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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7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택무군에게 말대꾸를 한 일로 집안 제일 높으신 분이 화가 단단히 났다.
남선생님은 서슬이 퍼렇게 되어 문하생에게 명령해 날 정당 마루에 강제로 세우게 했다.
교훈을 뼈에 새기려면 매질을 해야 한다고 믿는 양반이라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책편(회초리)으로 무려 서른 대를 때리겠다고 했다.
절편은 크기가 빠따라서 어린애를 때리는 용도로는 적합하지 않다나.
그나마 봐줘서 회초리 서른 대였다.

문하생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바지를 허벅지 위까지 걷어 올렸다.
“......”
오른쪽 어깨를 붙들고 있던 문하생이 내 몸에 남은 흉터를 보고 흠칫하더니 숨을 삼켰다.
잘렸다가, 찢어졌다가, 붙었다가, 도로 떼어내는 걸 반복하면 아무래도 흔적이 남는 법이다.
왼편에 선 문하생은 감정을 드러내는 건 적절하지 않다 여겼는지 아예 정면만 바라보며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
남계인 선생님이 호랑이처럼 포효했다.
“나라에는 정해진 규칙이 있고, 민간에서는 서로가 정한 약속이 있다. 이러한 약속을 무시하고 혼인을 장난처럼 여기었으니 네가 어떠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알겠느냐!”
읭? 지금 뭐라굽쇼?

거리를 두고 법정 증인처럼 뒤에 선 수사들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렸다.
‘밤마다 여성 수사들 거처를 찾아 뒷산을 헤맨다는 소문이 있어 어린 녀석이 밝힌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봤더니 정체가 단수였대. 그 주방에서 일하던 채수당 넷째아들 있잖아... 그 넷째한테 당장 혼인해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 거라고 막 소리를 지르며 행패를 부렸다는 거야.’
‘허어... 단수라고 차별하긴 싫지만 소동은 반갑지 않군.’
‘어디를 가든 단수가 말썽이군. 얼마 전 거기서도 비슷하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이름이 금현우... 금현우였을 거야. 전 종주의 혼외자식인 자가 단수취향이라서 저 사람이 좋아, 이 사람이 좋아, 이러고 엄청 해괴한 짓을 저질러 결국 성씨도 빼앗기고 모친 집으로 쫓겨났다고 하더라고.’
‘나도 그 소문 들었는데. 그런데 그 단수 놈이 집적거린 대상이 하필이면...’
‘크흠! 그건 말하지 마시게.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 그리고 마침 악보를 배우는 목적으로 손님께서 걸음을 하셨으니 실수로도 귀한 분의 귀를 어지럽혀선 안 될 것이야.’
‘아무튼 말세로고. 깝데기가 벗겨지지도 않았을 나이에 남자를 덮치다니. 발칙하군.’
‘채수당 넷째는 혼절하여 쓰러졌다던데?’
‘깨어나선 소지품을 꾸려 집으로 도망쳤다더군.’
‘미친놈이 결혼해달라고 쫓아오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쳐야지. 현명한 처사야.’

왼편에 선 문하생은 귀가 안 들리는 척하며 여전히 정면만 쳐다보았다.
오른편의 문하생은 귀가 붉었다.
남계인 선생님은 단호했다.
“때려라!”
맞는 건 괜찮아도 오해는 풀어야 했다.
나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남계인 선생님을 응시했다.
선생님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기가 무섭게 금언술을 걸어 주둥이를 꿰매어 놓았다.
아니야. 그거 아니라고. 내 입! 말하게 해줘! 억울해. 오해야!

회초리를 다 맞고 난 뒤엔 상처에 약을 바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한실 구석에 서서 다시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했다.
종아리가 아픈 건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퍼진 헛소문이 억울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나더러 단수취향이란다. 나에게 시비를 걸던 놈에게 연심을 품어 – SM 취향이냐. 그게 말이 돼?! - 결혼하자며 덤볐고, 청혼 받은 놈은 미친놈에게 순결을 잃을 수 없다며 운심부지처를 떠났...... 택무군을 보며 손가락으로 내 입을 가리켰다. 홧홧한 통증이 문제냐. 이러면 내가 가해자가 되어버리잖아!

금언술은 풀릴 기색이 없고, 한실은 주인의 기분을 대신하듯 온도가 싸늘했다.
“종아리를 맞았음에도 반성을 하는 태도가 아니구나.”
억울하다고! 서안 앞으로 조로록 달려가 손짓 발짓을 열심히 했다.
홧김에 ‘결혼하자!!’ 소리를 질렀던 건 맞다.
그런데 ‘혼인빙자 욕설죄’가 ‘무고’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으면 그건 형평성이 안 맞지.
공평하게 따지려면 심안인지 심선인지 하는 애를 잡아다 물증도 없이 날 도둑놈 취급한 죄부터 물어야 할 거 아냐. 게다가 평소에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는데. 그런데 걘 집으로 돌려보내고!
아, 그런데 걔 이름이 도대체 뭐지. 계속 이놈, 저놈, 부를 수는 없는데.

“이름도 모르고 청혼한 거냐!”
택무군이 책망하는 얼굴로 따졌다. 화가 단단히 나 평소의 우아하고 따뜻한 분위기는 간 곳 없고 냉랭하고 쌀쌀맞았다. 표정이 딱딱해지자 동생과 정말 일란성 쌍둥이처럼 빼닮아 내심 신기했다. 함광군이 형장, 형장, 이러고 극존칭을 쓰는 걸 보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인데 냉기를 저리 풍기자 하루 한시에 태어난 사람들 같았다.
“손바닥을 내밀거라!”
어른에게 말대꾸한 걸 꾸짖기 이전에 예절교육이 더 절실하다며 보충설교가 이어졌다.
여기서 보충설교라 함은 손바닥을 대나무 편책으로 때리는 걸 의미한다. 중학교 시절에 플라스틱 자로 손바닥을 맞는 것처럼 따끔거리는 게 느낌이 비슷했다. 내 몸 상태를 고려하여 일부러 힘을 빼고 때리는데도 벌이 와서 침을 쏘는 듯했다.

“그렇군요. 저 아이가 최근 둘째 형님의 골칫덩이라는 그 걸람이라는 아이군요.”
악보와 고금을 준비하고 네발 향로 옆에 다소곳이 앉은 이가 낮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공식적인 접객실인 아실이 아니라 개인 처소인 한실에서 잠시 자리를 비운 택무군이 돌아오길 기다려도 괜찮은 특별한 손님 – 금언술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벌겋게 변한 손바닥을 감추며 그를 향해 가만히 머리를 조아렸다.
사내는 미간에 붉게 단사를 찍고, 옷깃과 소매, 허리띠에 화려한 꽃을 수놓은 옷을 입고 있었다. 금사로 자수를 놓은 무늬가 빛에 따라 번쩍번쩍 빛이 났다. 과한 느낌으로 금을 써 복장이 요란스러울 법도 한데 사람 자체가 화사해서 그런지 잘 어울렸다. 머리에는 비단으로 만든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사극에서 관리들이 쓰고 다니던 관모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중앙으로 큰 보석을 달아 보다 화려했으며 역시나 테두리로 금박을 입혀 번쩍번쩍했다.
“명월청풍 효성진에게 이름을 받은 아이라고 들었는데.”
입꼬리를 올려 살짝 웃자 방안이 환해졌다.
“과연 그렇군. 바람이 불어 운심부지처의 나무가 소란스럽구나. 산바람이 거세면 숲이 시끄러우니 그래서 걸람(傑嵐)이야. 명월청풍 효성진이 사람을 잘 보았어. 너 때문에 둘째 형님의 장탄식이 늘었다. 이 말썽꾸러기 악동아.”
현대식 양복을 입고 수제 구두를 신고 있으면 전도유망한 배우라고 해도 통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택무군과는 종류가 다른 미인이었다.

척 봐도 혈연관계는 아닌데 서로 형님, 아우님, 호칭을 하는 것으로 보아 꽃이 만개한 도원에서 날을 잡아 같이 술을 마신 관계가 아닐까 싶었다.
아우임을 자처한 자가 하얗고 고운 손을 모아 택무군을 향해 예를 표했다.
“둘째 형님, 이 아우의 식견이 아직 짧습니다만, 그래도 감히 말씀드리자면 예절의 배움이 성현의 글을 익히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예(禮)를 모르면 덕(德)을 모르고, 덕(德)을 모르면 도(道)에 이르지 못하니까요. 그러니 그 아이에게 급한 건 글공부가 아니고 예절공부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도울 일이 있음 돕겠습니다. 형님께서 저 아이로 인해 고민이 많으시니 이 아우, 가만히 있지 못하겠습니다.”
“아니야. 너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둘째 형님. 저는 조카 여란이 때문에 속을 썩인 적이 많아 이런 문제엔 능숙합니다. 그런데 둘째 형님은 지금껏 천둥벌거숭이를 다룬 적이 없으시지요. 함광군은 어려서부터 모두의 모범이었고 몸가짐이 특출했으니 어른 속을 썩일 일이 언제 있었겠습니까.”
택무군은 동생 칭찬을 들었음에도 어쩐지 할 말이 있다는 얼굴로 잠시 머뭇거렸다.
보아하니 그 함광군도 어른 속을 제대로 썩인 적이 있는 거구먼, 눈치껏 때려 맞췄지만 겉으로 내색하는 건 주제 넘는 일이었다. 지금의 대화 주제는 함광군이 아니라 말썽꾸러기인 나였다.

학부모 면담을 요청받고 교무실로부터 콜을 받은 젊은 아버지의 안색을 한 택무군이 눈알을 위로 굴렸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모습이어서 옆에 선 나는 그저 황송할 뿐이었다.
“조카가 또 말썽을 피웠느냐?”
“마음이 조급하여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니까요. 개를 키우면 책임감도 생기고 조금 의젓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 새끼 영견을 주었어도 똑같이 말썽을 부리더군요. 얼마 전에는 이종사촌 아이들과 몸싸움이 났는데 반성하라 꾸짖었더니 가출을 하고, 이튿날 이릉노조의 제자라는 것들을 잡는다고 장터를 뒤집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이릉노조의 제자가 아니라 시장에서 가짜 부적이나 팔던 장사꾼이었지요.”
이번에는 꽃무늬 남자가 눈알을 위로 굴렸다.
두 사내가 한숨을 쉬자 축구공으로 학교 유리창을 깨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런데 뭔가 익숙한 내용이었다. 영견, 이릉노조의 제자, 가짜 부적.
우울해하는 두 학부모 옆에서 같이 눈알만 또로록 굴리고 있는데 택무군이 부피가 대단한 책을 건냈다.
방금 손바닥을 때려놓고 아픈 손으로 필사하라는 건 아닐 테니 머리 위로 들었다.
정답이었다.
잘 보이는 곳에서 책을 머리 높게 들고 있으라 지시한 택무군이 손님과 같이 악보를 펼쳤다.
고금을 연주하면서 둘이서 새 노래를 배우려는 것 같았다.

연주에 들어가기에 앞서 줄을 튕겨 조율을 하면서 꽃무늬 남자가 말했다.
“둘째 형님, 진심이에요. 금린대로 보내 1년만 예절을 공부하게 하세요. 그럼 사람이 될 겁니다.”
금린대! 그 말에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슬아슬하게 자세를 바로잡고 놀란 눈으로 사내를 다시 봤다.
제대로 보지 못한 나, 반성해라. 꽃무늬가 아니라 모란 무늬였다. 저 화려한 것은 모란이었다.
“왜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느냐. 금린대에 가면 밥을 굶을 것 같아서 그러느냐?”
내 쪽을 보며 사내가 활짝 웃었다.
“하인으로 여기진 않을 테니 크게 염려하지 말거라, 걸람아. 둘째 형님이 네게 그리 신경을 쓰는 걸 알고 있는데 아무렴 그런 네게 물을 긷고 산으로 가 나무를 하라 시키겠니. 금린대로 오면 너는 예절공부와 몸가짐을 배우게 될 거다. 마침 조카 여란이가 네 또래이니 친구가 되어도 좋겠지. 조카는 영견 꼬마 선자 말고는 친한 친구가 없어 늘 외로워 했단다. 그러니 꼭 친구가 되어주렴.”
그때까지도 우거지상이던 택무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영견 이름이 꼬마 선자라고? 그 이상한 이름은 누가 지었지?”
“조카가 직접 지었답니다. 귀여운 이름이지요?”
“귀엽지 않고 이상... 커험! 아니네. 귀엽네. 잘 지었어. 귀에 쏙 들어오네.”

내 다리 맛있다고 질겅질겅 씹던 똥강아지 걔도 이름이 꼬마 선자였는데.
아니겠지? 아닐 게야. 네이밍 센스가 괴상한 사람이 또 있었던 거지.
걔 주인 이름은 금릉이었지 여란이가 아니었거든. 응, 아니야.
부들부들 떨리는 팔로 책을 머리 위로 드는 일에 온 힘을 다했다.
드디어 악기 조율을 마친 두 사람이 악보를 보며 금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맑고 청아한 음색이 한실을 가득 채워나갔다.

Posted by 미야

2021/12/04 19:40 2021/12/04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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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6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후로 내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나는 예의 규칙적인 일과를 소화해냈고, 문하생들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어쩌다 택무군과 함광군과 마주치면 비굴하다 싶을 정도로 자세를 낮췄는데 상대가 제일종합상사 박 전무이사라고 세뇌하며 영혼이 탈곡된 미소를 짓는 걸 스스럼없이 저질렀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 동패(同牌). 신의. 아닐 부. 세가. 서머하다.’
악어의 미소를 짓는 건 사회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덕목이다.

정작 피곤한 방향으로 변화가 생긴 건 다른 쪽이었다.
“저놈의 신발을 보세요! 진흙이 잔뜩 묻어있습니다! 어디를 다녀왔겠어요!”
하인도 아니고, 문하생도 아니며, 피의자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고한 제3자도 아닌 어중간한 내 입장 탓에 결국 분란이 생겼다.
“밤에 몰래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걸 내가 목격했다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러대는 이는 심재... 심정 대충 그런 이름을 가진 하인이다. 운심부지처에서 일을 하기 시작한지 2년차의 젊은이다. 둘째 형도 이곳 주방에서 일을 하고 있고, 장남은 산 아래에서 음식점을 한다. 남사추와 남경의 말로는 채소볶음을 잘 하는 가게라고 한다.

큰소리가 밖으로 나가는 걸 달가워하지 않으며 숙수하인이 쩔쩔맸다.
그렇다고 숙수하인이 내 편을 들어주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화를 내는 이의 형이 지위가 있어 주방에서 식칼을 쥐고 있음이다.
“탈이 나 뒷간에 다녀온 것일 수도 있잖아.”
“아냐. 신발을 보라고. 신발에 진흙이 묻어 있어.”
심재, 아니면 심정 어쩌고의 그는 내가 수상한 짓을 잔뜩 하고 있으니 방을 뒤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장에서 그치지 않고 독방으로 주어진 내 처소로 허락도 없이 들어가 얼마 되지도 않는 세간을 뒤집었다.
숨겨뒀을 거라 여긴 위험한 부적이나 주술도구가 안 나오자 분통을 터뜨렸다. 택무군이 숙제로 내준 예측편과 이면지, 붓이 나오자 이번에는 하인 주제에 글공부를 하는 거냐며 또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그저 웃기만 했다. 최근 들어 웃음이 헤퍼진 느낌이다.
“이게 지금 웃어?! 웃음이 나와?!!!”
얘가 날 콕 찍어 미워하는 이유는 택무군에게 아부를 떨어 운심부지처에 빌붙었다고 생각해서다.
그럴 리가. 빌붙을 마음이었으면 근로계약서부터 쓰자고 했을 거다.
그 점을 설명할 수 없는 내 신세가 착잡하다.

“오늘따라 표정이 안 좋네요, 걸람. 무슨 일이 있어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런 거지. 과제가 너무 많다.”
“행복한 소리 한다. 물구나무서서 필사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건 또 무슨 소리여...!!”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에 피가 쏠려서 집중이 잘 되거든요. 주의력이 떨어졌다고 지적을 받으면 그렇게 벌을 받습니다.”
“근거 있는 주장이냐, 그거.”

장서각으로 공부하러 온 남사추와 남경의 두 사람과는 평소처럼 잡담을 나눴다.
하인들과의 불화에 대해선 내색을 하지 않았다.
천자소가 술이라는 것도 가르쳐주지도 않고 사오라고 시킨 일이라던가, 알겠다고 하고 천자소를 구하러 외출하려 했더니 출입구 결계에 막혀 튕겨나간 일이라던가, 결과적으로 천자소를 사오지 못했다 알리러 갔더니 게으름뱅이가 먹을 저녁밥은 없다며 혼난 일이라던가, 글씨 연습용으로 얻은 종이를 전부 빼앗긴 일이라던가, 깨끗하게 빨아야 한다며 이불을 가져가선 돌려주지 않는다던가 식의 이야기는 너무 구질구질해서 애들 귀에 들어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것보단 출입구 결계에 대해 궁금한 점이 많았다.

“흐음... 너무 당연하다보니 생각을 못한 부분이네요. 통행옥패가 있어야 결계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신원에 따라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장소가 나눠지고요.”
“근데 왜 나에겐 옥패를 안 줘? 담 넘어가라고?”
“통행옥패가 없음 담 넘어가는 것도 무리예요.”
남사추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더하여 무례하게도 시선을 내리깔고 내 다리의 길이를 가늠했다.
그려, 내 다리 짧다! 담을 성공적으로 넘기도 전에 가랑이가 찢어지겠지.
발가락을 까딱거리며 예측편 마흔여덟 번째 글을 읽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게 하며, 매는 사람 속에 깊게 들어간다.’ (※원문은 성경 잠언 20장)
한숨이 나오기 이전에 짜증이 났다. 탁 소리를 내어 책을 덮었다. 성현의 말씀 같은 소리. 속이 뒤집어지니 오늘은 그만 읽자.

“외출하고 싶어서 그래요?”
그보다는 운심부지처로부터의 탈출 각을 재고 있는 중이다.
“하긴, 수업을 받으러 온 다른 가문의 자제들 중엔 식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분도 있더라고요. 고소 음식은 너무 싱겁고, 풀 종류가 많고, 생선류가 일절 안 올라온다면서... 혹시 먹고 싶은 종류가 있나요? 얘기를 해주면 사다줄게요.”
남사추는 이상할 정도로 나에게 친절했다.
나만 보면 누군가가 떠오른다는데 상세하게 그게 누구냐 물어보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심지어 그 대상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지금보다 머리를 길러 꾸미면 더 자세하게 기억이 날 것도 같다 했는데 사실 가망 없는 얘기였다. 남사추는 어릴 적에 열병을 크게 앓아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몽땅 날아갔다. 가장 오래된 기억은 하얀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동산에서 풀을 입에 넣고 질겅거린 일이라고 한다. 그보다 더 어릴 적의 일은 안개처럼 흐릿하여 사람이고 건물이고 두부가 으깨진 모습으로 떠오른다고 했다.

두부를 으깨서 거기에 가발을 씌우면 내가 되는 건가.
상상해보자 기분이 나빠졌다.
그 으깬 두부가 가발을 쓴 상태로 뒷산을 넘을 궁리를 한다고 생각하자 이번에는 웃음이 터졌다.

기분 나빠하다 왜 갑자기 웃는 거냐며 남사추가 궁금해 했다.
아, 그릉데 이건 형이 못 말해주겠다. 생각보다 결계 뒷구멍 뒤지는 일이 베어 그릴스 오지 탐험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중이라... 신발에 묻은 진흙 얼룩이 왜 안 지워지겠냐고. 지난밤에도 격하게 굴러 등을 크게 다쳤다. 남씨 가문의 결계는 성격대로 꼼꼼해서 절벽이 있는 곳까지 놓치지 않고 진법을 그려놓았다. 낙화암 삼천궁녀처럼 뛰어내릴 각오를 다졌는데 보기 좋게 튕겨내더라.

“통행옥패는 줄 수 없다.”
그다지 미안해하지도 않아하며 택무군이 잘라 말했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 걸 네가 더 잘 알지 않니.”
일종의 가택연금이라는 거죠? 압니다.
효성진도 날 가둬두는 걸 최선이라 여기더니 택무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밤중에 여기저기 결계를 만지고 다니는 건 그만두면 안 될까? 결계가 흔들리면 신호가 오거든. 뒷산 절벽 부근에서 매번 경고음이 들려 숙부님이 언짢게 여기신다. 절벽 건너편은 선자들 숙소가 있으니까. 표정을 보니 몰랐던 것 같군.”
식은땀이 나려 했다.
남녀가 유별하다더니 여기 사람들은 강박관념이 느껴지게 남자와 여자를 절벽(물리)으로 갈라놓았다.
그보다 절벽 너머도 운심부지처라는 점에 소름끼쳤다. 도대체 경내가 얼마나 넓은 거냐.

“지루하면 악기를 배워보지 않겠니? 연주는 심신을 다스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
글쎄다. 리코더로 ‘학교 종이 땡땡땡’을 겨우 부는 수준인데 심신 안정 이전에 귀에서 피 나는 누군가가 날 죽이려할 것이다.
택무군은 내 이야기를 재밌는 농담의 일종으로 여겼다. 하지만 자기 귀에서 피가 나는 경험을 하면 말이 달라질 거다. 피리를 하나 받았어도 그런 까닭에 결코 입에 가져가질 않았다.

“훔친 물건이에요. 이것 보세요.”
아, 피곤하다. 쓰지 않을 물건이라 생각하여 숙소에 던져두고 피리라는 존재를 잊어버렸더니 멋대로 남의 방을 뒤지고 또 훔쳤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숙수하인도 내편을 들어줄 수가 없다며 말을 아꼈다. 피리는 플라스틱으로 양산된 리코더와 달라 비싼 물건이었다. 그리고 하인은 기본적으로 악기연주를 배우지 않는다. 그래서 문하생의 물건을 도둑질한 거라는 쪽으로 아무래도 의견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과학수사니 증거수집 이런 거 없고 오직 심증만으로도 나는 이미 죽일 놈이었다.

“저건 도둑놈이라니까!”
녀석이 내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었다. 그야말로 집문서 들고 도박을 하다 현장에서 들킨 남편 취급에, 바람나서 도망갔다 돌아온 마누라 취급이었다.
그런데 그런 취급을 하려면 일단 결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내 평소 신조다. 그러니 결혼하자!!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 안 되는 게 맞다. 원래 사람이 흥분하면 이치에 안 맞는 말과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법이다.
“어?! 내가 억울해서라도 너랑 결혼하고 만다. 어?!”
“으악! 저놈이 미쳤다!”
“결혼! 그 다음에 이혼을 신청하고 위자료를 뜯어내겠다!”
그 전에 귀에서 피가 나는 경험을 해보라지.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피리를 빼앗아 입에 물고 훅훅 바람을 집어넣었다. 솔솔라라 솔솔미! 실제로는 뼉쬭뾱빽 뼉뺄뻭! 도돌이표는 없지만 다시 돌아가서 반복한다. 뺙뽈빽뻑 뺄뻑빡! 어?! 들었어? 들었냐고!

귀가 예민한 분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 빠르게 날아왔다.
그는 달처럼 하안 얼굴에, 천사처럼 흰옷을 입고, 정교한 장식이 된 말액을 길게 늘어뜨리고, 근심에 젖어 피리를 빼앗았다.

“운심부지처에서는...”
“소음을 내선 안 된다고요?”
“운심부지처에서는...”
“남의 말을 가로막아선 안 되죠. 압니다.”
“운심부지처에서는...”
“남과 다퉈서는 안 된다고요? 규칙을 어겨 정말 죄송합니다, 택무군. 그런데 반성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여기서 나가라고 하시죠. 허락만 해주시면 제 발로 걸어 나가겠습니다. 아니면 매질을 하여 바르게 다스리렵니까? 여기선 영혼에 교훈을 새겨 넣는다며 절편으로 때린다면서요. 까짓 것, 팔다리도 뜯겨봤는데 매 맞는 건 애교지.”
“걸람아.”
“왜요, 죽은 사람은 화도 못 냅니까?”
택무군이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하지만 나는 그가 나에게 훈계하는 것이 젼혀 달갑지 않았다.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아, 이럴 적엔 담배가 절실했다.
그리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전생 시절 누나가 절실하게 보고 싶었다.

Posted by 미야

2021/12/02 15:05 2021/12/02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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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35

제6장 구름 위의 무간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운심부지처에서의 일정은 쳇바퀴처럼 돌아갔다.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여 정해진 장소로 이동, 군대식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업무에 들어갔다. 내가 맡은 일은 청소로 도서관인 장서각과 기숙사인 도심실을 돌며 일을 했다.
접객용으로 쓰는 아실이나 초혼을 하는 장소인 명실과 같은 곳에는 원천적으로 하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 이동 경로가 짧은 편이었다.
오후부터는 짬을 내어 글공부를 했다. 베껴 쓰기가 끝나면 다시 청소를 해야 했고,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택무군에게 불려가 개인적으로 숙제검사를 받았다.
해가 지면 휴식시간이 주어지고, 저녁식사를 끝마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취침 시간이었다.

원래 하인들은 네 명이서 한 방을 사용했다.
나는 별도로 준비된 작은 방에서 혼자 잤는데 몸에 흉터가 많다며 다른 이들이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피부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고작 흉터일 뿐인데 엄청 질색했다.
‘저렇게 맞은 자국이 많은 걸 보면 분명 큰 잘못을 저질렀을 거야. 도둑질을 하다 걸렸겠지.’
의심이 많은 자들은 내가 비싼 물건을 훔치지 않는지 뒤에서 감시했다.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든 말든 글자 외우는 일이 벅차 그 사람들이 날 뭐라고 모함하든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그렇게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어서 신라면의 매울 신(辛)과 행복할 행(幸) 구분도 어려워했다.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기까지 하니 짧은 시간 내 생활한자 3천개를 달달 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노력하고 있잖니. 응용력은 없지만 암기력은 그만하면 뛰어난 편이다.”
숙제검사를 하던 택무군이 아정집 필사는 이제 그만해도 되겠다며 빙긋 웃었다.
쓰는 건 여전히 어려워해도 읽는 건 그럭저럭 잘 맞추는 편이라면서 칭찬 아닌 칭찬도 해줬다.
그러면서 다시 내민 건 남씨 자제들에게 내려오는 선조들의 귀한 가르침을 적은 예측편이었다.

정말로 내켜하지 않아하며 구름무늬로 덮인 표지를 넘겼다.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정과 의를 바로 세워라.’
‘검을 들어 악을 벌해도 마음이 거울 같지 않다면 세상 이치를 모두 놓친 것이다.’
‘도의를 밝히는 것이 군자이고, 이득을 계산하는 것은 소인이다.’
좋은 말씀이다.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표정이 절로 소태 씹은 모양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건 ‘만화보다 재밌는 초등학생 문장 독해’ 이런 거라고 꼭 말하고 싶다.

“다른 제자들도 걸람처럼 공부에 열심을 다한다면 오죽 좋으련만.“
이걸 베낀다는 말은 아직 입에 담지도 않았습니다, 택무군.
“다들 글은 멀리하고 흐트러진 마음으로 작은 악을 지인에게 권하고들 있으니 정말 큰일이야.”
언제부터 연애편지가 작은 악이 된 건가요.
일련의 돌아가는 걸 꿰고 있던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구자씨 집에서 공부하러 온 한 여학생이 연애소설을 가져와 안서각에 숨겨두고 읽다 들켰다는 건 이미 알려진 이야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계인 선생님이 뒷목을 잡을 일이 후속으로 터졌는데 어디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선자들 사이에서 연서를 쓰자고 서로를 부추겼다는 거다.
남녀가 유별하니 줄리엣이 로미오에게 편지를 써도 배달이 될 일이 없건만.
가랑잎 굴러가는 모습에 까르르 웃는 소녀들은 가상의 로미오에게 열렬하게 마음을 고백하는 글을 적어 누가 더 애절하게 표현했는지를 겨루었다.
그렇게 있지도 않은 로미오와의 포옹을 상상하며 푹 빠져버리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죽겠건만 그들 중 한 명이 함광군을 상대로 절절하게 연서를 썼다.
선자들 중 함광군을 사모하는 이들이 많았기에 그걸 또 꺅꺅 소리를 질러가며 만장하신 가운데 소리 내어 읽어댄다. 좋은 시절이다.

“어쩌겠어요. 한창 그쪽으로 관심이 많을 때죠. 하지 말라고 하면 몰래 숨어서 더 할 걸요?”
“이미 다 해본 사람처럼 말하는군.”
“다 해봤죠. 고백하고 차여본 게 몇 번인데요. 진지한 관계까지 가본 건 딱 한 번이지만 결혼 고민은 해보지 않았으니 잘 헤어진 것도 같고...”
“자네, 올해 몇 살인가?”
“......!”
가끔 이런 식으로 실수를 해서 난처해 죽겠다.
택무군은 표정에 그다지 큰 변화가 없는 상태로 내가 대답하기를 기다려 주었다. 어딘지 무관심해 보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말로 꾸며내는 건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럴 적마다 나는 입을 그냥 다물어버리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솔직히 털어놓는다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갈등했다.

에라, 모르겠다.
“서른넷에 다시 스물하나를 더하는 건 많이 이상하죠?”
“일단 자네는 쉰다섯의 나이로는 보이지 않아.”
“그래도 열셋은 진짜 아니거든요?”
“좋게 생각하자. 예측편을 배움에 있어 부족함이 없는 나이다. 그럼 오늘부터 옮겨 적기를 시작하고... 다음번에 올 적에 여기까지 외워오게.”
“택무군. 분량이 너무 많습니다.”
“배움은 벼를 길러 쌀을 얻는 것과 같지. 많이 수확하면 수확할수록 좋은 것이야.”
“많이 수확을 해봤자 어차피 가규로 내세워 밥 세 그릇 이상은 못 먹게 하면서!”
내 항의를 들은 택무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래도 분량이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그래, 내가 이거 다 떼고 조만간 산을 내려가고야 만다.

고소의 등불은 일찍 꺼진다.
취침시간이 되었음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모두가 일사불란에게 잠자리에 든다.
하인들은 문하생과 달리 취침시간에 크게 구애받진 않았으나 불을 켜는 초가 귀한 탓에 어차피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게다가 기상 시간이 꼭두새벽이니 늦게 잠들면 잠들수록 다음날이 고되었기에 해시가 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초를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으로 베개를 꾸셔 넣어 사람이 누운 모양을 만든 뒤, 장서각에서 훔쳐낸 초를 쥐고 으슥한 뒷길로 들어갔다. 귀가 예민한 사람들이 많아 행동을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들키면 배가 아파 뒷간에 가는 거라고 거짓말을 할 생각이었는데 긴장을 해서 그런지 진짜로 배가 살살 쓰라렸다. 아랫배에 힘을 줘도 똥이 안 나오는 몸인데 장이 왜 아픈 건지 모르겠다.
실수로 나뭇잎을 밟았는지 바스락 소리가 났다. 지뢰라도 밟았다는 투로 발을 아주 조심스럽게 떼었다.
이러다 순찰 도는 사람을 만나면 잣 되는 거다. 부대 탈영병이 된 기분을 만끽하며 몸의 자세를 더 낮췄다. 밤눈이 밝았음 좀 좋으련만, 낮에 몇 번을 찾아오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음에도 방향을 짐작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문하생들이 평소에도 걸음을 하지 않는 장소로 ‘냉탕’이라 했다.
얼음처럼 차가운 계곡물에 들어가 정신수양을 하는 곳인데 나 같은 하인은 물을 더럽히면 안 되는 까닭에 입수가 전면 금지되어 있었고, 오직 신분이 높은 분들만 이용을 했다. 그 높은 분들이 옷을 벗고 들어가기에 모두가 접근을 꺼렸다. 혹시라도 명사의 벗은 몸을 눈에 담게 되는 날엔 운심부지처 전체가 뒤집어지기에 자연히 접근금지 지역이 되었다.

미친 것도 아닌데 뼛속까지 아릴 물속에 몸을 담굴 생각은 없다.
대신 사방을 더듬거리며 이동하면서 초를 켜도 들키지 않을 장소를 몰색했다.
바람을 등지고 서서 준비한 부싯돌을 당겼다.
느낌이 워째 축각참배 비슷해서 내가 다 소름끼쳤다. 나무에 대고 못을 박을 짚 인형을 준비해온 것도 아닌데 괜히 으스스했다. 영업시간 끝난 불 꺼진 남탕에 혼자 들어와 분신사바 하는 그런 느낌?
서두르는 게 좋겠다 생각하고 품에 손을 넣어 오래되어 삭아 문드러진 종이를 꺼냈다.

효성진 도장은 나를 결계에 가둔 뒤, 새를 이용하여 모두 세 번 서찰을 보냈다.
처음 보낸 글은 내용이 길었다. 순전히 안부를 묻는 내용이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아 나를 자신의 스승인 포산산인에게 데려가겠다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무서운 분이 아니니 근심하지 말라고 했고, 자신도 고아의 신분으로 포산산인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포산산인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나를 어떻게 데려가겠다는 설명은 없었다.
대신 포산산인 앞으로 나아갈 때 입고 있어야 할 옷차림새에 대해 장황하게 언급했다.
맨발이어선 안 되고, 무릎이나 겨드랑이에 찢어진 곳이 있어선 안 되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화려해서도 안 되고, 분 냄새가 나거나 향수를 뿌려도 안 되었다. 피가 묻어서도 안 된다. 이나 벼룩이 있어서도 안 되었다. 아...... 진짜. 아정집 2탄도 아니고.
더듬더듬 읽어나가던 나는 도중에 멈추고 하늘을 한 번 쳐다보았다.

두 번째 글에선 심각한 이야기가 나왔다. 송자침에게 일이 생겼다고 했다.
“백설관, 공격당하다, 사람이 죽다, 눈을 잃다, 독...”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송자침이 언젠가 말하길,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백설관의 막내가 열셋이라고 했다. 눈이 흐려지는 이유로 어둠을 탓하며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한자를 읽어냈어도 해석이 매끄럽지 않아 내가 착각한 건 아닐까.
“공격받다, 백설관, 모두, 죽다, 독, 눈을 잃다, 설양... 싸우다, 장례, 송자침 소식불명...”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흙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이 감정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울고 싶다? 화가 난다? 슬프다? 어이가 없다?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내가 품고 받아들이기엔 그건 너무나 거대한 감정이었다.
눈을 깜빡이며 종이를 쓰다듬었다. 누가 눈을 잃었다는 거지? 효성진 도장? 아니면 송자침?
백설관 사람이 모두 죽었다. 독을 풀어 공격했다. 매우 비겁한 술수였다. 독에 중독되어 반격도 못해보고 죽기까지 매우 고통 받은 듯하다. 무려 5년도 더 지난 옛날에.
나는 멍하니 넋을 잃고 계곡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5년 전에 이 글을 읽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마지막 글은 대단히 짧아 외마디 비명처럼 느껴졌다.
“난릉 금씨와 고소 남씨. 동패(同牌). 신의. 아닐 부. 세가. 서머하다.”

신발을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 세 장의 종이를 차례대로 물에 담갔다.
가뜩이나 약해진 종이였다. 물을 먹자 얼마 지나지 않아 휴지처럼 물렁거렸다. 그걸 손으로 하나하나 잘게 풀어 흐르는 물에 떠내려 보냈다. 혹시라도 가라앉는 것이 있을까봐 한참을 첨벙거리기도 했다.
차가운 물에 젖은 몸이 떨려왔다. 신음을 목구멍 깊이 삼키고 한참만에야 기슭으로 올라왔다.
물에 들어올 적엔 몰랐는데 바닥 돌이 제법 매끄러워 여러 번 넘어질 뻔했다.
“됐어, 뙜어. 괜찮아.”
그렇게 균형을 잡고 다 올라와선 다시 흙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아니야. 하나도 안 아파.”
미친 사람처럼 혼잣말을 하고 벗어두었던 신발을 찾았다.
생각해보니 진짜 미친 짓이었다. 불빛 하나 없는 계곡에서 물에 들어갔다 나왔다. 걸람이 자랐던 소산은 물이 귀해서 헤엄이라는 걸 쳐본 적이 없었고, 전생에서도 나는 고무튜브 없인 수영을 못했었다. 발을 헛디뎌 깊은 곳에 빠졌더라면 물에 둥둥 떴을 거였다.
물론 죽는 일은 없다. 나는 이미 죽은 몸이다.
차라리 물에 빠져 다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뜻 하며 진흙투성이의 발에 신발을 움켜 넣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30 17:02 2021/11/30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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