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급자족용 습작입니다. 완제품이 아니라서 부분적으로 내용이 수정되고 있습니다. 카테고리는 오남 이야기로 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오남 - 저주하는 자」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


그날 새벽, 악몽을 꾸었다.
나는 다시 차가운 우물 아래로 떨어져 쉰 목소리로 살려 달라 외치고 있었다. 몸은 이미 얼음장처럼 굳었고 물에 불어 주름진 피부는 새파랗다 못해 보라색에 가까웠다. 부러진 것이 확실한 복사뼈는 냉기에 압도된 탓에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다. 그저 춥고 또 추워서... 형님들의 이름을 불렀고, 어머니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줘! 구해줘! 날 여기서 꺼내줘! 부탁합니다, 부탁할게요, 흐으윽! 살려주세요!』
내가 빠진 마을 우물은 그다지 깊지 않은 편으로 수량이 부족한 탓에 이용하려는 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두레박을 한 번만 올리면 될 걸 여기서는 적은 양으로 세 번씩 끌어올려야 했기에 어른들은 사용을 기피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곳은 공동 우물이었고, 줄을 일부러 서지 않을 정도로 한적했기 때문에 나처럼 힘이 약한 아이에겐 요긴한 장소였다. 이를 고쳐 말하면 인적이 아예 끊기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외치는 비명은 아무에게도 닿지 않았다.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어째서야?!』
허리까지 차오른 물을 힘겹게 참방대며 나는 울부짖었다.
『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거야?! 나는 이 안에 있어!』

그 까닭을 이해한 건 다른 육신으로 태어나고 난 뒤였다.
나는 막내였다. 위로 여덟 명이나 되는 형제자매가 있었다. 가난했던 부모는 먹는 입의 수를 줄일 필요가 있었다. 즉, 실족하여 우물에 빠졌다는 걸 알았음에도 일부러 무시했다.
그들이 나를 위해 해줬던 일은 그렇게 죽는 것도 운명이겠거니 체념하고 우물 밖에서 손을 모으고 합장한게 전부.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주지 않고 우물 뚜껑을 닫아 봉인했다.

「도와달라 말을 해본들 달라지는 건...」
차가운 물로 세수를 했음에도 얼굴에서 멍한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어쩌면 나의 일부는 여전히 그 우물 안에서 참방대고 있나 보다.

오늘도 날씨는 좋았다.
고민을 해봐도 이렇다 할 수업 일정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부러진 창틀을 고쳐볼까.
가만 생각했다가 도리질하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었다.

『부서고를 이용하고 싶다고요.』
『예.』
『그럼 이 숙희가 안즈 님이 쓰실 출입증을 하나 만들어 드리지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서류뭉치와 씨름하고 있던 숙희는 서랍 안에서 아무 글도 안 적힌 보통의 나무패를 꺼내 굉장한 달필로 빠르게 내 이름을 손수 적어 넣었다. 옛날에 보던 것과 모양이 상이하고 출입증이라기보다는「오늘의 숙직 당번 - 지리가 안즈」를 적는 것 같아 묘하게 신경 쓰였지만 명색이 숙사감대부라는 자가 일을 허투루 할 리는 없으니 일단은 그게 출입증일 거라 믿었다.
『그럼 또 궁금한 건?』
이미 학습된 바 있어 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이리 말했다.
『오늘 석식 반찬은 무엇입니까.』
『개구리 반찬.』
『에?』
『놀라긴. 농담이오. 그럼 잘 가시오.』
나무패를 어떻게 이용해야 된다던가, 부서고의 위치는 어디라던가, 출입 가능 시간은 어떠하다는 안내는 깡그리 무시되었다. 숙희는 책상에서 눈조차 들지 않았다. 각각의 장부에 글씨를 적어나가는 붓은 신들린 듯하여 일부러 말을 걸어 그 흐름을 끊기도 민망하였다.
나는 얌전히 허리를 구부려 절을 올리는 것으로 용무를 마쳤다.

왕궁 도서관은 내가 알기로는 총 여덟이다. 물론 이건 내 기억 속의 정보이고 어쩌면 현재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내가 아는 이야기대로라면 그 중 셋은 황실의 영역이고... 셋은 관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라서 급제를 하지 않은 자가 함부로 기웃거리면 경을 친다. 하여 남는 것은 두 곳인데 가운데 중(中)자를 쓰는 중부고가 일반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도서관이다. 나눌 분(分)자가 들어간 분고는 중부고와 이웃하여 건물이 섰는데 그 외관은 매우 작다. 이곳은 책을 진열하거나 열람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고 왕궁 도서를 총괄하여 관리하는 직원들이 상주를 하는 곳이다. 새벽에 술병을 들고 부어라 마셔라 할 정도로 보안은 널럴했으나 어디까지나 관리라서 살짝 그 만행을 눈감아주는 것이고, 일반인은 그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나는 자석이 끌어당기는 것처럼 중부고가 있었던 장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현선당 앞에서는 샛길도 사용했다. 부지런히 풀을 옮겨 심었음에도 어찌나 다들 애용을 해주셨던지 흙이 드러난 부분으로 눈치껏 내려가면서 나는 큭큭 웃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변치 않는 것도 있었다. 이 샛길을 이용하지 않으면 명각루와 그 주변 연못을 따라 먼 길을 한 바퀴 빙 돌아야 한다. 나처럼 귀찮음을 느낀 이들은 기꺼이「개구멍」으로 질러갔다.
의외였다면 바지춤을 잡고 아래 돌담을 기어 내려갔을 적에 귀신이 노려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갑자기 등줄기가 오싹했는데 도대체 이 오한을 느끼게 만드는 것의 정체는 뭐지 이러고 주변을 둘러봤을 적엔 시야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목을 움츠렸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나쁜 감정을 가지고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거였다. 따라붙는 시선은 그저 나를 관찰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기심이 많은 귀신이거나 그와 비슷한 종류일 거다. 아니면 적룡신을 모시는, 인간 아닌 부류의 시종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쪽의 기분이 나빠지기 전 허겁지겁 풀밭에서 빠져나갔다.
「아이고, 무서워라. 다음엔 아무리 귀찮아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하겠군.」
다시 길 위로 돌아와 먼지를 털며 그렇게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버릇처럼 지름길을 이용한 건 그다지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나는 그렇지 않지만 안즈는 처음 와보는 곳이잖아.」
익숙해도 그 익숙한 티를 내는 건 좋지 않다.
그래도...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오랜만에 글자를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다. 종류는 뭐라도 상관없었다. 오래되어 낡은 이야기책이 취향이지만 지루한 연보감이라고 해도 기꺼이 읽어줄 작정이었다.
「그게 아니지.」
이쯤해서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 중부고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연보감을 찾는게 좋을 듯했다. 연보감이라는 건 1년 동안의 일어난 일이나 사업을 보고하는 정기 간행물이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이 세상에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싶다면 이보다 더 좋은 자료는 없다.
「옳거니. 바로 그거야.」
그러자 엉덩이에 날개라도 돋아난 기분이 되었다.
스스로의 얕은 지혜에 감탄하며 신이 잔뜩 나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15/05/30 10:18 2015/05/30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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