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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2

제4장 뜬소문과 재화욕심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 폭죽이 올라왔다.
피요용 귀를 찢는 소리의 끝자락으로 자색의 연꽃무늬가 팡 하고 떠올랐다.
신호탄이다! 나는 반색하며 걷던 방향을 바꿔 폭죽이 터진 곳으로 가고자 했다.
목숨을 건진 수사들과 하인들이 드디어 채비를 정비하고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낙오가 된 자들도 저 불꽃을 보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저리로 몰려갈 거다.

“안 갈래.”
그런데 소년의 반응이 신박했다.
“뭐?”
“모양이 모란문(牡丹纹)이 아니고 구판연(九瓣蓮)이잖아. 싫어. 안 갈래.”
빨리 가자는 재촉에 금릉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가 모란이나 연꽃이나 똑같이 꽃인데 차별하고 앉았어.
삐거덕 소리를 내며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려는 금릉의 목덜미를 얼른 붙잡았다.
자존심 강한 도련님은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며 당장 놔라 언성을 높였다. 그래봤자 배추보다 가벼웠다. 덜렁덜렁 흔들리는 작은 새끼 고양이를 왼손으로 안고 오른손으로는 무성한 덤불을 헤쳤다.
작은 가시가 달린 줄기들이 서로 복잡하게 뒤엉켜 뚫고 가기가 영 성가셨다.

“싫다고 했잖아! 명령이야! 내려놔!”
“명령이라굽쇼? 미안한데 내가 네 녀석 부하는 아니라서.”
“건방진 놈! 나중에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을 줄 알아! 하인들을 시켜 널 몽둥이로 때려주마!”
“어머나~ 그 몽둥이로 날 때려줄 하인들이 저기 있네? 그러니 저기로 가자.”
“안 된다니까! 구판연이잖아! 외숙부가 저 신호를 보고 달려오면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내 두 다리가 부러져! 편지만 써놓고 몰래 나온 주제에 야렵에 실패했냐며 야차처럼 화를 내실 걸? 절대로 모란문이어야 해!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저기로 가는 건 호랑이 입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격이라고.”
금릉이 다리를 동당거리며 아우성쳤다.

녀석이 외숙부에게 다리뼈가 부러지든 말든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다.
그리고 곰의 입보다 호랑이가 낫다. 둘 다 맹수라서 매섭기는 거기서 거기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호랑이 입 크기가 살짝 작다. 그러니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선택은 호랑이 입이다.
나는 금릉의 몸을 옆구리 쪽으로 흘리면서 등허리를 사선으로 비틀었다.
주변을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이와 말다툼을 하는 와중에 살짝 주의가 흐트러졌던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왔을 때까지 눈치를 못 챈 건 오롯이 내 실수다. 단단히 각오하기도 전에 식인 곰의 몸통 박치기가 이어졌다.

“우와악!”
이건 바닥에 내동그라진 금릉의 비명.

나는 손에 감고 있던 곤선삭을 수평으로 팽팽하게 잡아당겨 일종의 방패막이로 사용했다. 금속 줄이 튕기는 저음의 굉음과 함께 곤선삭이 곰의 벌어진 아가리 한 가운데를 정확히 후려쳤다.
언젠가 내가 큰돈을 벌면 곤선삭 제작 비밀을 캐고 말테다. 모양은 그렇고 그런 밧줄인데 내가 이것보다 더 튼튼한 걸 본 적이 없다. 괴물이 된 곰의 이빨도 막아주고, 보물이다 보물.

송곳니가 곤선삭에 갈리자 통증을 느꼈던 것 같다. 기습에 실패한 곰은 입을 다물고 한 발 물러섰다.
그런데 우리의 악연이 어디 하루 이틀이었냐고. 물러서는 척하여 사람을 방심하게 만들었다가 더 깊게 입질한다는 걸 내가 모를 리 있나. 나 역시 곤선삭을 내리는 척하다 더욱 팽팽하게 들어올렸다. 이걸 몰라 몇 년 전엔 발목이 통째로 날아갔다.
“사람을 그만큼 먹었음 만족이라는 걸 하라고, 이 망할 새끼야!”
욕을 얻어먹은 곰이 눈에서 거짓말처럼 밝은 레이저를 쏘아댔다.
현생이 아니라 전생 시절에도 사람 고기를 탐닉하면 힘이 세졌다가 초현실적인 괴물로 변한다는 전설 같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같은 소재로 만들어진 컴퓨터 호러 게임도 있었다.
나는 저 망할 놈의 곰이 지금까지 사람을 얼마나 많이 헤쳤을지 짐작이 안 갔다.

“금릉아, 달려!”
“뭐?”
“가서 어른을 불러와! 빨리!”
상황이 급박했다. 나는 금릉의 예상 도주 방향으로 뛰어들어 몸으로 가로막고 권투 스트레이트 컷의 동작을 취했다. 글쎄다. 화살에 맞았을 때도 가죽에 작은 생채기만 났으니 많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큰 북이 울리는 투웅, 소리는 제법 그럴 듯했지만 곰은 그저 움찔거렸을 뿐이었다.
“빨리 가!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 누구든 좋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해!”
“뭐라고?! 지금 이 몸더러 등을 보이고 도망치라고 말하는 거야?!”
“아, 좀!! 누가 도망치라고 했어? 가서 어른을 불러오라고!”
곰의 시선을 끌며 네 다리로 후다닥 움직였다. 곰은 그런 나를 쫓아오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가 체중을 실어 찍어 내리려 했다. 두더지 게임도 아닌데 여기를 쿵, 저기를 쿵쿵, 찍었다.
“빨리 가라니까! 형이 하는 말 좀 들어!”
정신없이 공격을 피하면서 피 토하는 심정으로 외치자 그제야 금릉이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간 절룩거리며, 그래도 제법 빠른 속도로 수풀을 가로지르는 아이를 보며 안도했다.
여기서 내가 충분히 시간을 벌어주면 쟨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와라!”
기합을 아무리 넣어도 내 기세가 그저 허풍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며 곰이 주둥이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철조망으로 분리된 동물원에서 저 얼굴을 봤음 나름 귀엽다고 했을지도.
곰이 앞발을 휘둘렀다. 간발의 차이로 나무 뒤로 돌아 몸을 숨겼다. 머리가 좋은 녀석은 그대로 돌진하여 날 가리고 있는 나무를 정통으로 갈겼다. 그러자 나무를 통해 전달된 충격이 뱃속을 온통 휘저었다.
트럭에 들이받힌 느낌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배를 끌어안은 채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순간 오른쪽 귀 옆이 뜨끈해졌다. 곰이 휘저은 앞발에 귓바퀴가 날아간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은 왼쪽이다. 돌아보지 않고 상체를 숙였다. 다리가 꼬였지만 운이 좋아 곰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어이가 없으려니까. 이 마당에 옆구리가 당겨 아프다니!’
전력질주 달리기 도중에 당겨오는 것처럼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신체 반응이긴 한데... 내가 언제 산 사람처럼 산소가 필요했다고. 그런데 진짜 개처럼 헐떡거렸다.
“우와아아!”
비명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한쪽 무릎을 접은 자세에서 곤선삭으로 곰의 다리를 걸어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은 곰도 비명인지 괴성인지 모를 울음소리를 냈다.
놈은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며 발톱을 세워 사방을 긁었다.
“같이 죽자!”
땅을 박차고 일어서며 뒤로 자빠지려는 곰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빈틈없이 주먹을 꽉 쥐고 놈의 심장 부위를 노렸다.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 한 방이었다. 나에게는 이제 다른 수는 없었다.

주먹이 곰의 가슴을 때리는 것과 동시에 놈의 강철 손톱이 내 목덜미를 길게 훑었다.
내가 급소를 노린 것처럼 녀석도 급소를 노렸다.
충격으로 흐려진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자 멀리 떨어져 있던 곰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아니, 그건 얼굴이 아니라 벌려진 입속이었다. 곰의 입안은 더러운 침으로 흥건했다.
‘뭐, 이만하면 시간은 충분히 벌어줬겠지. 열심히 했다, 나라는 녀석.’
나는 천천히 눈을 감...

그때였다. 눈을 감으려던 찰나 휘리릭 소리를 내며 창백한 금속이 총알처럼 날아왔다.
번쩍이는 금속은 곰의 목 한가운데를 정확히 꿰뚫었다.
‘어?’
곰도 멈칫했다.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리둥절해 했다. 그리고 나를 보며 네가 그런 거냐고 묻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했다.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검이 어느 방향에서 날아온 건지 보지도 못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도 안 갔다.
곰이 깊숙이 끓어오르는 소리를 흘렸다. 입으로 피거품도 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눈에서 불빛이 꺼졌고, 놈은 천천히 주저앉았다.
마침내 놈이 모든 움직임을 멈췄을 때 검 손잡이에 달린 보라색 장식 술이 나풀나풀 흔들렸다.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 되어 흔들리는 장식 술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아홉 장 꽃잎을 표현한 매듭이 달린 훌륭한 장식이었다. 꽃의 모양이었음에도 고운 여성이 쓰는 물건이라기보다는 남성적 느낌이 강했다. 부드럽지 않고 강직했고, 어딘지 모르게 기색이 날카로웠다.
그러고 보니 허공에 신호탄이 쏘아 올려 졌을 적에 이와 비슷한 무늬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다.
금릉이 어른을 불렀구나.
내 말대로 뒤돌아보지 않고 달려 안전하게 자기 일행과 조우했다. 다행이었다.
 
통증을 호소하는 목의 상처에 손을 가져가 세게 눌렀다.
상처부위를 눌렀다 떼어낸 손에는 검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
패인 자국이 제법 깊었지만 항상 그래왔듯이 며칠 지나면 새살로 덮여 흉터로 바뀔 것이다.
시선을 움직여 곰의 목에 박힌 검을 지긋이 내려다보았다.
번득이는 검 날을 보자 어쩐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이 검의 주인은 원거리에서 눈으로 보지도 않고 검을 집어던져 일격으로 곰의 숨통을 끊었다.
끔찍스러울 정도의 실력이었다. 이런 능력자와 마주쳐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을 거다.

발뒤축을 세워 살금 걸음으로 죽은 곰으로부터 열 걸음 떨어졌다.
과거, 설양이 만든 가슴의 상처부위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오래된 상처가 욱신 저려오며 만감이 교차했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이 많아지면 혼란스러울 뿐이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 현장에서 벗어났다.

Posted by 미야

2021/11/12 14:40 2021/11/12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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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1

제4장 뜬소문과 재화욕심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무려 5년이었다.
내가 말이지, 선반 위에 올려놓은 식초를 아쉬워하는 바람에 성불을 못 했다는 스님 이야기가 떠올라 그간 일부러 머리를 비우고 살아서 그렇지 아님 어쩔 뻔했어.
도끼로 쓸 돌을 갈 때 마음도 같이 깎으면서 ‘직지인심 견성성불’ 글자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 결말이 매번 다듬던 돌을 깨부수는 것으로 끝나 득도의 경지에 오름에는 실패했지만... 그게 내 잘못이겠냐고. 그 로빈슨 크루소도 난파선에서 식료품과 무기를 포함해 필요한 물자를 조달했다고! 갈아입을 옷 한 벌 없어 길 잃은 주시의 옷을 벗겨다 입은 나와는 하늘과 땅 차이지.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침착하자. 흥분할 때가 아니었다. 여러 갈래로 퍼져나가려는 잡념을 강제로 붙잡아 앉혔다.
지금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 효성진 당신, 나한테 걸리면 죽어! – 이게 아니라.
일단 품안 아이를 제 일행에게로 안전하게 돌려보내도록 하자. 급할수록 코앞의 문제부터 하나씩 해결하는 거다.

소년은 깨어났다 혼절하기를 반복했다. 뭐라고 계속 웅얼거리는데 솔직히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웅얼거림 중에서 ‘냄새 나’ 이 건 알아들었다.
업은 상태에서 어깨 뒤를 돌아보니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아미 한 가운데로 붉은 점을 찍은 작은 얼굴이 보였다. 아픈데 똥 구린내까지 맡아 표정이 절간 입구를 지키고 선 나찰 같았다.
“가까이서 보니 못 생겼구먼.”
툭 내뱉은 내 말에 아이의 뺨이 실룩였다.
그러든 말든 등에 업은 아이를 고쳐 안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밤이 끝나 이제 먼동이 밝아오는 중이었다.

데려온 하인들과 수사들 숫자가 적지 않아 분명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들이 있을 텐데 어디로 숨었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다.
답답한 기분에 ‘이봐요, 여기 댁들의 아가 도련님이 있어요!’ 큰 소리를 쳐서 불러볼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난 밤 곰이 수사들을 사냥하던 걸 떠올렸다. 아직 안전하지 않았다.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둥지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곰은 욕심이 많다. 집착도 강한 놈이라 사냥에 욕심을 부려 조용히 뒤를 따라오는 중일 수도 있다. 무엇 하나 확실하지가 않으니 최대한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주변을 경계하는 것이 옳았다.
‘아니면 이대로 되돌아가서 신호탄을 구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이들 무리가 곰으로부터 습격을 받았을 때 수사 중 하나가 신호탄을 꺼내 터뜨리려 하다 곰에게 밟혀 죽은 걸 떠올렸다. 곰이 죽은 수사의 시체를 물어가지 않았다면 아직 제자리에 남았을 거다. 운이 나쁘면 진법이 터져나갔을 때 휩쓸려 고운 가루가 되었을 수도 있고... 아, 진짜 효성진!!

“앉고 싶어.”
업혀 있던 아이가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만 흔들어. 머리가 울린다고.”
그 말을 듣고 아이의 몸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지럼증이 심하다면 간밤의 충격으로 뇌진탕을 일으킨 것일 수도 있다. 아이의 시선방향과 안색을 살피며 혹시 구역질을 하지는 않는지 체크했다.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구역질이 안 나겠냐! 도대체 얼마나 안 씻은 거야!”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 아이는 주둥이가 안 예뻤다.
“불쾌해. 날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다니. 더럽잖아!”
이야... 말본새가 재벌 3세다. 대기업 손자야. 삿대질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꿀 먹었어? 입이 달라붙었어? 너 누구야. 내가 묻는데 왜 말을 하지 않아?!”
“기가 차서.”
“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다. 인석아.”
너만 주둥이냐. 나도 주둥이다. 쏘아붙이며 눈을 흘겼다.

소년이 벌에 쏘인 것처럼 발끈했다.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모르니까 그렇게 건방을 떠는 거지! 내가 누구냐 하면, 나는 금릉이다!”
“됐고. 귀에서 이상한 소리는 안 나냐? 눈이 침침하거나 모습이 겹쳐 보이지는 않고?”
“이이익! 금릉이라고! 내 이름은 금릉이다!”
“인석아. 이름이 아니라 네 몸 상태를 묻고 있잖아. 여기가 어디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
“아.”

광폭화 스킬을 시전한 곰으로부터 머리를 통째로 물어뜯길 뻔한 걸 떠올렸는지 잔뜩 풀이 죽어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어두워졌다.
그래, 엄청 무서웠겠지. 내가 저만한 나이에 저만한 일을 겪었으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고 북극곰이 등장하는 코카콜라 광고도 못 봤다. 이불속에 틀어박혀 벌벌 떨기만 했을 거다. 몸을 떠는 아이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아냐! 추워서 그래!”
거의 울면서 금릉이 주장했다. 아이의 눈가가 습기로 촉촉했다.
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어깨를 으쓱였다. 상대방이 봤을 적에 멋대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몸동작이었다. 그렇다, 아니다, 좋다, 나쁘다, 이해한다, 모르겠다, 원하는 대로 아무거나 골라도 된다.
“진짜야. 거짓말 아니야!”
“응. 믿어. 하지만 아무리 추워도 지금은 불을 피울 수가 없어.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아직 위험하거든. 계속 움직여야 해.”
내 말을 듣고 아이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러더니 황급히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고 바짝 긴장했다.
“혹시 그 망할 곰이 근처에 있는 거야?”
“몰라.”
“큰일이네. 활도 잃어버리고... 검도 없는데 어쩌지.”
“그러니까 빨리 어른을 찾아야지. 검이 있어봤자 어차피 지금 네 힘으론 못 덤벼.”

금릉이 뾰족하게 반응했다.
“너! 그 말 취소해! 난 약하지 않아! 얼마 전 금단도 맺었다고!”
“금단이든 은단이든 부상을 입었잖아. 다친 몸으로 싸우고 그러는 거 아냐.”
“이게 말을 못 알아듣네. 금단을 맺었다니까! 건방지게 누구에게 충고하는 거야!”
“어른이니까 충고하는 거다, 인석아.”
“나보다 작은 주제에 무슨 헛소리야! 나는 올해 열둘이야! 넌 몇 살인데.”
“스물 하나.”
“흥! 숫자 세는 법을 엉터리로 배웠군. 하나, 둘, 셋, 다섯, 일곱, 이러면 그게 맞겠냐고.”
천하의 바보 취급하며 녀석이 눈을 흘겼다.
계속 따지기도 뭐해서 내가 동생 할 테니 네가 형 하라고 대인배의 마음으로 양보했다.
그보다는 지긋지긋한 이 산에서 내려갈 길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그리고 산을 무사히 내려가면...

“금릉아. 혹시 약양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니? 여기서 많이 멀까?”
“촌부의 자식이라 진짜 몰라서 저러나.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 어디 함부로 내 이름을 불러!”
금릉이 자기 옷을 가리켰다. 더러운 게 잔뜩 묻었어도 여전히 비싸 보이는 옷이었다. 소매에 모란무늬가 있고 금실로 수를 놓았다. 전부 수작업으로 수를 놓았을 테니 엄청난 공임이 들어간 옷이었다.
아니 씨발, 그래서 뭐요. 혹시 그건가. 내 이름은 이지호! 내 아버지가 삼성 회장 이재용! 네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게 그거야? 나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넌더리를 냈다.
“알았어, 알았다고. 부잣집 도련님의 이름을 함부로 불러 정말 미안해. 너, 부자야! 나는 가진 거 없는 흙수저니까 도련님 이름 함부로 안 부를게. 됐지?”
“그게 아니라... 야. 너 진짜 모르는 거냐? 아님 바보야? 이 백모란 무늬를 봐도 아무 생각이 없어?”
“예쁘다고 생각해.”
“맙소사. 진짜 바보였군!”
내 대답을 들은 금릉은 어째서인지 화를 누그러뜨리고 대신 날 불쌍하다는 눈으로 한참을 쳐다보았다.

아니, 그 시선은 반칙 아닙니까. 내가 왜 불쌍해? 진짜 불쌍한 건 너지.
시장에 갈 적에도 두 다리로 걷지 않고 꽃가마 타고 다닐 것처럼 생겨서 굳이 험한 산속에 뭣 하러 들어와 이 고생이래?

“곰이 있다고 알았음 절대 안 왔어. 소문에는 이 부근으로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신선이 만든 진법이 있는데 신선이 그 속에 무기를 숨겨놨다고 했거든.”
걸음이 계속 불편해보여 등을 보이고 업어주려 하자 금릉은 단호한 태도로 거절했다.
무례하게도 녀석은 코를 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좋을 대로 하라고 내버려두고 대신 머리 높이로 자란 풀을 뒤로 꺾었다. 한껏 자란 풀들은 부드럽지가 않고 심지에 철사가 들어간 것처럼 단단하여 피부를 긁기 십상이었다.

“무기?”
“어떤 무기라는 말은 없었어. 그래도 보통 무기라고 하면 검이 떠오르잖아?”
어느 날 한 신선이 예사롭지 않은 무기를 발견하였다. 쓰려고 하니 요사스럽기가 그지없어 제멋대로 날뛰었다. 술법으로 제압하자 곧 얌전하게 되었으나 신선은 이 무기가 제법 쓸모가 있으나 조종이 되지 않으니 사람에게 이롭지 않다 여겨 그대로 봉인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주변으로 큰 진을 그려 사람의 접근을 가로막고, 밖으로는 작은 진을 덧그려 다가가고자 하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 금릉이 재잘재잘 떠들었다.
“잠깐만요, 요사스럽고 조종이 되지 않는다며. 그런 무기를 굳이 찾으러 왔다고?”
“쓸모는 있다고 했으니까. 여차하면 내가 써줄 생각이었지.”
그 무슨 근자감이냐.

금릉의 입이 댓바람이나 튀어나왔다.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어? 전부 외숙부 잘못이야. 외숙부가 내 검을 가져가서 눈을 이렇게 뜨고 ‘못 준다!’ 이래버리니 나로서도 방법이 없잖아. 외숙부도 10대 시절에 야렵을 나가 큰 공을 쌓았으면서 왜 나는 어리다고 못 나가게 막는 건데? 나도 충분히 요괴를 잡을 수 있거든?”
야, 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네 외숙부라는 사람이 무척 현명한 분인 거 같다.
“작은아버지도 내 실력이면 야렵에 나가 수살귀 서넛도 거뜬히 잡을 수 있을 거라 하셨어.”
그 작은아버지라는 양반은 단순히 널 추켜세우는 게 아니라 조카를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것 같은데. 코흘리개 어린애가 무슨 귀신을 잡아.
“귀한 수호부를 주신 분도 작은아버지야. 혹시라도 위기에 처해도 이게 날 지켜줄 거라면서... 어, 내 팔찌. 어디로 갔지?”
자신의 텅 빈 손목을 보고 금릉이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입이 험한 것과 별개로 은근히 애가 맹했다.

Posted by 미야

2021/11/11 15:38 2021/11/11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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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0

제4장 뜬소문과 재화욕심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곰이 앞발을 휘둘렀을 뿐인데 광풍이 불었다.
나무 위에 올라간 나조차 솟구친 먼지로 눈이 따끔거렸으니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엉거주춤 서있던 수사들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화살을 다시 재장전하고 활시위를 잡아당길 준비를 마쳤던 어린 소년도 풍압에 휩쓸려 속수무책으로 굴렀다. 힘을 잃고 따라 빨려가는 화살들이 여기선 꼭 이쑤시개처럼 보였다.

완전 미쳤다. 턱을 힘껏 벌려 포효하는 짐승은 어쩐지 곰이 아닌 다른 생명체 같았다. 플루토늄으로 오염된 땅에서 태어나 유전자 변이를 일으킨 거대한 악의였다.

“도련님이 위험하다. 빨리 신, 신호탄을 쏴!”
수사 한 명이 허리 근처를 뒤적거렸다. 신호탄을 찾는 눈치인데 감정이 격해진 탓에 손을 떨어 간단한 동작조차 제대로 해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걸 놓칠 곰이 아니었다. 거대한 체구를 움직여 수사의 몸통을 앞발로 찍어 눌렀다.
모양새가 좋지 않은 죽음이었다. 흉부가 납작하게 찌그러진 수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신호탄을 올리라니까!”
“제길, 다리가 풀렸어!”
“그러니까 여기에 오지 말자고 내가 누누이 말했... 허억!”
곰이 웃는 걸 본 적 있는가.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 곰은 진심으로 재밌어 했다.

“정신 차려! 그러고도 너희들이 현문 세가의 수행자냐!”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애가 보기와 다르게 참 독했다. 어느 새 몸을 추스른 소년이 나무에 어깨를 기댄 자세로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솜씨가 출중하여 이번에도 화살은 곰의 몸을 맞췄다.
억울한 부분이라면 아직 나이가 어려 힘이 약했다는 점이랄까, 화살은 단단한 곰의 피부를 약간만 뚫었을 뿐이었다. 깊게 박히지도 않은 화살은 곰이 몸을 털자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끝이었다. 결말을 예상한 나는 진심으로 속이 상했다. 이런 식으로 죽기엔 아이가 너무 어렸다. 아직은 부모 아래서 어리광을 피워도 괜찮을 나이인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일부러 위험한 곳까지 와서... 곰이 두 다리로 걸었다. 이족보행 종족도 아니면서 거짓말처럼 속도가 매우 빨랐다. 성큼 걸음으로 소년에게로 접근한 괴수는 주둥이를 벌려 넋이 완전히 나간 아이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야, 이 개 자식아! 어린애는 건드리는 거 아니야!”
내뱉고 보니 저건 개가 아니라 곰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뭐, 괜찮겠지. 뜻만 통하면 - 중얼거리며 근처에 있던 바위를 들어 냅다 던졌다.
왕년에 배추 250근을 혼자 들어 운반하던 나다. 힘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기에 바위는 빙글빙글 돌며 곰의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깨진 것이 곰의 머리가 아니라 바위라는 점은 심히 유감스러웠지만 - 그래도 명중이었다.

돌에 맞은 곰의 눈이 벌겋게 변했다.
이 거리에서 고작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등골이 오싹했다.
녀석은 분노로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린 듯했다. 발광하여 발을 굴렀고,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집어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깨진 바위조각에 뽑힌 사람의 팔, 그리고 불운한 소년의 몸뚱이가 대포처럼 날아들었다.

‘씨발, 결계...!!’
날아오는 물체가 뿌리 채 뽑힌 나무라면 괜찮다. 결계는 오직 사람에게만 반응한다.
그래서 진법 위를 통과하는 물체가 사람이면 문제가 엄청 심각해진다.
나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제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벼락이 계속 같은 자리로 반복하여 내리꽂히는 기분이었고, 정전기가 오른 것처럼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콰르르 우르르 땅이 울렸다. 발아래 떨림이 꼭 대규모 산사태가 발생해 산중턱이 그대로 쓸려나간 것 같았다. 뭔가가 무너졌고, 다시 치솟았다가, 격렬하게 요동치며 주저앉았다.
‘씨발, 이래선 반물질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잖아!’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이미 기절한지 오래여서 팔이 축 늘어진 소년의 몸이 허공에서 둥실 떠올랐다. 그러더니 나침반 바늘처럼 몸이 저절로 회전했다.
동시에 손목에 찬 팔찌에서 자색의 불꽃이 솟구쳤고, 이내 소년을 에워싸고 무서운 기세로 타올랐다.
눈치껏 보아하니 주인을 보호하는 진귀한 아티팩트인 모양이었다.
불꽃은 소년의 육신을 통째로 튀기려 드는 결계의 힘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했다.
팽팽한 대결이었다. 먹느냐, 먹히느냐, 막상막하의 대결은 위력적인 폭풍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냈다.
폭풍에 휩쓸린 주변 나무가 쩍 소리를 내며 터졌다.

고개를 계속 들고 있다간 내 머리도 터져 나갈 지경이었다.
쪼그리고 앉았던 자세를 바꿔 아예 개구리처럼 납작 엎드렸다.
적절한 판단이었다. 토네이도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음 소들과 같이 오즈의 나라로 빨려갈 뿐이다.
뭔가가 코앞에서 와지끈 부서졌고, 간발의 차이로 머리 꼭대기 한 가운데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의 정체는 금이 가고 깨진 팔찌의 구슬이었다.

소란이 멎어 사위가 고요해지자 시야에 대자로 누운 소년의 몸이 가득 찼다.
마침내 결계를 깨고 진법 안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들어왔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아님 슬퍼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건 뒤로 미루기로 했다.
퍼득 깨달음이 왔다. 지금 이 순간의 고요는 단지 폭풍의 눈 속에 들어와서 그런 거지 아직 태풍은 지나가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허공으로 여덟 개의 기둥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리 예정되어 있던 순서대로 나타난 그것은 구름을 뚫을 기세였다.
문제는 일곱 개는 튼튼했고, 하나는 깨지고 절반이 부러진 상태였다는 거다.
좋지 않았다. 수직으로 선 기둥 꼭대기로 빛나는 거대 문양이 떠올랐다. 동시에 건물 외곽 철근이 구부러지다 못해 뚝뚝 끊기는 굉음이 들렸고, 문양이 거대한 쟁반처럼 기둥 위에 올라갔다.
상상력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다. 그 다음은 규모가 남다른 쟁반 노래방의 재현이었다.

기절한 소년을 등에 업었다. 초보자 아이템으로 주어졌던 곤선삭을 꺼내 나와 아이의 허리를 같이 동여맸다.
시간이 촉박했다. 기둥이 온전하지 않으니 문양은 곧 균형을 잃고 아래로 곤두박질할 것이고, 그 아래에 있는 모든 걸 공평하게 깔아뭉갤 터였다. 그 전에 파괴 범위에서 무조건 탈출해야 했다.
“효성진 이 미친 양반이 자폭 장치를 숨겨놨어!”
도를 숭상하는 인간이 결계를 억지로 깨고 안으로 사람이 들어오면 진법이 붕괴되어 침입자를 공격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것도 보통의 붕괴가 아니다. 일종의 폭파공법을 사용해서 엄청난 무게를 가진 철판을 사람들 머리위로 수직낙하 시킨다고 상상해보자. 댁이 무슨 알 카에다냐고!
하여간 이 세계 사람들이 가진 선악의 가치관은 현대의 기억을 가진 내 입장에선 따라가기가 벅찼다.
재판과정 없이 은원을 갚는 일이 일상이라 그런지 사람 헤치는 일에 손속이 매웠다.

“으으...”
“아파도 지금은 일단 참아!”
등 뒤 업힌 어린애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영험한 아티팩트가 지켜줬다고 해도 몇 년에 걸쳐 억압되어 있던 에너지와 정면충돌을 했으니 찰과상만 입고 끝나지는 않았을 거다.
이런 경우 함부로 만지지 않는 것이 정석이긴 하다.
목이나 허리처럼 안 좋은 부위로 금이 간 경우 몸을 흔들면 신경이 어긋나 영구히 망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존재하지도 않는 119가 출동할 것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납작 쥐치포 결말뿐인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잖아.
미끄러져 흘러내리는 아이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정신없이 뛰었다.
그 와중에도 나중에 이 아이의 부모로부터 고발을 당하겠구나 싶었다.
제법 부자이고, 제법 잘 나가는 집안일 거 같은데 이거 어쩌냐.

“엄마.”
아이가 엄마를 찾았다.
“아빠.”
아빠도 찾았다.
“외숙부.”
부르는 순서가 많이 이상하다. 엄마랑 아빠 다음엔 형이나 누나를 찾아야 하는 거 아니야?

바로 그때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불길하고 기이한 소리가 천지를 찢었다.
큰 바람에 휩쓸려 튕겨져 나가면서 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수직낙하 한 진법이 지표면과 충돌했다. 대략 반경 200간 정도의 땅이 트랙터로 뒤엎은 모양새로 일제히 주저앉았다. 관음보살이 현신하여 대륙 크기의 손바닥으로 큰 거북 등짝을 후려갈긴 모양새였다. 오싹할 정도의 파괴력이어서 나무는 물론이고 새와 짐승들까지 전부 형태를 잃었다.
“여기가 무슨 퉁구스카냐......”
뜨겁게 타오르지만 않았을 뿐이지 이 참상은 대형 운석이 공중에서 폭발을 일으킨 퉁구스카 그 자체였다.

‘때마침 결계 가장자리에 있었기에 망정이지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말 그대로 가루가 될 뻔했네. 효성진 이 인간... 선 넘었잖아! 만나기만 해봐. 너무 한 거 아니냐고 따질 테야. 그리고 주먹으로 날려줄 테다.’

아이와 같이 곤선삭으로 묶여 있다는 걸 잊고 자리에서 엉금엉금 일어났다.
운이 좋았다. 머리에서 피가 흘렀지만 이 정도면 곧 아물 것이다. 팔과 다리도 잘 붙어 있었다.
아, 방금 만진 팔은 내 것이 아니었다만. 상관없겠지. 아이의 팔도 제자리에 든든하게 잘 붙어 있었다.
어쩐지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푸흐흣 이러고 실성한 듯 웃었다.
기쁜 것이 아니라 미칠 것 같은데 사람은 웃을 수가 있는 거였나, 그러고 보니 미친 곰에게 발목을 물어 뜯겼을 때도 이렇게 웃었던 것 같다. 눈물이 나오지 않으니 웃어버리자 생각했던 게 얼핏 기억이 난다.
아니면 이런 게 인생 처세술인 건지도.
라면 다 끓여놓고 상 엎었을 적에도, 계약종료 통보서 받았을 적에도, 여자 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웃었다. 웃으면 복이 온다고... 누나가 말했다.

“아, 환장하겠네~”
배를 잡고 웃으며 머리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충격으로 날아오른 흙먼지가 검은 방사능 비처럼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21/11/10 13:20 2021/11/10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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