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33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고소 남씨 문하생들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려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신을 택무군이라고 소개한 사내는 시선에 개의치 않아하며 나를 시집오는 새색시처럼 인도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올라갔다.
쪽이 팔려도 어쩔 수 없었다. 입고 있는 옷이 너무 커 계속 자락을 밟아대는 바람에 넘어지지 않으려면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되었으니 발목이 부러지지 않도록 친절한 신사분이 에스코트를 자처했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참아가며 한손으로는 늘어진 옷자락을 모아 쥐고, 다른 손으로는 택무군의 손을 잡고 종종 걸음을 했다.

“그대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성은 없습니다. 이름은 걸람입니다. 뛰어날 걸(傑)에 산바람 람(嵐)을 씁니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은 머리에 문제가 생겨 기억을 못하게 되었기에 친절하신 분이 그리 쓰라 바꿔주셨습니다.”
“좋은 이름을 주셨군. 그 친절한 분이 누구인지 기억은 하고?”
사실대로 말해도 되는 걸까 10초 정도 고민했다.
그러다 상대를 속이려면 이름부터 감춰야 했다는 늦은 깨달음이 왔다.
“효성진 도장님입니다.”
“효성진... 명월청풍이었군.”
다음부터는 누가 내 이름을 물으면 걸람 대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회사원 이름을 말해야겠다.
하지만 비루하한 비렁뱅이의 이름을 굳이 궁금해 할 사람도 없을 테니 그야말로 김칫국 드링킹이었다.

제자로 보이는 청년이 묵직한 부피의 책을 들고 가다 에스코트를 받아 걷는 나를 보고 놀라 들고 있던 걸 왕창 놓쳤다. 무려 법전 크기의 책이었다. 발등이 찍힌 그는 비명을 질렀고, 택무군은 상냥한 목소리로 질책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소란 금지다.”
저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고 생각하며 택무군을 따라 대나무로 담장이 둘러진 정갈하게 정돈된 건물로 들어갔다. 오래된 절과 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어서 사진으로 찍으면 새해 1월 달력 그림으로 아주 어울릴 것 같았다. 눈이 소복이 쌓이면 분위기는 더 살아나리라.
그런데 이런 곳에서 죄인(추정) 추문을 한다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택무군이 마음을 편하게 먹으라며 다독였다.
“추문은 되었어. 그보다는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 혹시 좋아하는 차가 있나?”
그는 구름이 그려진 병풍이 있고 탁자와 방석이 있는 자리로 나를 데려갔다.
거기가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건 눌린 방석의 자국만으로도 짐작이 가능했다. 주인이 자주 앉는 자리는 상대적으로 납작 눌려있었는데 그 앞의 서안으로 책갈피가 끼워진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자주 보는 종류인지 표지 가장자리에 제법 손자국이 나 있었다.
“악보란다.”
오선지에 그려진 서양식 악보만 익숙했기에 그런가보다 여기고 넘어갔다.
표지에 적힌 한자 중 선(善)이라는 글자만 겨우 알아봤다. 글자가 모두 여섯이었는데 내 실력으론 겨우 글자 하나만 읽을 수 있었다.

탁자에 백옥으로 만든 피리가 보여 ‘여기 사람들은 흰색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피리도 흰색이네.’ 생각하고 맞은편 방석으로 가 앉았다. 양심상 다리를 편하게 하고 앉지는 못했다.
그보다 뒤편으로 놓인 서가가 인상적이었다. 제본의 방식이 달라 여기선 책을 눕혀서 보관한다.
각이 딱딱 맞게 정리한 책들의 모양이 어쩐지 눈에 익숙하다 생각하며 택무군으로부터 차를 대접받았다. 향이 짙으면 어색해할 걸 염두에 두었는지 물을 곱절로 많이 부어주었다. 입에 가만 물자 희미하게 꽃내음이 났는데 제법 입맛에 맞았다.

“망기... 그러니까 함광군이 그대를 곤란하게 만든 건 동생 대신 사과하지.”
“괜찮습니다. 그건 죄를 묻는 추문이었잖아......요...?”
추문이 아니었나? 택무군이 짐짓 시선을 피하며 자신 몫으로 다른 차를 우려냈다.
내 것과는 달리 색이 무척 진한 색이었고 풀 냄새도 그만큼 짙었다. 녹차 티백을 한꺼번에 다섯 개를 넣고 센 불에 조려낸 느낌이라 맛이 굉장히 쓸 것 같았는데 취향이 그쪽인지 탕약 같은 걸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찻잔에 따랐다. 녹차에도 설탕을 넣어 마셨던 나는 보는 것만으로는 입안이 아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택무군이 찻잔에서 시선을 들고 내게 말했다.
“망기가 아니라는 내 말도 안 듣고 고집을 부린 건 자기가 그토록 원하는 걸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지. 그 애는 예전부터 외골수여서 한 번 그래야겠다 정하면 쉽게 뜻을 굽히질 않아서... 그래도 본인이 착각했음을 깨달았으니 흐트러진 마음을 가다듬고 난 뒤엔 더는 염치없이 구는 일은 없을 거야.”
“......?”
“표정을 보아하니 모르겠다는 눈치인데 이해가 안 가도 그냥 그런 줄 알고 있게.”
동생을 대신하여 사과를 한다면서 해명은 대충이었다.
나는 여상히 굴었다. 높으신 분이 아랫사람에게 이유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 짓는 건 익숙한 일이다. 고생하여 만든 기획이 엎어졌을 적에 부장님은 그냥 그런 줄 알고 있으라고만 했다. 계급사회에선 흔히 있는 일이다.
중요한 건 함광군이 뭔가를 오해했고, 지금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 둘은 각자의 차를 마시며 각기 딴 생각을 했다.
옆에서 보글보글 따뜻한 소리를 내고 물 주전자가 끓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서 그대를 처음 봤을 적에 공자는 혼백의 모습이었지.”
기습 공격이었다. 입속에 담고 있던 차를 힘차게 뿜었다.
“니눼에?”
“갑자기 나타나 우리를 놀라게 했으면서 정작 본인이 더 놀라 서가에서 책을 들어 던지려 했어.”
“아... 콜록. 잠깐만요?!! 아,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구석에 있는 네발 향로의 모습이 낯익다. 고급스런 외관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었다. 고개를 휙 돌려 대나무 발 사이로 보이는 풍경을 눈에 담았다. 피톤치드! 빼곡하게 자란 편백나무가 뿜어내는 공기가 서늘했다. 구석에 고금이 있었고... 입구 앞쪽에는 사령이 나타났다며 손가락질을 하며 허둥대는 흰옷의 소년들이 있었다.
“그렇군. 확실히... 여긴 내가 예전에 죽었을 때 나도 모르게 와보았던 장소 같군요.”
내 말을 들은 택무군의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모르게 박수를 짝 쳤다.
기억난다. 그때 택무군은 지금과 달리 연한 푸른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럼 얘기가 한결 편해지겠군. 지금 자네 몸은 어떻게 된 건가. 숨을 느리게 쉬고 있지만 생기가 없고, 맥이 천천히 뛰고 있으나 온기가 없군. 나와 망기는 한눈에 알아보겠지만 수련이 낮은 자들은 자네를 사람이라 여기겠어. 단, 건강하지 않고 아픈 사람으로.”
“그야 전 흉시니까......요?”
“그렇지 않아. 전장에서 흉시를 여러 번 보았는데 그들 전부가 자네 같지 않았어.”
“그래요?”
“알려지지 않은 술법을 써서 부활했는데 온전하게 부활을 못한 것 같군.”
“그게 흉시잖아요?”
“아닐세.”
우리 둘은 거울을 마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인상을 구겼다.

서로가 납득을 못했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 주제는 일단 넘기기로 했다.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 찻잔을 들어 그게 독한 술이라도 되는 양 한 번에 들이켰다.
“소처럼 차를 마셔선 안 된다.”
“배움이 짧아 그러니 이해 좀 해주시죠.”
“앞으로 가르칠 게 많겠군... 그보다 묻고 싶은 것이 있어. 그대가 이곳에 혼백으로 나타났을 적에 혼자가 아니었는데 기억을 하는가?”
대답을 하기 전 시선이 구석에 놓인 고금으로 향했다. 입술도 약간 오므려졌다.
택무군 또한 고금으로 눈길을 주었다.
그때 고금의 줄이 저절로 튕겼고, 그것만으로 힘을 전부 써버린 혼백이 거품처럼 흐트러졌었다.
그렇게 혼백이 깨져 버렸으니 환생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먼저 죽임을 당했고, 다음으로 수사가 죽었다. 사실 내 입장에선 비명소리를 들은 게 전부지만 아무튼 설양이 용월을 죽였다. 그리고 시변하게 만들어 상씨 저택 참변의 미끼로 써먹었다.
기억을 하고 말고. 적절하지 않은 장소에서 적절하지 않은 상대에게 목숨을 잃은 그는 고소 남씨의 문하생이었다.

“이름이 용월이었어. 조금은 고지식한 성격이었지.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있어 다른 선자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어. 그래서 항상 혼자 다녔고...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을 했고, 부족한 재주라도 어디서든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 그런 식으로 가버릴 거라곤 누구도 짐작할 수 없었을 거야.”
“저에게 당과를 줬었어요.”
“그랬니?”
약간 초췌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택무군이 희미하게 웃었다.

시변하여 문제를 일으킨 용월의 시신은 부분으로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다시는 죽은 채 걸어 다니지 못하게끔 약양의 상씨 가주 상평이 그녀의 몸을 모두 여섯 부분으로 잘라 도륙했기 때문이었다.
상평의 입장에선 용월이 수행을 하는 몸으로 시변하였기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해는 갔다만 치욕적이었다.
남씨 사람들은 따져 묻기 이전에 일을 서둘러 마무리 지었다. 장례는 입고 있던 겉옷을 관에 넣어 간단히 행해졌다. 친한 지인이나 가족이 없었기에 유품은 모두 불에 태워졌다.

“나는 용월이 급사한 까닭부터 차분히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변했다는 결과를 두고 다들 원인은 그리 중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되어버렸지. 그 몸이 시변을 한 건 수행의 정도가 낮았기 때문이니 문하생의 신분으로 고소에 큰 폐를 끼친 거라고들 말했어.”
그리고 상씨 집안이 하룻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방식으로 몰락했다.
상씨의 멸문과 고소 남씨를 서로 연계시켜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운심부지처에서는 긁으면 부스럼이 난다며 문하생 용월의 이름 자체를 입에 담기를 꺼리게 되었다, 택무군이 그렇게 설명했다.
“다들 원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내게 진상조사는 반드시 필요했다. 그래서 몇 명의 수사를 모아 은밀히 초혼을 했어. 하지만 대화는 불가능했고 용월의 혼백은 이미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져 산들바람만 불어도 사라질 지경이었지.”
단지 몇 마디를 묻고자 그 가엾은 혼을 가루로 만들 수는 없었다고 택무군이 얘기했다.

그게 전부야? 그걸로 끝이야?
죽은 이의 혼백을 부르려 했고, 그나마 그 일에 실패하자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고 끝이냐고.
문하생의 죽음은 이만하면 되었으니 저편에 묻어버리자고 그리 쉽게 결정내려질 만한 거였나.

입가가 뒤틀리는 걸 손등으로 입을 닦는 척하여 감췄다.
지금이라도 튀어나오려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며 달편(達片)의 거짓을 읊어댔다.
“용월 수사는 택무군이 그리 신경을 써준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했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리 말하는 내 목소리는 책을 읽고 있는 것처럼 고저가 없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27 10:56 2021/11/27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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