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사내다.
외모도 출중하겠다, 실력도 좋겠다, 마음씨 참하겠다, 왕실에서 진작에 눈독을 들여 기사단에 들어와 일해볼 생각 없느냐 넌지시 스카웃 제시도 한 모양이다.「그러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면 팔자가 확 달라질 판이었다. 그러나 가우리란 자는 이미 정해진 자리가 있다며 그 좋은 제안을 극구 사절했다.
제가 원하는 건요, 아저씨. 끼마다 배부르게 먹고, 배꼽 친구가 손닿는 곳에 있고, 심심할 적마다 마실 수 있는 몇 통의 사과술만 있으면 되어요.
졸지에 아.저.씨.가 되어버린 왕실 대리인은 당혹감에 멀쩡한 콧수염만 꼬았다.

『호오, 그 정해진 자리라는 곳이 제피리아였나?』
『제피리아였네. 남작이 매 식사마다 배불리 먹게 해주겠다고 약조한 모양이지, 뭐.』
지난 저녁 성찬을 떠올리며 무심코 군침을 삼키고 보는 죠르프였다.
『그리고 배꼽 친구랑 같이 으라차차?』
『듣기로는.』
『으음. 신분상승의 기회조차 무시할만큼 소중하다는 배꼽 친구들이라는 것이... 저치들이야?』
뒤쪽을 향해 가만히 턱짓했다.

가우리와 같이 따라나선 두 기사의 이름은 정글스와 부르무이다.
연령대는 얼핏 보기엔 가우리보다는 약간 위로 보인다. 하지만 신상명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으니 정말로 어떠한가에 대해선 판단이 불가능하다. 혹시 또 아는가. 겉으로만 늙어보이는 것일 수도. 아니면 구렁이와 사촌이라 100살이 넘었을 수도 있다.
웨이브진 천연파마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정글스는 신경질적인 얼굴을 하고 있다. 그냥 봐선 화가 단단히 난 사람처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성격 탓이 아니라 단순히 엉덩이가 아파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세히 보니 말을 탄 자세가 대단히 어설프다. 그리고 누가 무어라 질문하면 재빨리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친절하게 말대꾸를 해주는데 돌아서면 마누라와 대판 싸우고 온 상태로 원상복구. 찡그린 눈썹을 풀면 썩 괜찮은 사람으로 보인다.
그 옆으로 껌처럼 딱 붙어가는 부르무는 매몰차다는 느낌이다. 진한 초컬릿 빛깔의 망토로 몸을 칭칭 감싸고 있는데다가 후드 아래로 드러난 차가운 얼굴 덕분에 근접이 힘들다. 덕분에 지금껏 부르무에게 말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르무 본인도 이제껏 입에 담은 말이라는 건「어이, 거기 나뭇가지 조심」이 전부다. 그게 아니었다면 혹시 벙어리인가 의심했을 것이다.
이런 타입은 곤란하다 - 죠르프는 은밀히 걱정했다. 신중하고 무거운 입... 백주대낮에 대로를 질주하는 기사라기 보다는 영주로부터 내려진 은밀한 명령을 수행하는 첩자라는 느낌이 있다. 왜 있잖는가. 각도 깊은 지붕을 맨발로 달려가고, 던지는 나이프마다 백발백중에다가, 달 없는 야밤에 강물 속으로 잠수해서 사라지는, 그런 사나이.

『신경쓰이나.』
『물론일세.』
당연한 거 아니냐며 죠르프는 배꼽 친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야밤에 표창이 슝슝 날아다니는 건 질색이란 말일세.』
하지만 정작 죠르프의 걱정스런 눈길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자! 부르무에서부터 시선을 약간만 돌려보자. 오른쪽에서 약간만 더. 그러면 보일 것이다.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 - 아니, 소녀가 말고삐를 죽자 살자 쥐고 있는게 말이다.

입으로는 괜찮다고 해도 실제로는 많이 지쳤다. 근성 하나로 기절하려는 걸 억지로 참고 있다는 걸 전투의 프로는 한 눈에 알아차렸다. 경련을 일으키는 팔뚝, 힘줄이 돋아난 이마, 핏기 가신 뺨은「당장 죽을 거 같어. 살려줘~!」를 외치고 있었다.

로머디스는 긍정했다.
『문제군.』
『문제지.』
다만 여기서의 문제는... 죽을 똥을 싸는 그녀가 아니다.
옆에서 조금만 더~! 응원의 구호를 외치는 금발의 청년 기사가 바로 문제다.

아가씨 옆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흡사 동생에게 승마를 가르치는 착한 형님 같다. 움푹 파인 도랑이 나타나면 조심하라고 미리 경고를 해준다. 그리고 안전하게 잘 뛰어넘는지 일일이 확인한다. 때때로 마실 물도 권한다. 달리는 속도가 늦춰질 적엔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며 기운 내라고 꼭 어깨를 친다.
그럴 적마다...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의 눈이 야광충처럼 번들거린다는 것이 공포스럽다.

지가 뭐라고 눈에 힘주는 건데?!
주인된 자의 감정 상태가「구질구질함」정도가 아니라「거지발싸개 같음」이라는 걸 깨닫자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이거, 무지 불안하다. 죠르프와 로머디스는 서로 눈짓했다. 보름 전쯤인가, 스토커처럼 따라붙던 엘리스 양이 집안 거실에다 자기 초상화를 무단으로 붙여놓고 도망갔을 때보다 분위기가 더 살벌하다. 그림을 두짝으로 분질렀을 적엔 그런가보다 넘어가기라도 하지. 행여라도 사람을 무릎팍에 올려놓곤 둘로 분지를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뭣 땜시? 기사가 아가씨를 섬기는게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거야, 뭐야.
마침 가브리에프가 리나를 향해 물주머니를 내밀었다. 자기가 한모금 먼저 꼴깍 먹고 아가씨를 향해 물주머니를 건냈다. 아닌게 아니라 목이 말랐던 모양이다. 그녀는 반색하며 주머니를 받아 뚜껑을 열었고, 이윽고 턱을 번쩍 들어 마음껏 원샷이라는 걸...

『기, 기다렷! 기다리십시오!』
그러니까 거기서 딴지를 거는 당신이 비정상이라니까요.
『누가 입을 대지 않은 새 물 주머니를 가지고 오십시오.』
그런게 있을 리 없잖아요.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오면 되지요!』
우길 걸 우겨요.
로머디스는 폭삭 늙어버렸다.
우리들 중에 어느 누가 번개처럼 무두질을 해서 즉석으로 가죽 물 주머니를 만들 수 있다는 겁니까요. 네? 차라리 호숫가로 내려가서 손바닥으로 물 바가지를 만들어 모두의 목을 축일 물을 길어오라고 하시지 그러슈.

죠르프가 휘익 휘파람을 불어 신호했다.
어쨌거나 핑계가 좋다. 쉬어가자.

가브리에프가 자연스럽게 리나의 말고삐를 잡았다. 달리던 말이 걸음을 멈췄다.
아, 지쳤다. 소녀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말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다리가 저려서 그런지 엉거주춤한 자세다. 시험삼아 몇 걸음 떼어보지만 게다리 걸음으로 겨우 세 걸음 걷고는 좌절 삼태기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바깥으로 굽혀진 무릎이 원 위치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데 똑바로 걷는다는 건 애시당초 무리다. 벌레에게 고추를 물린 어린애처럼 두 다리를 옆으로 벌리고 엉거주춤 움직이는 것밖엔 할 수 없다.

그런 리나를 보고 기사들 중 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자기들도 그런 꼬락서니로밖엔 걸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워낙에 그 모습이 웃기니까 웃고 봤다.
이것들이. 웃었어?
말에서 내려오지 않은 채 후작이 으르렁댔다.
로머디스가 눈알을 굴리며 어이 없어 했다.
그거 참. 답지 않은 레이디 보호 정신입니다요. 언제는 자기가 제일 먼저 웃었을 거면서.

이런 정신 사나운 분위기 속에서 리나 인버스가 서글픈 표정으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웃기니까 웃으라고 해요. 나도 웃긴데 뭐.』
『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리나양. 무엇이 웃기단 말입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보여준 승마 솜씨에 관하여 마음껏 찬사를 보내고 싶은...』
『위로의 말씀은 그만하시면 됩니다, 후작님. 내가 지금 어떤 꼬락서니인지는 제가 더 잘 알고 있거든요. 으아, 정말 한심하네. 운동 부족이었나봐. 엉덩이부터 안 아픈 곳이 없네.』

여자가 대놓고「엉덩이」운운해도 괜찮은 것인지는 나중으로 미루자. 간단한 맨손 체조를 시작하면서 그녀가 뒤로 엉덩이를 쑥 뺐다. 팔을 앞으로 길게 내밀고 옆구리 구부리기, 허리 뒤로 당기기... 읏샤읏샤 기합을 넣어가며 움직였다. 마무리로는 제자리에서 깡총깡총 뛰기까지.
더 놀라운 건 제피리아에서 따라온 일행 모두가 그런 그녀의 동작을 순서에 맞춰 따라했다는 거다.
제피리아에선 모두가 이런 체조를 하고 있나?
다른 건 몰라도 음침한 사내 부르무가 깡총뛰기를 따라하는 광경은 엽기 그 자체였다.
『결린 몸을 풀어주는 체조입니다. 관절이나 근육에 좋아요.』
『정말인가요? 아가씨.』
『그렇고 말고요. 그레이워즈 후작님도 긍정하실 걸요. 그렇죠? 몸이 편해지죠?』
이런. 저편에서 후작이 체면 불구하고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그리고 신호에 맞춰 모두가 뒤로 엉덩이를 뒤로 쭈욱...

어쨌거나 햇님의 기울어진 각도를 봐선 사람에게도 슬슬 영양보충이 필요할 때다. 말들을 쉬게하고 각자 알아서 자리를 펼쳤다. 슬프게도 솥을 걸어놓고 본격적으로 요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육포와 말린 빵, 약간의 건포도와 과일로 주린 배를 달래야 한다.
다른 건 몰라도 배가 고프다 그거 하나는 계속 불평하던 리나 인버스는 맹물에 풍덩 담가놓은 빵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다. 물에 불리기 전엔 이빨도 안 박히는 빵이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봐도 버터 냄새는커녕 밀가루라는 느낌도 안 난다. 흡사 돌덩이 같다.
『이, 이걸 먹으라고...』
하지만 허허벌판에서 제대로 된 식사가 나오길 기대하는 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길 기다리는 것과 비슷하다. 익히지 않은 살코기나 수분이 많은 부드러운 음식은 풀밭으로부터 올라오는 뜨거운 복사열에 금방 상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말린 빵이야말로 야외 생활에서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문명의 만찬인 셈이다.

『복통으로 죽을 것인가, 아님 맛이 없어 죽을 것인가의 선택인 거지.』
『그럼 기왕 죽는 거, 복통으로 죽을래.』
『오냐, 네 소원대로 그럼 내일 아침은 썩은 스프로 하지.』
뒤집어질 일 또 하나.
제피리아는 아주 이상한 곳임이 분명하다. 기사가 영주의 딸에게 반말을 찍찍 한다.
그리고 그 영주의 딸도 기사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반말을 막 한다.
정글스는 그게 뭐 대수냐며 물을 마셨다. 리나 인버스 역시 뭐가 잘못되었느냐며 물을 마셨다.
그들 뒤에서 가우리 가브리에프는 맹렬하게 빵을 뜯어먹었다.

Posted by 미야

2008/03/29 10:36 2008/03/2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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