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일상생활21

모니터는 여러 중요한 정보 화면을 빠른 속도로 흘려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핀치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베어를 산책시키는 문제에 대해 리스 씨와 상의를 해야 하는데.」
뉴욕에는 약 1,910만명의 인구가 있다. 그리고 가구당 아이들 수보다 훨씬 많은 애완견이 존재한다. 개와 같이 산책하거나, 개와 같이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은 주변에 널렸다. 따라서 핀치가 베어를 데리고 거리로 나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 진 않아서 낯선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어머나, 개가 참 잘 생겼네요, 이름이 뭔가요?」인사를 건네는 일이 부쩍 늘어났다. 다리를 저는 정장 차림새의 중년 사내와 남의 불알 뜯어먹고 살았던 사악한 수색견의 조합은 아무래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듯하다. 베어가 살갑게 꼬리를 흔드는 법을 배우고 나서는 더 심해져서 - 특수한 훈련을 받은 개 어쩌고는 그만 잊자 - 언젠가부터 빙긋 웃는 호의에 가까운 시선이 늘 따라붙게 되었다. 평범함을 가장하고 익명성 속에 숨어 흐릿한 인상을 풍기던 그에게는 달갑지 않은 일이다.
오늘 오전에는 녹차를 팔던 가판대 점원이「오늘도 멍뭉이랑 같이 나오셨네요?」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개를 좋아하는게 분명한 남자는 베어와 대화를 나눈답시고 멍멍, 이러고 개 짖는 소리를 흉내냈다. 세트로「설탕 드려요?」핀치의 독특한 취향도 기억했다. 확실히 개와 같이 있으면 기억이 더 잘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베어가 나쁘다는 얘기는 아니고.

이쯤해서 핀치는 핸드폰으로 푸스코와 통화 중인 리스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개를 이곳에 데려온 건 리스인데 목욕시키기, 산책시키기, 밥 주기, 놀아주기, 빗질하기, 응가 처리까지 어느새 전부 핀치의 몫이 되어버렸다.
「제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동물을 못 키우게 되어있어요.」
라는 건 이스트 없이 급하게 프라이팬에 구워낸 핑계고.
속사정은 약간 복잡하다.

《당신, 유부남이었어?!》
용건 같은 건 다 까먹고 핸드폰 저편에서 라이오넬 후스코가 소리를 질러대고 있다.
리스의 표정은 걸작이었다. 꿈뻑꿈뻑 속눈썹을 깜빡거리는데 말문이 갑자기 막혔을 적에 그가 보이는 독특한 버릇이다.
《다 들었어. 뉴욕 저널의 미모의 신문 기자와 데이트를 한게 언제라고 딴 여자와 결혼했다고?》
마우스를 움직이던 핀치의 손동작도 딱 멈췄다.
흥분했는지 라이오넬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리 매우 컸다. 이번에는 화장실에 숨어 변기 물을 내리며 어렵게 통화를 하는게 아닌가 보다. 공원이라던가, 건물의 흡연구역 같은 장소일까. 예민한 핀치의 귀로 몇 개의 단어가 들려왔다. 카터, 토스터기, 에소프레소 기계, 허니문, 등등.
리스가 손바닥으로 까칠한 뺨을 쓸어내렸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
《카터가. 섭섭하게 카터에게만 말해준 거야?》
『틀려. 그건 위장이었어, 라이오넬.』
《자네 와이프는 언제 소개시켜... 뭐어?! 그럼 벌써 이혼한 거야?》
『결혼을 했어야 이혼도 하지.』
《그런가? 그럼 위자료 걱정은 덜었네. 다행이군.》
『뭐가 다행이라는 건가.』
《랜든 워커 시장 후보의 체포 이후 FBI도 철수하고 인사부 일도 그럭저럭 가라앉았어.》
어렵게 한 바퀴 돌아 본론으로 돌아왔다.
가까스로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이 된 리스는 궁금한 점 몇 가지를 더 물어본 뒤에 사무적인 대화를 원만하게 마무리 지었다.

대화를 몰래 엿듣던 핀치가 혀를 끌끌 찼다.
『공짜 에소프레소 기계를 얻을 기회를 날려버렸군요.』
『네?』
『형사님이 당신에게 결혼 축하 선물을 하고 싶은 눈치던데.』
『장난이에요. 카터나 푸스코나 제 입장을 모르지 않아요.』
『어떤 입장이오?』
리스는 압, 이러고 벌렸던 일을 도로 다물었다. 전부 알면서 왜 묻느냐는 것이리라. 그 눈빛에 약간의 원망이 섞였다.
『.......... 알잖아요.』
『모르겠는데요, 미스터 리스.』
『시치미 떼긴.』
『아뇨, 정말 몰라요. 어쨌거나 이젠 당신도 사생활이라는 걸 만들 필요가 있어요. 젊은 여성과 같이 식사를 하고, 영화도 보고. 그건 그렇게 나쁜게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도 데이트 안 하잖아요, 핀치.』
『누가 그래요? 제가 데이트를 안 한다고.』
핀치는 허세를 부리며 일부러 즐거운 콧소리를 내어봤다.

젠장. 괜히 그 말을 꺼내서.

Posted by 미야

2012/11/12 14:04 2012/11/12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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