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도시괴담 중「블러드 메리」라는 것이 있다. 자정 12시에 촛불을 하나 켜고 거울처럼 비치는 물건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블러드 메리 이름을 열세 번을 읊조리면 피투성이의 메리가 나타나 목숨을 앗아간다는 것이다. 유령을 불러내는 조건이나 세부내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가지각색이지만 큰 줄거리는 대략 비슷하다. 자칫하다가 목숨을 빼앗길 걸 알면서 왜 블러드 메리를 불러내려 하는가 - 운이 좋으면 블러드 메리가 커다란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준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테면 미래의 남편 이름... 혹은 시험 점수, 혹은 애인이 바람을 피운 상대의 이름 같은 거 말이다. 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같잖은 비밀을 알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냐 - 부연 설명하자면 이렇다. 10대들, 특히 10대 소녀들은 솔직히 이런 도시괴담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그저 장난이었고, 치기에서 비롯된 담력 테스트였다. 학부모들이 블러드 메리 소환 의식을 금지시킨 까닭도 지극히 현실적이었는데 아이들이 장난을 치다 거울을 깨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주에 잔뜩 취한 상태인데다 촛불 하나만 켜진 화장실에선 세수수건도 으스스해 보이는 법, 흔들리는 바람에 비명을 지르고 거울을 향해 물건을 던져 나중에까지 창피스러워 할 흑역사 하나가 남게 되는 것이다.
이 블러드 메리의 아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캔디맨이다. 메리의 정체가 여성이라 그런지 이쪽은 남성 버전이다. 머리가 단순한 남자애들은 열세 번 이름 세는 것도 어려워하기 때문에 불러내는 법도 보다 간단해졌다. 블러드 메리는 열세 번 불러야 하지만 여기선 다섯 번으로 봐준다. 그리고 꽤 터프하다. 캔디맨은 소원이니 비밀이니 이런 거 절대 안 들어준다. 첫 번째 섹스 상대 알려주기 이런 거 없다. 캔디맨은 그저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려 든다. 소환자가 공격을 피하려면 캔디맨의 본명을 알아야 한다. - 당장 지옥으로 돌아가, ○○○○○! 그러면 캔디맨은 흐릿한 안개가 되어 흩어진다.
「이름... 제기랄, 알고 있는데!」 루모는 필사적으로 머릿속을 휘저어 미스터 츄파춥스의 본명을 생각해내려 애를 썼다. 제법 흔한 이름이었고 그다지 특색도 없었다. 분명... 음, 그러니까. 모자를 쓰고 흰색 장갑을 낀 팝의 황제가 문워크를 선보였다. 「생각났다. 마이클! 그래, 마이클이었어.」 그런데 크레이지 덤프가 영양가 없이 흘렸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놈 이름은 가짜야.》 핏기가 가신 손가락이 점차 하얗게 변해갔다. 더하여 마그네슘 부족이라며 바들바들 떨렸다. 이름을 모르니 거울 밖으로 튀어나온 악령을 돌려보낼 방법이 없었다!
『씨발!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일단 무고를 주장해보자. 『당신이 뭔데!』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고 본다. 뉴스 채널을 통해 내셔널 밴코프 은행에 무장 강도가 들었다는 속보를 듣자마자 자신의 알리바이부터 점검해봤던 그다. 추적이 어려운 선불 폰은 망치로 때려 부수고 유심 칩은 화장실 변기로 흘려보냈다. 흘려보내는 김에 피우다 남은 마리화나도 정리했다. 지난 밤, 심야 극장에 갔다는 영수증을 지갑에 잘 모셔뒀고, 그간의 행적을 손가락을 꼽아가며 정리했다. 경찰이 심문하러 와도 답변이 완벽할 수 있도록 연습도 했다.
- 최근 크레이지 덤프와 연락을 한 적이 있습니까? - 전혀요. - 집안을 잠시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 얼마든지요. - 어제나 오늘, 집으로 찾아온 손님은 없었습니까? - 청소가 귀찮아 손님은 초대하지 않아요.
완벽, 완벽. 그는 무고했다. 목젖이 위아래로 크게 움직이게끔 마른침을 꿀꺽 삼킨 뒤, 루모는 오래된 격언 하나를 곱씹었다.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산다.
『괜히 엄한 곳에 아무렇게나 찔러대고 그러지 마쇼. 가석방 중이라 얌전히 있었던 말이오.』 그런다고 해봤자 상대는 미스터 츄파춥스였다. 뭔가를 쪽쪽 빨면서 - 보나마나 사탕일 게다 - 상대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새끼가 뭘 억울하다고 지랄이야. 크레이지 덤프에게「당신이 감옥에서 썩는 동안 마누라가 바람났어요.」일러바친 게 바로 너잖아.》 『흐억.』 《열 받아 탈옥하게 만들어놓고, 한 술 더 떠서 크레이지 덤프가 은행 강도까지 저질렀는데「난 몰라요~ 아무 죄 없어요~ 난 선량한 시민이에요~」우기면 쓰나.》 『우, 우, 우기는 게 아니라 사실이잖아요. 크레이지 덤프가 탈옥한 게 왜 내 탓이에요?! 게다가 그가 은행을 털었다는 건 나도 뉴스를 보고 나서야 알았다고요. 나와 상관없다고요.』 《뭐가 상관이 없니. 자기 마누라와 오입질한 놈 이름을 대라며 잔뜩 화를 내고 있는 크레이지 덤프에게 선심 쓰듯 일련번호가 지워진 자동소총 두 자루를 헐값으로 팔았잖아!》 『팔긴 누가 팔아욧! 얼떨결에 빼앗긴 거지! 돈 한 푼 못 받았는데!』 《어쭈? 너 방금 시인했어. 새끼야... 그럴 적엔 증거 있느냐고 오리발을 내밀어야지.》 『헙.』 아무래도 망한 거다. 분명히 망했다.
《아무튼 너, 유죄.》 미스터 츄파춥스의 말투는 여전히 마트에 가서 직원에게 우유의 유통기한 얼마 남았냐 묻는 식이었다. 그러나 듣는 입장에선 피가 말랐다. 『그런게 어딨어요?!!!』 《어딨긴, 요깄지. 오늘부터 너, 고담으로 이사 가라. 앞으로 딱 24시간 줄게. 기왕이면 크레이지 덤프에게 연락해서 둘이서 손 붙잡고 같이 가. 그 인간이 긴급 수배 중이라는 건 난 모르는 얘기고... 아. 잠깐만? 최근 들어 고담으로 너무 많이 보낸 것 같아. 아무리 범죄의 도시라지만 나도 양심이 있지. 이번엔 고담 말고 메트로폴리스가 좋겠어.》
아니 될 소리다. 루모는 필사적으로 도리질했다. 메트로폴리스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슈퍼맨이 있다. 슈퍼맨이 누구던가. 우주선을 타고 온 외계인 침략자와 혼자서 맞장을 뜨고, 추락하는 보잉747 비행기를 한손으로 번쩍 들고, 마그마를 내뿜는 화산의 분화를 눈빛만으로 멈추게 만들고, 땅속 맨틀의 뒤틀림을 발 구름으로 바로잡아 지진을 멈추게 하는 이다. 그런 존재 앞에서 일개 장물아비는 너무나 그 존재가 미약해서 피크닉 테이블 위를 기어가는 개미보다 더 형편없었다. 슈퍼맨이 마음만 먹는다면 손가락으로 꾸욱 눌러버리리라. 『너무해요!』 거기다 그는 보호관찰 대상이라서 마음대로 도시를 떠날 수 없었다. 미스터 츄파춥스의 요구에 따라 메트로폴리스행 시외버스 티켓을 끊었다간 도주를 의심받아 가석방이 취소되어 버린다. 끔찍한 감옥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양반이. 나더러 지금 죽으라는 거에욧?! 게다가 크레이지 덤프랑 날 묶어?! 안 돼. 싫어. 못 떠나!』 《못 떠나?》 『못 떠나! 내가 왜 당신 말을 들어야 하는데? 당신이 내 두목이야? 아니잖아.』
혈압이 떨어지는지 속이 울렁거렸다. 불편함으로 가득한 무언의 시간이 잠시나마 이어졌다. 이윽고 츄파춥스가 숨죽여 웃기 시작했다. 어쩐지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비웃음을 바탕에다 광기를 양념으로 버무려 대단히 듣기 기분 나쁜 웃음 소리였다.
《하긴, 자네가 내 말을 들을 이유는 없지.》 『그, 그렇고 말고..(요)』 자신감이 통째로 사라져 느낌표 대신 슬그머니「요」자를 작게 덧붙였다.
《좋아. 마음대로 해.》 상대방은 오히려 싱글벙글이다. 《대신 나도 마음대로 할 거야. 이의 없지?》 클클,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지다 매끄러운 칼날에 잘리기라도 한 것처럼 별안간 뚝 끊어졌다.
Posted by 미야
2016/06/20 16:13
2016/06/20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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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1시 12분. 마이클은 이번에도 손톱을 세워 손목시계의 유리판을 톡톡 건드렸다. 자질구레한 흠집이 지나치게 많이 생긴 까닭이 아무래도 이 독특한 손버릇 때문일 듯하다. 그래봤자 본인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니 상관없다. 어차피 시계는 상표도 없는 싸구려였고, 애초부터 그는 남들과 달리 정밀한 고가 시계나 신형 자동차 같은 물건에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건전지가 닳아 초침의 움직임이 둔해지면 휴지통에 버릴 것이고, 대형마트에 들려 이를 대신할 적당한 가격대의 물건을 하나 고르면 되었다.
『졸려 미치겠네...』 산책 나온 기분으로 천천히 걷다 머리가 띵한 느낌에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서서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대다수의 평범한 이들이 변함없이 찾아올 내일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 어디서 길고양이가 먹이를 구하는 중인지 쓰레기통 쇠붙이가 텅 소리를 내며 울려 짙게 가라앉은 공기를 흔들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끌어올리며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다한들 밤눈이 어두운 마이클의 시야엔 고양이의 모습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양철 뚜껑을 밟았다가 지레 놀라 멀리 도망간 건지도 모르겠다.
『으아함~』 허리를 구부정하게 한 채 호주머니로 두 손을 끼워 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살고 있는 아파트와는 정 반대방향이었지만 순찰을 하느라 여러 번 돌아다녔기에 부근의 지리에 대해선 대략적으로 꿰고 있는 상태다. 조금만 더 걸으면 이 앞으로 문을 닫은 슈퍼마켓이 있다. 굳게 내려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는 녹슨 셔터 위에는 스프레이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다. 하트와 번개무늬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그림이다. 낙서가 뜻하는 바는 분명하지 않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인간의 심장을 100만 볼트로 튀겨버린다? 그보다 랭.KK 라는 이니셜이 눈에 익다. 도시 곳곳에 불법 페인팅을 남기는 자다. 최근에 작품 활동을 한답시고 고가 전철 위에 기어 올라갔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저 슈퍼마켓 셔터 위의 흔적은 그의 유작이다.
곁눈질도 하지 않고 지나쳐 약 빨은 보안등이 레이저 포인트처럼 점멸하는 작은 2층 건물로 향했다. 몇 년간 도색 공사를 하지 않아 헐벗은 콘크리트 표면을 드러낸 건물에는 골동품 가게가 하나 세 들어 있다. 옛날에는 전당포라고 했었지, 아마. 노트북이나 금목걸이, 반지, 명품가방 등을 헐값에 사들이고 인터넷을 통해 중고물품으로 팔아치우는 가게다. 당장 돈이 궁한 사람들이 주요 고객들인데 문제는 뒷손님이었다. 이 가게에서 판매되는 물건의 10~12%는 비정상적으로 거래된 장물이었다.
『이봐, 트랭키. 문 열어. 지금 가게 영업 아직 안 끝났다는 거 다 알거든?!』 「닫혔음」이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을 무시하고 입구를 두드렸다. 『트랭키이이~ 안 나오면 쳐들어 간다아~!』 입구를 감시하는 보안 카메라가 원격 조정으로 움직이자 렌즈를 향해 뭔가를 쓱 내밀었다. 만능 출입증인 경찰 배지는 아니고 - 엉뚱하게도 포장을 뜯지 않은 츄파춥스 캔디였다. 『나도 온 동네 시끄럽게 만들기 싫거든? 좋게 얘기할 적에 빨리 문 여시지?』 안에서 CCTV로 전부 보고 있었는지 삑, 소리가 나면서 출입구의 잠금 장치가 해제되었다. 『착하구먼.』 츄파춥스를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은 뒤, 마이클은 손이 아닌 발을 사용해 출입문을 밀었다.
『제기랄, 무슨 일이쇼.』 카메라와 핸드폰, 노트북 같은 전자제품이 빼곡히 들어찬 유리 진열장 앞에서 털 복숭이 사내가 인상을 썼다. 우호의 의미로 그의 두꺼운 손바닥이 테이블 위에 얌전히 올라가 있었지만 그거야 눈속임이고 - 여차하면 진열장 안쪽에서 장전된 산탄총을 꺼내 단 0.3초만에 방아쇠를 당길 거라는 걸 마이클은 잘 알고 있었다. 트랭키는 숙련된 사격수였다. 여기서 숙련되었다는 의미는 사물을 잘 맞춘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에게 총알을 날림에 있어 전혀 망설임이 없음을 가리킨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은 적이 있는 방향이 아닌 엉뚱한 방향을 향해 상당수의 총알을 낭비하게 되는데 전체에서 70%가 그렇고 나머지 30%는 참호를 노리고 똑바로 사격한다. 그리고 이들 30%에 속하는 사람 가운데 단 0.2%만이 적의 머리를 정 조준하는데 트랭키는 이 0.2%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남성 호르몬 분비의 과다로 머리 정수리가 벗겨지기 시작한 금발의 사내가 불만에 가득 차 마이클을 쏘아보았다. 『물건을 팔러 왔소?』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일단 장사꾼 멘트를 날리고 보았다. 어랍쇼, 그런데 의외로 마이클은 거기에 호응했다. 『이거, 손목시계 팔면 얼마 줄 수 있어?』 트랭키는 코웃음 쳤다. 걸레를 가져와 뭘 어쩌겠다고. 솔직히 공짜로 준다고 해도 받기 싫었다. 『40센트?』 『오케이... 그럼 전화 통화 정도는 가능하겠네?』 망설임 없이 시곗줄을 푸른 마이클은 낡고 흠집 난 싸구려를 유리 진열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위협하듯 체중을 앞으로 기울였다.
『시계를 내놓겠어. 그러니 40센트의 값을 하라고, 트랭키. 장물아비인 루카스 모드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줬음 좋겠어. 설마,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루모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그래도 명색이 자네 동업자인데.』 같지도 않은 요구에 언성이 높아졌다. 『아니 이보쇼. 공중전화가 필요한 거라면 가게 밖에서...』 『STOP, 트랭키.』
마이클 윈저의 키는 174cm다. 체격은 보통. 셔츠를 가슴꼭지 부근까지 걷어 올리면 단단한 근육 대신 물렁거리는 뱃살이 드러난다. 게으른 성격의 그는 땀 흘리는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체력단련에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 남들 허리 굵기의 팔뚝을 가진 트랭키에겐 말 그대로 한 방 꺼리였고, 주먹 대신 손바닥으로 후려쳐도 골로 가고도 남았다. 그런 주제에 남이 하는 말을 싹둑 자른다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지 모르는 행위다. 「걍 쏴버릴까.」 트랭키의 눈썹이 실룩 움직였다. 손을 진열장 아래로 내려 산탄총을 움켜쥐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초. 하지만 의외다 싶게도 트랭키는 마이클의 머리를 쪼개버리는 대신 모토로라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거로는 내가 손해를 보는 기분인데.』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두꺼운 엄지손가락으로 열 개의 숫자를 눌렀다. 예의 익숙한 뚜루르 신호음이 뒤를 따랐고 마이클과 트랭키 두 사람은 가만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루모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 같으니 내가 먼저 얘기를 해보겠소.』 『이미 관 뚜껑 열고 다리 하나 집어넣었는데 마음의 준비랄 게 왜 필요하나.』 『남은 다리까지 관속으로 집어넣을지, 아니면 다리를 뺄지, 녀석이 아직 결정 못 했을 수도 있잖소.』 『됐어. 결정 장애가 핑계가 되어주지는 않는 법이지.』 핸드폰을 낚아챈 마이클은 악마처럼 미소 지었다. 그리고 외쳤다. 『헤이, 루모! 지금 거울을 보고「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다섯 번만 말해볼래?』 상대방이 헉 소리를 내고는 바로 통화를 종료했다. 아니, 들리는 잡음으로 보자면 정상적으로 종료 버튼을 누른게 아니고 깜짝 놀란 나머지 핸드폰을 바닥으로 떨어뜨린 것 같았다. 『그것 봐요. 녀석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 거라고 했잖소.』 트랭키의 핀잔에도 아랑곳없이 마이클은 리듬에 맞춰 발을 까딱거렸다.
사탕을 입에 문 채로 거울을 보고.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미스터 츄파춥스. 다섯 번 말해요. 그럼 죽었던 망령이 되살아나 당신 뒤에 까꿍 인사하며 서 있을 거에요. 붉게 흐르는 건 크랜베리. 찐득거리는 건 허니 라즈베리. 안녕, 안녕, 미스터 츕스.
Posted by 미야
2016/06/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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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짐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배트맨이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고담의 범죄율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납치, 마약거래, 살인과 같은 심각한 범죄가 아니라 소매치기나 편의점 도둑, 지하철 성추행과 같은 자질구레한 범죄들이었다. 그래서 다들 그 심각성을 몰랐다. 서서히 데워져가는 들통 속의 개구리는 자신이 삶아지고 있다는 걸 모르고 죽는다고 했던가, 깊어지는 치안 악화에 사람들은 패스트푸드의 트랜스지방 탓을 하거나 배기가스로 오염된 공기 탓을 했다. 그리고 이 미쳐 날뛰는 모든 악행이 종말에 이를 즈음에 시장 선거가 있을 거라 짐작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때로 정치 선전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싸이렌 소리가 아무리 자주 들려도 그걸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운동 전략으로 여겼다.
「범죄 관련 뉴스를 잔뜩 때린 뒤에 여론이 악화되면 시장 후보가 선언하는 겁니다. 이 모든 잘못을 제가 반드시 바로 잡겠습니다~!! 그럼 순진한 유권자들은 기립박수를 치는 거죠.」 「그런데 이걸 어쩌죠. 우린 너무 익숙해졌어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고담은 항상 범죄가 들끓었습니다.」 토크쇼를 진행하는 루이 시켈이 카메라 앞에서 신랄하게 공화당 선거 전략을 까고 나섰다.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이 모든 건 얄팍한 눈속임이 아니었다. 컴퓨터 통계자료에 의하면 크고 작은 범죄율이 12%나 상승했다. 배트맨이 이 사실을 고든에게 귀띔을 해줬을 적에 두꺼운 안경을 쓴 반백의 GCPD 경찰국장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구치소가 항상 미어터질 지경이라 좀 이상하다 생각은 했소만... 그 정도였다고?」 「조커나 펭귄, 투페이스 같은 빌런만 염두에 두니까 사소한 디테일을 놓치는 걸세, 지미.」
그리고 거기에는 미묘한 패턴이 있었다. 흡사 도시 전반으로 범죄 투어라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배트맨이 파악한 바에 따르자면 잡범들은 외지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와서 무슨 백화점 쇼핑이라도 하듯 범죄를 저지른 뒤, 뒷골목에서 탈취한 자가용을 몰고 고담을 떠났다. 운이 나쁜 몇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나머지는 일주일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관광하듯 고담으로 돌아와 편의점 금고를 강탈하거나 귀가하는 여성을 덮쳤다. 「자, 잠깐만 기다려보게, 배트맨.」 「여기 내가 분석한 데이터가 있네. 자네에게 주지.」 「도시 바깥으로부터 범죄자들이 유입되고 있다고?!」 「그들 한명 한명은 별 대수롭지 않지만 가랑비가 모여 강물이 되는 법이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걸세, 짐. 누군가 뒤에서 못된 장난을 치고 있는게 분명해.」
팀 드레이크 - 레드로빈은「못된 장난」이라는 표현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거 아세요? 배트맨. 난공불락의 큰 요새를 몰락시키려면 병든 쥐 세 마리면 충분하다는 걸.」 실제로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도시를 점령한 정복자가 있었다. 「자니베크 칸은 병으로 죽은 쥐를 투석기를 사용해서 도시 성벽 안으로 집어 던졌죠. 나중엔 새카맣게 썩은 병사들의 시체도 던졌고요. 덕분에 페오도시아에서 흑사병이 창궐했어요. 도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폐허가 되었죠. 그 뒤의 중세 유럽의 역사는 우리가 배운 그대로에요.」 「누군가 우리에게 병든 쥐를 떼로 보내고 있다는 거군.」 「비유하자면 그래요. 누군지 몰라도 무척 악랄한 수를 쓰고 있는 것 같네요.」 「배후가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야겠다.」
그런 까닭으로 운 나쁜 소매치기가 밧줄에 발목을 묶인 채 3층 건물 높이에서 거꾸로 매달리게 되었다. 「이, 이러지 마세요~!!! 꺄아아악~!!」 배트맨은 경고도 하지 않고 소매치기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물론 그는 불살주의자다. 줄의 길이가 짧았기에 소매치기의 머리는 지면에는 닿지 않았다. 하지만 체중과 가속도 탓에 밧줄에 꽁꽁 묶인 발목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탈구되었다. 「누가 너를 이리로 보냈지.」 「크아악, 크아앗~!! 아프다고, 아파! 제발, 제발!」 고통에 몸부림치는 자를 배트맨은 다시 공중에 매달았다.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 또한 밤새도록 이러고 싶지 않아. 누가 너를 이리로 보냈지?」 「고문은 불법이야, 불법이라고~!! 아악, 내 발! 내 발이 뜯겨져 나갈 것 같아~!!」 「그 자의 이름을 대면 널 당장 병원에 보내주겠다.」 「개새끼!!」 「그 자의 이름이 개새끼인가.」 「멍청이! 그럴 리 없잖아~!!」 「그럼 누구지.」 「이이잇!」 배트맨은 침착하게 줄을 조정했다. 「알았어.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죽을 거 같다고 생각한 소매치기가 새파랗게 질린 채 한 이름을 외쳤다. 「미스터 춥스! 미스터 츄파춥스야! 춥스가 날 고담으로 보냈어!」
어쩐지 비만과 당뇨병에 걸릴 듯한 이름이었다. 그래도 철거 예정이던 공장에 불을 지르려 했던 방화범을 붙잡아 심문하고 성추행범의 손가락을 분질러서 미스터 츄파춥스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어냈다.
- 스타 시티에 주소지가 있음. - 단독 행동을 좋아함. 아니면 내부 조직에 명령체계가 없음.
불장난을 하려다 붙들려 호되게 경을 치게 된 방화범이 미스터 츄파춥스의 몽타주를 만드는데 기꺼이 협력했다. 하지만 그다지 도움은 안됐다. 완성된 몽타주 속의 얼굴은 싸구려 냄새가 풀풀 나는 할로인 가면이었다. 한쪽 눈은 햇빛에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고, 뺨이 찢어져 너덜거리고, 벗겨진 피부 아래로 치아와 턱뼈가 드러난 외모였다. 투페이스는 얼굴 반쪽까진 정상이었는데 이쪽은 전부가 망가졌다. 「너, 마약을 하나.」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에... 또. 가끔 합니다만. 그래도 어젠 하이를 안 했지라요.」 「정말로 이런 외모였다고?」 「그러니까 미리 말씀드렸잖아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말한 뒤, 방화범은 턱짓으로 그림을 가리키며 배경으로 오렌지 빛깔의 화염을 그려줄 것을 당부했다. 「이왕이면 머리카락도 훨훨 타는 모습으로 그려주쇼. 내 진짜 드러워서... 퉷.」 「이상하군. 왜 그렇게 싫어하지. 네놈의 두목이잖아.」 「그런 끔찍한 소리 마세요. 그럴 바엔 차라리 바퀴벌레를 제 형제 삼겠어요.」
왜 그가 미스터 츄파춥스를 그렇게나 혐오하는지 짐작을 못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이유가 나왔다. GCPD에 체포된 날치기 하나가 춥스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 따윈 없다며 이실직고를 해버린 것이다. 「경찰이라고?」 「정확하게는 부패 경찰이에요, 배트맨. 이름과 소속은 아직 불명이지만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고 현장에서 붙잡혀도 체포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여러 부당이득을 취했다고 하더군요. 포주를 협박해서 한 번에 만 달러 이상의 돈을 요구한 적도 있었고,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쇠지레나 야구 방망이를 써서 폭행을 했다더군요.」 레드로빈은 세 명의 용의자를 추려 나이트윙과 배트맨에게 보여줬다.
「어떻게 용의자를 확정했지, 레드로빈?」 침착하게 내려앉은 배트맨의 목소리는 흡사 어려운 과제를 검사하는 선생님 같았다. 그리고 레드로빈은 실제로 숙제 검사를 받는 기분을 느꼈다. 「불법 거래를 눈감아주고 현장에서 범인을 붙잡아도 체포를 하지 않음 - 이게 키워드에요. 다시 말해 부패 경찰의 근무 실적은 바닥이고 검거률이 평균치 이하겠죠. 실제와는 달리 눈가리개 효과로 그 사람이 근무하는 시간에는 마치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그것을 전제로 최근 1년간 스타 시티의 잡다한 사건 사고 기록을 수집하여 분류해봤어요. 살인사건이나 마약거래, 조직폭력과 같은 굵직한 건은 미스터 츄파춥스가 터치하기 곤란했을테니 일단 2순위로 밀어뒀고... 도둑질, 단순폭행, 성매매 같은 사건의 검거 시간대를 각 구역별로 정리해서... 쨘.」 컴퓨터 화면으로 수백, 수천의 붉은 점들이 빠르게 찍혀나가자 확실히 점이 덜 찍힌 흰색 바탕이 눈에 보였다.
「소개합니다, 미스터 츄파춥스입니다. 아니, 그의 근무 시간이랄까. 아무튼.」 레드로빈이 스스로를 대견스러워하며 코를 으쓱였다. 물론 배트맨이 잘 했다 소년탐정을 칭찬하는 일은 없었다. 허나 딱딱하게 굳은 배트맨의 입매가 잠시나마 부드럽게 변하는 걸 기분 좋게 즐길 수 있었다.
『...... 그때는 이미 다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쉽게 생각했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던 딕 그레이슨은 쓰게 웃었 - 아니, 지금은 히어로 코스튬을 입고 있으니 나이트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한 뼘 너비의 담장 위를 전력질주 하듯 빠르게 뛰어가다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소방용 비상계단 위로 착지했다. 주의는 했다만 소음이 전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잠시 귀를 뾰족 세우고 숨을 고른 뒤, 그제야 안전하다 판단한 그는 잔뜩 눌렸다 튕겨 오르는 스프링처럼 팔을 움직여 소방계단 맨 윗단으로 줄을 걸었다. 길게 늘어났던 줄은 언제 그랬냐며 줄어들었고, 79kg의 체중이 잡아당겨지며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웃한 골목 아래로는 한밤중의 차가운 기운을 뒤집어쓴 자가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느리게 걷고 있었다. 집에 가서 이빨 닦고 자겠다던 마이클 윈저였다. 피곤하고 졸린지 간혹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어쨌든 문제는 여기가 그의 집과는 완전히 정 반대 방향이라는 거였다.
Posted by 미야
2016/06/14 16:23
2016/06/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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