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척을 죽이고 따라다닌지 닷새.
엿새가 되자 수풀에서 시커먼 얼굴 셋이 부스스 떠올랐다. 그리곤 머슥한 표정으로「감자 구운 거 남은 거 있음 우리에게도 주세요」라고 말했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세일룬의 군인이냐.』
스승은 우릉 우릉 울어대는 먹구름의 형상이 되어 밥그릇에 밥을 담았다. 그리고 도리질했다.
아무리 배고픔에 장사 없다지만 임무는 내치고 따끈한 밥 - 그것도 그릇에 꾹꾹 담겨진 밥을 감격해서 먹어치우면 어쩌자는 거냐. 정체를 드러내지 말라는 명령은 국에다 말아 먹고 참 잘 하는 짓이다. 제르가디스는 화가 나서 - 애들을 잘못 가르쳤다 - 노릿하게 구운 토끼를 식칼로 토막쳤다.
그 기백이 어찌나 무시무시했던지 막스밀리엄이 거북이처럼 등을 움추렸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5인분의 밥을 미리 지어놓고 뭘 화내는 거야, 사부.』
접시를 정리하면서 그라바스가 막스밀리엄 편을 들어주었다.
왕자의 말에 스승이 뒤를 휙 돌아다 보았다.
『누가 5인분의 밥을 지었다는 거냐.』
『그럼 이게 사부의 눈엔 2인분으로 보인다는 거요? 나랑 사부가 이 많은 밥을 죄다 먹어치운다고? 그게 가능하려면 사부의 위장이 거인의 밥통이어야 할텐데.』
거기다 들판에서 직접 잡아온 토끼가 세 마리나 된다. 성장기 어린애가 앉을 식탁이라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영양소 과잉이다. 먹다 먹다 배 터져 죽을 일 있나. 그라바스는 확신하며 숟가락으로 그릇을 탕탕 쳤다.
자자, 먹고 봅시다. 속 보이는 쇼는 그만 하고.

잘 익은 고기에서 뼈를 발라내다 말고 요한슨이 쓰게 웃었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개구리를 날로 먹는 일엔 제법 지쳤거든요.』
불을 피우면 위치가 발각된다. 임무 수행 중 취사는 그래서 할 수가 없다. 생으로 버텨야 한다.
이것은 수도자들이 하는 고행과 많이 닮아 있다 - 요한슨은 그렇게 생각했다.
말린 육포와 견과류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 준비한 비상식량은 사흘째 되던 날에 바닥을 쳤다. 속수무책으로 날 생선과 개구리를 삼켰다. 맛은 그렇다치고 기생충 감염 때문에라도 내키지 않는 일이다. 갈아 입지 못한 팬티 사정보다 이쪽이 더 고약하다.
요한슨은 다시 한 번 쓰게 웃으며 발라낸 토끼 뼈를 접시 한켠에 얌전히 올려놓았다.

『일주일 내내 황야에서 노숙을 할 거라곤 짐작을 못했는데...』
이쯤해서 원망의 눈초리를 살짝 던졌다.
『설마하니 마을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신 건가요.』

밥풀이 붙은 주걱을 쥔 채로 제르가디스가 흐응 소리를 냈다.
『그런 바보 짓을 저지를 리 없잖아.』
그리고 덧붙여 말했다.
『밥 더 먹을 사람? 아직 많이 있다.』

일반인이 우굴거리는 마을 한복판에서「프로급 암살자와 딱 마주치다」경험은 하기 싫었다. 그래서 가나안 평원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황야를 계속 걸었다. 표적이 되고자 일부러 뻐엉 뚫린 들판 한 가운데 서서 가만히 있었던 적도 있다. 쉽게 말해 멍석을 깔았다.

그때까지도 소리도 내지 않고 감자 스프를 삼키던 로우드가 한 마디 했다.
『작전은 나쁘지 않았는데 너무 눈에 띄게 멍석을 깔았어요.』
함정이라 깨닫자 적들은 곧바로 다음 포인트로 넘어갔다.
『조심성 있는 놈들이예요. 참을성도 있고요.』
그러니까 유혹해도 쉽게 응하지 않는다. 이쪽에서 준비한 판이라는 걸 알자 훌훌 손을 털고 사라졌다. 혹시라는게 있으니까 일단 건드려보자 - 라는 건 알지 못한다는 식이다.

『그거, 골치 아픈데.』
『충분히 골치 아프죠.』
수긍하며 구운 감자를 입에 넣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려 한다. 이 문명의 냄새와 맛이라니. 살짝 넣은 카레 가루 냄새가 환상적이다. 그들의 스승 제르가디스는 요리 솜씨가 괜찮다. 신부로 삼고 싶어 진다 - 그 전에 목이 달아날 거라는 문제가 있지만.

모닥불을 막대기로 찔러대며 제르가디스가 질문했다.
『암살자들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없나, 요한슨.』
『본국에서 조사한 바로는「질풍」의 일원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는 아직 이렇다 할...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몰라요.』
『질풍?』
『14년 전에 세레겐 울프가 만든 암살 조직이죠. 이념 없이 오로지 돈으로만 움직이는데 최대 조직원 수는 항상 여덟을 넘지 않습니다.』
『흐응. 돈, 인가...』

그들이 돈 맛을 안다는 건 이쪽 입장에서도 나쁜 소식은 아니다. 이념이 없다면 충분히 실을 조정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쪽엔 막강 재력의 세일룬이 등뒤에 있다.
실을 조정하지 못할지라도 최소한 흔들어볼 수는 있을 터.
제르가디스는 주저 않고 메모지를 꺼내 몇 개의 글을 적었다. 그리고 그걸 우걱우걱 먹느라 바쁜 막스밀리엄에게 건냈다.

『우?』
『받아, 막스. 네가 해야 할 일이다.』
메모지를 받으라는 말에 허겁지겁 기름 묻은 손가락을 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뭐, 뭔대요?』
『하여간 받아.』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덩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볼에다 음식을 하나 가득 넣은 채 막스밀리엄은 질겁했다.
저 사내가 갑자기 다정해지면 후환이 늘 두려웠다.
웃으면서 안녕. 지옥으로 가는 티켓을 끊어주고 상냥히 손을 흔든다.

『이, 이상한 거 시키려는 거죠!』
『발가벗고 동네 한 바퀴 돌으라는 건 아니니까 안심해.』

막스밀리엄의 안색이 당장 창백해졌다.
안심은 하라는데 워째 더 겁이 나고 있다.
도움을 찾아 막스밀리엄은 허겁지겁 동료를 찾았다.

『저기요, 요한슨 대장...』
그러다 얼어붙었다.
일주일동안 속옷을 못 갈아입었다는 요한슨의 한숨에 그라바스가 가방을 뒤지고 있다. 세탁하여 정리해둔 심플한 검정색 삼각 팬티가 왕자님 손에 쥐어져 있다.
『급하신 것 같으니 이거라도 빌려드릴까요?』
친절한 제자의 말에 스승의 안색도 달라졌다.
잘 먹던 감자 스프 접시를 그래서 세 명이 동시에 뒤엎었다.
안돼 - 라는 절규가 잠시 드넓은 황야를 뒤덮었다.

Posted by 미야

2006/06/13 16:41 2006/06/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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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r 2006/06/19 23:48 # M/D Reply Permalink

    와오; 죄반 후반부의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 이부분이 생각나요. 보는 저야 언제까지나 소년의 이미지였지만 글속에서 이렇게 시간이 흘러 아들?(;)도 두고 제자들께 스승이라고 불리우는걸 보면 참.. 그치만 속옷가게에 쑥스러워서 못들어간다니 여전히 제르가디스답고 귀엽기도 하고. 5인분은 너무 적은거 아니에요?^^ 죄반에서 파편들로 보여진 이야기들이 조금씩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니 저로써는 기쁘기가 짝이 없습니다. 미야님. 미야님의 글이 제 성향과 완전히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나중에 캐릭들이 너무 가엾고 안타깝고.. 그점이 매력이긴 하지만요) 지금 하고 계시는 팬픽 작가분들중에서는 단연 최고라고 여겨집니다. 항상 글 기다립니다. 정말로 잘쓰십니다. 개그면 개그, 잔혹이면 잔혹. 그 방대한 양이나 세계관이나, 마치 새로 창조된 슬레이어즈를 보는 느낌이에요.더 써주세요! 재미붙여주셔요! >_< 아 그라바스.. 그 정령사 제자였군요. 이렇게 살벌하지만 나름 즐거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걸 보니 또 안구에 습기가--; 이제 저는 속지 않아요! 이 잠깐의 단비같은 개그는 후일 더 큰 비극을 위한 시초일뿐이라는걸!ㅠㅜ 늘 느끼지만 미야님의 묘사는 실제 모험을 연상케 합니다. 굉장히 사실 같아요. 주정을 가장한 비밀대화라던가, 새 신발과 붉은 카펫의 이야기라던가. 카펫이 붉은 이유는 처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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