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36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후로 내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나는 예의 규칙적인 일과를 소화해냈고, 문하생들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쩌다 택무군과 함광군과 마주치면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를 낮췄는데 상대가 제일종합상사 박 전무이사라고 세뇌하며 영혼이 탈곡된 미소를 짓는 걸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 동패(同牌). 신의. 아닐 부. 세가. 서머하다.’
악어의 미소를 짓는 건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정작 피곤한 방향으로 변화가 생긴 건 다른 쪽이었다.
“저놈의 신발을 보세요! 진흙이 잔뜩 묻어있습니다! 어디를 다녀왔겠어요!”
하인도 아니고, 문하생도 아니며, 피의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고한 제3자도 아닌 어중간한 내 입장 탓에 결국 분란이 생겼다.
“밤에 몰래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걸 내가 목격했다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이는 심재... 심정 대충 그런 이름을 가진 하인이다. 운심부지처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지 2년차의 젊은이다. 둘째 형도 이곳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고, 장남은 산 아래에서 음식점을 한다. 남사추와 남경의 말로는 채소볶음을 잘 하는 가게라고 한다.

큰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며 숙수하인이 쩔쩔맸다.
그렇다고 숙수하인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화를 내는 이의 형이 지위가 있어 주방에서 식칼을 쥐고 있음이다.
“탈이 나 뒷간에 다녀온 것일 수도 있잖아.”
“아냐. 신발을 보라고. 신발에 진흙이 묻어 있어.”
심재, 아니면 심정 어쩌고의 그는 내가 수상한 짓을 잔뜩 하고 있으니 방을 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독방으로 주어진 내 처소로 허락도 없이 들어가 얼마 되지도 않는 세간을 뒤집었다.
숨겨뒀을 거라 여긴 위험한 부적이나 주술도구가 안 나오자 분통을 터뜨렸다. 택무군이 숙제로 내준 예측편과 이면지, 붓이 나오자 이번에는 하인 주제에 글공부를 하는 거냐며 또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최근 들어 웃음이 헤퍼진 느낌이다.
“이게 지금 웃어?! 웃음이 나와?!!!”
얘가 날 콕 찍어 미워하는 이유는 택무군에게 아부를 떨어 운심부지처에 빌붙었다고 생각해서다.
그럴 리가. 빌붙을 마음이었으면 근로계약서부터 쓰자고 했을 거다.
그 점을 설명할 수 없는 내 신세가 착잡하다.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네요, 걸람. 무슨 일이 있어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런 거지. 과제가 너무 많다.”
“행복한 소리 한다. 물구나무서서 필사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여...!!”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에 피가 쏠려서 집중이 잘 되거든요. 주의력이 떨어졌다고 지적을 받으면 그렇게 벌을 받습니다.”
“근거 있는 주장이냐, 그거.”

장서각으로 공부하러 온 남사추와 남경의 두 사람과는 평소처럼 잡담을 나눴다.
하인들과의 불화에 대해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천자소가 술이라는 것도 가르쳐주지도 않고 사오라고 시킨 일이라던가, 알겠다고 하고 천자소를 구하러 외출하려 했더니 출입구 결계에 막혀 튕겨나간 일이라던가, 결과적으로 천자소를 사오지 못했다 알리러 갔더니 게으름뱅이가 먹을 저녁밥은 없다며 혼난 일이라던가, 글씨 연습용으로 얻은 종이를 전부 빼앗긴 일이라던가, 깨끗하게 빨아야 한다며 이불을 가져가선 돌려주지 않는다던가 식의 이야기는 너무 구질구질해서 애들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것보단 출입구 결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다.

“흐음... 너무 당연하다보니 생각을 못한 부분이네요. 통행옥패가 있어야 결계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신원에 따라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장소가 나눠지고요.”
“근데 왜 나에겐 옥패를 안 줘? 담 넘어가라고?”
“통행옥패가 없음 담 넘어가는 것도 무리예요.”
남사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더하여 무례하게도 시선을 내리깔고 내 다리의 길이를 가늠했다.
그려, 내 다리 짧다! 담을 성공적으로 넘기도 전에 가랑이가 찢어지겠지.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예측편 마흔여덟 번째 글을 읽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게 하며, 매는 사람 속에 깊게 들어간다.’ (※원문은 성경 잠언 20장)
한숨이 나오기 이전에 짜증이 났다. 탁 소리를 내어 책을 덮었다. 성현의 말씀 같은 소리. 속이 뒤집어지니 오늘은 그만 읽자.

“외출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보다는 운심부지처로부터의 탈출 각을 재고 있는 중이다.
“하긴, 수업을 받으러 온 다른 가문의 자제들 중엔 식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분도 있더라고요. 고소 음식은 너무 싱겁고, 풀 종류가 많고, 생선류가 일절 안 올라온다면서... 혹시 먹고 싶은 종류가 있나요? 얘기를 해주면 사다줄게요.”
남사추는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친절했다.
나만 보면 누군가가 떠오른다는데 상세하게 그게 누구냐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그 대상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머리를 길러 꾸미면 더 자세하게 기억이 날 것도 같다 했는데 사실 가망 없는 얘기였다. 남사추는 어릴 적에 열병을 크게 앓아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몽땅 날아갔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하얀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동산에서 풀을 입에 넣고 질겅거린 일이라고 한다. 그보다 더 어릴 적의 일은 안개처럼 흐릿하여 사람이고 건물이고 두부가 으깨진 모습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두부를 으깨서 거기에 가발을 씌우면 내가 되는 건가.
상상해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 으깬 두부가 가발을 쓴 상태로 뒷산을 넘을 궁리를 한다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웃음이 터졌다.

기분 나빠하다 왜 갑자기 웃는 거냐며 남사추가 궁금해 했다.
아, 그릉데 이건 형이 못 말해주겠다. 생각보다 결계 뒷구멍 뒤지는 일이 베어 그릴스 오지 탐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라... 신발에 묻은 진흙 얼룩이 왜 안 지워지겠냐고. 지난밤에도 격하게 굴러 등을 크게 다쳤다. 남씨 가문의 결계는 성격대로 꼼꼼해서 절벽이 있는 곳까지 놓치지 않고 진법을 그려놓았다. 낙화암 삼천궁녀처럼 뛰어내릴 각오를 다졌는데 보기 좋게 튕겨내더라.

“통행옥패는 줄 수 없다.”
그다지 미안해하지도 않아하며 택무군이 잘라 말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일종의 가택연금이라는 거죠? 압니다.
효성진도 날 가둬두는 걸 최선이라 여기더니 택무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밤중에 여기저기 결계를 만지고 다니는 건 그만두면 안 될까? 결계가 흔들리면 신호가 오거든. 뒷산 절벽 부근에서 매번 경고음이 들려 숙부님이 언짢게 여기신다. 절벽 건너편은 선자들 숙소가 있으니까. 표정을 보니 몰랐던 것 같군.”
식은땀이 나려 했다.
남녀가 유별하다더니 여기 사람들은 강박관념이 느껴지게 남자와 여자를 절벽(물리)으로 갈라놓았다.
그보다 절벽 너머도 운심부지처라는 점에 소름끼쳤다. 도대체 경내가 얼마나 넓은 거냐.

“지루하면 악기를 배워보지 않겠니? 연주는 심신을 다스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글쎄다. 리코더로 ‘학교 종이 땡땡땡’을 겨우 부는 수준인데 심신 안정 이전에 귀에서 피 나는 누군가가 날 죽이려할 것이다.
택무군은 내 이야기를 재밌는 농담의 일종으로 여겼다. 하지만 자기 귀에서 피가 나는 경험을 하면 말이 달라질 거다. 피리를 하나 받았어도 그런 까닭에 결코 입에 가져가질 않았다.

“훔친 물건이에요. 이것 보세요.”
아, 피곤하다. 쓰지 않을 물건이라 생각하여 숙소에 던져두고 피리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더니 멋대로 남의 방을 뒤지고 또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숙수하인도 내편을 들어줄 수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피리는 플라스틱으로 양산된 리코더와 달라 비싼 물건이었다. 그리고 하인은 기본적으로 악기연주를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문하생의 물건을 도둑질한 거라는 쪽으로 아무래도 의견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학수사니 증거수집 이런 거 없고 오직 심증만으로도 나는 이미 죽일 놈이었다.

“저건 도둑놈이라니까!”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야말로 집문서 들고 도박을 하다 현장에서 들킨 남편 취급에, 바람나서 도망갔다 돌아온 마누라 취급이었다.
그런데 그런 취급을 하려면 일단 결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내 평소 신조다. 그러니 결혼하자!!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 안 되는 게 맞다. 원래 사람이 흥분하면 이치에 안 맞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법이다.
“어?! 내가 억울해서라도 너랑 결혼하고 만다. 어?!”
“으악! 저놈이 미쳤다!”
“결혼! 그 다음에 이혼을 신청하고 위자료를 뜯어내겠다!”
그 전에 귀에서 피가 나는 경험을 해보라지.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피리를 빼앗아 입에 물고 훅훅 바람을 집어넣었다. 솔솔라라 솔솔미! 실제로는 뼉쬭뾱빽 뼉뺄뻭! 도돌이표는 없지만 다시 돌아가서 반복한다. 뺙뽈빽뻑 뺄뻑빡! 어?! 들었어? 들었냐고!

귀가 예민한 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빠르게 날아왔다.
그는 달처럼 하안 얼굴에,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정교한 장식이 된 말액을 길게 늘어뜨리고, 근심에 젖어 피리를 빼앗았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소음을 내선 안 된다고요?”
“운심부지처에서는...”
“남의 말을 가로막아선 안 되죠. 압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남과 다퉈서는 안 된다고요? 규칙을 어겨 정말 죄송합니다, 택무군. 그런데 반성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나가라고 하시죠. 허락만 해주시면 제 발로 걸어 나가겠습니다. 아니면 매질을 하여 바르게 다스리렵니까? 여기선 영혼에 교훈을 새겨 넣는다며 절편으로 때린다면서요. 까짓 것, 팔다리도 뜯겨봤는데 매 맞는 건 애교지.”
“걸람아.”
“왜요, 죽은 사람은 화도 못 냅니까?”
택무군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에게 훈계하는 것이 젼혀 달갑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 이럴 적엔 담배가 절실했다.
그리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전생 시절 누나가 절실하게 보고 싶었다.

Posted by 미야

2021/12/02 15:05 2021/12/0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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