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느릿느릿 강을 따라 바다까지 갑니다. 개인의 취향과 시각에 따라 대단히 불쾌한 내용일 수 있습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마우스 버튼을 재빨리 눌러 윈도우 화면을 닫아주세요. ※


드디어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샘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떨구었다.
「양이 세 마리, 다섯 마리, 여섯 마리...」
내용물이 텅 비다시피한 가방은 아래로 떨어질 적에도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소지한 짐이 하나도 없으면 남들에게 의심을 사니까 부득이 양말이니 손수건이니 하는 걸 몇 점 들고 나왔을 뿐이다. 소복히 무너지는 모습은 그래서 여자들이 잘 착용하는 스카프를 많이 닮았다. 그걸 발로 밀어 구석으로 치워놓고 곧바로 침대로 직행, 벌목꾼이 내지르는「나무가 넘어간다~!」외침을 뒤로한 채 베개에 얼굴을 박았다.
전등을 켤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물에 젖은 타올처럼 축 늘어졌다. 불순물이 섞인 듯한 눈꺼풀은 진작부터 작동이 여의치 않은 상태다. 신발을 벗고, 전등을 끄고,「오늘 하루는 정말 죽도록 힘들었다」자조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의 끈을 놓아버리도록 하자.
졸음이 날벌레인양 등줄기를 타고 간질간질 올라왔다. 샘은 극도의 피곤함을 느꼈다.

「원숭이가 여덟 마리, 아홉 마리, 열 세 마리... 열 다섯 마리...」
그런데 그놈의 망할 원숭이들은 아무래도 동물원 오락단 출신인 모양이었다. 야생에선 구경도 못할 커다란 심벌즈를 쥐고 탕탕탕 소리를 내고 있으니 도대체 성가셔서 눈을 감을 수가 없다. 뾰족하게 생긴 파티용 모자를 쓴 원숭이가 스물 여섯 마리 - 여기까지 인식한 샘은 베개에서 얼굴을 떼어냈다.
『제발! 나에게 왜 그러는 거야! 왜 날 못살게 만들어!』
꼬리를 둥글게 말고 사방으로 도망치던 원숭이들은 일제히 끽끽 소리를 냈다. 화가 치밀어 손에 쥐고 있던 모텔의 카드키를 위협의 의미로 던졌다. 그런다고 해봤자 그것들은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나 같이 무표정한데다, 눈동자가 지나치게 바싹 구워진 팬케이크 빛깔이었다. 샘은 절망했다. 녀석들은 어차피 살아 있지도 않았다.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이대로 잠들려고 한 내가 죄인이다.』
도망갈 곳을 미처 찾지 못한 양떼들이 메에 울음을 터뜨렸다. 그걸 모조리 붙박이 옷장에 쳐넣은 뒤, 쾅 소리를 내어 입구를 닫아버렸다. 다시는, 다시는! 샘은 손가락을 흔들며 심각한 어조로 경고했다.
『내일 아침까지 거기서 절대 나오지 마! 알아 들었어?』
확실히 하기 위해 샘은 붙박이 옷장 앞으로 의자를 세워두기까지 했다. 만들다 만 뜰채처럼 생긴 부적도 손잡이에 걸어두었다. 좋다. 그럼 다시 침대로 가는 거다. 손바닥을 탁탁 털며 등을 돌렸다.

「그치만 이건 괜찮은 방법이 아니야. 나에게 닥친 이 문제가 성가신 토끼들 때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거든.」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어느새 양들은 두툼한 털 코트를 집어던지고 토끼가 되었다. 샘은 움켜쥔 주먹으로 이마를 때렸다. 부적을 씹다 버린 껌처럼 여긴 토끼가 벽장에서 튕겨나와 줄넘기를 돌리며 깡충깡충 뛰기 시작했다. 메리고라운드, 메리고라운드, 얼레리 꼴레리~♬ 토끼의 머리가 천장에 닿으려 했다. 그때마다 조롱조의 노랫소리는 한 옥타브씩 더 올라갔다.
샘 윈체스터는 바보입니다, 샘 윈체스터는 얼간이입니다~♪

『그래! 나는 천하에서 둘도 없는 바보다. 보태어준 거 있냐!』
좁은 방을 한 바퀴 돌았다. 열 걸음만에 제자리로 돌아온 샘은 다시 두 바퀴 더 돌았다.
침착해져야만 했다. 손톱을 맹렬하게 물어뜯으며 만족스럽지 못한 방안을 둘러보았다.
여기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왜 나는 편히 쉴 수가 없는 거지.
TV를 켜면 괜찮아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샘은 곧바로 텔레비전의 전원을 켰다. 먼지투성이의 브라운관으로 알록달록한 색점들이 떠오르면서 스무 살이 안 되었음직한 젊은이가 도로를 쏜살처럼 가로질러가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분위기로 보아 탐정물인 모양이다. 제목은 알 길이 없었다. 두어 발의 총성이 울렸고, 무리에게 쫓기던 사내가 날렵한 동작으로 담장을 넘어갔다.
《뒤쪽으로 따라가! 어서!》
악당들의 외침에 - 아니면 정장을 한 수사관일 수도 있다. 샘은 내용을 따라갈 수 없었다. 본 적이 없는 영화였다 - 주인공으로 보이는 남자가 뒤돌아 보았다. 머리가 길다는 점만 빼면 용모가 딘을 많이 닮았다. 샘은 리모컨을 제자리에 내려놓곤 시뻘겋게 불을 토하는 말들이 달려가는 걸 지켜봤다. 괴물을 닮은 말들을 피해 딘은 뒷골목으로 달아났다. 경광등을 요란스럽게 번쩍이며 경찰차들이 도로를 질주했고, 음모에 걸려든 불운한 젊은이 또한 뒷골목으로 몸을 던졌다.

남자가 달아난다. 딘이 달아난다.
아무도 그들을 잡을 수 없다. 왜냐하면 딘은...
『아냐, 이건 정말이지 아니야.』
코앞으로 눈부신 손전등을 들이대고 있다는 감각이다. 눈이 멀 것만 같았다. 팔을 갈지자로 휘젖던 샘은 TV를 도로 꺼버렸다.

『하느님!』
그의 소망은 너무나도 조촐했다. 그렇지 않은가. 새로운 제2의 천지창조를 희망하는게 아니다. 그저 숙면을 취하고 싶을 뿐이었다. 세상 모르고 잠들어, 어떠한 꿈도 꾸지 않고, 행복한 기분으로 깨어나면 좋겠다고 바랄 따름이다.
『그런데도 나를 벌하는 겁니까!』
느리게 이동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커튼 너머로 넘실거렸다. 불규칙적 모양을 띈 빛의 물결이 반대편 벽지를 타고 천장까지 흘러갔다. 그러자 방안은 물이 가득찬 어항이 되었다.
『하느님!』
신은 원망 섞인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영원히 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눈을 뜨면 향긋한 커피가 머리맡에 놓여있다. 바닐라 향이 첨가된 달콤한 커피다.
《이제야 일어났냐, 우리 잠꾸러기~!》
반쯤 열린 욕실에서 슬리퍼를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
《너, 어제 늦게까지 게임했지. 이 형에게 숨길 생각일랑 말아. 나는 배트맨이란 말이다! 여자들 옷, 어디까지 벗겼냐. 팬티는 벗겨봤냐.》
하얀색 거품 투성이의 칫솔을 쥐고 근엄한 표정을 지어봤자 하나도 안 무섭다. 거기다 화를 내는 요점이「성인 사이트에 접속해서 저속한 옷 벗기기 게임이나 하며 밤새도록 놀았다」가 아니라「여자 브래지어 벗기는데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서야 기운이 쏙 빠져버린다.
「그러는 형은 얼마나 빨리 벗기는데!」
도날드 하비*와 오빌 메이져스*, 닥터 케보키언*에 대해 조사하고 있었다는 설명은 뒤로 접고 샘은 발끈해서 소리부터 치고 본다.
《알몸으로 만드는데 딱 5분.》
죽음의 천사고 안락사고 하나도 모르는 형은 손가락 다섯 개를 자랑스럽게 들어보인다.
그러다 돌연 표정을 바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런데 거들은 착 달라붙어서 잘 안 움직이긴 해. 아무리 나라도 그건 좀 힘들어.》

욕실 문은 닫겨 있다. 그런데도 샘은 여전히 슬리퍼를 끄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식으로 문가를 쳐다봤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면 안에서 사람이 나올지도 모른다. 그립고, 또 그리운 얼굴이 말이다.
《새미? 화장실 비었다. 너도 오줌 눌테야?》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그곳의 전등은 계속해서 꺼져있는 채로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샘은 화가 난 채 웃어댔다. 그리고 울었다. 얼룩에 얼룩을 더하는 새 눈물을 손등으로 부지런히 닦아내며 한 맺힌 저주의 주문을 읊었다.
『아빠에게 일러바칠테다.』
존이 죽어 이젠 이 세상에 없다는 건 나중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주문. 그리고 강력한 주문.
『아빠에게 이를 거야. 두고 봐.』
그야말로 어린애다운 발상이다. 창피하다는 인식은 있어서 그 증거로 코가 새빨갛게 번졌다. 그러나 박탈감과 피로감에 곤죽이 된 머리로는 빈 깡통을 향해 딱딱한 복숭아 씨앗을 던지는게 왜 어리석은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몸을 똑바로 유지하기 위해선 손으로 벽을 지탱해야만 했다. 샘은 고개를 숙인 채 1분가량 깊게 심호흡했다. 그러나 그 어떤 행동을 취해도 몸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납작하게 몸이 눌려 유리판 사이에 낀 듯한 느낌이었다.

달콤한 냄새, 꿈의 냄새.
부탁이니 손을 잡아줘.
《샘? 넌 그냥 내 궁둥이 아래로 착 붙어있기만 하면 돼.》
절망감이 바람에 둥둥 떠다녔다.
《괜찮아. 내가 있어. 네 옆에 이 형이 있다고. 그러니까 넌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야. 하나도 괜찮지가 않아... 팔을 교차시켜 스스로의 몸을 안았다.

딘은 섹스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눈빛에서 샘은 전혀 다른 사실을 보았다.
5분.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기는데 소요되는 시간.
그가 사타구니로 손을 뻗었을 때 샘은 뜨겁게 신음소리를 흘렸다. 자존심 같은 건 진작에 걷어치웠다. 네 발로 엎드려선 빌었다. 가슴과 엉덩이를 주무르면서 차례로 입을 맞춰달라고 애원했다. 딘이 한 손으로 샘의 얼굴을 감싸쥐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뺨을 쓸었다. 샘은 입술을 핥았고, 딘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야만 했다.
《나는 너와 섹스하고 싶지 않아.》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 샘은 구역질했다 - 그토록이나 싫었다면 딘의 목덜미가 흥분감으로 붉어질 턱이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다. 그럴 것이다.

『살려줘.』
나선으로 회전하며 쏟아지는 불가사의한 폭포가 이곳에 있다.
영원히 미명의 새벽은 오지 않을 것이다. 계속해서 밤. 다시 밤.
샘은 눈을 붙이고자 한 자신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세제 향이 강렬하게 남은 이불을 머리꼭대기까지 뒤집어쓰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줄넘기를 하는 토끼와 한 무리의 양떼들, 그리고 심벌즈를 쥐고 있는 원숭이들이 이때다 하고 달겨들었다. 욱 하는 것도 잠시, 온몸의 뼈가 달그닥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정신을 갉아먹는 짐승들이 둥글게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동안 샘은 얌전히 그들의 발 아래서 짓밟히고만 있었다.
『살려줘...』
그 애원에 호응하듯 긴팔 고릴라가 샘의 머리를 꽉 하고 눌렀다.

『곱게도 지랄한다!』
웅크리고 누워 훌쩍대는 그 모습이 어찌나 한심스럽던지 딘은 방금 전까지 동생을 살해하고자 칼날을 갈아댔다는 것도 깡그리 잊었다.
『잘 하는 짓이다. 임마! 여기서 뭐 하냐. 혼자서 질질 짜고!』
놀란 샘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 딘?』
『배트맨이시다!』

Posted by 미야

2008/04/20 23:50 2008/04/20 23:50
Response
No Trackback , 2 Comments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856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Comments List

  1. 로렐라이 2008/04/21 17:20 # M/D Reply Permalink

    새 에피 방영일도 얼마 안남은데다 미공개 사진들도 대방출된 상황에서 눈빠져라 기다리던 미야님의 Paradise Lost 07편도 보니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것 같이 행복하네요!!!ㅠㅠㅠ 아...샘도 너무 안타까운 상황이고orz 형제가 제자리걸음하며 서로 애태우는게 너무 가슴아파요..

  2. 소나기 2008/04/21 19:18 # M/D Reply Permalink

    아!!! 형제가 드디어 만났다는 기쁨도 잠시!!!
    우리 딘, 어물쩡 넘어가려는 건 아니겠지요?
    ㅠ.ㅠ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1208 : 1209 : 1210 : 1211 : 1212 : 1213 : 1214 : 1215 : 1216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9505
Today:
1211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