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31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엉덩이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린 흉한 모양새로 자빠져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아, 어쩌지. 방금 뇌가 녹았다.
오금이 풀려 허리 아래로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겨우 손가락 하나가 어설프게 움직였을 뿐으로, 서툴게 모스 부호를 치는 것처럼 중지가 까딱였다.
그나마 위안으로 삼자면 나 혼자 창피한 꼴을 당한 건 아니라는 거였다.
피리 불던 사나이도 허리가 빠진 모양새로 넘어져 경련을 일으키는 중이었는데 나처럼 뇌에 정지신호가 온 것 같았다. 그는 애가 타는 눈빛으로 떨어진 피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마음만 굴뚝이고 몸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주는 눈치다. 벌벌 떨며 어떻게든 손을 뻗어보려 했으나 욕심이 과했다. 겨우 어깨만 들썩였을 뿐이었다.

딩, 이러고 악기의 줄을 튕기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얼음처럼 차가우면서도 아까보다 음이 약간 높았다.
소리가 달라지면 충격도 달라지는 건지 코피가 왈칵 터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저 소리를 앞으로 두 번만 더 들으면 뇌가 액체로 변해 인근한 눈구멍과 콧구멍을 통해 조용히 흘러내릴 터였다.
나는 제발 그만하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문제는 쇼크가 와서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는 거였다.

“함광군!”
제발 그만 하라는 뜻인지, 아니면 더 해보라고 부추기는 건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일제히 달려오며 한 사람의 이름을 입을 모아 외쳤다.
바닥을 밀며 천천히 기어가던 나는 제발 전자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함광군!”
다행스럽게도 악기의 줄을 뜯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고, 대신 잘 벼려진 검이 검집을 빠져나올 적의 날카로운 금속음이 그 뒤를 이었다.

“명화부에 불을 붙여라.”
지시에 따라 어둠 속에서 밝은 불빛이 일어났다. 명화부가 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장터에서 가짜 도사로부터 사들인 불쏘시개 부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쪽은 청색에 가까운 색을 냈고, 바람에도 쉽게 꺼지지 않았다. 적당한 불빛으로 사야가 확보되자 그 다음으로는 일사천리였다.
흰 색으로 옷을 맞춰 입은 수사들이 별빛을 가리던 장대를 재빨리 걷어냈다. 동강이 낸 장대는 횃불처럼 사용되어 다시 불타올랐고, 마당을 어슬렁거리던 주시들의 모습이 더욱 확연해지자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살육의 장이 펼쳐졌다.
이미 죽었던 것들이니 ‘살육’이라기보다는 ‘처리’가 보다 걸 맞는 표현이겠지만.
두부를 자르는 것처럼 팔과 다리가 떨어져 나갔다.

무리 중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남사추와 남경의였다. 두 사람은 윗 연배 수사들의 뒤를 따라 빠르게 검을 움직이며 주시를 정리했다. 날렵하고 가벼운 몸동작을 보여주며 그 어떠한 동요 없이 그르륵 소리를 내는 시체들을 베어나갔다. 저 어린 나이에 썩어 문드러진 시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 보니 새삼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떼거리의 습격 탓에 의복이 엉망이 된 금릉을 일으켜 세운 것도 그 두 명이었다.

“쓸데없는 도움이야! 나 혼자 일어설 수 있어!”
고집쟁이가 앵앵거렸다.
하지만 순전히 허세여서 남경의가 일부러 팔을 놓자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를 본 남사추가 넘어지지 않도록 옆에서 잘 잡아주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금릉은 고맙다는 인사를 일절 하지 않았다.
대신 화풀이를 하듯 검을 휘둘러 주시를 정리하는 일에 끼어들었다.

“피리요! 저 사람이 피리를 불어 주시를 조정했어요! 함광군.”
시체들을 쓸어내는 와중에 누군가 피리를 주목했다.
나는 약간만 남아있던 힘을 전부 끌어 모아 바닥에 떨어진 대나무 피리를 움켜쥐었다.
검은 옷의 괴인이 당장 그걸 자신에게 넘기라며 야단법석이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못 넘긴다. 이건 위험한 물건이다.
고소 남씨는 뒤로 빠지고, 운몽 강씨는 이죽거릴 거다.
난릉 금씨는 과장된 헛소문으로 치부할 것이고, 청하 섭씨는... 거긴 망했다.
그렇다면 이 물건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피리를 놓아라.”
함광군이라는 이의 목소리는 음에 고저가 없었다. 듣기만 해선 감정이 하나도 없는 사람 같았다. 냉기도 없고, 온기도 없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었느냐, 그건 또 아니었다. 이대로 계속 고집을 부리며 피리를 놓지 않는다면 남의 사정 봐주지 않고 손을 아예 잘라낼 사람이었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원한이 서린 눈빛을 하고 있는데 그걸 어떻게 모르겠냐고!

평범한 말투였지만 목소리에 위엄이 가득했다. 함광군이 다시 경고했다.
“피리를 놓아라.”
경고를 들었음에도 손아귀에 힘을 줬다. 에라, 까짓 것. 아프긴 하겠지만 손모가지 정도는 잘려도 다시 붙는다.
대나무로 만들어져 속이 텅 빈 피리의 표면이 지나치게 구워진 과자인양 금이 가기 시작했다. 뾰족한 부스러기가 살을 헤집는 느낌이 들었지만 멈추지 않고 힘을 더 줬다. 제법 크게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되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피리는 제 형태를 잃어버렸다. 가시가 박힌 손바닥이 쓰라렸지만 이것으로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도발하는 미소를 짓고 있는 나를 내려다보는 함광군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니까 원한 깊은 눈빛에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짐작하자면 피리가 망가져 아쉽다는 건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뭔가 더 깊고 거대한 원념의 뿌리가 밑바닥 깊은 곳으로 있었다.
아예 모르는 척하고 싶을 정도로 어두운 수렁이어서 숨이 막힌 내가 먼저 시선을 돌려야 했다.
이렇게 진득한 어둠을 품은 사람을 ‘빛을 품은 군자’ 함광군으로 부른다고? 다들 돌았구먼.

“묶어라.”
이 사내는 기본적으로 말이 짧았다.
그래도 구체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모호하기 짝이 없는 이런 명령이 익숙한지 수사들이 일제히 달려와 눈에 화상을 입은 남자와 피리 불던 사나이, 그리고 용의자로 지목된 날 곤선삭으로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함광군. 그건 내 하인이에요.”
금릉이 뛰어와 사람 취급이 하나 잘못되었다고 항의했다.
그런데 어디 가서 비빌 짬밥이 아니어서 함광군이 지긋이 한 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혀가 굳은 눈치였다. 본부장 앞에 선 일개 평사원의 기분을 맛보며 금릉이 한 걸음 후퇴했다. 다른 때 같으면 내가 누군지 아느냐, 외숙에게 이를 거다, 후렴구를 덧붙였겠지만 지금은 꼬리를 내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함광군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관하자 남경의가 대신 끼어들었다.
내가 볼 적엔 어른 앞에서 주제넘은 짓이라는 느낌이었지만 금릉과 소년의 나이가 비슷하니 그렇게 하라 묵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함광군이 뒷짐을 졌고, 의도치 않게 삼자대면 비슷하게 흘러갔다.

“네 하인이라고?”
눈을 뾰족하게 한 남경의가 나와 금릉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말아 피식 웃었다.
“무슨 까닭일까. 금 아씨가 거짓말을 다 해가며 사람을 편들어주고.”
“아니거든?!”
“그럼 네 하인이 원기를 모은답시고 밤늦게 공동묘지로 가서 무덤도 파던데 그걸 허락했다고? 사마외도라면 그렇게 치를 떨면서?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금릉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봤다. 목소리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구린내, 너 무덤 팠어?!!”
“오해야.”
“들었어? 안 팠대.”
“그거야 끌고 가서 추문을 해보면 알 수 있는 거고.”
남경의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기본적으로 쟤는 날 믿지 않았다.

“저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녀석이라고. 이 장소에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수상하지. 게다가 우리는 이 부근에서 사마외도를 추종하는 무리의 뒤를 추적해서 여기까지 온 거거든. 저건 분명 한 패야. 무덤이 연속하여 훼손된 게 식살귀 짓이 아니라는 것도 저 녀석이 흘린 단서 때문에 알게 되었으니까... 무슨 인연 때문인지는 몰라도 네가 감쌀 필요가 없다고.”
얘기를 들은 금릉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화가 난 거라기보다는 짜증이 난 것 같았다.
“식살귀가 아니었다고?”
“맙소사. 그 부분이 화를 낼 부분이야?”
“내가 식살귀를 잡겠다고 얼마나 수모를 겪었는...!! 애초에 소문이 왜 그딴 식으로 난 거야!”
“야.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따져야겠어?”
“그럼 여기서 따져야지 언제 따져! 것보다 내 개는?! 우리 꼬마 선자는?!”
“오호라, 이제 네 개도 우리 책임이다 이거지.”

이제 둘은 말로만 으르렁대며 싸우는 게 아니라 몸으로도 싸우려 했다.
그런 다툼이 늘 있었던 일인지 보다 나이 많은 수사들은 개입하여 뜯어말리는 대신 소년들을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무엇보다 다툼이 난 두 사람 중 하나가 다른 집 자제였고, 무엇보다 금릉의 억지주장에 따지고 싶은 마음이 든 건 남경의 혼자만이 아니었던 거다.
“네 똥개가 어디로 갔는지 누가 알아!”
“똥개라니! 꼬마 선자는 작은아버지가 주신 영견이야!”
“누가 영견 이름을 꼬마 선자로 지어. 괴상하잖아!”
그리고 나는 처치곤란의 문제아 취급을 받아가며 곤선삭에 묶여 끌려갔다.

“잠깐만요.”
이 와중에 남사추가 달려와 코피가 번져 엉망이 된 내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그가 보인 친절에 기대어 마지막으로 호소했다.
“말해도 안 믿겠지만, 나는 저들과 한 패가 아니야.”
“그래요. 분명 도령은... 피리를 감추려는 게 아니라 부수려는 것처럼 행동했죠.”
사추는 제대로 설명하면 아무 일 없을 거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때리지도 않을 거고, 채찍질하지도 않을 거며, 굶기지도 않을 거고, 어두운 광에 가둬두고 방치하지도 않을 거라고 했다.
아니, 그게 꼭 그렇게 할 거라는 것처럼 들려 듣는 입장에선 살이 떨리는데. 나, 이대로 괜찮은 건가.

“선배님, 이 아이는 아직 어리고 운몽의 구판연 문양이 들어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는 걸 본 적도 있습니다. 강씨 종주가 사마외도를 혐오하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사술을 추구하는 아이에게 집안 무늬가 들어간 주머니를 그냥 줬을 리 없죠. 사연이 제법 있는 것 같고, 죄를 저질렀다는 확실한 증거 또한 없으니 너무 험하게 다루진 말아주세요.”
선배로 불린 수사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떡이고는 곤선삭 잡을 줄을 잡아당겼다.
그 당겨지는 느낌이 어쩐지 효성진 도장에게 잡혀갔을 때를 떠올리게 하여 기분이 착잡해졌다.
거기다 그것으로 나의 수난이 끝난 것도 아니었다.
와앙.
사건 다 끝난 것도 모르고 바쁘게 뛰어다니던 강아지가 어디에선가 갑자기 쏜살 같이 튀어나오더니 두 눈을 반짝이며 내 다리를 콱 물었다.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끝.

Posted by 미야

2021/11/24 14:04 2021/11/24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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