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34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텍스트툴즈가 구닥다리 버전이라 환장하겠어요. 몸통이 비대해져 이사를 할 엄두도 안 나는데 큰일이다... 이 블로그는 태생이 윈도우7 기반이라고.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남들과 똑같다는 걸 참지 못하는 존재다.
민주주의와 공정, 불평등 타파를 앞세워도 누군가는 순서를 정하고 줄을 세운다.
임원 전용 화장실이라던가, VIP 전용 승강기가 왜 만들어졌는데.
하물며 이 세계에선 귀족과 몸종의 구분이 매우 또렷했다.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남들보다 비천한 신분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나아가 그 태생적 지위의 차이를 인정하고 수긍하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예(禮)’라고 생각했다.
정리하자면, 이곳 사람들에게 있어 예절이라는 건 자신의 신분에 맞게 삶을 꾸려가는 자세를 일컫는다.

‘남가에서 예를 중시한다는 건 다시 말해 서열과 귀천을 매우 따진다는 뜻이지. 원래대로라면 나 같은 배추 배달꾼은 감히 이곳 문지방도 못 넘었어. 이거 몹시 피곤하구먼...’

문하생들의 옷도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었다.
구름무늬가 들어간 옷을 입은 사람은 신분이 높았고, 문양의 면적이 넓을수록 중요한 위치의 사람이었다. 민무늬 백의는 물어볼 것도 없이 집안이 하찮았다. 설양에게 살해당한 용월 수사도 민무늬 흰옷을 입었으니 제일 밑바닥이었다.
머리의 띠도 그런 식으로 구분을 두어 신분의 차이를 표현했는데 이곳 운심부지처에서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은 ‘선생님’ 호칭으로 불리는 남계인, 그리고 직계인 택무군과 함광군 형제였다.
선생님은 남씨 집안 높은 어르신으로, 하고 있는 머리띠의 무늬가 구름이 아니고 무슨 용의 발톱처럼 구불거렸다. 택무군과 함광군은 집안 가르침을 따라 사치하지 않았으나 옷에 들어간 문양이 정교했다.

하인들은 기본적으로 진흙으로 염색을 한 옷을 입었다. 무난한 갈색이거나 어두운 회색이었다.
흰옷을 입은 문하생들은 갈색으로 염색한 옷을 보면 매번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대신 하인들은 머리를 조아려 존경을 보여야 했다. 그것이 예절이었다.

“어? 걸람이잖아? 애기 도사다!”
청소도구를 챙겨 움직이는 나를 보고 남경의가 아는 체를 했다. 이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비파 열매 먹을래? 달콤하고 시원해.”
그래도 아랫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건 금기시하지 않았다.
“글공부는 잘 되고 있나요? 경의에게 듣기로 아정집 베끼기를 하고 있다던데 어디까지 외웠어요?”
남사추의 말에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이건 전형적인 을에 대한 갑질이었다. 글공부랍시고 자기네 가규를 달달 외우게 만들고 있다.

운심부지처 내에서는 뛰면 안 된다. 밤놀이 금지. 맨발로 다녀서도 안 된다. 도둑질을 하면 안 된다. 불장난을 해서도 안 된다. 물장난도 하지 말아라. 수업을 빼먹어선 안 된다. 식사시 금언. 세 그릇 이상 금지. 젓가락 입에 물기 금지. 휘파람 불지 말아라. 어깨동무 하지 말아라. 귓속말 금지...
이거 뭡니까?!
종이는 매우 귀하고 비싼 물건이다. 나 같은 하인이 낭비하면 안 된다.
그런 까닭에 문하생들이 쓰고 버린 허드레 종류를 얻어 어렵게 베껴 쓰기를 하고 있다.
천자문부터 시작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글공부 교제로 받은 건 남씨네 가규를 모은 아정집이었다.

그런데 여기 남씨 사람들은 대단히 이상하다. ‘윗사람을 공경하라’ 이런 건 아이들에게 가르칠 내용이라 납득할 수 있는데 ‘슴가 꼭쥐스 노출 절대 No, No!’ 이런 쓸데없는 걸 왜 넣어둔 건지??
거기다 내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보고 도리어 어디가 이상하냐고 반문한다.
침 뱉기 금지, 지저분한 얼굴 금지, 헝클어진 머리 금지, 걸으면서 책 읽기 금지, 반찬투정 금지, 그릇에 음식 남기는 것 금지, 식사 도중 일어나기 금지...
다섯 살 어린이용 ‘처음 배우는 한글’ 교재의 첫머리가 ‘화장실에서 용변 볼 적엔 전화통화 금지!’ 이런 꼬라지면 그 책은 엄마들에게 안 팔린다!

“이거 저도 백 번 옮겨 적으면서 글쓰기를 배웠어요.”
사추가 그리운 추억이라며 그렇게 말했다.
“지금도 벌 받기 과제로 가끔 옮겨 적기도 해요. 경의는 저번 주에 한 번 필사했지? 경내에서 이동하면서 몰래 사과를 먹고 있는 걸 들켜 벌을 받았지.”
“그런 건 말하지 마!”
남경의가 꽥 소리를 내며 화를 냈다.
군것질을 좋아하여 자주 과일을 숨겨두고 먹다 걸린다고 한다. 한창 배고파 할 나이의 청소년이니 좀 봐줄 것이지, 내가 저 나이였을 때엔 햄버거에 김밥, 천하장사 소시지에 컵라면까지 한 번에 흡입했다.

“그런데 사추와 경의는 장서각에 무슨 일로?”
“장서각에 공부하러 오지 다른 볼 일이 있단 말이냐?”
“원래 지금은 수업 시간이잖아.”
“선생님이 청담회 일로 바쁘셔서 이틀 간 자가 학습이야.”
“아이고, 이럴 때일수록 놀아야지. 쓸데없이 성실하구먼.”

하인이 문하생에게 반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그런데 얘네들을 보면 까마득한 후배처럼 보이는지라... 충격으로 뒤섞여버린 내 자아는 꼰대 아저씨에 가까워서 뽀송뽀송한 소년들을 자꾸 툭툭 건드리고 만다.
그런 들 어떠하랴, 이런 들 어떠하랴,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를 겨드랑이에 끼고 장서관에 입장하기에 앞서 능숙하게 신발을 벗었다.
솔직히 걸레질과 빗자루질 둘 중의 어떤 방식이 효과적인 청소방식인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여긴 쓸고 닦을 먼지 자체가 적었지만 높은 곳의 먼지를 닦기엔 내 키가 너무 작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그리고 책은 기본적으로 습기를 싫어하니 환기를 잘해야 했다. 미리 준비하여 가져다둔 의자를 들어 창문 앞에 세웠다. 장서각의 청소는 창문을 활짝 여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곳의 창문이 모두 열여섯이라 의자에 올라갔다 내려가는 일만으로도 골치가 아팠다.

청소를 한다며 부산을 떠는 모습에 개의치 않고 남사추와 남경의가 서안 앞에 앉았다.
사추는 바로 문방사구를 펼치고 먹을 갈기 시작했는데 남경의는 빈손으로 친구 옆에 바싹 붙어 있었다.
최근 용무 없이 장서각을 출입하는 문하생의 숫자가 늘었기에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소문에 의하면 여성 수사들이 이용하는 안서각에서 숨겨놓은 연애소설이 나왔단다.
이곳에도 중2병이라는 것이 존재하였기에 타지로 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 중 일부가 사고를 치고 가는 경우가 없지 않아 들켜서는 안 될 금서를 사저에서 가져와 서가에 몰래 숨겨놓고 읽는 일이 종종 있는 모양이었다. 표지를 경전으로 위장하는 수법을 써서 친구들끼리 돌려 읽었는데 눈치 빠른 선배 선자가 알아차리고 이게 과연 언제 들통이 날 것인가를 두고 내기까지 했단다. 열아흐레 되던 날 결국 들켰도, 아무래도 여자라서 체벌은 차마 못하고 주동자들이 반성문을 쓰는 걸로 잘 넘어갔던 것 같다.
대신 이게 수사들 사이에 이야기가 번져 ‘안서각에서 연애소설이 나왔으면 장서각에도 춘화집 같이 은밀한 것이 숨겨져 있는 거 아닌가?’ 라는 의심으로 커졌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소년들이 경전으로 위장된 춘화집을 찾으러 장서각에 자주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아니거든!”
얼굴이 벌겋게 변한 남경의가 멀쩡한 사람 모함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난 그런 거에 관심 없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아까부터 경전 종류만 들었다 놓았다 하더라, 너.

먹을 갈던 남사추는 한숨이 깊었다.
“일지 점수가 을하(乙下)이 나와 다시 고쳐 써야 해서요.”
“그래서 내가 최대한 간단하게 적으라고 했잖아. 선생님은 이것저것 길게 적는 걸 싫어하셔. 그리고 개인적 감정이 들어가면 무조건 감점이라고. 뒷방 노인네가 주책맞게 돈을 써서 어린 여자에게 새 장가를 가려고 했다, 재수 없었다, 할아버지를 서방으로 맞이하게 된 여인이 불쌍했다, 그런 집구석엔 귀신이 붙어도 싸다, 이런 식으로 적지 말랬잖아.”
“그렇게 안 적었거든?!”
남사추가 자기 일지 어디에 그런 문장이 적혀 있냐며 ‘을하’ 점수를 받은 글을 눈높이로 들어 흔들었다. 글자를 배웠지만 여전히 모르는 글이 있어 보고도 해석이 절반만 가능했다.

그러니까 월주 지방으로 돈 많은 상인이 돈을 들여 어린 소녀를 데려와 첩으로 삼았는데 여인이 혼인을 거부하고 목숨을 끊었던 것 같다. 자진(自盡)이라 했으니 맞을 거다.
그래서 원혼을 품은 귀신이 나왔......던 건 아닌 듯하고. 더듬더듬 읽어보니 구하다, 비술로, 금전을 들여, 되살려서, 혼례를 계속하고, 음호부, 이런 내용으로 이어졌다.
“신부가 죽자 지참금을 모두 돌려주게 된 신부의 아버지가 급히 달음박질하여 달려와 음호부로 죽은 딸을 되살리고자 했다는 겁니다. 그것도 비슷하게도 만들어지지 않은 가짜 음호부로요.”
“뭐, 뭐라?!”
“그렇고말고요. 착잡한 일입니다. 추궁하여 물어보니 이릉에서 도술을 배웠다고 주장하는 무리가 사기를 쳐서 신부의 아버지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추야! 음호부의 글자로 어째서 호랑이 호(虎)를 쓰는 건데?!”

뒤통수가 얼얼했다. 나는 지금껏 호부를 호신부(護身符)의 준말로 생각해왔다. 보호할 호(護)를 쓰는 호부 말이다. 그래서 여러 모양새와 물건으로 상상을 했고 막연하게 은붙이나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서로운 조각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름에 호랑이가 붙으면 너무 뻔해지는 거 아닌가. 그건 호랑이 조각이었다!
‘효성진 도장이 일단 보면 알아차릴 수 있다고 쉽게 말한 까닭이 있었구나! 호랑이였어, 호랑이!’
유레카. 나도 모르게 사추의 손을 꽉 맞잡았다.
“호랑이였구나!”
남경의는 구제불능의 바보를 보는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호랑이 말고 뭐라고 생각했는데. 여우(호狐)?”
방해하지 말고 청소나 계속하라며 남경의가 날 물리쳤다. 그리고 시어머니처럼 대나무 발에 쌓인 먼지는 걸레로 하나하나 닦아내야 한다고 잔소리했다.
그래도 자신이 서가에서 꺼내 어지럽힌 책은 본인이 정리할 테니 힘들게 옮기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넌 음호부에 관심 두지 마.”
경전을 읽는 척하던 남경의가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못을 박았다.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 거야. 아까 말했던 죽은 신부의 아버지와 그에게 가짜 음호부를 팔았던 일당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아? 사마외도라면 치를 떠는 운몽 강씨 수사들이 몰려와 갈가리 찢어버렸다고. 그거로도 성이 차지 않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기까지 매질을 했어. 하필이면 팔아치운 물건이 음호부라서... 거기 종주가 눈이 돌아갔거든. 강씨 종주는 나이가 어리든 많든, 성별이 여성이든 처벌을 함에 있어 가리지 않아. 사마외도라고 의심하면 일단 때리고 보지. 네 몸은 한 대만 맞아도 그냥 두 동강이 날 거다. 그러니 지금도 그렇고 나중에도 그렇고, 절대로 사술잡기나 음호부에 관심 갖지 마.”
처참하게 두들겨 맞고 있던 자들을 떠올린 건지 소년의 낯빛이 심히 어두워졌다.

하지만 나는 호랑이 조각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쑤시는 통증이 느껴져 여전히 아물지 않은 유일한 가슴 상처로 손을 가져갔다.
나는 죽은 사람을 살려낸 호랑이 조각에 대해 알고 있다. 그것은 가짜가 아니다.
저 바깥 어딘가로 아직도 나를 저승에서 불러낸 음호부가 돌아다니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초조해졌다.

Posted by 미야

2021/11/29 11:29 2021/11/2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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