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04

제1장 좀비인데 좀비는 아니라고 하더군요

※ 블로그 버전이 낮아 글쓰기 에디터가 익스플로러 11에서나 제대로 보인다는 거... 집에 있는 컴퓨터로 수정을 시도했다 식겁함. 크롬도 깨지던데 어쩌냐.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소설만 읽은 상황이며 이해부족으로 원작 설정이 미세하게 뒤틀릴 수 있음. 일부러 뒤트는 일은 원작자의 요청에 따라 하지 않습니다.



무슨 큰 일이 생겼나 싶어 서둘러 밖으로 나가보니 과장이 아니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 전부가 우리 가게에 우르르 몰려 있었다. 표정들이 하나같이 꼭 버터 맥주에 꽂힌 호빗 같았고, 유명 연예인이 뿔테 안경 하나 쓰고 나타났다며 저마다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들 무리 한 가운데로 의복과 꾸밈이 상서로운 낯선 이가 뜬금없게 왼손으로 배추 하나를 들고 있었다. 수려한 인물과 하나가 되자 벌레 먹은 배추 잎사귀마저 하얗게 빛이 나는 듯했다.
광채가 난다, 그 말을 끝으로 아무 생각이 안 났다.
그 인물이 우리를 향해 돌아서자 송만희와 나는 얼이 빠져 아래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하얗다 못해 푸른 옷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포장되지 않은 산속 길을 걸어왔을 텐데 신발코에 진흙 튄 흔적 하나 없다니.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은 또 어떻고.
신선은 겨드랑이에서 암내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왜 나왔나 했다.
아무리 기를 써 봐도 떡이 지는 바람에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을 전부 잘라버린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쩐지 부끄러워져 얼른 손가락에 침을 묻혀 혹시라도 붙어있을 눈곱을 정리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선사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았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고소 남씨에서 수행을 하는 문하생으로 이 근방을 지나다 음기가 강하고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어 잠시 들렸습니다. 듣자하니 부근에서 자주 주시가 나온다고 하던데, 어제 이 가게에서 묘강산 방향으로 배달을 다녀온 자와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까요.”

목소리를 듣고 다시 한 번 더 놀랐다. 뺨에 분을 칠하지 않아 선이 고운 남성으로 보였던 이 젊은 선사는 실은 여성이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있을 것 같은 세상에서 여성이 도를 닦는다는 것 자체가 가능하다는 것이 놀라웠고, 그걸 나만 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주변의 반응이 또 놀라웠다.
내가 살던 세상에선 부처님도 ‘여자는 여래가 되지 못하며, 장부라야 부처가 될 수 있다.’ 라며 대놓고 차별했었는데 여기선 남자고 여자고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지 않음 선인이 될 수 있는가 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태생부터 글렀다. 내 정수리에선 엄청 고약한 냄새가 난다.

다시 부끄러워하며 침 바른 손가락으로 얼굴을 닦자 셋째가 제발 지저분한 짓 하지 말라며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아, 왜 그래요. 나에게도 체면이라는 게 있단 말예요.
남들 보기에 내 꼬락서니가 어떠할지 상상해보자 선사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날 땀을 그렇게 흘리고도 속옷도 안 갈아입었고, 밥을 먹고 난 뒤에 물로 입안을 헹구지도 않았다.
걸람이 걸람했네 – 뺨이 홧홧 달아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소 남씨 수행자는 노비나 마찬가지인 날 앞에 두고도 무척이나 예의바르고 정중했다. 선사는 나에게서 악취가 난다며 코를 막지도 않았고, 눈곱 떼는 모습에 헛기침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띈 채 상냥한 목소리로 ‘혹시 먹고 싶은 건 없니?’ 라고 조용히 물어왔을 뿐이다.

“당과 좋아해?”
“좋아해요.”
쳐다보는 보는 눈이 많아 내가 불편해할 거라 여겼던지 선사는 나를 인기척이 없는 으슥한 골목길로 끌고... 아니, 조용한 장소로 데려갔다. 나는 여전히 몸을 꼬고 있었고, 그녀는 소매 안쪽을 뒤져 땅콩가루를 뿌린 튀긴 밀과를 꺼내 내 손에 뇌물인양 쥐어주었다.
오는 거 사양하지 않는 주의다. 꿀에 버무린 밀가루를 튀긴 밀과는 촉감이 쫀득하니 이에 달라붙었다.
오랜만에 접하는 단맛이라 어느새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 손가락까지 핥았다. 입술에 남은 기름까지 알뜰하게 빨았다.
“하나 더 줄까?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좋네.”
폭이 넓고 긴 소매 안쪽에서 종이로 싼 밀과가 하나 더 나왔다. 도라에몽 만능 주머니도 아니면서 수납력이 엄청났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밀과를 받으면서 무슨 핸드백이나 게임 인벤토리처럼 사용되는 소매의 쓸모에 감탄했다. 설마, 저 속으로 호리병이나 손수건 같은 것도 들어가 있는 건 아니겠지.

선사는 내가 밀과를 다 먹을 때까지 충분히 기다려주고 난 뒤에야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주시가 나온다고 다들 꺼려하는 길을 여러 번 다녀왔다면서.”
뿐만 아니라 내일도 가야 합니다.
“어른도 두려워하는데 주시를 보고 무섭지 않았어?”
“주시는 행동이 굼뜨고 움직임이 뻣뻣해서 피하기 쉬워요. 더러 옷을 잡아당기며 살을 깨물려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요령껏 주먹으로 때리면 되고요.”
“주먹으로...”
“물론 때린다고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건 잘 아니까 작정하고 덤비거나 하지는 않아요.”
“대단한데. 정말로 겁이 하나도 없구나.”
“선사님. 진짜 무서운 건 주시가 아니라 들개 떼죠. 죽어있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이 훨씬 무서워요.”
선사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들개도 있어?”
“예전에는 여러 마리 있었어요.”
들개에게 쫓겨 달아나는 날 보며 설양이 얼마나 비웃었던지.
물어라, 물어라, 부추기며 놈은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막상 물렸을 적엔 벼락같이 화를 냈지만.
애초에 그놈의 기분은 좌로 십리, 우로 십리를 왔다 갔다 했기에 화낸 이유를 크게 따질 필요는 없었다.
설양은 개의 털색이 노란색이어서 기분이 나빴다고 했고, 그래서 내 팔과 다리를 물어뜯은 개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었다.

여태껏 피비린내가 나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린 모양이다.
‘어디 아픈 곳이 있어?’ 물어보며 지그시 손목을 붙잡았다.
선사는 진맥도 보는 모양이다. 도를 닦으면 약초 보는 눈이 밝아지고 의술에도 능해진다더니 진짜였나 보다. 팔을 쭉 펴게 만들어 피부의 색과 주름까지 꼼꼼하게 살핀 뒤에 ‘어제 잠을 잘 못 잤나봐?’ 물어왔다.
뭐, 불가항력입니다. 나무판자 하나 깔고 자면 아무래도 뻣뻣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관절이 아주 굳은 건 아니고요. 팔꿈치가 딱딱한 건 때를 안 밀어서가 아니라 굳은살 때문입니다.

선사가 붓으로 그린 듯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채소가게 주인이 부모님이니?”
“부모님은 제가 어릴 적에 다 돌아가셨고 송씨 부부가 길거리에서 떠도는 걸 거둬주셨습니다.”
“선량한 분들이군.”
그럴 리가. 그 선량한 분들은 성장기 어린이에게 밥도 주지 않았는뎁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 싫었던 나는 약양 상씨에게 도움을 구한 선동요 주민들 이야기를 주절주절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산 사람이 많으니 죽은 사람도 많은가 봐요. 그러니 주시도 많고.”
“선동요는 이 마을보다 커?”
쓰다듬던 내 팔을 도로 내려놓으며 선사가 질문했다.
“훨씬 크죠. 거긴 무늬를 찍은 비싼 기와를 올린 집도 많아요. 밤에 보면 불빛도 훤하고요, 늦은 밤 불조심, 불조심 외치면서 순찰 도는 사람까지 있답니다. 아... 물론 큰 도시를 구경해본 선사님 눈에는 별 거 아닐 수 있지만요.”
“그렇지 않아. 규모가 크던 작던,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흥미롭지.”
말을 마친 그녀는 밝게 웃으며 두 손을 모아 보잘 것 없는 나에게 정중한 작별 인사를 해주었다.

옴마야, 나 방금 연예인 만나고 왔다.
헤벌쭉 좋아 죽으려는 나를 보고 셋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좋은 건 좋은 거지. 그 유명한 4대 선문세가 사람을 직접 본 건 오늘이 처음인데.

“문하생인데?”
“응? 문하생이 어때서요.”
“별 거 아니거든. 혈통도 아니고, 직속 제자도 아니고. 그 년 이마에 묶은 말액 봤어? 하얗기만 하고 아무 무늬 없었잖아. 그건 그냥 선사에서 밥이나 겨우 얻어먹는 식객이라는 의미야.”
벌레 먹은 배추 잎을 정리하다 말고 그 박한 평가에 고개를 들었다. 그놈의 년, 년 소리 듣기 싫었다.
송혜교라고. 김태희라고. 내 마음속의 별들을 향해 짬뽕 같은 소리 하지 마.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싸했다. 셋째는 오줌 마려운 표정이고 일꾼 두 명은 아예 쥐고 있던 배추를 땅에 철푸덕 떨어뜨렸다.
입만 움직여 ‘뭐야? 무슨 일인데?’ 물어봤다.
동시에 목덜미로 누군가 후, 하고 뜨거운 입김을 불었다.

“아걸.”
“아이고, 설 공자!”
나는 자지러져라 뛰었다.
“신났네, 우리 아걸.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오늘 맛있는 거 얻어먹었다더니 신났어.”
“예... 그게. 지나가는 선사께서 큰 은혜를 베푸시어 저에게 밀과를...”
“좋았어?”
“좋았고 말고요! 꿀맛이던데요.”
나중에 먹으려고 아껴둔 밀과를 꺼내 – 덕분에 잇자국이 남았다 – 부적처럼 흔들어댔다.
저거 봐라. 사탄의 눈이 가늘어졌다.

Posted by 미야

2021/10/18 15:24 2021/10/1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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