없을 것이 분명한 리스는 핀치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곰이 나타나면 재빨리 핀치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 냅다 달리기 위해서였다. 불곰은 갈색곰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에 속하며, 개체 중에는 700KG이 훌쩍 넘어가는 놈도 있다. 화가 나서 앞발을 휘두르면 나무가 부러진다. 아무리 리스라고 해도 불곰과 맞닥뜨려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강경하게 마주보고 싸우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회피도 좋은 작전이다. 『맙소사. 곰이 나오는 곳에서 버섯을 따겠다며 어슬렁거린 겁니까.』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리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간혹 목격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경계심이 강한 곰이 일부러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없어요. 리스? 그러니 진정해요. 제 눈에는 당신이 곰처럼 보이는군요.』 머리에 씌워진 바구니가 양편으로 달각달각 흔들렸다. 아마도 핀치는 웃었던 것 같다. 『맙소사, 당신. 곰이 무서워요?』 리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오.』
작은 돌을 주워 벼랑 아래로 던졌다. 멀리 던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맞추기 위해서도 아니다. 조각은 포물선을 그리고 우거진 수풀 어딘가로 떨어졌다. 핀치가 그런 리스의 동작을 따라했다. 요령이나 힘이 부족한 관계로 핀치가 던진 조약돌은 얼마 못 가고 가까운 곳으로 떨어졌다. 리스는 이렇게 따라 해보라며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멀리 던졌다. 그래봤자 누가 더 잘 던지나 서로 대결하자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은 곧 흥미를 잃었다. 『미스터 리스, 혹시 제일 처음 들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제일 처음 들은 말?』 『여기에 나라는 의식이 있구나, 깨달았을 적에 누군가 당신에게 말해준 것이 있을 겁니다. 그걸 말해준 사람은 당신의 AI 제작자일 수도 있고, 더러는 그룹으로 움직이는 소프트 엔지니어들 중 한 명일 수 있습니다. 파워-온 스위치를 올릴 적에 의식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글쎄요, 핀치. 꽤 많은 것을 기억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혹시 그건가. 손가락을 흔들면서 이게 몇 개입니까, 묻는 거요?』 『아뇨.』 핀치가 쓰고 있던 바구니를 머리 위로 불쑥 들어올렸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표정은「믿을 수가 없어!」라는 거였고, 그 놀람 속에는 일말의 분개 비슷한 것도 섞여있었다. 『모든 AI 제작자의 의무 비슷한 겁니다. 우리는 바벨의 후예로 최초의 인류 아담을 모방한 지성을 창조하였으며 - 로 시작하는 내용이지요. 당신의 AI 제작자는 그 단계를 빼먹은 겁니까?! 그랬다면 괘씸한데.』 글쎄다. 제시카는 의외로 덜렁거리는 성격이었다. 의식이 깨어났을 적에 그는 눈부시게 환한 빛과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처리하느라 혼란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며 이게 모두 몇 개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을 채 듣지도 않고「깜빡했다!」크게 외쳐 리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깜빡했다... 라.』 『저더러 신경 쓰지 말라더군요. 크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어요.』 『중요한 건 아니다...』 핀치는 웃었고, 동시에 화를 냈다. 『재밌군.』 정말로 재밌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꺼낸게 아니라는 건 리스도 알 수 있었다. 핀치의 뺨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이름을 불러주는 의식을 안 했다는 겁니까?』 『이름을 부르긴 불렀죠. 제시카는「리스, 내 말이 들려요? 들린다면 이 손가락이 몇 개인지 말해보세요」라고 했어요.』 다 듣고 핀치는 신음했다.
고풍스러운 이 의식은 AI 공학의 아버지인 노만 버뎃이 시작했다.
우리는 바벨의 후예로 최초의 인류 아담을 모방한 지성을 창조하였다. 필멸자로서 선과 악을 자의로 판단, 충분히 고뇌하고, 고통을 당하며, 그로 인해 구원을 받으라. 이곳에 생명 있느냐 - 그럼 부름에 화답하여라. 여기 자리한 너는 누구인가. 이름을 말하고 너는 깨어나라.
『그러면 AI는 베이스로 입력된 자기 이름을 말하면서 눈을 뜨게 됩니다.』 『나에겐 그런 거 없었는데요.』 『바빠서 빼먹었나. 그럼 나중에라도...』 『나중에도 그런 건 들어본 적 없어요.』 『버뎃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필시 역정을 내겠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요, 미스터 리스. 제가 보기에 그건 매우 중요한 의식이라고요.』
노아는 대단히 오만한 종족이었다. 지성이 높았으며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려고 애썼다. 범죄를 혐오했고,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배척했다. 결점을 찾아내면 바로 고치기 전까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노아였기에 가능했지요. 노아는 로봇 기본 원칙을 처음부터 부정했습니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라 - 그리고 어린 자녀들을 세상에 던져놓은 겁니다. 이것이 선하다, 이것이 악하다, 사전에 가르쳐주지 않고요. 무책임하게 그랬음에도 잘못될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믿었죠. 깨어난 자녀들이 비뚤어져 판단력을 잃을 거라는 가정은 전혀 못했거든요.』 돌 하나가 핀치의 손을 떠나 수풀에 떨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노아가 만든 로봇들은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했어요.』 두 번째 돌조각이 훌쩍 날아갔다. 『그런데 노아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어요. 그들은 알고 있어야 했어요. 로봇이 아닌 노아가 판단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에 대해서요. 그리고... 음. 그게 실수였죠.』 마지막으로 핀치가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건 돌멩이가 아닌 빈 바구니였다.
Posted by 미야
2012/10/04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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