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 of interest (7)

「10년만 더 젊었으면...」
무심코 거기까지 생각하고 리스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게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정말로 죽어버릴 작정이었다. 술을 마셨고, 그것도 매우 심하게 마셨고, 잠을 자지 못했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심신이 망가져가는 상황에서 높은 곳에서의 투신을 고려하거나 질주하는 트럭 앞으로 몸을 던지는 계획을 세우곤 했다. 더 이상의 미련은 없어 - 임종을 앞둔 노인네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꿈뻑거리며 재활용 종이박스로 세운 길거리 임시 텐트에 몸을 눕히곤 했다. 그러면서 소원을 빌었다. 죽고 싶다, 빨리 죽고 싶다, 하루에 10년씩 시간이 흐르면 일주일 뒤엔 해골만 남을 터이니 누군가 태엽을 빨리 감아 날 끝장을 내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지금은 약해진 체력을 원망하며 나이를 거꾸로 먹는 방법은 어디 없나 이러고 있으니 사람은 참으로 간사하다.

《리스 씨?》
『...타겟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근처에서 대기 중입니다.』
무선 통신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핀치의 목소리에 퍼득 정신을 차리고 망원렌즈 조작에 다시 집중했다. 오랜 시간 계속된 잠복 탓에 팔이며 다리며 안 아픈 곳이 없었으나 그와 교대를 해줄 다른 인원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집중력을 잃는 일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리고 13시간 내내 식사도 못하고 가랑비에 쫄딱 젖어가며 상대를 미행하는 건 악마 같은 모래 폭풍을 견뎌내며 시가전에 임했던 군 복무 시절과 비교하면 그나마 양반이라고 할 수 있었고...
『엣취!』
높은 장소에서 머리를 조준하고 있는 저격병의 존재 유무보다 혹시 감기에 걸린 건 아닌가를 신경 써야 한다니, 이 얼마나 나태하고 늘어진 팔자인가.

이번 번호의 주인은 기간제로 계약한 학교 선생님이었다.
나이는 마흔 일곱으로 미혼, 결혼 경력 없음. 이름은 조나단 버터워스, 보스턴 출신이고 가족으로는 결혼해서 LA로 이주한 누이 한 명이 있다. 전공은 영문학,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했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시를 썼다. 1989년도부터 1992년에 걸쳐 쉴라 미러라는 여성 가명으로 통속소설 시리즈물을 다섯 편 썼다. 이쪽은 의외로 선전했는데 화성에서 온 미래 경찰과 섹시한 여대생 콤비의 활략을 그린 SF 액션물이라고 한다. 궁금한 마음에 리스는 핀치에게 읽어본 적 있느냐 물어보았다. 그러자 이도저도 아닌 김 빠진 콧소리만 돌아왔다. 그런 일반적 평가를 작가도 인식했는지 1992년 이후로는 소설을 쓰지 않았다.

《부모로 받은 유산이 제법 됩니다, 미스터 리스.》
양친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보험금과는 별도로 원래 양친이 중소규모 사업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상속받은 재산 외에도 25만 달러의 신탁예금이 있습니다. 본인이 꾸준히 노력을 해야 하겠지만 당장은 재정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을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치만... 허, 씀씀이가 크네요. 이번 달에도 거의 1만 달러를 인출했어요. 의무화된 CTR(현금거래보고)을 피하려고 뒷자리가 좀 빠졌지만요.》
계속되는 핀치의 설명에 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트라도 대여했답니까? 선생 주변에서 요트 같은 사치품은 못봤는데요.』
《협박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 미스터 리스. 이런 식의 출금 기록이 1998년부터 여럿 됩니다. 문제는... 비정기적 패턴을 보인다는 거죠. 2002년에서 2004년까지는 단 한 번도 거액 인출을 하지 않았거든요. 반면 2008년에는 두 번 거액 출금이 있었고요.》
『협박범이 3년이나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아요, 핀치.』
《글쎄요. 다른 사람을 협박해 돈을 받아본 적이 없어 모르겠습니다.》
그는 농담을 농담 같게 안 하는 습성이 있다. 덕분에 리스는 웃으면 될 포인트를 놓쳐버렸다.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닐 거예요. 혹시 누이 클레이에게 돈을 준 건 아닌가요?』
답변은 번개처럼 빠르게 돌아왔다.
《여동생 클레이의 계좌를 보고 있는데요, 이쪽엔 눈에 띄는 거액 입금 내역이 없어요.》
『그럼 선생이 그 돈으로 거액의 쇼핑을 즐겼다는 건가요. 아니면 도박?』
《그건 리스 씨가 알아내야 할 부분으로 보입니다... 흠.》

희미하게 이어진 하품 소리에 시계를 흘깃 보았다. 자정을 넘어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핀치는 졸린 모양이었다. 평소 커피에 의지하지 않는 만큼 졸음을 이겨내는 무기는「의지력」하나밖에 없을 터, 리스는 슬슬 핀치를 쉬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제가 지키고 있을 겁니다. 핀치는 가서 눈을 붙이고 오세요.』
《괜찮습니다. 아직 조사할게 남았습니다.》
리스는 안경을 벗고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덕분의 핀치의 눈은 늘 빨갛다. 지금도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닐 거다.
『무리를 하면 내일 움직이는데 지장이 생깁니다.』
《지금 신용카드 사용 내역을 보고 있습니다.》
『착하죠? 말 들어요... 핀치.』
피곤함 탓에 하품이 나오는 사정은 이쪽도 비슷했으나 리스는 고집을 부렸다.
『가서 쉬십시오.』

조나단 버터워스는 에너자이저였다. 직장인 학교에서 일찌감치 나와 집으로 가지 않고 이곳저곳을 계속 방문하며 움직였다. 가게 다섯 곳을 들러 친구가 아님이 분명한 사람을 여럿 만났고, 저녁에는 술집에 가서 1시간동안 앉아 있었다. 동석한 사람은 없었고 대화를 나눈 사람도 없었다. 상당히... 이상하다. 장소와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제각각 움직이는데 지금까지 접촉한 사람이 여자가 다섯 명, 남자가 두 명... 그들 모두 전화는 하지 않는다. 신발가게 앞에서 머리를 뒤로 묶은 여자가 그에게 쪽지를 건넸다. 버터워스는 읽지 않고 소매춤에 메모를 넣었다. 인사도 안 하고 여자가 총총 걸음으로 사라졌다. 이제 다시 버터워스는 방향을 돌려 세 블록 떨어진 곳의 4층 높이의 사무실 건물로 향했고, 정체 모를 서류봉투 하나를 들고는 두 시간 뒤에는 차를 몰고 다운타운 밖으로...
『그만 집으로 가라. 제발.』
따라다니던 리스가 체력 부족을 호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리스 씨? 버터워스가 만났다던 사람들 중 전송해준 사진으로 두 명의 신원을 확인했습니다.》
그의 고용주 또한 황소 고집이었다.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아 두 개의 자판을 동시에 두드리고 있었다.
《앨런 싱어... 마흔 두 살. 미들 이스트 고등학교에서 심리 상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결혼해서 자녀가 한 명 있네요. 언젠가 같이 일했던 적이 있는 동료인 걸까요? 마이클 슬러셔... 이쪽은 제빵 기술자... 학교에 납품하는 빵을 만드는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실한 납세자로 평범한 시민입니다. 일단 앨런 싱어의 음성 사서함을 해킹해 보겠습니다만... 솔직히 그들 모두가 어떤 관계로 묶여 있는지 추측하기가 어렵군요.》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으로만 판단해선 안된다.
앨런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스치듯 지나가는 사내에게 비밀스럽게 쪽지를 건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었다. 리스는 그게 썩 좋지 않은 종류라고 직감했다.
『버터워스가 차에 올라타 이동합니다. 따라가겠습니다.』
리스는 서둘러 어두운 골목에서 나와 세워두었던 자동차로 뛰어갔다.
『긴 밤이 될 것 같습니다, 핀치.』
《조심하세요.》
졸음을 억지로 삼킨 핀치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Posted by 미야

2012/05/14 13:25 2012/05/14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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