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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demption 09

※ 현실 도피로 팬픽을 쓰는 여자. 내가 생각해도 징그럽다... 기진맥진하여 자러 갑니다. 나츠메 우인장 2권에서 수분 부족으로 길바닥에 넙죽 쓰러진 갓파가 나오더군요. 그게 어찌나 제 모습 그대로던지 부르르 떨렸습니다. 여하간 제멋대로 망상, 우르르 컁컁,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글의 내용은 영 아니지만 1월 24일, 딘 윈체스터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나이가 나이인만큼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은 전화요금 고지서처럼 밀리는 일 없이 착착 도착하였다. 각종 우편물속에 섞인 부고장의 숫자는 최소한 슈퍼마켓 할인 쿠폰만큼은 되었다. 슬픔이 반복되면 감정은 무뎌진다. 그래서 베버리는 친절하게 자신을 환영해주던 노부인의 사망 소식에 눈가를 촉촉이 적시는 대신,「내 순서까지는 그러면 얼마나 남았을까」에 대하여 차분히 생각했다. 관절염과 혈압 문제가 좀 있어도 의사는 사는데 지장은 전혀 없을 거라 장담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최소 10년은 남에게 민폐 안 끼치고 이대로... 후우.
남의 죽음으로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인 존재다.
『이런 소식을 알리게 되어 유감입니다.』
입에 발린 말을 하는 청년을 향해 손사레를 치고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두 사람 중 까까머리 쪽이 간단하게 고맙다고 인사하며 신발 상자처럼 생긴 종이 박스를 챙겼다.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 상자였다. 내용물이 뭔지는 모르겠다만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동작에 달각 소리를 냈다. 그것이 꼭 깨지지 않도록 신문지로 겹겹이 싼 유리컵의 느낌인지라 가까스로 머릿속에서 지워낸「외판원」의 가능성이 또다시 고개를 슬그머니 처들었다.

『실례하겠습니다.』
중산층이 집결하여 살고 있는 마운틴 로드의 밟고 미래지향적인 동네 분위기와는 다르게 베버리 홀리의 집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싹 메말라 있는, 이것이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을 적에 샘이 느낀 첫 번째 감상이었다. 그렇다고 보풀이 일어난 낡은 소파나 고물 텔레비전이 시선을 끌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36인치 텔레비전에는 고가의 최신형 스테레오 장치까지 달려 있었다. 혼자서 DVD를 보는 것이 취미인지 거실장으로「구름 위의 산책」,「타이타닉」같은 영화 타이틀이 보였다. 고급 재질의 레이스 커튼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은퇴 후 연금으로 살아가는 60대 노부인의 살림은 그만하면 넉넉한 편이었다.
반면에 액자에 넣어진 사진이나 수가 놓여진 쿠션, 그림 같은 세심한 악세서리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것이 샘의 신경을 건드렸다. 자랑스런 자식들과 귀여운 손주들의 사진을 집안에 하나 가득 진열해두는 것이 일반적인 노인들의 습성이다. 사진들의 쓰나미는 벽을 점령한 뒤에 테이블 위까지 도달하기 마련이다. 어디로 시선을 돌려도 아이들이《치즈~♡》를 외치는 소리로 도배되어 있다.
그런데 베버리의 집은 그렇지 않았다. 사진이 아예 없었다.

얼굴 쳐다보기가 끔찍스러울 정도로 가족을 싫어했던 걸까.
그럴 것 같지 않다는게 수수께끼였다.
한 달에 한번씩 요양원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윤기 잃은 머리를 빗겨주었던 딸이다. 토마스 스테이플러가 자신의 보호자로 지목했던, 아울러 중요한 성경책을 포함한 유품을 모두 정리하여 넘긴 딸이다. 애정이 없었다면 정기적인 요양원 방문은 사실상 쉽지 않다.
원래 가족에 대한 감정은 쉽게 이거다 하고 단정지을 수 없는 거라고 해도 이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상황의 조합은 샘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가족을 사랑했을까, 사랑하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어쨌든 더 이상 두리번거리는 건 실례다. 계속 그랬다간 사전 조사를 나온 강도처럼 인식될 것이다.
베버리의 안내를 받아 의자에 앉자마자 샘은 미리 준비했던 그대로《저희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입니다》문구를 반복하여 암송했다. 준비한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놓은 딘도 통탄의 표정을 가장했다. 그게 어찌나 감쪽 같았던지 베버리는 이 두 청년이 새로 입사한 직장에서 무척이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구나 짐작하고 덩달아 긴장했다.
순간의 판단 미스로 사업을 송두리째 말아먹은 자식놈 생각도 났겠다 목소리가 약간은 부드러워졌다.
『자, 말해보시구려. 무슨 실수였는데 그려슈.』
『나탈리 윙 여사의 유품을 유족에게 전달했는데 그중의 일부가 당사자의 것이 아니라고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어이쿠.』
베버리가 눈을 뒤집으며 비난하는 표정을 지었다. 비유하자면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유골을 엉뚱한 매장지로 보낸 셈이다. 이래선 대형 사고다.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사람이 하는 일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은 절대로 꺼낼 수 없다. 베버리는 두 청년들의 안색이 일주일동안 죽사발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창백할 법도 하다고 인정했다. 직장에서 맨몸으로 안 쫓겨난게 오히려 이상하다. 아니면 민간 소송 전문 변호사가 희생양이 필요하다며 그들의 퇴직 결정을 방해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사람 살려!》다.

까까머리 말고 고릴라 덩치 쪽이 눈치를 살살 살펴가며 입을 열었다.
어딘지 모르게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구겨진 와이셔츠가 어쩐지 그가 처한 상황을 극적으로 대변해주는 것 같아 베버리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래서 혹시나 다른 분의 유품과 혼동이 된 것은 아닌지를 일일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스테이플러씨가 돌아가신 것이 2005년 9월이니까 시기적으로는 맞지 않습니다만, 요양원에서 바로 이웃 호실에 머무셨으니 행여나 착오가 있었던 건 아닐까 염려가 되더군요.』
준비한 검정색의 파일철을 꺼낸 고릴라 덩치는 유족들에게 인계된 물건들의 목록으로 보이는 페이지의 낱장을 넘겨가며 자근자근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희는 스테이플러씨의 유품 목록을 미리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중에... 으음, 성경책이 있었지요?』
『있었지.』
『죄송하오나 잠시 보여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이것도 같이 봐주시고요.』
그러면서 사내는 밖에서 들고 온 종이 박스를 개봉했다.

상자 속에는 성경책과 여성용 돋보기 안경, 그리고 벽에 거는 십자가 장식패가 들어가 있었다.
베버리는 검은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리며 내용물이 뭔지 차분히 들여다 보았다.
큐빅 장식이 달린 안경은 한 눈에 봐도 아니니까 제외하도록 하고... 다른 건 몰라도 상자 속 성경책은 아버지의 유품과 매우 흡사하게 생겼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어떻게 보면 똑같은 것도 같다. 각국 서점에서 대량으로 팔려나가는 물건이다. 글자가 크고, 주석이 붙었고, 싸구려 금박으로 테두리 장식이 되어 있고...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물건이었다는 점에서「이것은 내 것, 요것은 네 것」이라는 개체 구분은 쉽지 않았다. 자신에게 닥친 일이 강 건너 불구경이 아님을 깨달은 베버리는 내심 당황했다.

『저희는 데보라 윙 여사의 성경책과 토마스 스테이플러씨의 성경책이 서로 뒤바뀐 것이 아닌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렵지 않다면 둘을 비교해 주시고, 문제가 없다면 이를 증빙하는 이 문서에 직접 싸인도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저어, 시설에 고인의 유품 전부를 이미 기증을 하셨다거나 어디다 버리신 건 아니지요?』
『물론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지.』
『다행이네요.』
뭐가 다행이냐! 눈에 띄게 가슴을 쓸어내리는 딘을 본 노부인의 안색이 노랗게 변색되었다.
차라리 안마기를 사달라고 애원하는게 더 낫겠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더듬었다. 장례식 절차를 끝내고 요양원 직원이 유품을 인계했던 날이 아버지의 유품 상자를 마지막으로 본 날이다. 한 시대가 종말로 치달았음을 인지한 그녀는 벽장 속에 물건을 그대로 처박아두고 만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 그걸 다시 꺼내려먼 대대적인 붙박이장 정리가 필요했다. 차곡차곡 쌓아올린 상자 전부를 뒤집어 엎어야 한다. 먼지는 휘날리고, 관절은 아파진다.
그게 싫어진 베버리는 꾀를 냈다.
『그래봤자 성경책이잖수. 그냥 맞다고 서명만 하도록 하죠. 펜을 이리로...』
잘 생긴 까까머리 쪽이 눈앞에서 재빨리 서류철을 치웠다. 그리고 근엄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이런 일은 대충 해선 안 됩니다.』

이런 젠장맞을. 눈앞에서 낙원을 박탈당한 베버리는 어색한 웃음을 팔고 있는 두 청년을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분노와 절망감으로 진작에 쪼그라든 유방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왕년에 자식 넷을 헤치운 솜씨는 아직도 건재했다. 마음에 들지 않다 싶자 곧바로 치고 나갔다.
『좋았어. 그럼 홀가분하게 팔아치워 이미 집에 없다고 치자고!』
『아이고, 홀리씨. 그러지 마시고 제발 우릴 도아주세요.』
『왜 내가 자네들을 도와야 하는데? 그 까닭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나에게 말해줄 수 있어?』
하나도 어렵지 않다. 딘은 샘에게 눈짓한 뒤,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가능합니다. 세 가지라고 하셨나요. 불쌍해 보였다, 불쌍해 보인다. 젊은 놈들이 직장에서 당장 잘리게 생겼으니 불쌍해서 이 일을 어쩌냐.』
『하아!』
그놈의 기름칠한 혓바닥을 인두로 지지면 딱 좋겠다. 할 말을 잃은 노부인의 표정으로 비웃음이 감돌았다. 더하여 자세한 설명이 불가능한 깊은 혐오감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둥실 떠올랐다.

『알았네! 내가 졌네, 젊은이. 찾아보도록 하지. 망할 성경책! 하여간 끝까지 말썽이군. 우리 아버지가 평생에 걸쳐 교회에 나간 적이 손가락에 꼽는다는 걸 알고는 있수? 심지어 우리들 자식들은 아버지가 무신론자냐 유신론자냐를 두고 싸웠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그놈의 성경책을 한시도 품에서 떼놓은 적이 없다는 것도 그럼 모르시겠구려. 어쩌다 식구들 중 누군가 그걸 만지기라도 하는 날엔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도 말이야.』
『모릅니다.』
『흥! 당연히 모르시겠지! 딸인 나도 모르는데 생판 남이 뭘 알겠어.』
그렇게 중얼거린 베버리는 생각지도 않은 팔다리 펴기 운동을 하기 위해 - 벽장에서 유품 상자를 내리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얌전히들 있으시게. 수상한 짓을 저지르면 빗자루로 때려줄테야!』
거실을 빠져나가기 전에 부인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는 것으로 형제들을 웃게 만들었다.

토마스 스테이플러는 자랑스런 2차대전 참전 용사이다.
역사가 그의 이름을 기억한다. 훈장도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을 다시 해석하자면 아버지나 남편으로선 꽝이었다는 얘기가 된다오. 미국이란 나라는 그를 존경했지만 나는 그를 결코 존경할 순 없었지.』
베버리는 내뱉듯이 그리 말하며 먼지가 소복히 쌓인 상자를 윈체스터 형제들 앞으로 내밀었다.
먼지 탓에 재채기를 여러번 해서 그런지 코가 빨갛다.
어쩐지 크게 당황한 듯한 두 청년들을 두고 베버리의 눈썹이 가늘어졌다.
『왜 그딴 식의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그러시나. 원래 존경과 사랑은 별개야. 둘은 같지 않아. 그런 것도 몰라?』
『아, 예...』
『그렇다고 우리 아버지가 자녀들을 학대했다거나, 부인을 때렸다는게 아니야. 그치만 말이지. 사람을 죽여본 자는 남을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용기를 잃어버려. 그게 상부의 명령 때문이었든 아니든, 사람을 헤쳤다는 기억이 긴밀한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데 훼방을 놓아버리거든. 덕분에 우리 아버진 누구와도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았어. 부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기 자식들에게까지 벽을 쌓았지. 사람을 혐오했어, 우리 아버진. 그는 고독했고, 덕분에 우리들 자식들도 항상 외로웠다네.』

《외롭다》라는 말에 반응, 까까머리 쪽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걸 미처 눈치채지 못한 베버리는 입술을 깨물며 상자를 묶은 매듭을 풀었다.
『노인네의 이런 푸념이 귀에 닿지 않겠지. 자네들 세대는 전쟁이 뭔지도 모를테니까. 하지만 말일세. 난 용사니 전사니 하는 것들이 대단히 싫어. 참전 용사? 엿이나 먹으라고 그래.』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는다. 사랑은 했지만 절대로 존경할 수 없다.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먹먹한 검정에 가까워졌다.
『자유니, 이념이니, 정치니 하는 것 이전에 가족이 부숴지면 남는게 하나도 없는 거야. 그래서 나라만 지켜선 안돼. 먼저 지켜야할 것은 가족이야.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중요한 걸 곧잘 망각하지. 그리고 나처럼 죄다 잃어버리고 난 뒤에 후회해. 인간은 어리석어... 그리고 바보야.』

베버리 홀리는 엄숙한 표정으로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아버지의 분신을 노려보았다.

성경.
신의 말씀이 기록된 책.

그것을 불안한 표정을 지은 짧은 머리카락의 청년이 손을 뻗어 잡았다.

Posted by 미야

2007/01/23 21:21 2007/01/23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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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라키시스 2007/01/23 21:38 # M/D Reply Permalink

    미야님 안녕하세요. 국내 SPN 동인찾아 산넘고 물건너 헤매다가 여기까지 흘러들었습니다. (그리고 만세를 불렀..;) 형제가 항상 너무 대놓고 애틋해서 양놈들 정서에도 저런게 있나 싶어 신기해하면서 보던것이 이제 정말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입니다. 소설 잘 읽고 갑니다. 두근두근 다음편을 기대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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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demption 08

※ 드라마가 착착 진행되면 될수록 팬픽과 원작이 점점 어긋난다는 문제점이... (으악!) 고백하자면 전《샘을 죽여라》는 아버님의 유언을 전혀 예상 못 했습니다. 게이 커플로 오해받을 적의 딘의 반응도 정 반대로 나오더군요. 하지만 팬픽 줄거리가 이미 확정되어 있는 탓에 세부적인 설정을 다시 고쳐 쓸 여력이 없습니다. 눈 딱 감고 그대로 진행합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땅이 흔들렸네 지진 일어났네 난리났네요. ※


아르바이트 및 중간고사와 씨름하고, 엄청난 분량의 리포트 작업에 목을 매단 채 도서관에서 날밤 지새우던 학창 시절도 이보단 덜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람의 생명이 달린 문제니 헌팅 생활이 피곤하다고 불평해선 안 된다고 추슬러 보지만... 인정하자. 산재보험금 지급 신청도 불가능한 이놈의 직업 탓에 이가 닳아 곱게 부숴질 지경이다.
쏴아 하고 수도꼭지에서 물 나오는 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샘은 이대로 침대에 달라붙어 나비 번데기가 되고 싶다는 욕구와 싸웠다. 그럭저럭 3시간 가량 눈을 붙였지만 과연 잠을 자기는 잤나 싶다. 끈끈한 당밀을 발라 팔과 다리를 고정시켜 놓은 듯한 느낌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시멘트를 온몸에 들이부어 돌덩어리로 굳혀놨다. 프렌치 코트를 입은 어둠의 신사들이 이대로 붙잡은 인질을 바다로 던져버리기만 하면 완벽할 것 같다. 마무리로 녹음기 버튼을 눌러 준비된 효과음「풍덩」소리를 틀면 곧바로 엔딩 크레딧이다.
바둥거리며 고개를 움직여봤다. 아직은 무리라며 굳은 근육이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여, 허니. 일어났냐.』
욕실 문을 활짝 열어두고 만장하신 가운데 아침 세수를 하던 딘이 끙끙 앓는 소리에 반응하여 바깥을 살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손으로 쓸어올리며「죽었니, 살았니, 개구리 반찬」을 외쳤다.
『젠장... 누가... 허니야...』
간밤에 카운터를 지키던 주근깨 투성이의 모텔 종업원이「라스베가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두 분, 사이가 겁나게 좋아 보이시네요. 결혼하러 오셨나요?」라며 짓궂은 농담을 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장난이다. 샘은 기겁했는데 딘은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정확하게는 우거지상을 하고「우린 형제입니다」라고 꼬박꼬박 정정하는 샘의 행동이 재밌다고 생각한 것이겠지만, 사정은 어찌되었든 호모 커플 취급을 받고도 즐겁게 웃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끔씩 샘은 형이 보통 그릇이 아님을 깨닫곤 했다.
깨닫기만 했던가, 징그러워지기도 한다.
『우리 귀여운 잠꾸러기. 당신의 게으름이 신혼 여행을 망치고 있군요, 허니. 이리 와서 나랑 같이 같이 욕실을 쓰지 않겠어요?』
『꽥~!!』
하여간 동생을 골려먹기 위해서라면 기찻길에서 열차와 씨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인간이다.
욕실에서 딘이 낄낄 웃음을 삼키며 수도꼭지를 잠궜다.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탁탁 털어내는 기척이 들려왔다. 비누 냄새가 향긋하게 나는 것으로 보아 면도도 이미 끝마친 상태다. 누구는 아직 눈꼽도 처리를 못 했는데 하여간 바지런도 하다.

『어제 늦게까지 게임했지, 너. 다닥다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 때문에 나까지 피곤해졌다고.』
『얼어죽을 게임. 밤새 인터넷으로 조사하느라 녹초가 된 동생에게 그게 할 소리야?』
샘의 반박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까까머리가 스프링 달린 인형처럼 좌우로 뒤뚱거렸다.
『오우, 어쩐지 뿅뿅 소린 안 나더라니.』
말을 참 예쁘게도 한다.
유전자 돌연변이, 내지는 좀비에게 점령당한 도시 한복판에서 기관총을 난사하며 무차별 헌팅을 시도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솟는다. 마무리로 수류탄도 터뜨린다. 그리고 철조망을 단숨에 뛰어 넘는다. 실수로 형을 철조망 저편에 두고 왔지만, 그런 사소한(?) 잘못은 잊어먹고 재빨리 탄창을 갈아 끼운다. 철커덕 소리와 맞추어 뒤돌아 다시 기관총을 난사한다.

『여하간에 그 오쿠림바라는 거 말이야, 형.』
『오냐.』
방금 전에 샘의 상상 속에서 좀비와 세트로 총에 맞아 죽었다는 걸 알 까닭이 없는 딘은 계속 해보라는 식으로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무방비한 상태로 적에게 활짝 벗은 등을 드러낸 채 오늘 입을 셔츠를 골라 침대 위에 올려 놓았다.
여전히 눈꺼풀이 철썩 달라붙은 상태인 샘은 덕분에 곱절의 피곤함을 느꼈다. 형이 고른 건 맨날 입는 감청색의 T-셔츠가 아니라 반듯해 보이는 와이셔츠다. 목 조르는 넥타이는 다행히 생략되었지만 아무튼 단추가 줄줄이 달린 옷이다. 그 옷만 봐도 오늘 하루가 어떻겠다는게 눈에 훤했다. 실종자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관계자들을 족치는 거칠거칠한 형사 놀이는 끝이다. 오늘 그가 연기할 건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걸 깨닫자 개구리처럼 부운 눈이 번쩍 띄였다. 우와, 이거 큰일났다. 트렁크 속으로 샘이 입어도 괜찮을 와이셔츠가 남아 있는지 기억에 없다. 그들이 코인 셀프 세탁장에 들린 건 무려 일주일 전이다.

『오쿠림바는 파르카이 내지는 모이라이를 말하는 것 같아.』
『모이라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잖아. 운명을 관장하는 세 명의 여신 말이야. 한 명은 실의 길이를 결정하고, 다른 한 명은 물레로 실을 짓고, 다른 한 명은 가위로 잘라버려. 클로소, 라케시스, 아트로포스...』
『그래서?』
『거 참. 중간에 자르지 좀 말자. 여하간 사전을 찾아봤는데 일본어로「보낸다」라는 뜻의 단어가 오쿠리였어.』
뒤돌아본 딘의 얼굴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놀란 것 같다. 반문하는 목소리가 곱절로 커졌다.
『일본? 스시와 초밥의 나라 일본 말이야?』
『응. 스모와 가라오케의 그 일본이야. 오쿠리는 보낸다, 바는 할멈을 뜻해. 이걸 더하면 오쿠리바는「보내는 할멈」이라는 뜻이 되지. 그걸 오쿠림바로 발음한 것 같아. 그쪽의 사투리거나 듣는 사람이 발음을 잘못 알아 들은 거겠지. 어쨌거나 스테이플러씨가 언급했던 오쿠림바는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는 늙은 여자라는 의미야. 구전 전설에 나오는 아트로포스가 늙고, 추하고, 무겁게 다리를 저는 노파로 묘사되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없잖아 있다고 할 수 있지.*』
『흐응. 알겠다. 그러니까 오쿠림바라는 건 그리스 신화의 일본 버전이라는 거냐? 그런데 웬 일본?』
『토마스 스테이플러씨가 1944년 남브리스타 군도에서 죽어가는 전쟁 포로 어쩌고 했잖아?』
『그랬지.』
『그거 태평양 전쟁이야.』
『겍.』

실감이 요~만큼도 안 나는 모양이다. 태어나 초밥을 먹어본 역사가 없는데 갑자기 일본판 죽음의 여신이라니. 더하기 태평양 전쟁 어쩌고? 해도 너무한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끼우다 말고 멈칫한 딘은「우리가 지금 지나간 역사 공부까지 해야 하는 상황인 거냐?」라며 난색을 표했다. 학교 수업 참석을 등한시한 탓에 남북전쟁이 몇 년에 시작했는지조차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을 붙들고 골동품 비슷한 역사 이야기를 꺼내다니. 그래서 징징 우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난《진주만》영화도 안 봤단 말이야, 샘.』
『리처드 플레이셔 감독의《도라도라도라》는 봤을 거 아냐.』
『2001년에 나온 영화도 안 봤는데 1970년에 찍은 영화를 봤을 거 같어?! 제발...』
두 팔을 벌리고「날 살려달란 말이야」라고 애원하는 딘을 지긋이 올려다 보니 와이셔츠의 단추마저 서로 엇갈려 끼운 상태다.
『칠푼이.』
형에게 이리 가까이 오라 손짓했다.
이러다 정말로「허니」가 되어버리겠다 걱정하며 잘못 끼운 단추를 하나하나 다시 맞추어 끼웠다. 동생이 하는대로 얌전히 몸을 맏기고 있는 딘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더욱 심란해졌다.

『역사 공부까진 필요 없을 거야, 형. 우리가 신경을 써야 하는 건 태평양 전쟁이 아니라 오쿠림바니까. 그래서 말인데, 딘. 아트로포스라면 끝장을 내는 여신이잖아. 솔직히 말해 이번 일, 우리 힘으론 벅찬 건 아닐까 걱정이 되. 마담 라바도 섣불리 덤비지 말라고 사전에 경고했었고...』
『왜. 무서워?』
똑바로 쳐다보며 눈을 맞춰온다. 어둡고도 깊은 녹색의 눈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닌 자의 눈동자다. 친구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있는데도 무서워? 내가 지켜줄텐데 그래도 무서워?』
바로 가까이에서 저음으로 울리는 그 목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것은 여성용 붉은 립스틱을 손으로 만졌을 때의 느낌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그 생생한 감각에 샘은 어쩐지 뒤돌아 10리 밖으로 달아나고픈 심정이 되어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샘은 방어적인 태도로 뒷걸음질부터 쳤다.
『혼자서 옷도 못 입는 형이잖아.』
『엥.』
『그러면서 누굴 지켜준다는 거야.』
『임마. 그래도 난 총도 잘 쏘고, 싸움도 잘 한다고. 어쩌다 단추 한 번 잘못 끼웠다고 못 미더운 놈 취급이냐.』
『섭섭해? 그럼 바지부터 제대로 입어.』
『어이.』
『이제 슬슬 비켜주지 않을래? 화장실에 가고 싶거든.』

찌푸린 형의 시선을 피해 샘은 허겁지겁 욕실로 달아나고 보았다.
문이 찰칵 소리를 내고 닫기자 이젠 살았다 안도의 숨이 터져나왔다.
그러나 고개를 들자 깨끗하게 닦여진 거울 속으로 부도덕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낯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맙소사, 뺨이 새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그것이 못 참게끔 혐오스러워 샘은 거울 위로 찬물을 좍좍 끼얹었다.
『지금은 일 하는 중이야. 실수하면 목숨이 위태로워져. 정신 바짝 차려야만 해, 샘 윈체스터.』
가까스로 진정하고 오늘 그들이 할 일에 대해《정신 집중!》을 외쳤다.

불현듯 오늘의 운세란에 과연 무슨 내용이 적혀져 있었을지가 궁금해졌다.
갈색 지붕의 평범한 단층 집을 노크한 딘은 오늘은 신문을 읽지 않았다는 점을 후회했다.
점술가는 무어라 했을까.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거나, 하는 일마다 탈이 난다거나, 아무리 노력해도 남들로부터 인정을 못 받는다거나... 입안으로 욕설을 굴리면서 짜증이 치솟는 걸 참았다. 하여간 흉(凶)이다. 십중팔구 그건 확실했다.
「성 카틀레야 요양원 직원입니다. 문을 열어주시지 않겠습니까」라고 신분을 밝힌 딘을 눈앞에 세워두고 베버리 홀리는「진짜요?」라고 반문했다.
『외판원이 아니고?』
나의 이 어디가 화장품을 세일즈하는 외판원으로 보인다는 겁니까 - 딘은 와이셔츠 단추를 쥐어짜며 신음했다. 예순이 넘은 이 할머니는 도무지 의심을 풀려고 하질 않았다. 덕분에 5분 전부터 계속 같은 소리다.

『그치만 요양원에서 당신 얼굴을 본 기억이 없구려.』
늦은 아침 식사를 방해받았다며 베버리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해도 기억력 하나는 여전히 쓸만하다우. 그래서 하는 말인데 댁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지가 않아. 자, 그래서 말인데... 외판원이지? 자네들.』
『성 카틀레야 요양원에서 나왔다니까요. 그쪽에 취업한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니 저희 얼굴이 익숙하지 않으실 거예요. 아까 신분증도 보여드렸잖아요.』
『나 같은 순진한 노인네들을 속여 물건을 강매한다는 이야길 들었어. 안 속아, 안 속아! 일주일 전에 카드 게임에 나왔던 앤소니 영감도 그랬다고. 혓바닥 굴리는 외판원에게 귀가 솔깃해져 쓸데 없는 안마기를 사고 말았으니 다른 사람들도 조심하라고 말이야.』
『속이긴 뭘 속인다는 거예요?! 나탈리 윙 여사님의 유품 확인의 건으로 도움이 필요해서 그럽니다. 저희가 일이 서툴러서... 어흠, 아무래도 신입이니까요. 그래서 작은 실수가 있었어요. 그걸 바로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나탈리 윙 할머니는 잘 아시죠? 홀리씨. 요양원에서 부인의 아버님이셨던 토마스 스테이플러씨의 옆 방에 계셨던 분입니다. 인사도 여러번 나누셨잖습니까.』
강팍하게 팔짱을 끼고 있던 노부인의 표정이 살짝 바뀌는 순간이었다.
『옆방에 계셨던?』
그 표현이 과거형이라는 점에서 베버리 홀리는 인상을 찌푸렸다.
『알다마다. 참 좋은 분이셨는데... 돌아가셨수?』
눈 딱 감고 샘은 정중하게 거짓말했다.
『편안한 임종이었습니다.』

Posted by 미야

2007/01/21 08:45 2007/01/2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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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1/22 15:46 # M/D Reply Permalink

    오, 맙소사 새미 보이.. ㅋㅋ 부도덕한 남자의 얼굴.....!!!! 형때문에 점점 동요하고 있는 새미가 오늘따라 왜이리 귀여워 보인답니까...! 크흐흐 사실 팬픽의 묘미란 원작에서 못 채우는 갈증을 채우기 위한것! 영 다른방향을 잡으신대도 저는 미야님의 추종자가 되렵니다~

    1. 미야 2007/01/22 19:08 # M/D Permalink

      사실은 벌을 좀 주고 싶었달까... (고개를 돌리고 땀을 닦는다) 라고 해도 딘 횽아에게 새미를 제물로 바치기 연맹에 이미 가입을 한 까닭에... (삽을 들고 땅을 파는 것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아무튼 달리는 거예요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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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demption 07

※ 도련님은 가출쟁이, 이것은 샤바케의 부제가 아니었더냐~!! Hunted 에피소드를 보고 절규.
어찌되었든 이것은 훈남, 꽃남 윈체스터 보이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마우스를 움직여 윈도우를 닫는 당신의 멋진 센스를 보여주세요. ※


갑작스런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쇠붙이가 긁히는 금속성 소리와 같이 해서 술에 취한 것이 분명한 금발의 여자가 비틀 걸음으로 가게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흥분한 탓에 호흡이 엉망이다. 승리의 전리품일까, 빨간 매니큐어가 발려진 손으로 밑단에서부터 뭉텅 잘려져 나간 남성용 실크 넥타이를 꽉 쥐고 있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것이 길거리에서 아무렇게나 파는 싸구려는 아닌 듯하다. 모르긴 몰라도 고가인 물건으로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는「옛날엔 제법 비싼 물건이었을」넥타이였다. 아무래도 험한 가위질을 당한 후니 영광스런 시절은 과거형으로 말해주는게 옳을 것이다. 여자는 그걸 공처럼 둥글게 말더니 쓰레기통 쪽으로「슈웃~!」소리내어 던졌다.
『날 감히 물 먹이려 하다니. 주제에 양다리를 걸쳐? 엿이나 먹어라!』
그녀가 정말로 자르고 싶었던 건 넥타이가 아니라 아랫도리에 달린 그거겠거니 싶은 순간이었다.

『왜? 뭘 보냐, 자식아. 어디서 재미난 구경이라도 생겼어?』
어두운 골목 가장자리에서 홀로 서성이던 샘은 앙칼진 여자의 고함에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저 혼자 멋대로 가버린 형이 원망스럽다.
사실 샘은 딘과 맨날 붙어서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두 사람 모두 덩치가 남산인데 아장아장 손 붙잡고 다딜 일 있느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성인이 된 만큼 맡은 일을 분담해서 각자 처리하자는게 그의 평소 주장이었다. 딘이 시체공시소를 뒤지면 샘은 문서보관소를 터는 거다. 그만큼 시간도 절약되고 능률도 올라간다. 새끼 오리도 아닌데 맨날 자기 뒷꽁무니만 따라오라고 종용하는 딘에게 얼마나 대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오늘따라 딘은 개인 플레이를 주장하며「넌 여기서 기다려」라고 말했다.
하필이면 이런 날, 이런 장소에서.
거시기에 바를 연고를 소화제로 오해해서 잘못 삼키기라도 했나,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야! 꺽다리야! 어딜 슬슬 피해! 내 말이 말 같지도 않냐?!』
그가 지은 죄라고는 정보를 얻으러 술집으로 들어간 딘을 얌전히 기다린 것밖엔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 시비를 걸어온 취객을 만난게 두 번, 지나가는 여자에게 그렇고 그런 제안을 받은게 세 번, 괜찮은 정키 가진 거 있느냐 물어온 인간이 하나, 뜨뜻한 시선을 던져오는 중년의 남성을 피해 달아난게 두 번이다. 동네가 이상한 건지, 아니면 자신이 이상한 건지 이젠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이마 한 가운데로「저에게 대판 싸움을 걸어주시지 않겠어요?」라고 써붙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전생에 지은 죄가 어찌나 많았으면 술에 취해 루이비통 핸드백을 도끼인양 휘둘러대는 아가씨까지 등장했다.
제발 살려주라.
불필요한 소동을 피해 더욱 으쓱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샘은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동네가 이상해서가 아니라 네가 괴짜라서 그런 거야, 샘.』
한참만에 용무를 마치고 자동차로 돌아온 딘은 그게 진실이라며 딱 잘라 선언했다.
그리고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무어라 항의하려던 동생을 향해 차가운 청량음료 캔을 던졌다.
『머리가 계속 지끈거리지? 넌 옛날부터 담배 연기를 무지 싫어했잖아.』
『에?』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시는 것도 좋지만 그걸 먹으면 아픈게 더 빨리 가라앉을 거야. 마셔.』
『잠깐, 잠깐만. 이거 밀크 소다수잖아!』
새파랗게 되기까지 얼린 청량음료 따윈 문제가 아니다. 샘은 인상을 구겼다. 가볍게 기침 몇 번 했다고 밖에다 줄창 세워두더니 이제는 엉뚱하게 밀크 소다수를 마시라 권하기까지 하고 있다.
평소 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X-레이로 그 뇌를 찍어서라도 들여다봤음 소원이 없겠다. 밑도 끝도 없이 분홍색으로 칠해진 소녀 취향의 깡통 음료수라니.
거기다 더 무서운 건 형이 어쩐지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만지며 시선을 피했다는 것이다.

손가락에 묻은 얼음 알갱이를 털어내며 샘은 짜증을 부렸다.
『날 생각해서 자판기에서 빼왔다는 말은 농담으로라도 제발 하지 말아줘. 혹시나 하고 꼬시던 아가씨에게서 선물로 얻은 거지? 내 말이 맞지?』
동생의 따지듯 캐묻는 말에 딘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냐. 돈 주고 사온 거야.』
『밀크 소다를?』
『옛날엔 좋아했잖아.』
『내가 지금 몇 살이게. 형이 가지고 있는 나에 대한 정보는 신속히 업데이트가 될 필요가 있어.』
화낼 기운도 없어 물기 묻은 소다 캔을 뒷자석을 향해 던졌다.
그것이 호의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남의 감정을 배려하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술 취한 여자가 휘두른 핸드백에 얼굴을 맞은 건 어디까지나 샘이지 딘이 아니잖는가. 게다가 그 얻어맞은 까닭이 자신이 괴짜여서라고 못을 박기까지 했는데 농담으로라도「당신의 친절함에 감사드리며 맛있게 음료수를 먹도록 하겠습니다」라는 대답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나저나 뭐 알아낸 건 있어?』
까칠하니 반응하는 스스로에게 환멸감을 느끼며 샘은 억지로 목소리를 바꿨다.
조금은 풀 죽은 것처럼 보이는 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어. 이번에도 허탕이야. 안에서 오마 릭스라는 친구를 붙잡고 물어봤는데 사흘 전부터 체스터 스테이플러를 못 봤대. 이거 좀처럼 안 나오네. 뭐라도 걸려야 하는데 다들 손만 휘젖고, 어휴.』

딘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었다.
라바의 집으로 네 명의 젊은이들이 들이닥친게 지난 12월 2일.
「그 친구, 솔직히 말해 맛이 갔어요.」
오마 릭스의 앞으로 가짜 경찰 배지를 들이밀고 알아낸 바에 의하면 체스터는 술을 한턱 쏘겠다고 거짓말을 해서 세 명의 단짝 친구를 불러내었다고 한다. 그리곤 여기가 술집이냐 항의하는 친구들을 끌고 대신 엉뚱한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고 한다.
「단단히 미친 거예요. 링컨 대통령이 기저귀를 차고 있을 적에나 지어졌을 것 같은 괴상한 아파트로 우릴 데리고 갔다니까요. 멋지게 놀아보기 전에 엑스타시를 사려고 그랬으면 차라리 덜 밉죠. 형사님도 한 번 생각을 해보세요. 여자애도 없고 술 냄새도 안 나는 장소에서 깡 마른 욕쟁이 할멈을 세워놓곤, 죽은 자기 할아버지를 저승에서 불러주면 무려 200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는데 그게 정상으로 보여요?」
「정상으로 안 보이지.」
딘은 그간의 경험을 살려 능숙하게 맞장구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발언이 걱정스러워졌던지 릭스는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봐도 딘은 거칠거칠한 구정물계 전문 형사로밖엔 안 보였다. 낡은 그의 가죽 재킷에서 짙은 수갑의 냄새가 풀풀 풍겨나왔다.《미란다 조항은 안 말해줘도 이미 알고 있지? 싸게 등 뒤로 손 돌려》라는 말을 듣기 싫어진 릭스는 뒤로 빼는 제스츄어를 취했다.
「무, 물론 그렇다고 엑스타시를 사는 걸 제가 정상이라 생각한다는 건 아니예요, 형사님.」
「걱정 말아. 그 부분은 못 들은 걸로 할테니. 나는 마약 단속반이 아니거든. 내가 궁금한 건 체스터 스테이플러가 12월 2일에 뭘 했고, 그 이후로 어디에 있느냐는 점이야.」

조수석에 앉아 형의 모험담을 얌전히 듣고 있던 샘은 가렵지도 않은 귀를 긁었다.
2일에 뭔 일이 있었는지는 이제 그들도 대략적으로 꿰고 있다.
「그 할아버지는 나도 알거든요. 뭐랄까, 비밀이 아아~주 많은 사람이었어요, 형사님.」
딘이 웃는 낯으로 긴장을 풀게끔 살살 유도하자 오마 릭스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꾹꾹 찌르며 내키지 않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거기다 입도 무거워 강도가 쳐들어와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고 현금을 집구석 어디다 숨겨두었느냐 물어도 끝까지 대답을 하지 않을 사람이었죠. 왜 그런 사람이 있잖아요. 전기 고문을 해도 소용이 없고,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흘릴 그런 분이었어요.」
체스터는 평소에도 할아버지가 숨긴 비밀을 어떻게든 알아내고 싶어 안달이었다고 한다.
「에... 그러니까... 녀석은 어릴 적에 입양되었거든요.」
릭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을 보면 이거다 하고 쨘~ 나오잖아요. 체스터의 진짜 엄마는 중국인인가 그렇대요. 그런데 아무도 진실을 안 가르쳐 주었죠. 입양 기관을 뒤져도 다들 알려줄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들었어요. 결국 남은 건 할아버지 뿐인데... 입을 안 열었죠. 놈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친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있는데도 그걸 숨겼다고 굳게 믿었어요.」
그것이 체스터가 자신의 친한 친구 셋에게 미친 놈으로 취급을 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같이 강신술 테이블에 앉아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한 이유였다.

『그런데 운이 안 따라주려니 강신술은 멋들어지게 실패했고...』
딘은 자동차에 키를 꽂으며 전방을 주시했다.
부르릉.
아유, 하여간 예뻐 죽겠다. 열쇠를 돌리자마자 들리는 엔진 소리가 어찌나 행복하던지 딘은 며칠간 축적된 피곤을 잠시 잊었다.
『할아버지를 불러내려고 했는데 그 망할 할아범을 제치고 생판 다른 것이 튀어나와 체스터에게 들러붙은 거지. 놀란 라바가 어떻게든 수습을 하려고 했지만 영매의 검은 테이블은 이미 뒤집힌 후였고, 능력부족 탓에 이후로 지금까지 엉망진창 쑥대밭이라는 말씀.』
가까스로 저승에서 뒤따라 나온 토마스 스테이플러는 일을 망친 라바에게 종주먹을 들이대고 있고, 체스터는 연락두절. 눈이 풀려 밖으로 나가버린 상황에서 말 그대로 연기처럼 사라져 이제는 그가 살아있는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게 되었다.
종합 평가, 이보다 더 고약할 순 없다.

『슬슬 한계야. 죽은 사람에게 강제 빙의된 채 5일을 넘긴 사람은 아무도 없어. 대부분 발광하거나 심장마비를 일으키지.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은 같은 차원에서 공존하면 안 된다는게 일반적 자연 법칙 아니겠냐. 그걸 무시하려고 하면 누구라도 댓가를 치러야 하지.』
사이드 브레이크를 조절하다 말고 딘은 내뱉듯이 그렇게 말했다.
『시체공시소 쪽엔 체스터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사람이 없었어, 딘.』
덩달아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면서 샘이 말했다. 그놈의 징그러운 5일째가 되기까지 앞으로 딱 22시간 남았다. 순간 딸각 하고 분침이 움직였다. 어쩐지 그 움직임이 사형 선고처럼 느껴져 질겁한 샘은 얼른 시계로부터 눈을 떼었다.
『아직은 없어도 이제 곧 들어올 거다.』
『그래서 앞으로 어쩌자고? 딘. 시체공시소 쪽에서 죽치고 기다리자고?』
『그렇게 하고 싶냐?』
샘은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을 표현했다.
『아니. 농담으로라도 우리, 그런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다, 샘.』
그렇게 말하면서 딘은 지난 하루 반나절동안 들고 다녔던 체스터 스테이플러의 사진을 운전석 앞으로 아무렇게나 끼워 넣었다.

「나 지금 무지 삐졌거든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속의 청년은「제대로 하는 반항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겠다며 바지춤에 손을 꽂고 있었다. 마음의 갈 곳을 잃어 땅에 있어도 땅에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다. 슬픔과 분노가 범벅이 되어 혼란스러워하는 눈빛으로 정면을 쏘아보고 있는데 어쩐지 그게 제시카를 잃고 난 직후의 동생의 눈빛 같아서 딘은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는 수 없어 다시 손을 뻗어 사진을 거꾸로 뒤집었다. 하여간 다들 멋대로 고통받고 살고 있다.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었다.
이쪽도 슬슬 한계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적절히 수면을 취해야 한다.
가까운 모텔을 찾아 두리번거리면서 딘은 진작에 차가워진 발을 엑셀레이터 패달 위로 올려놓았다.
예쁜이 임팔라가 부릉 소리를 내면서 그런 딘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Posted by 미야

2007/01/13 20:46 2007/01/13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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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Yuri 2007/01/14 00:10 # M/D Reply Permalink

    요새 슈퍼내츄럴을 보느라 매일 새벽에 자고 있습니다... 큰일이에요.. 어쩌죠?ㅠ

    1. 미야 2007/01/14 13:07 # M/D Permalink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동영상 켜고 헤죽 웃는 단계까지 이르고 나야 진정한 지옥이 도래합니다. (끄덕끄덕)

  2. 크림베리 2008/12/26 17:54 # M/D Reply Permalink

    푸하하하하하!! 미야님 코멘트에 웃음터졌어요 ㅋㅋㅋ 꼭 무슨 상담소 같아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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