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이 넘을 무렵, 결심이 섰다.

도시를 떠나자.

그렇게 하자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차분해졌다.

제임스는 서랍장을 열어 여분의 속옷과 깨끗한 양말을 챙겼다. 짐을 싸본 적이 하도 오래되어 순서가 어색했지만 많이 가져가면 가져갈수록 좋은 것이 속옷과 양말이라고 배웠다. 그는 총 일곱 개의 양말과 여덟 장의 팬티를 꺼내 차곡차곡 접었다.

다음으로는 거실로 가서 종이로 된 책을 책장에서 꺼내들었다. 제목이 맥베스였다.

「마음속에서 슬픔의 뿌리를 캐고 기억에서 뿌리 깊은 근심을 캐낼 수는 없는가. 상쾌한 망각의 약을 써서 마음을 짓누르는 독소를 일시에 제거하란 말이다.」

겉표지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속지에 책의 맛보기 구절이 그럴 듯한 로마체로 인쇄되어 있었다.
종이는 오래되어 누랬고 좀약 비슷한 냄새가 났다. 좋은 말로도 상태가 썩 좋다고 할 수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대량으로 구입한 필수 교양서적들 중 하나여서 뒤편에는 열람카드를 꼽는 봉투가 풀을 발라 덧붙여진 상태였다. 전자도서로 대체되면서 대량으로 폐기되던 걸 청소업무 근로자를 꼬드겨 몰래 하나 빼내왔다. 덕분에 구닥다리 방식의 열람카드도 그대로 붙어 있었다.
카드의 맨 아랫줄에는 어린아이가 힘을 줘서 정자체로 쓴 제임스 모어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름은 파기 예정이던 책을 빼돌린 뒤에 썼다. 이렇게 해두면 책을 훔친 게 아니고 영구 대여중 상태가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때는 어렸으니까 – 제임스는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열람카드를 빼냈다. 책은 제자리에 돌려뒀다. 아쉽지만 책은 가져갈 수 없는 물건이다.

열람카드를 일종의 메모지처럼 사용하여 하단부에 글자를 적었다.

나는 떠납니다.

지나치게 간결하여 어쩐지 유서 같은 느낌이 풀풀 풍겼지만 제임스는 여기서 더 길게 쓰고 싶지 않았다. 어디로 갈 거라는 목적지를 적으려니 당장 생각나는 게 없었고, 주변관계가 형편없는 탓에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으니 대신 갚아달라는 부탁을 할 것도 없었다.
카드 표면을 가볍게 쓰다듬은 뒤, 제임스는 그걸 식탁 위에 잘 보이도록 올려두었다.

주방으로 간 김에 냉동고 칸을 열어 아이스크림 통을 꺼냈다.
두 개 중 하나는 바로 해체했다. 비닐로 싼 현금뭉치 내용물은 꺼내어 네 뭉치로 나눴다. 몇 장의 지폐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눠 양말 속에 넣었다. 나머지는 적당히 바지나 점퍼 안주머니에 숨길 작정이었다. 용도를 끝마친 아이스크림 포장용기는 잘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

보다 묵직한 무게가 느껴지는 다른 아이스크림 통은 박스테이프로 꼼꼼하게 둘러 감았다.
강물에 빠지더라도 한 방울의 물도 통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되었다. 여러 번 감고 나선 손톱으로도 긁어보고 문질러도 보았다. 그렇게 여러 번 확인을 한 뒤에야 비로소 만족하고 여행용 배낭에 집어넣었다.

바지와 셔츠는 하나씩.
군청색 카고 바지와 라운드 넥의 회색 티셔츠를 꺼내기 위해 붙박이장 앞에 섰다. 가슴팍에 오렌지 주스 얼룩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다소 흉한 모양새지만 직장을 구하기 위해 면접을 보러 나가는 것도 아니고... 맨 앞에 걸려있던 엉뚱한 분홍색 꽃무늬 셔츠를 옆으로 밀고 회색의 옷을 잡으려고 팔을 죽 뻗었-

『...............!!!!!』

어릴 적 벽장 너머에 부기맨이 숨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산타클로스가 있다면 부기맨 또한 존재할 것이다.
부기맨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모른다. 제임스가 부기맨의 생김새를 궁금해 했을 적에 그의 어머니는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라 조언했었고, 구글은 15세 연령제한을 이유로 이미지를 차단해버렸으니까.
나이를 먹고부터 더 이상 부기맨의 생김새가 궁금하지 않게 되었건만... 쓸데없는 친절이었다.

부기맨의 손가락은 길었고, 하얬으며, 피아노를 오래 친 사람처럼 관절이 도드라져서 보기에는 좋았다.
다만 그 손가락 다섯 개를 전부 사용하여 사람 입을 틀어막았다는 점에선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참 많았다. 숨도 쉬지 못하게 콧구멍까지 덮어 막았다는 부분은 매우 유감이기도 했고.

사람은 숨을 쉬지 못하게 되고 난 뒤부터 30초가 지나면 절반은 미친다. 이후로 3분까지는 잔여산소를 태워가며 충분히 버틸 수 있으나 실상은 1분만 넘어가도 꼴딱 넘어간다. 돌고래 유전자를 가진 숨 오래참기 세계기록 보유자들이 아닌 이상 발악, 발광, 발버둥의 단계를 거쳐 착실히 정신줄을 놓는다.

제임스는 얼굴의 반을 덮은 손가락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이상할 정도로 미끄럽고, 기이할 정도로 온기가 없는 부기맨의 손가락은 그러면 그럴수록 제임스의 얼굴에 철썩 들러붙었다.
들숨과 날숨이 겨우 두 번 생략되었을 뿐인데 공기를 필요로 하는 폐가 속수무책으로 짜부라 들었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났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검은색 셔츠가 보였다. 정확하게는 검은색 바탕 위로 인쇄된 로고가 보였다. 홈디포. 흔하게 볼 수 있는 체인 철물점 가게 이름이었다. 「당신이 할 수 있으면 우리는 도울 수 있다.」글귀도 있었다.

『마이클, 그가 숨 쉬기 어려워하고 있어.』
또 다른 누군가가 부기맨을 만류했고, 부기맨은 짧게 아 소리를 내며 수긍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제임스가 숨을 몰아쉬기 위해 허겁지겁 입을 벌리자 잠시 떨어졌던 손가락이 언제 그랬냐며 코와 입을 도로 틀어막았다.
비명 지르는 건 꿈도 못 꾸고 그저 숨만 쉴 생각이었던 제임스는 마냥 억울할 뿐이었다.

『마이클, 그러다 그 사람 죽어.』
사람 죽이는 걸 말리는 것치고는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엄살은. 사람은 이 정도로 질식사하지 않아.』
『심장박동수가 높아. 분당 100회 수준까지 올라갔어.』
『위험한 수준까지는 아니네.』
『그만둬. 그에게 상해를 입히려는 게 우리의 목표는 아니야.』
『뭐, 그렇기는 하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던 이들은 반 기절상황에 빠진 제임스를 바닥에 눕혔다.
홈디포 철물점 가게 로고가 들어간 셔츠를 입은 쪽이 물러서자 다른 쪽이 몸을 수그려 쓰러진 제임스의 안색을 살폈다.
굿윌 헌옷가게에 들러 아무거나 집어온 게 분명한 – 소매가 터무니없이 짧은 탓에 손목이 드러났다 – 체형과 맞지 않는 후드티를 입은 그가 눈 감고 있던 제임스의 뺨을 가볍게 때렸다.

숨 막히게 하고, 얼굴 때리고.
제임스는 화가 났다.
『제발, 그냥 아무 거나 가져가세요.』
이에 「거 봐 내가 뭐랬어, 멀쩡하잖아.」철물점 로고가 한 마디 거들었고,
얼굴을 톡톡 때리던 쪽은 「눈 떠보세요.」요구하며 제임스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Posted by 미야

2020/06/09 13:31 2020/06/0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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