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51

※ 2013년의 시작은 토너가 줄줄 새는 프린터와 함께...;; 썅. 미드 Person Of Interest 팬픽입니다. 일부 내용이 드라마 설정과 같지 않습니다. ※


거울 속의 여자는 어쩐지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꼴불견이라고 생각하며 핸드백을 열어 무기-화장도구를 꺼냈다.
정기적으로 관리한 탓에 헤어스타일이나 피부, 눈썹모양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노화에 따른 미세한 잔주름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눈 밑과 턱의 처진 군살은 고가의 미용시술로 감쪽같이 없애버렸다. 머리카락은 원래의 색보다 한 단계 밝게 염색했고, 눈두덩이엔 옅은 살구색의 아이새도우를 발라 생기가 돋보이게끔 연출했다. 잡아당겨진 옆머리 아래로 진주 귀걸이가 반짝였다.
「완벽해. 그러니 기죽을 것 없어.」
입술에 립스틱을 덧바르며 차분히 외모를 점검했다.
시차 적응 탓에 피부가 거칠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옷맵시까지 살피고 나니 아까보다 훨씬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번져나간 화장품을 새끼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내며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다시 호텔 라운지로 돌아갔다.
입구 방향부터 차분히 살폈지만 그녀와 약속을 잡은 남자는 아직 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상대가 누구이든 항상 10분 먼저 와서 기다리던 전남편과는 다르게 딱 시간을 맞춰 도착하려는 모양이다. 아니면 갑자기 쏟아지는 굵은 빗줄기 탓에 의도하지 않게 늦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도시의 교통체증은 맑은 날에도 악명이 높다. 뉴욕시 인구가 어느 날 갑자기 절반으로 줄어든다면 모를까, 무지개가 뜨든 폭풍우가 몰아치든 앞으로도 좋아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금방 그칠 비는 아니야. 어쩌지, 우산을 안 가져왔는데.」
입구로부터 거리가 제법 있었음에도 기분 나쁜 습기가 느껴졌다.
부르르 떨던 그녀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라운지 옆에 위치한 커피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성이 먼저 테이블에 앉아 남성이 오기를 기다리는 건 제3자가 보기에 썩 좋지 않은 모양새지만 오늘은 그냥 예외로 치기로 했다.

그렇게 몇 걸음 걷다 반대편에서 다가오던 커다란 남자와 어깨를 부딪쳤다.
『아, 미안합니다, 부인.』
부주의하게 앞을 보지 않고 걷고 있던 건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검정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황급히 사과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렇다고 해도 세게 부딪친 건 아니었기에 올리비아는 교양 있게 미소를 지으며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남자는 바쁜 일이 있는지「그거 다행이군요」한 마디만 덧붙이곤 빠른 걸음으로 승강기를 타러 갔다. 올리비에는 그 남자가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버튼을 누르는 것만 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상념에 잠긴 탓에 남자의 이목구비나 목소리는 금방 잊었다. 하지만 그가 넥타이를 하지 않은게 어쩐지 기억에 남았다.

올리비아가 만나려고 한 남자는 죽은 전남편의 친구로 이름은 해롤드 렌이라고 한다.
남편과는 MIT 대학에서 만났고, 직업은 손해사정사이고, 직원의 수가 자신을 포함하여 다섯이 넘지 않는 작은 보험회사를 운영한다. 규모는 작아도 주 거래 고객들이 상류층이다보니 먹고 사는데 부족함은 없고, 취미는 희귀서적 모으기. 듣기로는 결혼은 하지 않았다. 자녀도 없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올리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가 나쁜 시누이에 대해 꿰고 있는 내용도 이보다 곱절은 더 된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전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내에 대해 아는 내용이 겨우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 하물며 그와 직접 만난 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서 언젠가 한 번은 그가 실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편이 지어낸 일종의 상상친구인 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다.
「그건 아니지, 올리비아. 실제로 의심했던 건 그런 내용이 아니었잖아?」
교통 체증으로 늦었다며 사과하는 남자를 향해 억지웃음을 짓던 올리비아는 가벼운 두통을 느꼈다.
그랬다. 아주 먼 옛날, 그녀는 해롤드 렌이 어쩌면 남편의 동성애 파트너가 아닐까 의심한 적이 있다.

『오랜만입니다, 올리비아. 이렇게 보니 건강해 보여서 좋군요.』
인사말은 형식적이고 딱딱했다.
『올리비아?』
한 번 더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빗물에 젖은 남자의 어깨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이상한 기분이다. 그녀는 화들짝 꿈에서 깨어나 30년 가까이 학습한 미소 - 이른바 상류사회에서 표준 모델이라고 여겨지는 상냥한 표정을 지으며 뺨과 입술 근육을 솜씨 좋게 잡아당겼다. 의붓딸의 학교 행사에서 곧잘 써먹는 가면으로 지루해 미칠 것 같은 본심을 감추기에 엄청 효과적이다. 고백하자면 가끔은 재혼한 남편과 부부싸움을 할 적에도 사용한다.
『갑자기 연락을 드렸음에도 이렇게 만나주셔서 감사해요, 해롤드.』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오, 저도 방금 전에 도착했답니다. 그보다 시간을 내주셔서 고마워요.』
올리비아의 발음엔 런던 억양이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녀의 친정은 영국이다.
『괜찮습니다. 일정이 한가해서 시간을 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습니다.』
남자 역시 기계적으로 웃었다. 마치 보험금 지급 절차에 대해 문의하는 고객을 앞에 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반듯하고 예의발랐다. 하지만 친절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으로 사내의 눈빛은 냉정했다. 그리고 그 속을 알 수 없었다.

유리알을 닮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저 밑바닥에서 차가운 불꽃이 튀었다.
「사기꾼!」
죽은 전남편 네이슨 잉그램은 이 남자를 전적으로 신뢰한 듯하다만.
올리비아는 단 한 번도 해롤드 렌이라는 자를 좋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오히려 격렬히 증오했고,
원수처럼 미워했다. 그것이 본심이다.

싸늘함이 안개처럼 그녀의 주위를 에워쌌다. 주문한 홍차에는 입조차 대지 않았다.
『부탁할게 있어서요.』
『무엇을?』
해롤드가 남편의 동성 애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곧 착각이었던 것으로 판명났다. 왜냐하면 그들 부부 사이가 멀어지기가 무섭게 네이슨 잉그램이 젊은 여자들과 신나게 바람을 피워댔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남편은 열 살 연하의 여자까지 침대에 끌어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아는 화가 나지 않았다. 반대로 안심이 되었다.
남편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게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해묵은 오해가 풀렸다고 좋아하기는 일러서.
비밀스런 눈빛, 공모하는 손짓, 잊을 듯하면 매번 걸려오는 짧은 안부전화.
방향을 잃은 그녀의 막연한 의심은 더욱 복잡해졌고, 어두워졌으며, 보다 심각해졌다.

올리비아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제야 고백하는 건데 나는 내 아들 윌리엄이 당신을 지나치게 따르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심지어 나는 당신과 윌이 성관계를 가진게 아닌가 의심했었죠.』
『올리비아. 지금 뭐, 뭐라고요...?』
둔기로 세게 얻어맞은 충격에 들고 있던 찻잔을 비스듬히 잘못 내려놓았다. 덕분에 3/1가량 남아 있었던 홍차가 흘러넘쳐 테이블을 더럽혔다. 찻잔이 쓰러졌든 말든, 해롤드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내의 동공은 계속해서 크게 벌어졌다.
윌리엄과 성관계를 가졌을 거라 의심했다고?
기겁을 한 손해사정사의 입이 금붕어의 그것처럼 뻐끔뻐끔 열리고 닫겼다.
『그런! 나는. 결코. 단 한 번도!』
『알아요.』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다른 방향으로 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건 아들과 멀어져버린 못난 여인의 몹쓸 상상이죠. 윌리엄과 나는 더 이상 피가 통하는 아들과 엄마가 아니에요. 막막한 타인과 같은 관계죠. 그 아인 내게 얼마나 예의바르게 구는지 몰라요. 마치 날 큰 기업체 CEO처럼 대해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해롤드 삼촌이라 부르면서 애정을 표현하지요? 그 아이가 당신에게 전화를 걸면서 웃는 걸 봤어요. 마치 애인과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맙소사. 내가 어떤 기분이었을 것 같아요? 윌은 철이 들고나선 나에겐 그런 표정 보여준 적 없어요.』
속눈썹이 빠르게 깜빡깜빡 움직였다. 마침내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눈가를 눌렀다.
『그러니 부탁할게요. 수단에서 봉사활동은 그만두고 미국으로 돌아오라 당신이 얘기해줘요. 그 아인 내 말은 더 이상 듣지 않으니까... 이런 부탁하기, 죽기만큼 싫어요. 그치만 나는.』
거기까지 말한 여인이 품위도 잊고 콧물을 들이마시는 소리를 냈다.

Posted by 미야

2013/01/02 19:34 2013/01/02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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