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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7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난 어린애가 싫어.”
그럼 보내주던가.
“일지 쓰는 건 더 싫어 죽겠어.”
투덜이 스머프가 빙의했냐.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 남경의는 악의는 없는 편인데 생각 없이 말을 툭툭 뱉는 성격인 것 같았다. 객잔의 방이 덥다고 투덜거렸고, 창문을 열자니 술주정뱅이들이 떠들어 시끄럽다고 투덜거렸고, 밥이 맛이 없었다고 투덜거렸으며, 하루 종일 수고하였으나 식살귀는커녕 급 낮은 주시도 못 봤다며 투덜거렸다.
정자세로 앉아 마찬가지로 일지를 쓰고 있는 동료가 아무런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이쪽은 이제 막 사춘기가 온 10대처럼 시끄러웠다.
실제로도 여드름 짜느라 정신없을 연령대이긴 한데... 훔쳐보는 시선을 느낀 남경의가 퍼뜩 고개를 들더니 먹물 묻은 붓으로 날 가리키며 질책했다.
“으이그! 어떻게 박선망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걸려가지고는!”
그러니까 그게 내 잘못이냐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억울하다. 팔 높게 들고 반성할 까닭이 과연 있는 거야?

사연인 즉 이러하다.
마을로 돌아가라는 남사추에 말에 나는 얌전히 그 말에 따랐다. 수행자들이 몰려들어 식살귀를 잡는다며 법석을 떨고 있는데 함부로 숲속을 어슬렁거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도중에 바쁜데 방해하지 말라며 다그치는 수사들과 마주쳤다.
공을 쌓을 욕심에 마음이 급해진 그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나침반처럼 생긴 희한한 물건을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다 날 밀쳤다.
그래서 넘어져 박선망에 걸렸냐고? 아니. 그건 아니고.
넘어지면서 가지고 있던 이릉노조 초상화를 흘렸는데 그게 한 수사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놈이 감히 내 앞에서 위무선의 더러운 낯짝을 들이밀어?!”
이릉노조에게 묵은 원한이라도 가진 사람이었는지 그가 검을 뽑아들고 버럭 화를 냈다.
나는 진정하라는 몸짓을 해보이며 뒷걸음질을 쳤고, 거기에 비탈길이 있는 지는 꿈에도 몰랐고, 실수로 발목을 접질렀고, 굴렀다.
그래서 구르다가 박선망에 걸렸냐고? 아니. 그건 아니고.

“뭘 빙빙 돌려 변명을 하고 있는 거야. 넌 그저 눈앞에 박선망이 보이니까 그게 뭔지 궁금했던 거잖아! 일부러 건드려놓고 왜 아닌 척하는 건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투명하게 빛나고 있어 신기한 마음에 손으로 살짝 건드려 봤...”
“고의로 저지른 게 맞잖아! 그게 한두 푼짜리인 줄 알아?!”
비싼 물건이었나 보다. 하긴, 비싼 물건이니 수사들이 두 번이나 박선망을 망가뜨린 날 죽이려 든 거겠지. 말리던 남가 소년들과 드잡이도 하고.

“경의. 목소리를 낮춰. 객잔 사람들이 놀라서 다 몰려오겠어.”
“몰려오라고 그래! 내가 억울하고 분해서라도 계속 소리를 지를 거다. 장래희망이 도사인 철부지 어린애 때문에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우리가 부순 것도 아닌데 박선망 값도 물어주게 생겼잖아!”
“경의, 진정하라니까.”
“못해! 덕분에 써야 할 일지 분량이 곱절로 늘었어! 여기엔 식살귀 소문만 무성할 뿐이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었는데! 이건 완전 멍청한 짓이야!”
으르렁거리던 소년은 먹물이 튀어 서안이 엉망이 되는 걸 개의치 않으며 붓을 탁 소리가 나게끔 내려놓았다.
“저기... 이 근처 무덤이 파헤쳐진 건 사실인가요?”
“넌 궁금해 하지 마! 팔이나 똑바로 올려. 거기서 더 내려오면 벌 받는 시간을 늘릴 테다.”
야무지게 벌서게 만들면서 남경의가 눈을 부라렸다.

“기분을 풀어, 경의. 소문에 불과한 거면 어찌 보면 잘 된 일이지.”
남사추가 그리 말하며 붓 놀리던 걸 멈췄다. 도중에 딴짓을 하던 동료와 달리 쉬지 않고 적었기에 분량을 다 채운 듯했다.
“늙고 이가 빠진 짐승이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되자 인가로 내려와 무덤을 훼손한 건지도 몰라. 생각지 못한 우연의 일이 부풀려져 그게 식살귀 소문으로 변한 거 아닐까.”
납득할만한 추론이었다. 남경의가 그럴듯하다며 맞장구를 쳤다.
“사추, 넌 일지에 그렇게 적었어?”
“아니. 선생님이 추측은 일지에 적지 말라고 해서 적지 않았어.”
“선생님은 짧게 쓰는 걸 좋아하시지. 그런데 또 택무군은 판단은 본인이 하신다며 뭐라도 좋으니 일단 적으라고 하시잖아. 아... 어쩌지. 그런데 사추 넌 저 애기 도사 이야기는 적었어?”
“간단하게만 썼어. 마을 아이가 다른 수사가 설치한 박선망에 걸렸기에 너랑 내가 도와줬다고만 했어.”
거기까지 말한 남사추는 손짓을 하여 나더러 가까이 오라고 했다.
상냥한 부름이었지만 나는 결코 다섯 걸음 이상 가까이 가려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지만 난 그들이 입은 흰옷이 너무 싫었다.

“저, 저 망할 똥고집 봐라! 표정이 왜 저래!”
“경의, 너무 뭐라 하지 말고... 아직 어린애잖아.”
“그래봤자 우리랑 그렇게 차이도 안 나. 사추, 넌 너무 물러 터졌어!”
어쨌거나 손들고 벌 서는 건 그만하면 되었다며 드디어 축객령이 떨어졌다. 밤이 깊었다는 거였다.

그런데 나에게 달리 돌아갈 집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말이지.
머리카락을 앞으로 내려 얼굴을 가리고 나무로 만든 장대를 들었다. 확인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이제 이야기를 돌려 내가 실수로 발목을 접질르고 비탈길을 굴렀던 때로 되돌아가자.
심하게 구른 건 아니었다. 깎아지른 낭떠러지도 아니었고, 풀이 많이 자란 경사 진 언덕이라서 몇 번 몸을 뒤집는 정도로 그쳤다.
그런데 마침 머리를 아래로 향한 상태로 처박혔기에 바닥에 남은 묘한 흔적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나란히 고랑이 패인 두 개의 줄이 길게 이어졌는데 내게는 그게 꼭 의식이 없는 사람을 질질 끌고 간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은 겨드랑이에 팔을 넣어 상체를 들었고, 한 사람은 다리를 들었는데 길이 평탄하지가 않아 다리를 든 사람이 도중에 놓아버린 거다.
이상했다. 마을에서 크게 다쳐 산을 내려왔다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없었다.
자국을 더듬어 따라가자 외발바퀴 수레자국으로 바뀌었고, 드문드문 잡풀을 꺾은 자국을 남겼을 뿐, 이내 사라졌다. 경험이 부족한 나로서는 이후 추적이 곤란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수사들은 저마다 귀신을 잡을 생각만 했지 고개를 숙여 땅을 보지 않아 사람이 남긴 흔적을 죄다 놓쳤다. 식살귀와 외발수레는 서로 상관이 없으니 이쪽에 대한 건 그냥 놓아버린 거다.
이후 이곳저곳을 뒤지다가 박선망을 건드려 망가뜨린 건 순전히 우연이고.
따지고 보면 우연 70%에 본인과실 30% 되겠지만.
아니 진짜로 뭔가 반짝거린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확 움직이더라고, 그게. 맹세코 살짝만 만졌거든.

‘아무튼 구울 같은 건 결코 아니야.’
벌레가 새카맣게 꼬인 걸 장대로 건드리니 머리만 남은 작은 짐승이었다.
맹금류는 덩치가 작은 개나 고양이를 사냥하여 잡아먹으면 머리는 안 먹고 버린다던데 이 숲에도 매나 올빼미가 살고 있는 눈치다. 잘려나간 단면이 제법 깨끗했다.
‘무덤을 파는 수고를 해서 시체를 먹는 애들이 이런 공짜 진수성찬을 마다하겠어? 식살귀가 아니야.’
짐승의 머리를 장대로 툭툭 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야기잖아.’
그런데 왜 굳이 오지랖을 부려가며 공동묘지까지 살펴보려 하는 건지는 하느님도 모를 것이다.

이 세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평장을 한다.
땅을 깊게 파서 관을 묻은 뒤에 평평하게 다진다는 얘기다.
재물이 있는 사람들은 수고를 더 들여 봉분을 쌓기도 했는데 일반적이진 않았다. 무덤지기를 따로 두지 않는 이상 봉분 자체로도 부장품을 노리는 사람들의 표적이 되었기에 부자들은 위로 올리는 대신 아래로 더 내려갔다. 심하면 핵미사일에도 끄떡없을 방공호처럼 굴을 파서 관을 안치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이 가게 되는 공동묘지의 모양새는 어떠할까.
뻔 한 거 아닐까. 상대적으로 얇게 묻힌다.

바닥에 납작하게 깔린 판자를 발로 밟고 올라섰다.
판자 아래 묻혀있을 망자를 모욕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었다.
‘나무에 두께가 있어. 내 몸무게가 올라가도 끄떡 하지 않을 정도야.’
최근에 뜯어낸 적이 있는지를 확인해보고자 더듬더듬 가장자리를 만져봤다. 글쎄다. 만지는 것만으로는 확실하지 않았다. 덮개로 쓰인 널빤지는 오래되었고 여러 번 재활용되었다.
‘시취는 나지 않아. 이 무덤은 오래되었고 최근에 사람을 묻은 것 같지는 않아.’
뚜껑을 여는 일엔 적절한 도구가 필요해 보였다. 아무리 허술하다고 해도 사람 손으로 뜯어낼 정도로 대충 만들지는 않았다.
‘여기 말고 다른 곳을 더 볼까.’

늦은 밤이라 움직임에 어려움을 느꼈지만 수 곳의 무덤을 살펴봤다.
그렇게 해서 알아낸 건, 오래된 무덤은 상대적으로 멀쩡했고 새로 만든 무덤 몇이 땅을 판 흔적이 남았다. 여자가 묻힌 관은 안 건드렸다. 어떤 표식을 남겨 구분하는 건지 나로서는 짐작이 가지 않았는데 열린 관의 크기로 보아 파헤쳐진 건 전부 남자다.
부자들은 안 건드렸다. 파내는 일에 수고를 더 해야 할 테니 가난한 탓에 얇게 묻힌 사람만 골라내어 팠다.
“버크와 헤어인가.”
이쪽 세계에서도 시신이 돈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저쪽 세계에서는 오래전부터 시신을 팔아 돈을 챙기는 무리들이 있었고, 심지어 무덤에서 파낼 시체가 없자 여관에서 사람을 죽여 팔아치운 살인자도 나왔는데 그게 버크와 헤어다.

“법해어가 뭐야?”
“아니. 버크와 헤어.”
“그러니까 법해어가 뭐냐고.”
순간 몸이 공중으로 번쩍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는데 멱살이 잡혔다는 사실 보다는 상대가 하얀 소복을 입고 있었다는 점에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공동묘지에 하연 소복이면 딱 그거잖아.
“처녀귀신이다~! 처녀귀신! 히이익!”
“누구더러 처녀귀신이라는 거야! 이놈이 눈이 삐어서!”
따악, 하고 매운 주먹이 앞 통수에 날아들었다.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 뜬 남경의가 한 번 치는 걸로는 부족하다며 같은 자리를 또 때렸다. 눈앞으로 별이 번쩍였다.

Posted by 미야

2021/11/18 12:35 2021/11/1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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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6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릉노조.
무려 3천여 명의 수진계 사람들과 다이다이 맞장 뜬 사나이.
비천한 하인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불세출의 천재로 땅을 흔들고, 바다를 뒤엎고, 하늘을 두 쪽 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멋대로 우쭐거리고, 기고만장하여, 결국 친자식처럼 길러준 운몽 강씨를 배반하더니, 기어코 사술을 익혀 모두를 이기려 했고, 끝내 내세에서도 갚지 못할 업보를 쌓았다.
이릉에 자리를 잡은 위무선은 새로운 종파를 세워 스스로 노조의 자리에 앉았고, 사마외도로 높은 단계의 흉시를 만들어 백가에 대적했다.
이릉노조의 힘으로 죽음이 내려오면 흉시가 사람을 죽이고, 쓰러진 자가 다시 일어나 흉시가 되었다.
그가 만든 흉시는 시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행동이 빠르고 자연스러웠다. 두려움이 없었으며 정신이 또렷했다. 사고력이 있었기에 말을 할 줄 알았고, 무기를 사용하여 사람을 도륙함에 망설임이 없었다.

“그 흉시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이릉노조의 법보가 음호부다.”
가짜 도사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음호부라는 거, 직접 본 적 있어요? 어떻게 생겼어요?”
“음... 사악하게 생겼지.”
“그게 아니라 둥글게 생겼다던가, 각이 졌다던가, 용무늬가 조각되어 있다던가... 생김새요.”
“소름끼치는 모습이야.”
“색은 어떤가요. 검정? 아니면 은색? 파란색?”
“다시는 눈에 담고 싶지 않은 역겨운 색이지.”
구라쟁이! 나는 풍성하게 기른 턱수염을 계속 쓰다듬고 있는 도사를 노려봤다.
지금껏 아는 체를 많이 했지만 거짓말을 지어내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고, 음호부는 그가 아는 영역 밖의 일임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떠벌린 것과는 달리 아예 이릉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군. 내가 발품을 팔아야겠다. 남는 건 시간이니 직접 가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도사님은 이릉에서 부적 만드는 걸 배웠다면서요. 혹시 음호부 만드는 건 안 배우셨어요?”
“배워볼까 했는데 공물을 많이 바쳐야 한다고 해서 포기했어. 그리고 시체를 다루는 건 좀 그렇잖아.”
가짜 도사는 은근 서민적이었다. 흉시를 만들어 수사들과 싸우는 건 관심이 아니라고 했고, 자신은 겨울에도 물이 얼지 않는 주문이라던가, 과일을 말리지 않고도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실용적인 주문 같은 게 더 좋다고 말했다.
그러다 콜록 기침했다. 다섯 푼이나 받고 내게 팔았던 엉터리 부적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아주 엉터리는 아니야. 나에게도 상도덕은 있다고. 주시에게 효과는 없을지 몰라도 불이 붙는 건 진짜거든. 아궁이 볏단에 불붙일 적에 요긴히 쓸 수 있지. 다만 요령이 좀 필요해. 이렇게 탁!”
성냥 같은 종류였나 보다. 놀부 마누라가 주걱으로 흥부 뺨 때리는 식으로 세차게 후려갈기니 진짜로 부적에 불이 붙었다.
나뭇가지를 비벼 불붙이는 일이 엄청 고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부적의 효과에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좋아하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도사가 주변에 많이 홍보 좀 해달라며 공짜로 부적 두 장을 더 주었다.

화창하고 좋은 날이었다. 잎사귀 하나 입에 물고 숲속을 걸으며 머리 위로 한가롭게 팔짱을 꼈다.
‘결국 음호부에 대한 건 건진 게 없네.’
척 보면 알 수 있는 종류일까? 최강 네크로맨서의 주술도구이니 검게 빛나는 보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게 의외로 뒤통수를 치는 종류라면? 영화 인디애나 존스, 최후의 성전 편에서 진정한 예수 그리스도의 성배는 투박한 외견으로 화려한 금잔 뒤에 숨어 보물 약탈자를 기만했다.
‘막연한 추측이지만 반짝거리진 않을 것 같아. 반지나 목걸이, 이런 장신구도 아닐 것 같고. 이 세계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악세사리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 같으니까.’
시장에서 구걸을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을 적에 반지나 목걸이를 한 사람들이 얼마 없었다.
결혼을 한 남녀끼리 반지를 교환하는 풍습 또한 없는 듯했다.
‘이릉노조 이 사람... 결혼은 했을까? 자식 이야긴 없던데.’

초상화 속의 이릉노조와 눈싸움을 하며 상상력을 부풀려봤다.
이 피부 시커멓고, 눈 찢어지고, 도깨비처럼 귀가 어깨까지 늘어진 사내가 ‘빛으로 메이크 업~!!’ 이러면서 보석 박힌 손거울을 만지작거릴 리는 없고. 아님 마법서 같은 건 아닐까. 영화 미이라에서 사자를 일으켜 세운 건 기묘한 장식으로 표면이 덮인 한 권의 책이었다.
‘아냐. 숨겼을 적에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라면 서양식 제본으로 책을 만들 리 없지.’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호부’라고 했으니 몸에 지니고 있어도 크게 부담을 느끼지 않을 크기다. 기껏해야 머리빗 크기? 쟁반처럼 커다랗지 않다. 배구공이나 축구공 크기도 아닐 것이다.
‘크아앗, 그래봤자 전부 추측이잖아. 이래선 음호부를 코앞에서 봐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겠어.’
기록 같은 건 없을까.
제작법 이런 건 소실되었어도 그 생김새를 그림으로 옮겨놓은 게 남았을 수 있잖아.
그렇다면 정말 좋을 텐데.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이릉노조의 초상화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콧구멍만 있고 코는 없는 이릉노조 위무선 씨. 혹시 생전에 그림 잘 그리셨나요? 뭐 좀 남겨놓은 건 없으시고요?”
무인도에서 배구공 윌슨과 대화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진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한 가닥 가능성에 기대했다.
네크로맨서의 핵이 파괴되면 네크로맨서가 만든 언데드들도 먼지로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음호부를 찾아 파괴하면 음호부로 만든 흉시 역시 저절로 파괴되는 것일 수 있다.
설양이 이릉노조를 흉내 내어 만들었다는 음호부... 반드시 찾는다.
나는 정말 간절한 마음이 되어 이릉노조의 초상화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런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도령.”
반투명한 그물에 걸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나를 발견한 흰옷의 소년이 그리 말했다.
“세상에, 의지할 게 따로 있지. 도깨비 그림만 붙잡고 있음 어떻게 해요. 차라리 도와달라고 크게 소리를 내지 그랬어요.”
“......”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뭔가가 발을 확 잡아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무 위였다. 생각이 많아져 주의력이 산만해진 탓에 덫에 걸린 것이다.

검을 휘둘러 줄을 끊으면서 소년이 말했다.
“미리 말해두는데 우리가 놓은 덫이 아닙니다. 그러니 원망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고 보니 멀리서부터 ‘잡았어? 잡았냐고.’ 이러면서 허둥대며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소년처럼 흰옷 차림새가 아니라 회색에 갈색, 옥색 등 제각각으로 차려 입고 있었다. 연령대도 훨씬 높아 게 중에는 머리에 서리가 내린 자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호들갑스러웠고, 옷차림만큼이나 한데 섞이지 않고 따로 놀았다.

고소 남씨 소년이 가까이 오려는 그들을 제지하며 말했다.
“식살귀가 아니고 어린아이입니다.”
“아니, 비싼 박선망에 요괴가 아니라 어린아이가 왜 걸려.”
“사람이 걸어 다니는 길에 부주의하게 설치를 했으니 그렇죠. 통제도 제대로 하지 않고 덫을 깔았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겁니다.”

머리에 서리 내린 선사가 이에 발끈하여 뭐라 하려 했다.
그가 뭐라고 할지는 쉽게 짐작이 갔다. 나이도 어린 것이 어른도 몰라보고, 되바라져서 따지기나 하고, 요괴만 잡으면 그만인데 말이 많아서 - 하지만 사내는 얼굴만 벌게진 채로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요괴를 잡는다고 설치다 덫으로 엉뚱한 걸 잡은 건 그들의 실수가 맞았고, 무엇보다 남가 소년의 위세가 대단했던 탓이다.
거기다 소년의 동년배로 보이는 자가 크게 소리치며 다가오고 있었다.
“사추! 남사추! 좋은 소식이야. 함광군이 곧 이리로 오실 것 같아!”
그 외침을 들은 무리들은 금방이라도 오줌 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다른 장소에 설치한 덫을 살펴보겠다는 핑계를 대며 황급히 자리를 피해버렸다. 함광군이라는 사람이 대단히 두려운 모양이었다.

마찬가지로 화장실 급한 표정을 지은 소년이 근심하여 말했다.
“경의. 이곳에 진짜로 식살귀가 나타난 건지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데 함광군에게 신호했어?”
“아니.”
“곧 이리로 오실 거라며.”
“오실 것 같다고 했지, 오신다고 하진 않았잖아. 그럼 된 거야.”
남경의가 이 정도는 거짓말 측에 속하지도 않는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것보다 얜 뭐야?”
재밌는 구경은 같이 하자며 남경의가 고개를 길게 뺐다.

얼마 전 이 부근에서 무덤이 파헤쳐지는 일이 발생했다는 건 나도 익히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무덤 도굴이 비단 어제 오늘만의 일도 아니고, 작정하고 부장품을 노리는 전문 집단도 있는지라 그러려니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런데 보아하니 일반적 양상이 아니었나 보다.
아까 뭐라고 그랬더라... 식살귀? 그러니까 시체 파먹는 구울?
부장품은 그대로고 시체만 사라졌나 보군.

“여러분들은 식살귀를 잡으러 오신 거예요?”
“상관없는 네가 관심을 둘 일은 아닌 것 같다만.”
남경의가 귀찮다는 내색을 감추지도 않고 내 어깨를 툭 밀었다.
이런 일은 지긋지긋하다며 남의 어깨를 미는 동작이 거칠었다.
남사추는 어린애를 괴롭히면 안 된다며 말렸으나 남경의는 가차 없었다.
“말을 안 하게 생겼냐고. 그깟 그림에 부적만 들고 애가 수행자 흉내를 내고 있잖아.”
“호기심 때문이겠지. 타일러서 집으로 돌려보내자. 얘도 박선망에 걸렸을 적에 충분히 반성했을 거야.”
“저게 어딜 봐서 반성을 하는 얼굴이냐고, 사추. 땟국을 봐. 하나도 안 울었어.”
“너무 무서우면 눈물도 안 나오는 법이야. 경의, 그만해. 애가 아파하잖아.”
내 뺨을 찹쌀 반죽인양 죽죽 잡아당기고 있는 남경의를 말리면서 사추가 그렇게 주장했다.

Posted by 미야

2021/11/17 12:42 2021/11/17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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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조사] 풀피리 25

제5장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되, 사람은 사람이 아니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이릉노조, 세 푼에 한 장, 다섯 푼에 두 장! 밤새 잠자리가 뒤숭숭하다? 집안에 우환이 있다? 일단 한 번 붙여봐. 악귀는 악귀로 물리치는 법! 잡귀가 이릉노조를 보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세 푼에 한 장, 다섯 푼에 두 장!”
장대에 홍보 깃발을 달고 크게 외치는 장사꾼의 호객행위에 사레가 들렸다.
이름만 불러도 쳐들어와 흉악을 저지르고 간다며. 그래서 감히 이름도 못 부른다며.
볼드모트는 의외로 싼 값이었다. 한 장에 세 푼밖에 하지 않았다. 술 한 병보다 못한 값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보자 장사꾼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스스로 흥이 돋아 이번엔 붉은 물감으로 그린 부적을 꺼내들었다.
“그래도 못 미더우면 이것도 같이 가져가시오. 악귀징벌 부적 한 장에 다섯 푼!”
이럴 수가. 이릉노조 초상보다 부적이 더 비싸다. 볼드모트가 분노하여 어둠을 먹는 자들 표식을 마구 난사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미리미리 준비하여 후회하지 말자! 답녕령 고개에 주시가 매우 많소이다. 왼손에는 이릉노조! 오른손에는 악귀징벌! 양손을 가득 채우면 여행길이 강녕하네~!!”

허리를 숙여 초상화를 구경하던 짐꾼이 속으로 저울질을 하더니 사지 않는 방향으로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가격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아니면 물건이 마음에 차지 않은 건지는 나도 모른다.
손님이 흥미를 잃고 자리를 뜨려 한다는 걸 알아차린 장사꾼이 재빨리 가격 흥정을 제안하려 했다.
하지만 짐꾼은 노련하게 자신을 잡으려던 팔을 피했다.
“아니 왜?! 이게 어째서 마음에 안 든다는 게야?”
그건 댁이 초상화를 너무 못 그려서 그런 거지.

턱을 괴고 멀찍이 떨어져 돌아가는 모양새를 구경하던 나는 장사꾼의 뒤떨어지는 예술 감각에 혀를 내둘렀다. 눈과 입을 그렸다고 초상화가 되는 건 아니지 않던가. 볼드모트에겐 코가 없었지만 이릉노조에겐 있었겠지. 그런데 저 장사꾼은 콧구멍이랍시고 먹을 찍어 둥글게 점 두 개만 묘사했을 뿐이다.
검은 피부와 송곳니, 힘줄이 툭 튀어나온 인물도 코가 없으니 흉악하다는 인상 이전에 웃겨 보였다.

“왜 웃는 거야, 비렁뱅이 주제에 재수 없게.”
날 알아차린 장사꾼이 침을 탁 뱉었다.
그래도 발로 차거나 욕을 퍼붓지는 않았다. 콘셉트가 ‘도사’라서 어린 거지를 핍박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장사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허리띠에 옥패장식을 걸고 학우선을 모방한 부채를 들었으니 점잖게 손짓으로만 저리 가라고 표현했다.

그런다고 내가 시키는대로 할 사람이 아니지.
“이릉노조가 진짜 이렇게 생겼어요?”
“왜 달라붙어! 살 거 아니면 가라, 얘야. 물건 살 돈도 없으면서 귀찮게 하는 거 아니다.”
“그냥 궁금해서 그래요. 이릉노조가 진짜 세요? 악귀가 보고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날 만큼 세요? 그런데 왜 부적보다 값이 싸요? 만약 제게 다섯 푼이 있다면 이릉노조 초상 두 장을 사는 것이 좋아요, 아님 부적 한 장을 사는 것이 좋아요?”
장사꾼은 그쪽으로 머리가 비상했다. 생각할 것도 없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딴 고민을 왜 해! 전부 다 자기 안전을 위해서인데 기왕 돈을 쓸 거, 다섯 푼에 두 푼을 더해서 이릉노조 초상화 한 장에 부적 한 장을 사야지! 한 푼 깎아준다. 사!“
어디 가서 굶어죽지 않을 사람이었다. 세일즈의 귀재였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수중에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초상화와 부적을 한 장씩 구입했다.
이것으로 얻은 노잣돈이 전부 동났지만 잘 하면 이릉노조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볼 수 있겠다 싶자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탁월한 선택이다.”
가짜 도사는 태세를 바꿔 빙글빙글 웃으며 돈을 챙겼다.

“그런데 진짜로 이릉노조가 이렇게 생겼어요?”
“그럼! 아주 무섭게 생겼지. 입과 귀에서 연기가 나오고 키가 무려 아홉 척이란다. 이 도사님이 직접 이릉에 내려간 적이 있어 이릉노조 위무선에 대해 아주 잘 알지.”
이릉은 지명 이름이었군.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 부적을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부적 만드는 것도 거기서 배운 거예요?”
“용케 아네. 맞아! 거기서 배웠어. 그 부적을 부정한 것들의 이마에 딱! 붙이면 불이 저절로 붙는단다.”
마음에 드는 설명이었다. 냉큼 부적을 이마에 딱 소리가 나게끔 붙였다.
메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여. 불량품이여? 나는 흉시인데 불 안 붙는데?
“아니, 아니. 네 이마에 붙이는 게 아니라 주시에게 붙이는 거라니까. 얘가 참 아둔하네.”
가짜 도사가 혀를 차며 이마에 붙은 부적을 떼어주려 했다.

“가짜 부적이잖습니까.”
지학의 나이에 이른 소년이 참다 참다 참견하는 거라며 인상을 쓰고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나도 눈이 동그래지고, 가짜 도사의 눈도 동그래졌다.
가짜 도사의 말문이 막힐 법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격식이 있어 보이는 하얀 옷을 입은 소년은 나이가 어렸음에도 신선의 기운을 풍기며 이목구비가 준수했다. 무엇보다 싸구려가 아닌 제대로 된 검을 차고 있었는데 그게 날을 세운 진검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 불과한 걸 부적이라고 팔면 안 됩니다.”
소년이 강하게 나오며 내 이마에 붙은 부적을 떼어냈다.
“흉내조차 내지 않았군요. 이건 아무런 효능이 없어요. 정말 위급한 상황에서 이런 걸 쓰려 한다면 그 사람의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아, 뭐, 어쩌면, 그... 그런가요?”
장사꾼이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를 취했다.
“아이에게 돈을 돌려주세요. 그리고 그 부적은 더 이상 팔지 마시고요.”
“예, 예!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공자님.”
“경고하는 겁니다.”
풀이 꺾인 가짜 도사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팔던 물건을 챙겨 달아났다.

엄한 표정을 짓던 소년이 기세를 누그러뜨리더니 나에게 돌려받은 일곱 푼을 쥐어주었다.
손이 참 따뜻했다.
“도령도 앞으로 속지 않도록 조심해요.”
“고...맙습니다?”
상대방의 친절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일단 흰옷 자체가 싫었다. 배추 가게에서 나에게 당과를 사줬던 이름 모를 선사도, 효성진도, 눈부시게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친절했지만, 결과적으로 친절하지 않았다.

내 표정이 엄청 이상했나 보다. 소년이 고개를 숙여 내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동전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고 입술을 끌어당겨 가식적으로나마 웃었다.
설마, 내가 흉시라는 거 알아본 거야? 그, 그렇다면 참 감사하네요!

“사추. 이제 출발할 거야. 거기서 뭐 해?”
“별 거 아니야, 경의.”
“무슨 일 있어?”
“아냐. 다 끝났어. 터무니없는 가짜 부적을 파는 사람이 보여서.”
소년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자기네 무리로 돌아갔다.

상인들이 목소리를 낮춰 숙덕거렸다.
‘고소 남씨다.’ ‘고소 남씨가 야렵을 왔다.’ ‘함광군은 안 보이는데.’ ‘어린 소년들이 대단하군!’
한 귀로 흘리면서 골목길로 들어가 몸을 낮췄다.

효성진이 친우 송자침과 함께 설양이 저지른 악마 같은 짓을 고발하였을 적에 현문 세가의 반응은 각각 달랐다.

고소 남씨는 자기네 식으로 알아본다며 뒤로 빠졌다.
운몽 강씨는 혈기가 왕성하여 ‘엿 드세요!’ 라고 했다.
난릉 금씨는 과장된 헛소문이라고 치부했고, 청하 섭씨는 물불을 안 가리고 ‘죽여라!’ 일갈했다.

나뭇가지로 땅바닥에 꼬부랑 낙서를 한참동안 끄적거리던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현문 세가라는 거, 신선이라는 거, 그야말로 쓸데없었다.
‘그나마 청하 섭씨가 우리 편이긴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과거형이다.
왜냐하면 당시 청하 섭씨의 종주였다던 자가 매우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적봉존 섭명결은 생전에 민심을 잘 살피고 무(武)에 맹진하여 ‘바르고 곧은 사나이’ 이미지로 큰 인기를 누렸다고 한다. 그런 사내가 갑자기 패도를 꺼내 허공에 휘두르며 주화입마에 빠져선, 말리려던 동생까지 상처를 입히고는 칠백으로 피를 쏟고 급사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었지만 섭씨 일가가 젊어서 요절하는 건 집안 내력이라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이른 새벽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모양새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나에겐 그놈의 교통사고가 빨간 마티즈 느낌이라서...’
손바닥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땅바닥에 그린 낙서를 지웠다.

청하 섭씨는 이후 쇠락기에 접어들어 지금은 4대 현문 세가로 취급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구색만 맞춰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 몸을 의탁한 수행자 숫자도 적어 지금은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적봉존이 여태껏 살아있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내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천하에 의지하고 믿을 구석 하나 없다는 얘기다.

“아, 찾았다. 요놈! 요놈! 내 돈!”
고소 남씨 소년에게 쫄아 도망갔던 가짜 도사가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이릉노조의 초상화와 부적을 팔았던 값이 아쉬워 멀리 도망가지 않고 주변을 맴돌았던 모양이다. 고소 남씨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날 찾으러 다녔는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아이고 형님, 나는 웃으며 일곱 푼 동전을 쥔 손을 반갑게 흔들었다.
어차피 부적은 장난감 같은 거였고, 그에게 물어볼 것이 아주 많았다.

Posted by 미야

2021/11/16 13:16 2021/11/16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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