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으로 서둘러 가보자고 주장하는 - 사실은 졸라대는 후배의 뒷통수를 손바닥으로 후려갈겼다.
하여간 젊은 것들은 피가 절절 끓어서 문제다. 마이클의 눈에는 일찍 죽고 싶어 환장한 것처럼 보였다.
『인석아, 블뤼드헤이븐에선 아무도 안 가르쳐주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야.』
젊음과 열정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 않는다. 사실 그의 생각엔 일을 베베 꼬아놓는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마이클은 이 잘 생긴 후배가 왜 본거지인 블뤼드헤이븐에서 떨어져 나와 엉뚱한 스타 시티에서 헤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간 저 녀석의 장점은 그저 훤칠한 생김새밖엔 없군.」
나중을 위해서라도 아는 정보통을 통해 넌지시 블뤼드헤이븐 내부에서 저 인간이 무슨 사단을 일으켰는지 파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어디로 가는 건데요? 선배.』
『어디긴 어디겠냐. 서로 가야지.』
『엣? 그러다 강도들이 전부 도망가면요.』
『해피엔딩이지.』
『에엣? 베드엔딩이 아니고요?』
『무슨 소리냐, 너. 은행 건물이 폭파되고 사람들이 다쳐야 베드엔딩이지. 인석은 당연한 것도 몰라요.』
나무라며 채 떼지 못한 눈곱을 정리했다.

유령의 집처럼 고요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경찰서 내부는 오히려 분주했다.
현장으로 다수의 인원이 빠져나가면서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이 곱절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흡사 말벌의 공격을 받은 꿀벌의 벌통 같은지라 마이클과 딕 그레이슨을 보고도 아무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깨를 치고 지나가도 미안하다 사과를 하지 않았다.
뭐, 기분은 더럽지만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통증을 호소하는 어깨를 툭툭 친 뒤, 마이클은 글자가 잔뜩 적힌 상황판은 무시하고 벽걸이 텔레비전 앞으로 가서 섰다.

계획이 어긋나 퇴로가 막힌 은행 강도들은 나름 필사적이었다.
《앞으로 1시간 43분 주도록 하겠다! 헬기와 조종사! 그리고 더블치즈베이컨 피자 열 다섯 판! 사이드 메뉴는 갈릭 트위스터다.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 즉시 인질을 살해할 것이다. 제일 먼저 희생당할 어린양은 바로 이 여자다! 이제 1시간 42분 남았다.》
시커먼 스키 마스크를 뒤집어 쓴 범인이 겁에 질린 여직원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통통한 살집의 여직원은 너무 무서운 나머지 끽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굵은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극적인 효과가 나게끔 비명 좀 질러줬으면 하고 범인이 그녀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찔렀는데 여자는 가엾게도 비명을 지르기는커녕 오히려 숨을 삼켰다.
카메라가 그런 여자의 얼굴을 클로즈업 했다. 눈물에 마스카라가 번져 흡사 판다 같았다.

벽걸이 TV의 스피커를 통해 확성기를 든 데이비슨 반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질을 풀어주고 항복하라!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그 즉시 마이클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아니, 그런다고 쟤네들이 착하게 말을 듣겠느냐고. 이 와중에 작정하고 밥 먹겠다는 애들인데.

그렇게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구석 데스크에서 전화 수화기를 든 채로 딕 앤더슨이 휘익 휘파람을 불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리처드 D 앤더슨. 애칭은 딕.
똑같이 딕이라는 애칭을 사용하는 리처드 그레이슨의 등장 이후로 마이클은 그를 원조 딕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원조 딕은 발끈했다.
「내가 원조면 그럼 쟤는 짝퉁 딕이냐?!」
원조 딕으로부터 손가락질까지 당한 짝퉁 딕은 실실 웃던 걸 멈추고 굉장히 기분 나빠했다.
하여 마이클은 두 명의 딕을 리처드 1번, 리처드 2번으로 부를 것을 고민 중이다.

손등으로 턱을 괸 채 딴 생각을 하고 있자 성격 급한 원조 딕이 손가락을 따악, 딱 튕겼다.
『헤이, 마이클! 이리 오라니까. 범인 중 하나가 크레이지 덤프래.』
그럴 리가 없다며 마이클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뭐? 크레이지 덤프?! 농담이겠지. 45년형 받고 엊그제 감옥에 간 녀석이 은행에 왜 가 있어.』
원조 딕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왜 갔겠냐. 아무렴 녀석이 은행 계좌를 새로 개설하러 거기 갔겠냐. 것보다, 너. 서장님 말씀 하나도 안 듣고 있었구나. 사흘 전에 블록 게이블에서 탈옥했다고 전체 집합시켜놓고 주의 줬잖아.』
『어... 음.』
『잘 났어, 진짜. 또 눈 뜨고 졸았구먼.』
수화기를 얼추 턱 밑에 낀 자세로 원조 딕이 그를 향해 수첩과 연필을 집어 던졌다.

수첩과 연필을 던졌다는 건 통화 내용을 대신 받아 적으라는 얘기다.
공짜 비서 취급에도 불구하고 마이클은 별다른 저항 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괴발개발 급하게 휘갈긴 이름은 모두 아홉으로 이들은 모두 크레이지 덤프의 감옥 동기이거나, 사촌이거나, 동업자이거니,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관계일 것이다.
탈옥 사건에 연류가 되었을지는 아직 확정할 수 없다. 은행 강도 사건과의 연관성도 아직 모른다.
연필 끝을 세워 머리를 긁은 마이클은 그중에서 눈에 띄는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 옆으로 점 하나를 꾸욱 찍었다.

루카스 모드. 나이는 서른 아홉. 별칭은 루모.
비쩍 마르고, 들쥐처럼 앞니가 돌출되었으며, 팔뚝에 비키니 차림새의 미녀를 문신한 멍청이다.
열 두살 무렵부터 생 양아치로 시작해서 폭력에, 주거지 불법 침입에, 불법약물 소지죄로 감옥을 들락날락하다 마지막엔 장물 취급으로 쇠고랑을 찼다. 그게 대략 3년인가 4년 전일 거다.

제대로 다 받아 적었느냐 물어보지도 않고 원조 딕이 마이클로부터 수첩을 빼앗았다. 예절은 물 말아 잡수셨다.
『내셔널 밴코프에서 가장 가까운 피자 가게가 어디냐고? 씨발, 다들 살판 나셨군. 짜증나 미치겠네. 생각 중이라니까 기다려. 그러니까... 음. 더 빅스가 가까우려나? 맛은 로얄 페퍼가 더 좋기는 한데 은행 강도들 입맛 챙겨주기는 그렇잖아. 그런데 값은 누가 내고. 응? 몰라? 그런 대답이 어딨누. 이 와중에 시청에 문의하리?』
가만히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마이클이「더 빅스」보다「메모리즈 피자」가 가깝다고 훈수를 뒀다.
『메모리즈가 더 가깝댄다. 거기로 주문을 넣... 응? 콜라에 마취제를 타면 어떻겠느냐고? 그걸 왜 나에게 물어!』
바로 그 때 딕 앤더슨의 시선이 수첩에 찍힌 아주 작은 점에 머물렀다.
한 순간이나마 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딕 앤더슨은 여전히 수화기를 쥔 채로 짐짓 허리를 틀어 자세를 바꿨고, 그것으로 완전히 관심이 사라진 것 같았다. 어차피 쥐똥보다 더 의미가 없을, 흘려 찍은 작은 점이었다. 뭐랄까, 흡사 그건 문장 뒤에 습관처럼 찍힌 마침표와도 같아서 이게 뭐냐 물어보는 쪽이 이상했다.

잠시나마 눈빛이 달라진 사람은 또 한 명 더 있었다.
「뭐지. 두 사람만의 신호인가.」
겉으로는 입 꼬리를 당겨 핸섬한 미소를 짓고 있었음에도 파란 빛깔의 눈동자 위로 살얼음의 냉기가 스치고 지나갔다.
블뤼드헤이븐 경찰 대학교를 졸업하고 경찰관으로 근무를 시작한지 이제 겨우 1년 4개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몸 추임새가 그들만의 특별한 신호가 될 수 있음을 짝퉁 - 딕 그레이슨은 이미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바닥을 툭툭 걷어차거나, 입에 물고 있던 이쑤시개를 반으로 부러뜨리거나, 손가락으로 귀를 만지거나 하는 식이다. 버릇처럼 보이고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 사소한 몸짓이 사전 약속된 동작이라면 얘기가 사뭇 달랐다.
지난 2월에 마피아 조직으로 정보를 흘리는 것으로 적발된 부패경찰들도 비슷한 방식을 써먹었다.
그들의 신호는 테이크아웃 종이컵이었다. 다 사용한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이 아닌 책상 위에 놓는 날이면 그날 밤 늦은 시각에 어김없이 추적하기 힘든 익명의 번호로 전화 통화가 이루어지곤 했다.

생각이 너무 길었던 것 같다. 마이클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자신의 애송이 파트너로 시선을 던졌다.
『왜.』
『네? 아뇨... 별 것 아니에요, 선배님.』
황급히 변명하며 코를 긁었다.
FBI에선 코를 만지는 걸 두고「거짓말에 대한 신체반응」이라고 한다.
당연히 마이클은 속지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니긴, 인석아. 현장에 언제 가느냐고 묻고 싶어서 좀이 쑤시지?』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며 그가 히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 일을 워쩌나, 우짜나... 후후. 눈치로 보아 이미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은데.』
『네?』

별안간 TV 소리가 시끄러워졌다. 리포터가 뭐라고 다급히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화면은 회색의 연무로 온통 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카메라맨이 사래가 들린 것처럼 콜록대며 기침을 터뜨렸다.
《콜록, 켁! 연막탄입니다! 콜록! 방금 누군가 봉쇄된 은행 건물로 접근하... 컥! 케엑!》
그리고 마이클과 원조 딕, 짝퉁 딕 세 사람은 빠르고 정확하게 날아가는 화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로빈후드가 쏘아올린 깃털 달린 화살이 아닌, 은백색으로 빛나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것이 갈고리 발톱처럼 생긴 걸 드러내며 매끄러운 벽면을 어렵지 않게 움켜쥐었다. 이윽고 붉은 빛이 점멸하였고 동시다발적으로 화약이 터지는 쾅 소리가 났다.
《모두 엎드려!》
기차 화통을 삶아 잡수신 데이비슨 반장이 경고를 하기가 무섭게 검정색과 붉은색으로 코스튬을 입은 자가 연무 속에서 튀어나와 뚫린 구멍으로 훌쩍 뛰어들었다.

「아스널!」
「저럴 바에야 정문으로 들어가지 왜 굳이 3층 높이에서?」
「피자 주문 넣기 전이라 다행이다. 휴우...」


각자 딴 생각을 하며 세 사람은 벽걸이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Posted by 미야

2016/06/02 10:30 2016/06/02 10:30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2015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245 : 246 : 247 : 248 : 249 : 250 : 251 : 252 : 253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22451
Today:
139
Yesterday:
301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