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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의 기억은 뒤죽박죽이다.
큰 열을 내며 드러누운 탓에 벌어진 일의 순서라던가, 장소라던가, 사람의 얼굴 같은 것들이 죄다 섞여 혼란스런 그림이 되어버렸다.
아무튼 나는 서남문 한 가운데서 기절했고, 어린애가 죽었다 누군가 소리를 질렀고, 누군가의 등에 업혀 어딘가로 옮겨졌고, 의원으로 짐작되는 자가「몸살입니다, (이 정도로는) 안 죽습니다.」말했고, 열을 식히기 위해 얼굴을 덮은 차가운 물수건이 코와 입을 막아 질식사의 위기를 겪었고, 누군가 물그릇을 엎었고, 젖먹이가 울어댔고, 정복을 입은 관원이 찾아와 질문에 답을 하라며 침상에 누운 내 몸을 마구 흔들었으며, 포도 알보다 곱절은 굵은 약을 억지로 삼켰고, 까무룩 정신을 놓고 잠들었다. 그러다 다시 깨어나면 이름이 무엇입니까, 이 손가락은 몇 개입니까, 식의 우문이 이어졌다.
만사가 귀찮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 손가락은 두 개요, 대꾸했더니 억지로 복용해야 할 약이 더 늘어 포도 알 크기가 복숭아 크기가 되어버렸다. 맛 또한 상상초월로 지독해졌다.
담 너머 익숙한 향취 맡으매 님과의 밀월 약속이 꿈처럼 아득하여 슬픔을 지운 달은 뜨고 지고 -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속벽향가에 실린 연애시나 실컷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진짜 미쳤을지도 모른다.
1편부터 42편까지 외우고 나서야 입안을 맴돌던 지독한 쓴맛이 가셨다. 몸에는 좋을지 몰라도 정신에는 해로운 약이었다.

『얼굴빛이 많이 좋아졌구나.』
진통제에 취해 다소 멍한 기분으로 날 찾아온 손님을 쳐다보았다.
『누구신지요.』
『아... 그게. 이 아저씨는... 그러니까 뭐랄까... 음.』
사내는 차마 자신이 저질렀던 만행을 제 입으로 털어놓기가 민망했던지 있지도 않은 티끌을 털어내겠다며 뒷목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투명한 더듬이를 길게 뻗어 내 안색을 주의 깊게 살폈다. 뭐냐, 이 인간. 군장을 벗고 평복으로 갈아입어 인상이 크게 달라졌을 터이니 포박한 나를 성문 안쪽을 향해 집어던진 본인이라는 걸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는 눈치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구렛나루까지 밀었다.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이라벽치, 이 등신각치야. 소원대로 끝까지 모르는 척해주마.
나는 시치미를 잡아떼고 다시 한 번 질문했다.
『누구신지요.』

이라벽치의 어두웠던 표정이 활짝 펴졌다. 내가 누군지 못 알아보는구나, 지화자. 사내는 신이 나서 가까이 있던 의자를 세게 끌어당겼다.
나는 다소곳하게 손을 모으고 그가 의자에 앉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상당히 덩치가 큰 자였다. 산속에서 그 난리를 쳤을 적엔 몰랐는데 그가 엉덩이를 붙이자 방 자체가 비좁게 느껴졌다. 심지어 천장도 아까보다 1척은 낮아진 것 같아 숨이 막혔다. 과연, 그래서 이름에 치 라는 글자가 붙는 거였다. 치는 큰 남자를 의미한다. 속어로 거대한 남근이라는 의미도 있다.

『우선 이걸 가져왔다. 네게 무척 중요한 물건 맞지?』
많고 많은 잡동사니 중 하필이면 그가 가지고 온 물건은 아버지가 먼 길 떠나는 나에게 내려준「자결 상자」였다. 새카만 빛깔의 자개 장식 상자를 보자 뺨 근육이 굳으려 했다. 집안의 명예를 항시 잊지 말고 행동을 바르게 하여 - 그는 안에 든 서찰을 꺼내 읽고 내가 어느 집 자식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중요한 거라 판단하여 일부러 챙겨왔다.
목이 터져라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내 심정은 까마득히 모르고... 치밀어 오르는 걸 삼킨 채 상자를 받았다.

『훌륭하신 아버지다. 허락을 구하지 않고 읽었는데 좋은 내용이었다.』
물론 그랬을 것이다. 적은 글 속에 영혼은 없어도 최소한 모양새 하나는 반듯했으니까.
『도중에 사고가 있었노라 빈사국으로 연락을 취하긴 했는데 답장을 받기까지는 시일이 걸릴 것 같구나. 그래도 자식인 네가 무사하다는 걸 아시면 부모님께선 크게 기뻐하실 거야.』
과연 그럴까, 이번에도 마당을 향하여 벼루를 집어 던지실 지도.
『네가 학업을 할 내재원에도 알려 머무를 방을 준비해둬라 급히 일러뒀다.』

이쯤해서 이라벽치는 송충이 모양의 눈썹이 가렵다며 손가락을 얼굴로 가져가 긁기 시작했다.
『끄응... 그런데 뭔가 좀 착오가 있었던 것 같아. 내재원 숙사감 양반이 엄청나게 화를 내더라고. 계란을 얻으려면 일단 닭부터 키워야 한다나, 뭐라나. 닭이 없는데 알을 내놓으라는 법이 어디에 있느냐면서...』
다음으로 나올 얘기가 어떤 종류일지 짐작이 갔다.
『있잖아, 이거 제법 민망한 이야긴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거다. 어차피 가던 도중 죽임을 당할 아이라서 아버지는 사전에 미리 예비할 일을 등한시했다. 책값이니 수업료니 하는 것들을 마련하지 않았고 내재원의 숙소도 미리 잡아두지 않았다. 황제에게 선물을 보내는 건 자존심을 세워가며 엄청 신경을 썼는데 그 다음부터는 신호가 뚝 끊겨 아이의 의식주 문제 전부가 허공으로 붕 떠버렸다.
『사친으로 온 네가 여기 이사실에서 굶어 죽는 일은 결단코 일어나지 않겠지만... 곤란하게 되었구나.』
수중엔 땡전 한 푼 없는데다 심지어 당장 갈아입을 속옷조차 없다.

이런 건 싫으니 집으로 보내 달라, 울음을 터뜨릴 거라 짐작했던 모양이다. 커다란 몸을 긴장시키고 곧 가득 차올라 이불을 흥건히 적실 눈물을 각오했다. 이라벽치는 호랑이를 잡는 것보다 아이들 달래는데 더 어려움을 느끼는 남자였다.
『어허! 울지 마! 울지 말고!』
하지만 나는 희노애락을 전부 잊어버린 멍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울어서 해결이 된다면야 맹인이 될 때까지 눈물을 떨굴 것이다. 매운 양파를 얼굴에 문질러서라도 울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우는 건 단순히 체력 낭비다.
당장 급하게 된 건 그동안의 약값이다.
자연스럽게 무릎 위로 올려놓은 세공품 상자로 시선이 갔다.
이걸 팔아 한 달치 생활비라도 벌면 좋으련만.
『곧 집에서 좋은 연락이 올 거다. 그때까지만 힘내서 참는 거야, 알겠지?』
남의 사정도 모르고 이라벽치는 속 편한 소리를 꺼냈다.
허나 고국 빈사국에서 달가운 답장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약간의 호의를 얻어 깨끗한 옷을 구했다.
『우리 아들 놈 옷이야.』
이 정도면 대충 맞을 거라며 사내 옷을 몇 벌 꺼낸 이라벽치는 꿈에도 내가 여자아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다. 내 몸을 진찰을 한 의원이 사실을 바로잡아주었을 법도 했는데 어째서인지 나는 계속 사내 취급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빈사국 지리가 家의 장자(長子) 안즈」로 적힌 서류들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그 범인은 바로 이라벽치였다.
벌써부터 피곤해진다. 언제부터 일이 꼬였는지... 이걸 무슨 재주로 바로 잡아야 할까.
『저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니? 내 눈엔 그다지 낡은 것 같진 않은데...』
『마음에 듭니다.』
잘라 말하고 감청색의 옷을 손으로 잡아챘다.

Posted by 미야

2015/05/12 16:36 2015/05/12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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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그나마 양은 적었지만 어쨌든 토사물은 그 냄새가 지독했다.
당황한 나머지 팔을 뻗어 머리카락이며 붉은 의주갑에 튄 오물을 어떻게든 털어내려 시도했다.
그 행동이 사실상 손가락으로 문대는 거였음을 깨달았을 적엔 이미 늦어 청년 장수의 이마로 푸른 혈관이 곤두섰다. 발칙하게도 똥을 문지른 것이다.

『우와앗?! 빨리 막아!』
『지, 지지지지 진정하세요! 애기가 놀란 나머지 그냥 토한 거에요.』
『여기서 화내시면 안 됩니다, 자손!』
네 명의 병사들이 동서남북 방향에서 매달려 나를 대신해 애원하며 사죄했다.
그리고「자손」이라고 불리운 자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사람이 웃으면 예뻐야 정상인데 이건 많이 무서웠다. 하여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아아, 오늘 하루는 참 정신없었어. 하늘이 맑네... 날씨 좋다.

나는 이대로 정신줄을 놓고 그만 편안해지고 싶었다.
하나, 둘, 셋, 넷... 『지금 나더러 진정하라는 말이 나와~?!』마침내 귓청을 한 방에 날리는 대포 소리가 터졌다. 기함만으로 사람을 쓰러뜨리고 나무를 와지끈 부러뜨리는 거, 정말 오랜만에 목도한다.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은 바닥에 등을 대고 벌렁 드러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말똥말똥 쳐다보았다.

하여 지금 내 몸으로 굵은 밧줄이 칭칭 감겼다.
표면상으로는「요괴인지 사람인지 여전히 구분이 가지 않아서」이고, 속내는「발칙해서」 다.
『미안하다. 아프거나 저리면 꼭 말해다오.』
이름이 이라벽치라고 했던가, 나이 서른 중반의 사내가 몸을 묶은 줄을 느슨하게 조정해주며 얼쭘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 정도 나이라면 결혼하여 슬하에 어린 자녀가 있을 터이니 우는 아들 벌주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죄수 포승줄 묶는 것처럼 하지 않고 아낙네가 장 보따리 묶는 식으로 매듭을 해서 속된 말로 엄이도정 하였다. 눈 가리고 아웅했다는 얘기다.
『너무 뻑뻑하진 않고?』
『괜찮습니다.』
『조금만 참으렴. 이 아저씨가 잘 해결해줄게.』
믿어보라는 아저씨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만.

원래대로라면 포승줄에 묶이는 것 정도로는 안 끝난다.
왜냐하면 그들이 청년 장수를「자손」이라는 독특한 호칭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풀어서 적으면「무한권능으로 하늘보좌에 올라 온 산하를 지배하시는 위대하신 적룡신의 만세자손」- 줄여서 자손 - 황족이다. 진짜로 황족이 용신의 후예냐고 묻지는 말아 달라. 예전에 그 질문을 친구에게 했을 적에 그는 그걸 자기 입으로 설명하기엔 본인의 입장이 난처하다며 뺨을 긁었다. 인간과 용이 서로 교미를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고 해도 2세를 볼 수 있는가 - 호기심이 들지만 천벌 받을 질문이다. 알 듯 말 듯 하여도 짐짓 모르는 척해야 신상에 좋을 것이다.
아무튼 황송하여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가 없는 서대륙의 황제는 용신의 직계 자식으로 셈 쳐 적손, 황태자는 주손으로 구분하여 호칭하고 이하 황족은 자손으로 부른다.
그러니까 나는 평소 우러러 얼굴도 바라볼 수 없는 귀인을 향해 송구하게도 토를 하고, 거기에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지분거려 그 냄새 지독한 걸 치덕치덕... 윽.
흙바닥에 코를 박은 채 신음했다. 인생 종쳤다. 황족 능멸죄면 그 처벌 수위가 어떻게 되더라. 태장 30대였던가.

『촌 사람의 아이로는 보이지 않는군. 피부도 하얗고.』
『저 아래서 이두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바퀴가 망가졌고 말 두 필은 이미 사라진 상태입니다. 짐 일부가 손상되었고요... 시체도 한 구 나왔는데요.』
일처리는 일사불란하여 버려진 마차와 미리노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도망간 놈이 있다던데.』
타평에 대해 묻는 말엔 도리질하며 모르겠노라 거짓말했다. 미운 감정은 터럭조차 없다. 아버지의 명령에 따른 것뿐이니 차라리 이대로 멀리 도망가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도망노예로 조만간 수배되겠지만... 혹시 또 아는가, 숯 만드는 마을에 숨어들어 제2의 인생이라는 걸 시작해볼 수도 있으니까... 타평이 구운 숯인지도 모르고 그걸로 밥을 짓게 될 지도 모른다.

『혹시 사친 행렬로 온 거 아닐까. 마침 그럴 때잖아.』
『사친이라... 헤에, 그렇군. 벌써 오월인가요?』
『넌 어떻게 생겨먹어서 세월 가는 것도 모르냐!』
『관심이 없으니까 그렇죠, 뭐.』
『그게 자랑이니? 하여간 내 주변엔 왜 이런 칠푼이 같은 놈들만 꼬이는 거야.』
『암튼 사친이면 행렬에서 이탈했다가 변을 당한 거겠죠. 잘 됐네요, 서남문까지 데려다 주면 되겠네.』
『.......... 포박해서?』
이라벽치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귀신을 잡으라고 나라에서 녹봉을 내리는데 산속에서 하라는 짓은 안 하고 대신 어린애를 잡아 - 여론이 악화되고 맹비난이 쏟아질게 두려웠던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도 했다.
『그럼 거적으로 대충 모습을 가려서...』
『아예 시체 취급이냣?!』
『아니, 저한테 화를 내봤자... 저어, 자손?』
눈은 감았으되 잔뜩 긴장하여 귀를 세워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에 콧물만 훌쩍거렸다.

『서남문으로 던져.』
머리를 대충 털어낸 자손이 이번엔 벗어놓은 의주갑을 손보기 시작했다.
여전히 잔뜩 찌푸린 표정이었지만 익숙한 자세로 갑옷을 직접 손질하는 모습이 무인다웠다.
『아, 네. 서남문으로 보내라고요?』
『아니, 던지라고.』
『죄송합니다만 다시 한 번만 더 말씀해주시면 안 될까요? 지금 무어라 하셨는지요.』
『이 귀머거리야! 던지라 하였다. 녀석이 요물이라면 성문에 닿는 순간 주술의 영향으로 온 몸이 터져 죽는다. 이사실의 여덟 성문은 용신의 가호 아래 있어 저주받은 것들은 감히 통과를 할 수 없어.』
이라벽치가 울먹거렸다.
『요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니까요~!!』
『그래? 사람이었어? 그럼 잘 됐네. 안 죽을테니. 그러니 빨리 저놈을 끌고 내 눈 앞에서 사라져. 쉭쉭.』

황족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말씀 받들어 서남문에 도달한 이라벽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푹 내쉰 뒤, 왕래하는 인구가 그렇게나 많은 곳에서 모두의 눈총을 받아가며 밧줄로 칭칭 동여맨 내 몸뚱이를 성문 한 가운데로 집어 던졌다.

Posted by 미야

2015/05/11 20:41 2015/05/1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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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 거 아닌 작은 원인을 까닭으로 미래는 정해진 운명에서 이탈하고 새로운 장을 써내려간다.
원래대로라면 사내는 눈이 망가지고, 나는 크게 다쳤어야 했다. 그것이 정해진 줄거리였다.
그러나 작은 요소의 개입으로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간다.
신발 밑창으로 볼록 튀어 오른 조약돌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주룩 미끄러졌다. 하여 나뭇가지는 그의 눈꺼풀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눈가로 깊은 생채기를 냈다.
『으악! 내 눈!!』
지면을 똑바로 밟지 못한 탓에 찌르기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지 못 하고 빗나갔다.

뭐, 나름 좋은 점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나 역시 치명상을 입는 대신 어깨를 살짝 베이는 걸로 끝났다는 거다. 사선으로 잘려나간 옷 틈새로 빠르게 붉은 물이 베어나왔지만 피부 아래 근육까지 칼날이 닿은 건 아니어서 적절한 조처만 취한다면 출혈 역시 곧 멈출 터였다.
그러나 바로 그러했기에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나는 더 이상 상대를 공격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익숙하지 않은 산을 타며 체력을 잔뜩 소모한데다 방금 전의 일격에 모든 걸 쏟아 부은 탓에 말 그대로 먼지와 재만 남은 상태였다. 네 발로 기어다니는 짐승이 두 다리로 선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얼어붙은 건 바로 그 때문이었고, 누군가 옆에서 훅 하고 입김만 불어도 그대로 쓰러질 참이었다. 신물이 올라와 구토감이 느껴졌음에도 그래서 마음 놓고 기침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다.

다행이라면 타평은 이런 내 사정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
그는 허겁지겁 뒷걸음질 쳐서 나와의 거리를 벌리더니 칼로 허공 베기만 죽어라 했다. 아마도 하는 짓거리로 보아 공황상태인 듯했다. 이쪽에서 다시 도약하여 달려들면 어쩌나 겁을 집어 먹은게 분명했다. 마침내 내가 참지 못하고 콜록 기침을 터뜨리자 혼비백산했다. 지금 같아선 나 같은 어린애는 주먹질 한 방이면 단숨에 끝내버릴 수 있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다.

『요, 요망한 것!』
그가 어찌나 씩씩거리던지 콧구멍이 두 배는 커져 있었다.
『어,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리고는 터무니없는 비난을 퍼부어 내 머리꼭지를 돌게 만들었다.
『애를 잡아먹고 둔갑했구나! 이 사악한 요마 녀석!』
아니, 이보쇼. 그 무슨 실례되는 말을. 숨이 막혀 구역질을 느끼는 요마가 있음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런데 여기서의 문제는 타평만 그런 생각을 한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뜬금없이 고약스런 살기가 느껴진다 싶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살피러 와봤더니... 음.』
타평과 나, 두 사람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청년 장수의 존재를 깨닫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소스라치게 놀랐는데 하나는 전혀 인기척을 내지 않고도 사람이 그렇게나 가까이 접근했음에, 다른 하나는 그가 화려하게 칠해진 붉은색의 의주갑을 착용하고 있어서였다. 더하여 청년 장수의 어깨 보호대엔 구슬을 물고 있는 용의 머리 그림 세 개가 새겨져 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세 개씩이나 되었다.
「적룡군이다.」
어린아이의 울음도 뚝 그치게 한다는 위용은 과연 소문처럼 범상치 않은지라 타평은 듣기 민망한 끽 소리를 내며 거북목을 만들었다.

해를 등지고 선 채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매끄러운 턱을 쓰다듬던 청년 장수는 여전히 골몰히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했다.
『어느 쪽이 살인자고 어느 쪽이 요괴지... 보아하니 저쪽으로 시체도 한 구 굴러다니는 것 같고... 어디보자. 칼을 든 자는 이쪽이고...』
심드렁한 말투지만 어쩐지 무시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계속해서 이런 말도 했다.
『이거 귀찮군. 헷갈린다고 전부 죽여 버리면 잔소리를 들을 테고... 음, 생각 같아선 전부 죽이면 간단할 것 같은데... 까짓 것, 일단 저지르고 볼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타평은 파랗게 질려선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나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다보지 않았다. 가파른 부근에 이르러선 뛰어내렸다. 그만한 기울기와 높이면 발목을 접지를 것이 분명했음에도 펄쩍 뛰는 동작은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음, 저놈은 바지춤을 쥐고 달아나네.』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잡으러 갈 생각은 없어보였다.
대신 청년 장수는 노골적인 호기심 - 더하여 불쾌감을 얼굴에 드러내며 내 쪽을 주시했다.
『자, 그럼 너는 어떻게 할래?』
어쩌긴. 나도 달아나고 봐야지.
그렇게 눈빛으로 대꾸하고 등을 돌리던 찰나 후들거리던 오른쪽 무릎이 보란 듯이 꺾였다.
무릎이 꺾인 것뿐인데 청년 장수는 내 몸짓에 반응, 순간이동의 마법을 부려 - 움직임이 너무 빨라 순간이동이라고 밖엔 설명이 되지 않았다 - 땅바닥에 코를 박지 않게끔 친절하게 날 부축해 줬... 개뿔, 정정한다. 한손만 사용하여 장사의 힘으로 내 멱살을 힘껏 잡아챘다.
『후욱!』
시야가 억지로 반 바퀴 돌자 긴장으로 인해 가뜩이나 좋지 않던 속이 더 나빠졌다. 게다가 허공으로 발이 들린 채 흔들리기까지 하여 울렁거림은 곱절이 되었다. 목 졸림에 더하여 현기증까지 일자 의식이 빠져나가려 했다. 안 좋다. 여기서 기절하면 적룡군의 청년 장수는 그대로 내 목을 부러뜨릴 것이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 가운데 주변은 이내 소란스럽게 변했다. 한 명이 아니다. 여러 명이 한꺼번에 나타나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정신이 흐릿한 관계로 그들이 말하는 내용을 제대로 된 문장으로 인식할 수는 없었지만 그 어조는 분명해서 청년 장수더러 당장 하던 짓을 멈추라며 야단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내 귀를 자극한 건 특정 인물의 울부짖음이었다.
『무무무무무무, 무슨 짓입니까!』
『요괴를 붙잡았다, 이라벽치.』
『어딜 봐서! 그냥 어린애잖아욧!』
『하지만 네가 그랬잖아. 가고한에 어린애로 변신하는 요괴가 나온다고.』
『그런게 있기는 있죠. 하지만 그건 머리가 나빠서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지 못해요. 둔갑을 해도 속옷을 머리에 쓰고 다닌다고요! 아이고, 그러니 제발 그만 하십쇼. 그러다 죽겠어요!』
말리는 손이 가세되니 공중에서 내 몸뚱이는 더욱 흔들렸다.
『어허! 잘 보거라, 이라벽치. 네가 사전에 알려줬던 그대로 이것 또한 옷을 제대로 입지 않았어.』
『뭘요. 제가 보기엔 바지와 윗도리를 잘 입었는데요.』
『이라벽치 네 녀석은 여전히 관찰력이 꽝이군. 눈 커다랗게 뜨고 자세히 봐라. 허리띠를 허리에 묶지 않고 엉뚱하게 발목에 묶었잖아.』
『에... 지금 보니 분명 허리띠가 맞기는 합니다만...』
『그러니 변신귀가 분명하겠지.』
『에, 에엣?! 그 정도의 사소한 걸 갖고 변신귀라고 단정짓는 건가요?! 이 아이, 상처를 입고 피도 흘리고 있는데... 험한 일 당한 가엾은 아이면 어쩌려고... 제 눈에는 영락없는 사람으로 보입니다만.』
『거 참. 요괴가 맞다니까 그러네.』
인상을 찌푸린 청년 장수가 멱살을 잡은 팔에 힘을 더 주어 내 몸뚱아리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빨리 죽이고 싶으니 어서 둔갑을 풀어라, 풀어라 그렇게도 말했다.
제발 그만해. 이제 한계다.
『웨에에엑!』
날 에워싼 모두의 눈이 삽시간에 동그래졌다.
『......』
『......』
쥐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이제 모두의 시선은 토사물을 몽땅 뒤집어 쓴 청년 장수에게로 집중되었다.

Posted by 미야

2015/05/10 12:22 2015/05/10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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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비밀방문자 2015/05/11 02:09 # M/D Reply Permalink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1. 미야 2015/05/11 11:21 # M/D Permalink

      댓글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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