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0

주저하며 스치듯 입술을 누른다.
사랑스런 버드 키스.
손에서 놓아버린 그리운 얼굴들이 어둠에서 걸어나와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친구의 얼굴. 외국으로 떠나버린 아들 같은 청년. 상복을 입은 약혼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생사조차 알 길이 없는 형제들.
온기 없는 허상이 그의 뺨을 감싸고 부드럽게 입술을 맞춰온다.
「해롤드.」
슬픔따윈 고이 접어 역병에 걸린 나무뿌리 아래로 파묻어버렸다고 생각했건만.
여전히 꿈틀거리며 역사하는 감정은 메마른 눈동자에 물기를 가득 채우도록 명령한다.
천만번의 낮과 밤을 헤아려 말살하려 노력한 그것의 이름은 후회.
칼을 휘두르고 주먹을 휘둘러 어떻게든 살해하려 노력한 그것의 이름은 절망.
존재하지 않는 서버로부터 유효하지 않은 계정으로 바이러스성 메일이 도착한다.
백신 프로그램을 동원해도 치료가 불가능.
감염되어 망가져가는 심장.
아아, 당신들은 이다지도 사랑스러운데.
어째서 나는 덩그러니 혼자 떨어져 이를 악물어야 하는 거지.
「해롤드.」
사라진 얼굴들은 다시금 입술을 꾹꾹 눌러오며 존재를 피력한다.
고여 있던 눈물이 혹시라도 아래로 주루룩 흘러내리는 건 아닐까 겁을 내며 부운 눈을 올려떴다.
『영화는요.』
스스로 생각하기엔 의식이 돌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졸음에 취해있었다.
무릎담요를 끌어올려 이불처럼 목 윗부분까지 덮은 탓에 머리는 뜨거웠다. 반대로 신발을 벗어던진 발은 차갑다. 상이한 온도차이가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동시에 발을 따뜻하게 만들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한다. 발가락을 꿈질거려 쿠션 틈새를 벌렸다.
『모르겠어요. 안 보고 있었어요.』
취기 탓인지 대답하는 목소리 또한 잔뜩 쉬어있다.
글쎄다. 독한 종류도 아니고 맥주 정도에 취할 것 같지는 않았다만 - 어쨌든 핀치는 알코올이라면 금방 신호가 오는 체질이다. 상상과 달리 리스도 그와 비슷한 체질일 수 있다. 풀어헤친 셔츠자락 틈새로 보이는 살갗이 짙은 분홍색이다. 그리고 그리로 뜨거운 열기가 확확 솟구쳤다. 마치 용광로 같다 -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체온이 이상하리만치 높다. 감기에 걸렸나? 그렇다면 큰일이다.
『존?』
소리를 내어 남자의 이름을 부르자 어렵게 쌓아올린 사고의 이미지들이 흔들린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블록은 밑둥부터 요동치며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화에 대해 질문해야 하는데. 지금은 몇 시나 되었나. 내 안경은 어디에 있지. 베어는? 여기는 어디. 나는 과연 안전한가. 것보다 네이슨은 어디로 갔지. 그를 추궁하여 감기약을 어디에 뒀는지 물어봐야 하는데. 발이 시렵다. 코가 아리다. 눌린 등이 불편하다. 하소연하며 뾰족한 코로 리스의 겨드랑이를 꾹꾹 눌렀다.
『영화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어요.』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려온다.
천상에서 순수하게 반짝반짝 빛나는 그들의 목소리.
「해롤드.」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아아, 사랑스러운 사람들.
37.5℃의 아름다운 온기가 그를 온전히 감싼다.


* * * 굴욕의 캡틴 아메리카.

Posted by 미야

2012/11/09 10:54 2012/11/09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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