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냘프게 생긴 손가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걸 멈추고 손을 도로 소매춤 속에 감췄다.
『어쨌든 나와는 상관이 없지. 어디 보자. 그럼 여기서 북쪽이...』
그리고 잠시 쓰게 웃었다.

방향 감각 제로.
미치고 펄쩍 뛸 일이다. 지도라는 훌륭한 문명의 이기도 절대 도움이 되어주질 않는다. 두서너 번씩 확인을 하고 계곡을 따라 걸음을 했건만 결론은「왔던 길로 다시 돌아가시오」다.
마그너스는 고민했다. 글자를 똑바로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지도를 들었을 적에 그림의 윗 부분은 관행상 북쪽이 맞을 것이다. 더하여 지금 그가 가고자 하는 사일라그는 지도의 맨 윗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마그너스의 지팡이는 북쪽으로 향해야 한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 북쪽으로만 가면 된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그의 지팡이는 사흘 내내 남쪽을 향해 있었다. 왜 그럴까.

『사일라그로 가려면 계곡을 따라 내려가셔야지요.』
주문받은 냉동 사과를 배달하던 장사꾼이 어쩔 줄 몰라하던 그를 향해 참견해왔다. 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이다. 하긴, 일직선 도로를 오르락내리락 왕복하는 것만 벌써 두 시간째다.
 
『계곡으로 내려가라니. 난 북쪽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계곡을 따라 내려가시라니까요. 이쪽 방향으로 가셔야 할 거요.』
『내려가?』
『내려가는 겁니다.』
『북쪽이니까 올라가야 맞지 않나?』
『참 답답한 분이네. 그거랑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과는 얘기가 서로 다르잖습니까.』
그러면서 사과 장수는 무겁게 혀를 끌끌 찼다.

맞는 소리인 것 같았다. 그래서 마그너스는 사과 장수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그럼 이쪽이다.
『틀려, 틀리다니까! 이곳 레고지엔은 우물을 가운데 두고 윗 마을과 아랫 마을로 나눠집니다. 윗 마을로 가야 계곡으로 갈 수 있다고요. 여긴 아랫 마을입니다. 계곡으로 나갈 수 있게 뚫린 길이 없어요.』
『아까는 내려가라고 했지 않았나.』
『계곡을 따라 내려가라고 했지, 누가 마을 아래로 내려가라고 했소? 그냥 윗 마을로 올라가세요, 나으리.』
『올라가는 건가, 내려가는 건가. 아님 나 더러 지금 죽으라는 건가.』
『진짜 답답하네. 윗 마을로 올라가 계곡을 따라 내려가시라고요!』
이런 식이라면 사일라그까지 천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마그너스는 여전히 우물쭈물했다.
『올라가라고?』
『윗 마을까지만 올라가고 다음엔 내려가는 겁니다. 어휴~!』
넌 바보냐 - 사과 장수의 탄식이 목에 걸렸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설명해도 여전히 잘 모르겠다. 레-이위는 꽤나 자신 없는 눈치로 은화 닷푼을 주고 구입한 지도를 한숨과 같이 둘둘 말아 도로 품에 넣었다. 봇짐을 진 사과 장수가 불안한 시선을 힐끔거렸다. 저놈의 지도는 장식품이 맞다. 또다시 엉뚱한 방향으로 트는 걸 봐선 단순히 지도 탓만은 아닌 것도 같다만. 하여 고함은 또다시 터져나왔다.

『이곳이 계곡으로 보여?』
야단맞는 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싫은 법이다. 레-이위 마그너스는 무작정 고개부터 떨궜다.
『당신 눈은 해태야? 도중에서 안 꺾었어? 언덕을 향해 무작정 올라왔다고?』
기념비적인 산적 데뷔를 위해 언덕에 대기하고 선 사내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사일라그? 완전히 반대 방향이다. 그것도 한참 반대다. 어디로 가면 좋을지 몰라 헤매는 것도 정도껏 하셔야지. 마이애미로 가겠다며 캐나다 국경 방향을 향해 이틀 내내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밟아댄 꼬락서니... 물론 이 세계엔 마이애미도, 캐나다도 없다.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거기다 지도는 거꾸로 들고. 솔직히 불어. 길을 잃어버렸다는 건 순전히 공갈이지? 당신, 그냥 설교가 하고 싶어져 아까 술집에서부터 날 따라온 거 아냐. 내 말이 맞지? 오지랖 넓으신 사제 지망생 나으리님.』
레-이위는 화들짝 놀랐다. 이런 오해는 딱 질색이다.
『절대로 아니야! 그쪽의 뒤를 밟아온게 아니네! 내가 뭐 하러.』
『말은 잘 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왜 땀을 질질 흘려.』
『언덕을 30분이나 걸어서 올라왔네. 땀이 나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지.』
아니, 아니. 지금 땀 흘린 것이 대수냐. 마그너스는「걍 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지도로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거꾸로? 거꾸로?! 지도가 거꾸로 되어 있어?! 정말로 땀이 나는 것 같다. 그것도 식은땀이다.

『어이? 지금에 와서 지도를 보는 척해도 늦었어.』
웨더라는 이름의 친구는 버럭 화냈다.
『사일라그로 간다면서 이 언덕으로 올라왔다는 거짓말을 누가 고스란히 믿어줄 거 같냐!』
화만 냈던가, 펄펄 뛰었다.
『하여간 신을 섬기는 족속들이라니!』

『오해라니까. 거기다 나는 특별히 신을 모시거나 하고 있지 않네. 이 옷차림 때문에 오해를 하고 있는 듯한데 이건 순전히 보온성과 통기성을 강조한...』
『시끄럿, 사제 지망생! 내가 한 두 번 당해봤는지 아나. 안 봐도 뻔해. 산적질은 나쁘다느니, 회개하고 착한 사람이 되라느니, 신을 믿고 천국 가라느니 떠들면서 어떻게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보겠지. 내 심정이 지금 어떤지 알기나 해?! 불명예를 안은 검사의 기분이 어떤지 눈꼽만큼도 모르면서!』
『모르이. 알고 싶지도 않고. 그러니까 안녕. 잘 있으시게. 나는 그만 가 보겠...』
『어딜 가!』
『왜 이러시나. 잡지 마시게. 나는 갈 길이 먼 사람이라네.』
『멀든 가깝든, 일단은 기다려!』
『어허라, 더 얘기할 것이 뭐가 있겠나. 그쪽은 산적질을 계속 하시게. 방해할 생각은 없다네.』
『당신 바보야? 사일라그는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
『이쪽!』

이렇게 되면 저주받은 거라고밖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레-이위 마그너스는 하얗게 질려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젠장, 나에게 동서남북의 개념에 대해 다시 설명해달라. 아니면 모든 길은 사일라그로 통한다고 말해주던가.
 
『와. 진짜 바보네.』
웨더 크라우의 눈이 땡그래졌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이제까지 들어본 역대 거짓말 중에서 가장 창의적인 거였어. 사실 나는 산적 데뷔를 하겠다는 댁이 걱정되어 따라온 것이 아니라 끝장의 방향치인 탓에 길을 잃어버린 거랍니다 - 이게 사실이라면 개가 웃을 노릇이지.』
『멍멍. 개가 웃었네.』
『.......... 우엑, 정말인 거야?』
『북쪽으로 가려면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었나?』
『방향은 높이완 상관 없지.』
『위도는 높이의 문제가 맞네.』
『그치만 산을 올라가고 내려가는 건 위도가 아니라 고도의 문제지. 그리고 이거 아슈? 사제 지망생 나으리님. 난 지금 산적 데뷔 중이라는 거.』

청년은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검을 툭툭 건드리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레-이위 마그너스도 정색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그거 싫은데. 설마... 내가 처음인 건가?』
『처음이다.』
『믿기질 않는군. 그쪽이 산적 데뷔하러 나간지 시간이 제법 흘렀을 터인데... 그동안 이 길로 단 한 명도 안 지나갔다고?』
『날씨가 흐려서 그런가, 한 명도 안 지나갔다.』
『맙소사. 그럼 내가 산적 데뷔야?』
『바로 그렇다. 자! 갖고 있는 거 다 꺼내놔!』

Posted by 미야

2009/03/24 13:09 2009/03/24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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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엘리바스 2009/03/24 23:40 # M/D Reply Permalink

    오래간만에 슬레이어즈이군요~~~꺄아~~~

    벗뜨 리나와 제르가디스가 나오질 않아용..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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