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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6

제8장 어린아이는 사고를 쳐야 어른이 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사람 살려 울부짖으며 우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이 바라는 것도 그거였다.

금목현의 시선은 하늘로 올라간 연이 아니라 내 얼굴을 향해 있었는데 그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라 아무리 의젓한 척해도 아직 애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걸 어쩐다. 이 몸뚱이는 눈물샘이 고장 나 울지를 못한다. 게다가 뇌신경 프로세서가 엉겨 붙어 울음이 나와야 하는 순간에 웃음이 터진다. 이게 마음대로 되는 일도 아니고, 여러 번 죽고 되살아난 탓에 맹독성 화학약품 통에 빠지고 난 뒤에 훼까닥 돌은 DC 빌런처럼 되어버렸다.

나도 모르게 웃어버린 듯하다. 금목현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아냐, 너 비웃은 거 아냐. 자존심 긁으려는 의도 아냐.
마음의 외침이 닿지 않은 탓에 금목현의 격려(?)에 따라 화살 재장전이 빠르게 이루어졌다.
아이들은 이번에야말로 연을 떨어뜨리겠다며 서둘러 화살을 쐈다. 마음이 급했으니 조준은 더 엉망이었고 애먼 화살에 얻어맞을 위기에 처한 나는 말 그대로 연의 줄을 쥔 채 이리저리 움직이며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덕분에 연의 움직임은 거의 미친 망아지 수준이었고, 소년들은 독이 바짝 올라 거의 폭발 일보직전까지 이르렀다. 무리 중 활을 가장 잘 쏜다던 금목현도 연을 맞춰 떨어뜨리는데 실패하자 울컥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그게 내 탓이냐고! 나 또한 울컥했다.
고함과 야유가 터지는 와중에 금목현이 승부욕을 보이며 활 두 개를 한꺼번에 줄에 끼웠다.
“그래! 날려버려!”
“본때를 보여줘!”
그들이 노리는 게 연이 아니라 꼭 나인 것 같아 줄을 놓고 도망쳐야 하는 거 아닐까 고민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그랬다간 화살이 내 등짝에 꽂힐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아까부터 귀 따가워 죽겠네. 누가 오리처럼 꽥꽥거리는 거야!”
누군가 짜증을 내며 시끄럽다 타박을 하는 것과 동시에 금목현이 당겼던 줄을 놓았다.
찰나의 순간 약간의 삑사리가 난 것 같았지만 어쨌든 화살 하나가 성공적으로 연을 꿰뚫었다.
나머지 하나는... 음, 담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갔다.
“진짜 못 쏘네.”
화려하게 장식된 화살 통을 메고서 날아가던 화살의 궤적을 지켜보던 소년이 밥상 위로 올라온 국이 짜다는 투로 툭 내뱉었다.
금릉이 하던 말을 듣고 있던 금목현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기롭게 두 개의 화살을 걸어 한 번에 쐈는데 그 중 하나만 명중했으니 그렇게 안 하니만 못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수치스럽기도 하기에 금목현은 남 탓을 했다.
“저 하인 놈이 연을 제대로 날리지 못해서 그래.”
멈추지 않고 광역 스킬을 걸어 공격의 범위를 넓혔다.
“그리고 이 방법으론 활쏘기 수련이 잘 되는 것 같지도 않아. 우리가 잘 아는 어느 분께서 말씀하시길, 운몽 제자들은 연을 맞추는 걸로 활쏘기를 배운다고 해서 따라 해봤더니 우리 금씨에겐 영 안 맞는 것 같단 말이지. 방식이 별로야. 후져. 역시 금씨에겐 금씨의 방식이 있고, 강씨에겐 강씨의 방식이 있는 거겠지. 뭐, 누구는 금씨 방법은 내버려두고 강씨 방식으로 수련하는 걸 좋아하지만 말이야... 난 관둘래. 나랑 맞지 않아. 연습을 해도 실력이 안 늘잖아.”

금목현이 지목한 그 어느 분이 아무래도 금릉인 것 같았다.
금릉의 예쁜 얼굴이 왈칵 찌푸려졌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시비가 늘상 있던 일인지 금릉의 대응은... 음, 소인배 그 자체였다.
시비에 비아냥으로 대응했다는 얘기다.
“그런가? 평소에 시시덕거리며 연습을 하니 실력이 안 느는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뭐라고?”
“뭐긴. 네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네 수준으론 방식이 안 맞았던 거야. 고정된 과녁으로 연습을 해야 하는 단계인데 움직이는 연을 무슨 재주로 맞추겠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평소에도 실력이 좋다 하도 과시하기에 그만 착각했지 뭐야.”
응, 이러면 맨주먹으로 싸우자는 거 맞지.
키 큰 소년들이 저보다 작은 금릉을 둥글게 에워쌌다.
그리고 우리 금릉은 참지 않았다. 다수를 상대한다는 불리한 조건에서도 일련의 망설임 없이 자기가 먼저 주먹을 날리고 보았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는 한 마리 치와와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럼 나는 어떻게 했느냐고?
연줄을 감아 정리하고, 떨어진 연을 줍고, 땅바닥에 꽂힌 화살을 뽑았다.
높으신 도련님들끼리 싸울 적에 천한 것이 함부로 끼어드는 거 아니다.
자기들끼리 바쁜 것 같으니 알아서 꾸벅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아니, 뜨려 했다.
“야! 도중에 가긴 어딜 가려고!”
금목현이 내 목덜미를 덥석 쥐었다.
소동을 눈치 챈 어른이 싸움을 말리려고 여기까지 달려오면 금릉이 먼저 주먹질을 날렸노라 확인을 시켜줄 목격자가 필요하단다.
그런데 내가 왜?
나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모두 앞에서 얼굴에 빨갛게 세로줄 그어진 소년을 지목했다.
줄을 제대로 당길 줄 몰라 화살 한 번 쏘아보지 못했던 소년은 분함과 억울함에 뒤로 넘어가려 했다.
그게 뭐. 내 얼굴에 붕대 감은 거 안 보여? 마무리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눈을 다쳐 사물이 흐릿한데다 전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계시니 감자바위 같고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나 빼고 자리에 모인 감자바위 전원의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야!”
“예, 도련님. 따로 시키실 일이 있으신가요.”
턱 아래가 벌겋게 부어오른 금릉이 의원에게 치료받으러 간다면서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너, 구린내 맞지.”
“아닌데요.”
“어쭈? 이것 봐라. 맞잖아, 구린내. 얼굴 절반을 붕대로 감았어도 내 눈은 못 속인다. 네가 죽었다고 남씨네 것들이 광광 울던데 전부 거짓말이었네?”
길을 가로막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덕분에 넘어질 뻔했지만 그보다 금릉은 내 눈을 가린 붕대에 관심이 쏠린 상태였다. 하지 말라는데도 계속 손을 가져가 풀려고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 포장지도 아닌데 붕대 끝을 잡은 손끝이 집요했다.
“뭐야, 뭐야. 어째서 그따위로 변장까지 한 거야? 붕대는 영 아닌데. 야, 왜 자꾸 피해.”
“제 이름은 구린내가 아닌데요.”
“그래. 오늘은 몸에서 냄새 안 나네. 그런데 네 이름이 뭐더라.”
“안선준입니다.”
“이게 누굴 속이려 들어. 걸람이잖아, 너.”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으면서 괜히 한 번 찔러본 거냐, 홧김에 붕대 끝을 쥐고 있는 손을 찰싹 소리가 나도록 때렸다.
치와와는 참지 않는다. 금릉도 지지 않고 내 팔뚝을 찰싹 때렸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얼마나 맵고 따가운지 맞은 자리를 세게 문지르며 신음했다.

“아오, 아파라. 얘가 은근히 손맛이 맵네. 맨날 싸워서 단련이 잔뜩 되어 있구먼.”
“그래서 뭐. 너도 다른 애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설교하려고?”
“미쳤냐? 그런 싸가지들과 뭐 하러 친하게 지내. 그런 놈들은 이쪽에서 친하게 지내자고 하면 호구 잡을 것들이야. 적당히 거리를 두고 너나 엿 많이 잡수세요 해야 뒤탈이 없다고.”
금릉이 눈을 끔뻑거렸다. 지금까지 싸우지 말라는 말만 들었지, 나처럼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나보다.
“어... 그렇지.”
“그리고 너처럼 다굴 당하면 안 되는 거야. 그게 싸움의 기본 원칙이라고.”
“다굴이 뭔데?”
“아까처럼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는 거.”
“그럼 거기서 꼬리를 내리라고?”
“상황에 따라서는 그렇게 해야 할 때도 있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딱 한 놈만 골라 줘 패. 이놈도 때리고, 저놈도 때리고, 힘들게 노력해봤자 피해가 분산되잖아. 그러니 딱 하나만 노려.”
골목대장 놀이를 해본 적도 없으면서 조언이라고 떠들고 앉았으니 내 얼굴 두께도 참 두껍다.

화살 통을 메고 가는 내 옆에서 도련님이 뒷짐을 지고 걸었다.
“구린내, 너도 사촌들과 자주 싸웠어?”
“싸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어. 자주 왕래를 안 했거든.”
내뱉고 나서 생각해보니 이건 온서염이 아닌 안선준의 기억을 토대로 나온 이야기였다.
온서염은 소산 거리에서 발견된 이후 고아처럼 자랐으니 왕래고 뭐고 친척 자체가 없었다.
안선준의 가족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만 왕래했는데 사촌과는 연령대도 맞지 않고 서로 교차점이 없어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했다. 한선준이 중학생이었을 때 사촌은 대학생 졸업반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적에 장례식장에서 담배 심부름을 시켰던 기억이 났다. 그 정도뿐인 얄팍한 관계였다.
“뭐야.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싸우는 요령에 대해 날 가르치려 들어?”
내게서 화살 통을 도로 빼앗아 들면서 금릉이 어이없어 했다.
음, 그렇게 따지면 할 말이 없다.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이곤 금릉에게 얼른 의원에게 가보라고 했다. 붓기가 빠지기도 전에 멍이 들 텐데 위치가 또 애매하게 턱 아래라서 밥 먹을 적마다 쑤실 거다. 그러니 약초든 뭐든 미리 잔뜩 발라놓는 게 좋았다.

“어쨌든 내가 먼저 주먹질한 거 아니라고 말해줘서 고마워.” 
“별 말씀을.”
“그런데 그 자식들 나중에 보복하러 올 수도 있어. 그... 뭐냐. 금목현은 꽤 치사해.”
“내가 봤을 적에도 그럴 것 같더라. 하지만 괜찮아. 그래봤자 애들이잖아?”
“웃기고 있네. 너도 애거든?!”
여기까지만 하고 우리들은 헤어졌다. 서로 길게 대화를 나눌 처지도 아니었고, 나만 보면 짜증을 내는 유수관이 날 발견하자마자 아까부터 계속 놀고만 있을 거냐며 내 귀를 잡아 뜯으려 했기 때문이다.
살아 움직이는 과녁 역할을 하다 화살에 맞을 뻔했어도 유수관 입장에선 놀이에 불과했다.

“너를 어디다 써먹어야할지 모르겠다.”
그러면서 설거지, 물 길어오기, 청소하기, 짐 나르기, 가리지 않고 힘든 일은 다 시키더라.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일주일이 금방 흘러갔다.

이 와중에 금릉이 은밀하게 손을 쓰기라도 한 건지 개 한마리를 돌보는 일이 내 앞으로 떨어졌다.
“귀한 개다.”
압니다. 그리고 내 종아리 씹는 걸 대단히 좋아하는 놈이기도 하죠.
꼬마 선자는 ‘꼬마’ 타이틀을 붙이고 있기가 민망하게 커다랗게 자랐다. 처음 봤을 적엔 주먹밥 크기였던 선자는 대형견 아프간하운드보다 덩치가 더 커졌다.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움찔하게 될 크기랄까, 털은 촘촘했고 짧은 편이었다. 목덜미에 검은 갈기가 있어 늠름한 수컷의 위용을 보였는데 사실 얜 암컷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거기로 불알이 안 보이니까 아는 거지 그게 뭐 대단한... 음.
주인을 닮아 처음부터 시비조다. 이번에도 선자는 어김없이 내 다리를 와앙 물었다.
썩을 놈의 유수관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아무 것도 못 본 척했다.
“밥을 주고, 털을 빗겨주고, 똥을 치우고, 닭을 잡아먹지 못하게 지켜보면 된다. 참 쉬운 일이지.”
“그보다 식자재를 운반하고 싶습니다만. 그냥 포대자루 옮길게요.”
“안 돼!”
선자를 돌보는 일이 설렁설렁 해치우는 종류가 아니라 일종의 벌칙수행이라는 건 유수관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21/12/23 13:47 2021/12/2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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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5

제8장 어린아이는 사고를 쳐야 어른이 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운심부지처가 그 자체로 산이었다면 금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이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여의도 63빌딩 처음 보는 시골뜨기가 되어 입을 벌렸다. 건축기술의 한계로 하늘을 찌르는 높이까지 지붕을 올리지 못한 관계로 규모를 옆으로 늘려 크기가 무지막지했다. 화려하고도 웅장한 기세가 그냥 한 나라의 왕궁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기를 꺾는 건 정문의 모양새였는데 정문 입구까지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며 세어보면 무려 108개나 된다던데 이건 사람의 무릎 뼈를 갈아버리는 미친 지랄이었다.
질려하는 내 반응을 곡해하고 길을 안내하던 수사가 기뻐했다. 감탄이 그 감탄이 아닌데 아무튼 좋아했다.

어쨌든 수사는 내가 정문 계단으로 올라갈 신분이 되지 못했기에 이참에 실컷 구경이나 하라며 이곳저곳을 끌고 다녔다. 멀리서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손님들의 모습이 확실히 장관이기는 했다. 비단 옷을 입고 다들 강제 유산소 운동 중이었는데 근엄한 척하고 있어도 겨드랑이에 땀이 차고 있었다.
수사의 말로는 청담회처럼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엔 가마를 사용한다고 한다. 염방존이 친히 입구에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황금 가마가 훨훨 날아다니고, 금색으로 옷을 입은 수사들이 주변을 엄호하여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나.
아무튼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 수사는 나를 데리고 별관처럼 생긴 옆 건물로 들어갔다.

“눈에 붕대는 왜 그런 건데.”
“다쳤습니다.”
“어쩌다?”
“강도에게 당했어요.”
궁예처럼 한쪽 눈을 붕대로 가렸더니 거리 감각이 떨어져 걷는 게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헛디디고 주룩 미끌어졌다. 난간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뻔했다. 한쪽 눈으로만 사물을 보는 훈련을 더 해야겠다 생각하며 이쪽을 흘깃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목 인사를 했다.
안내역할의 수사는 그런 식으로 하다간 해가 져도 끝나지가 않을 거라며 발걸음을 독촉했다.
한참을 빙빙 돌아 호텔 로비 같은 곳에 당도하자 지배인 분위기의 남자가 나를 맞았다.
배가 많이 나와 스스로 발을 닦을 수 없는 풍채의 사내였는데 몸집이 비대해도 동작이 재빨랐다.

“그래서 누구라고?”
“안선준입니다.”
“어디 안씨인가.”
“죽산 안씨입니다.”
“죽산이 어디야. 들어본 적도 없군.”
접힌 종이를 펼쳐 뭐라 적힌 글귀를 읽더니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며 끙 소리를 냈다.
이어지는 건 형식적인 주의사항이었고, 앞으로 당분간 간단한 잡일거리를 하게 될 거 말하며 파리를 쫓는 시늉을 했다.
“유수관! 나는 바쁘다. 나 대신 얘 좀 데려가!”
그러더니 연회용 소반 2천개를 창고로 옮기는 일에 다짜고짜 날 투입했다.
그렇게 금린대에서의 첫날은 짐 나르기로 시작해서 짐 나르기로 막을 내렸다.
다행히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드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입 갈구기는 딱히 없었다.

“그래서 누구라고?”
“죽산 안씨 안선준입니다. 먼 시골에서 왔습니다.”
“숫자는 셀 줄 알아? 자루 마흔둘을 가져가면 된다.”
다음 날에는 식자재가 든 자루를 주방까지 옮기는 일을 했다. 무가 가득 들어 제법 무거웠는데 다섯 번을 왕복하기도 전에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요령부리지 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자루 운반을 시작했다.
“무가 마흔둘이라고? 너는 무가 그렇게 좋디? 내일도 모레도 뭇국 먹고 싶어?”
자루가 너무 많이 왔다고 한다. 그러더니 주방으로 옮겨놓은 자루 마흔 둘에서 열다섯을 빼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했다.
“뺄셈은 할 줄 알지?”
어제 연회용 소반 나르던 일은 순전히 맛보기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후임 갈구기였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양손으로 자루를 하나씩 들었다. 전생에서 쓰던 빨간색 고무코팅 장갑이 너무나 그리웠다. 뒤에서 음흉하게 쿡쿡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왜 이렇게 굼떠!”
어제 봤던 사람이었다. 유수관... 그게 직책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알 재간이 없었다.
“너, 그리고 너! 따라와라.”
그가 나 말고도 다섯 명의 하인을 데리고 연무장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저 앞으로 활 과녁이 있고 풀을 베어 단정하게 정리한 모양이 더도 말고 연무장이었다.
여기서 돌을 주우라는 건가? 나 혼자 어리둥절해 하는데 다들 과녁으로 뛰어가 꽂힌 화살을 뽑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발선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한참 되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크고 무거운 화살을 품에 안고 세 번 왕복하니 진이 빠지려 했다.
한 시진 뒤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이 되자 다들 개처럼 헐떡거렸다.
나 또한 힘이 부쳤는데 모두가 단합하여 눈치를 줘서 마지막 왕복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졌다.
“걷지 말고 뛰어!”
악마 교관이 따로 없었다. 유격, 유격, 구호를 붙이면 딱이다 생각하며 보다 빨리 걸었다.
한쪽 눈을 가린 상태라 뛰는 건 무리였다. 거리 감각이 둔해진 상태에서 뛰면 십중팔구 넘어질 거다.
“못 봐주겠네. 엉덩이 흔들며 뒤뚱거리는 거 봐라.”
소리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성격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든 말든 과녁으로 가서 화살을 뽑았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 쏘았는지 박힌 간격이 일정했다.

다섯 개의 화살을 품에 안고 돌아서는 순간 쇄애액 공기를 찢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사람이 과녁 앞에 서있는데 어느 미친놈이 활을 쏘았다.
“아, 미안. 미안.”
말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소년이 어서 비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시 활에 화살을 걸고 줄을 당겼다. 내가 비키지 않아도 바로 쏠 기세였다. 실제로도 망설이지 않고 쐈다.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명쾌한 탁, 소리가 나면서 과녁 한 가운데로 화살이 박혔다.

“도련님, 그러다 사람이 다치겠습니다.”
유수관이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며 소년을 만류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실수라도 할 것 같으냐?”
“도련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놈은 실수를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이게 무슨 일요일 저녁 시트콤인가 싶었다. 유수관은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비비며 ‘저놈이 놀라 화살 앞으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낭패다.’ 라고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별 거지 같은 말을 다 들어봤어도 저 주장은 정말이지 신박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얼른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금린대에서의 두 번째 날, 금씨 가문의 방계 도련님 금목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나, 하는 짓 없이 미움 받는 부류인가.”
《글세. 운심부지처에 있을 때보다 취급이 더 안 좋은 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밥은 여기가 더 맛있어. 반찬 가짓수도 많고.”
《밥 먹으려고 금린대에 온 것도 아니면서.》
“아냐. 반찬이 맛있으니 섭섭하던 것들이 다 용서가 된다. 간이 알맞게 잘 들었어.”
온서염과 대화를 나누며 버섯조림을 입에 넣자 옆에 앉은 하인이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이러고 쏘아봤다. 모르고 보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이니 미쳤다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룻밤이 지나기도 전에 눈만 다친 게 아니라 머리도 다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빗자루 질을 하면서 온서염과 대화를 나눴더니 소문은 한층 더 빠르게 퍼졌다.

“야, 얼굴에 붕대 감은 놈!”
금목현이 자기를 닮은 사촌들을 데리고 나를 콕 찝어 괴롭히러 왔다.
다들 금색으로 옷을 입었고 미간에 붉은 단사를 찍은 소년들이었다.
나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용무이신가요.”
“연 날릴 줄 알아?”
“아니오.”
“어릴 적 뭐하고 놀았기에? 됐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거기서 연을 날려봐.”
그렇게 말하며 각자 활과 화살 통을 챙겼다. 훈련을 하는 김에 이번에는 연을 날려 움직이는 표적으로 삼을 생각인 것 같았다.

금목현의 실력이라면 빗나간 화살에 맞을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같이 온 사촌이라는 녀석들은 어쩐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슨 놀이라도 하는 분위기로 왁자지껄 떠들며 깔깔 웃느라 바빴는데 무기를 다루면서 집중하지 않는 태도만 봐도 앞날이 구만리였다.
“나란히 쏴서 누가 먼저 연을 떨어뜨리는지 내기를 하자.”
“내기가 되겠어? 여기서 활솜씨가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군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척 봐도 제일 실력이 떨어질 것처럼 생긴 소년이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난 아직 움직이는 건 맞추기 힘들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 움직이는 걸 맞추기 힘들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활을 다루는 것 자체가 서투른 아이였다. 시험 삼아 줄을 당겨본다면서 뺨에 붉은 세로줄을 긋는 걸 봐선 확실하다. 잘못 튕겨나간 줄에 얻어맞고 악! 비명을 지르자 금목현이 웃겨 죽는다고 난리를 쳤다.
“웃지 마! 재미없어!”
“알았어. 더는 웃지 않을 테니 넌 거기서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나머지 소년들이 제각각 활을 걸고 연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벌레를 형상화한 것 같은 연이었다. 바탕이 짙은 녹색이었고 가슴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활쏘기 연습용으로 쓰기엔 가격이 있어 보였다.
그런 연을 들고 바람을 등진 채 이리저리 뛰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나 연을 다루려면 나름 요령이 필요했다.
“느려 터졌어!”
참을성이 부족한 소년이 발을 동동 굴렀다. 발을 구르는 데 멈추지 않고 위협조로 한 발 쐈다.
근처에도 오지 않고 멀직히 떨어졌기에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비신사적 행위였다.

‘더 늦어지면 표적으로 내 머리를 맞추려 들겠군. 거 참.’
바람을 타고 연이 본격적으로 날아오르기도 전에 금목현이 활을 들고 목표물을 조준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눈 먼 화살에 맞겠는데?’
금목현을 따라하는 소년들을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집중하지 못한 소년이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않고 줄을 놓았다.
폼은 엉망이면서 힘은 펄펄 솟는지 화살은 제법 멀리까지 날아갔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온서염의 경고와 거의 동시에 발치 앞에 푹 소리를 내며 화살이 박혔다.

Posted by 미야

2021/12/21 17:11 2021/12/2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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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44

제7장 나라카(地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형장과 사추가 걱정했다.”
거기까지 말한 함광군은 묵묵히 입을 다물어버렸다.
길게 이어지는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는 손을 떨었다.
세간에서 칭송하는 명사라고 이러깁니까.
내가 먼저 나서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엔 함광군의 표정이 지나치게 근엄했다.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지장보살의 얼굴이어서 떠들기는커녕 옆에서 같이 침묵수행을 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자백을 강요하는 압박감도 같이 느껴졌다. 고해성사! 그러니까 딱 그거다.
트레이너님, 제가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야식을 주문해 먹었습니다. 참회하는 의미로 스쿼드 20회 추가하겠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손톱만 튕겼다.
그런 나를 함광군은 색이 연한 눈으로 뚫어져라 응시했다.

없던 위궤양 증상이 발현하기 일보 직전, 머리에 꽃 단 아이가 함광군의 부어오른 손가락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그걸 보고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이는 생전 엄마에게 배웠던 대로 아픈 거 빨리 날아가라며 숨을 호호 불었다. 어떻게 보면 함 흐뭇한 광경인데 숨을 부는 아이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에서 솜털이 쭈뼛 섰다.
사특한 존재라고 생각한 함광군이 지니고 있는 보검으로 베어버리면 그건 성불이 아니고 파훼다.
아무리 귀신이라지만 어린아이가 박살나는 걸 목격하긴 싫었다.
나는 계속 신호를 보내 에비, 지지, 당장 떨어지라 했다.
하지만 함광군이 매우 잘 생겼기에 내 말이 먹혀 들어갈 리 없었다. 애들은 본능적으로 잘 생긴 사람을 좋아한다. 미인인 유치원 선생님의 다리를 붙잡고 ‘선생님, 결혼했어요?’ 물어보는 건 만국 공통이다. 나도 어릴 적에 못생긴 아버지 버리고 잘 생긴 옆집 형 따라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내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얘졌다 다시 빨개지자 함광군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인데 이쪽이 목이 턱 막혔다.
“저기, 손가락이 많이 부으셔서.”
“......”
“아프실 거 같은데.”
“......”
“아니, 뭐 그렇다고요.”
물집이 잡히는 것만으로도 그게 얼마나 쓰라린지 알고 있는데 본인은 그리 마음에 두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다시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택무군과 남사추가 내 생사여부를 궁금히 여겼다. 그래서 문령을 반복하여 확인하러 왔다. 끝.
살려줘, 살려달라고.

이런 유형의 사람과 무인도에 단 둘만 남으면 이틀만에 입으로 피 토하고 죽는다.
조난을 당한 사람이라면 무릇 SOS 신호를 어떻게 보낼 것이며, 불은 어떻게 피울 거고, 구조대가 올 때까지 식수는 어떻게 해결할 건지 옆 사람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비행기 추락에서 살아남은 동지가 석고 틀에 부어 만든 딱딱한 얼굴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이러는 거다. 구조대가 올 때까지 계속. 그럼 헬리코박터균이 없어도 위가 아파지게 된다.
심지어 그는 습격에 대해 캐묻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죽었는데 무리에서 나 혼자 어떻게 살아남은 건지,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수사들을 파견했는데 왜 피하고 돌아다닌 건지, 운심부지처로 돌아올 생각은 있는 건지, 궁금해서 물어볼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무사했음 되었다.”
“네.”
“......”
그리고 다시 기괴한 대치가 계속되었다.
아니, 진짜지. 이 사람과 정상적으로 대화하려면 화술 스킬 레벨이 어디까지 올라야 하냐고.

난처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내 화술 스킬은 노멀 등급이다.
“그게, 설명이 어려운데... 진심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있어요.”
속이 답답했다. 그런데 이 답답함은 시원한 물 한 잔 마셔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있는데, 그건... 믿을 수 없어서예요.”
널 못 믿는다는 말을 듣고도 함광군의 표정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솔직히 원숭이 울음소리를 흉내 내도 모르는 척할 것 같은 느낌이다. 일절 관심이 없어 보였고, 어떤 의미에선 지루해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런데 벌겋게 변한 손가락은 그와 상반되는 시그널을 보냈다. 고금 연주에 단련된 사람이 손가락이 저지경이 되도록 오랫동안 줄을 튕겨가며 문령을 한 거다. 온전히 날 찾기 위해서.
“괜찮다.”
이것으로 저 사람이 말하는 ‘괜찮다’ 의 무게는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게 확실했다.

돌연 함광군이 들고 있던 고금을 소매 안에 넣었다.
진정한 도라에몽의 수납공간이었다. 그 커다란 물건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윽 사라지는 걸 보면 게임 인벤토리 같은 기능을 가진 듯했다. 새삼 여기가 판타지 세계라는 게 실감났다.
머리에 꽃을 단 아이가 깨달았다며 박수를 짝, 하고 치더니 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따라가 보니 나무뿌리가 엉킨 곳으로 작고 연약한 뼈가 보였다. 언제부터 여기에 누워있었던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뻥 뚫린 두개골의 눈구멍으로 다리가 많이 달린 벌레가 지나갔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쭈그리고 앉아 벌레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을 드러내며 벌레를 향해 손가락을 꾹꾹 찔러댔다.

두 팔을 걷어붙였다.
여기는 지옥이다. 지옥 같은 곳이다.
삽 같은 적절한 도구가 없어 함광군이 자신의 보검 피진으로 나무뿌리를 끊어냈다. 그 옆에서 나는 맨손으로 뼈를 정리했다. 부드럽고 작은 뼈들은 이미 다수가 소실되어 얼마 남지도 않았다. 일부는 들개 같은 짐승이 먹이로 인식하고 둥지로 물어갔을 것이다.
뼈에 붙은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을 예쁘게 정리해주고 흙을 덮었다.

“혹시 마차 몰던 마부를 조사해보셨나요.”
“그 사람은 금린대 사람이다.”
“그건 내부적으로 정보가 공유되었기에 마부에 대한 조사를 따로 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인가요?”
“다른 가문의 일이라는 뜻이다. 염방존에게는 적이 많다.”
많이 생략된 내용이었지만 돌아가는 그림은 대충 머리에 들어왔다.
염방존은 도중에 계획을 바꿔 실력 있는 수사들과 같이 무리에서 이탈했다.
마차는 비어있었고, 마부는 암살자가 칼을 휘두르기도 전에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운심부지처 사람이 무리를 따라가다 휩쓸려 죽었지만, 혹은 죽었다고 추정되었지만, 사건 조사는 금린대 사람들이 도맡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함광군이 질문했다.
“왜 마부를 조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나 빼고 유일한 생존자잖아요.”
“아니다. 그 사람은 죽었다.”
“엑?!”
누군지 몰라도 마부를 빨간 마티즈에 태웠다. 신속한 꼬리 자르기였다.
애초에 날 납치한 무리와 한패이기는 했을까. 그 또한 이용당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누구에게 이용을 당했지?

약양 상씨 일족 참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
설양이 음호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걸 아는 사람.
효성진 도장이 그 음호부를 빼돌렸을 거라고 여기는 사람.

손가락을 접어가며 헤아려봤다. 위치가 높다. 권력이 있다. 비밀리에 사람을 죽여도 의심을 받지 않는다.
나 같은 건 언제든지 처치 가능할 거다. 그러나 건드리지 않았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다. 함광군 같은 운심부지처 사람들이 날 부지런히 찾아다녔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본 전제조건이 마음에 걸린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는 짝패다. 실제로 염방존과 택무군은 서로 형님, 아우 하는 관계다.
효성진 도장은 나에게 이 두 가문을 믿지 말라고 전언을 남겼다.
그런데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어딘가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다.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다. 권모술수에 약하고 사람의 이중적 속내를 파악하는 일에 재주가 없다. 위에서 시키는 일이나 하고 월급을 받는 샐러리맨이다, 아니. 이었다. 사내정치를 못했기에 양쪽에서 치이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런 내가 음모론 어쩌고 이러고 고민해봤자 답이 쉽게 나올 리가 없다.
머리에 꽃을 단 꼬마가 눈치를 보더니 내 이마로 손을 댔다.
아픈 거 훠~어이 날아가라.

“어쩌죠, 함광군. 계속 도망쳐야 할까요?”
함광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언을 해줄 위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고, 선택은 오롯이 내 몫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판단을 마칠 때까지 종용하지 않고 기다려줬다.


제7장 나라카(地獄),  끝.

Posted by 미야

2021/12/21 11:08 2021/12/2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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