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엔 이 아가씨를 채용하는 것이 가장 괜찮은 것 같아, 오남. 암산 실력 뛰어나고 외국어 능통이래.』
『어이. 지금 우리 가게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게 아니라고.』
핀잔에도 불구하고 태영은 혀를 장난스럽게 내밀었을 뿐이다.

「처음엔 엄마 오리를 잃어버린 새끼처럼 보였는데. 이젠 다 컸군.」
환상대륙에서 이곳으로 넘어오고 난 뒤에도 태영은 흡사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처럼 말을 잘 했다.
고대 마법의 영향을 받은 거라 짐작은 했지만 오남은 신관이 아니라서 자세한 이치라던가 방식이라던가 하는 건 알지 못했다. 다만 그거 참 편리하군, 생각만 했을 뿐이다.
그래도 한계는 있어 대륙 표준어 이외의 방언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고 읽기와 쓰기가 불가능했다.
소년은 바짝 약이 올라 자신에게 반쪽자리 선물을 안겨준 신룡의 무신경함을 욕했다.
「내가 까막눈이라니!」
그리고 하얀 색은 바탕이고 검은 색은 글자인 책을 사정없이 패대기쳤다.
「제기랄, 두고 봐. 선행학습과 야간자율학습을 일만 년이나 해온 나에게 불가능은 없어.」
학구심과는 약간 다른 종류라고 생각되었다. 먹고 자고 씻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머리에 띠를 맨 채 하루에 열여섯 시간 이상을 온전히 책상에 앉아 공부에 몰입하더니 아동용의 읽고 쓰기 교재부터 시작해 맹렬한 속도로 글을 깨우치기 시작했다. 읽기까지 2개월, 능숙하게 쓰는데 5개월 걸렸다.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빨랐음에도 그는 표기체계가 온전히 하나인 표음문자였음 딱 한 달이면 가뿐하게 해치웠을 거라며 자랑했다.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병기하여 쓰는 일본도 아니고. 귀족 말쌈이 둥귁과 다른 것도 아니면서 평민들이 쓰는 표기법과 구분하여 쓰다니. 너희들 하는 행동은 참 이상하다. 그래도 뭐, 나름 재밌었어.」
소년은 으스대며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려보았다. 그가 살던 곳에서는 승리를 의미하는 동작이란다.
그렇게 승리를 자축하는 동안 한쪽 코에서는 과로 탓에 시뻘건 코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오남은 아래턱을 어루만지며 일반 파베 문자로 적혀진 선전물을 대충 훑었다.
피곤에 찌든 경비원이 입에 담았던 두 사람, 에이딜렌과 안나의 이름도 보였다.
그중에서 외국어 실력이 탁월한 쪽이라면... 안나이던가. 에이딜렌이던가.
기억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는 견과류를 앞으로 자주 먹어야겠다 다짐하며 태영에게 말을 걸었다.
『미인의 기준이 암산 실력과 외국어 능통은 아니지.』
『어쩔 수 없다고, 오남. 여기 적혀져 있는 건 하나같이 미인을 뽑는 내용들이 아닌 걸. 체중이나 가슴 사이즈 같은 신체 크기도 안 적혀져 있고.』
그러면서 태영은 자기가 아는 단위법을 이쪽의 단위법으로 고쳐가며 윗입술을 가만 깨물었다.
『1kg이 대략 2릭스. 1cm가 3시온. 그렇다면 169cm에 49kg 여성은 500so에 몸무게 98rx겠군.』

거기까지만 했음 참 좋았을 것이다.
그런데 태영은 손짓으로 풍만한 가슴을 표현하며 둥글고 무거운 가슴을 위로 받쳐 올리는 시늉을 해보였다.
『내 기준엔 이 정도가 딱 좋은데.』
『남이 볼까 무섭다, 인마.』
멜론처럼 큰 가슴을 묘사하는 음란한 손을 탁 소리 나게끔 쳐내며 정색했다.
환상대륙에선 비정상적으로 큰 가슴이 미인의 기준이라도 된다는 건가. 그렇다면 몹시 기괴하다.
『큰 가슴이야 기괴한 쪽이 아니고 로망이지. 그리고 내 기준으로는 오히려 여기서 하는 짓이 더 기괴해.』
맞은 손등이 아프다며 입을 삐죽 내민 소년은 그렇게 주장하며「요리 잘함」이라 적힌 선전물 글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미인은 요리를 잘 합니다. 아무렴요. 특제 토마토 소스를 만들 줄 알아야 미인인 거에요.

하지만 오남의 눈에는 그보다 훨씬 기괴한 요소가 있었다.
왕이나 귀족이 없는 세계에서 자란 소년은 무엇이 이상한지 전혀 모르는 눈치다만.
『그게 무슨 소리야, 오남. 내 세계에도 왕은 있어.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의 할머니 여왕도 있고, 대신관에 필적하는 교황이라는 분도 계셔. 귀족이라 부를만한 유산 계급 또한 존재하지.』
『하지만 텐. 넌 절대계급을 피부로는 그다지 못 느꼈던 것 같아. 그러니 이런 걸 눈으로 보고도 놓치지.』
『내가 뭘 놓쳤다고.』
『보라고, 그녀들은 보모에 과일가게 점원에다 보험사 직원일세.』
『그게 어때서. 그게 그렇게 이상한 거야?』
오남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소년의 어깨를 토닥였다.
『환영하오, 미지의 세계를 접하는 순진한 소년이여. 빙빙 돌려가지고는 네가 이해를 잘 못하는 눈치니까 그냥 이렇게 질문할게. 란데가스 제국에서 제1의 미녀는 누구지?』
뜬금 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은 바로 튀어나왔다.
『그야 바르샬롯 황녀지.』
오남은 윙크를 했다.
『정답. 잘 맞추셨습니다. 그럼 제2의 미녀는 누굴까.』
『어... 그건 좀 어려운데. 레이나 카르튼 대공녀?』
『나는 개인적으로 일라이스 후작가의 영애가 더 미인이라고 생각하는데.』
『너야 드레스와 장신구를 판답시고 커튼 뒤에서 귀족가의 영애들을 직접 만나보았겠지만 난 아니거든. 난 일라이스 후작가의 영애의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가 무슨 색인지도 몰라.』
『그렇담 카르튼 대공녀는 직접 본 적은 있고?』
『멀리서 딱 한 번.』
『그런데도 그 빨간머리 왈가닥을 제국에서 손꼽는 미인이라 생각한 거야? 수상하군... 어쨌든 좋아. 그럼 제3의 미녀는 누굴까.』
『아~ 씨! 미인대회를 란데가스 제국에서 여는 것도 아닌데 질문이 왜 이따구야. 게다가 3등, 4등, 5등을 가려 어쩌려고. 그래봤자 우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
무작정 달렸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남은 희극조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래. 전부 쓸데없어. 어차피 미인대회를 열어봤자 우승자는 무조건 황녀 전하야. 그런데 왜 그런지 아나?』
『그야... 황녀님이 제국에서 가장 예쁘게 생겼으니까?』
『허허허. 이리 오시오. 환영하오, 순진한 소년이여.』
오남은 재차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태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같은 남자가 어깨를 만지는 건 싫다. 혐오감을 드러내며 태영이 어깨 위에 닿은 오남의 손을 털어냈다.
『이제 알겠어. 그렇다는 건 그 사람의 지위가 곧 미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건가.』
『일반적으로는.』
『뭐야, 그게.』
태영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게 절대계급이 존재하는 이 세상의 법칙이다.
바르샬롯 황녀보다 더 아름다운 빵 굽는 파티쉐는 있을 수 없다. 일라이스 후작 영애보다 더 빼어난 미모의 가정교사는 있을 수 없다. 제국은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어우, 좇 같아. 그렇담 미인대회에 직업이 보모인 평민 출신의 여성이 애써 참가를 해봤자 등수에 들 가능성은 요만큼도 없다는 얘기잖아.』
『맞아.』
그 생김새가 무척이나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그래봤자 태생적으로 그들은 미인이 아닌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게 자연스러워. 네가 그걸 인정하지 못 하는 건 왕 없는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이야.』
『쳇. 저쪽 세상에도 왕은 있다니까 그러네.』
불쾌감을 피력하며 소년이 있지도 않은 날벌레를 쫓는 시늉을 했다.

Posted by 미야

2015/09/21 21:53 2015/09/21 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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