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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demption 03

※ 주말을 이용해서 오로라 타자치기를 해봤습니다. 오타 정리는 교회 다녀와서 천천히 할랍니다. 행복한 새해 맞이하시길... ※


사람의 죄책감을 슬쩍 건들인 뒤, 금고에 넣어둔 현금을 몽땅 내놓으라 협박하는 건 사이비 교주나 저지르는 짓 아니었던가.
분을 삭히려 애쓰면서 딘은 영양 부족으로 거칠어진 자기 손톱을 내려다 보았다. 신선한 과일 섭취를 게을리 한 까닭에 하얗게 일어난 각질이 보기가 좋지 않았다. 짜증을 내며 보풀 하나를 잡아 뜯었다. 따끔거리는 통증과 같이 해서 피 한 방울이 살짝 베어나왔다.
제기랄. 여기서의 문제는 바로 이거다. 닉슨은 탄핵으로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게 만들 수 있었지만, 샘에겐 당장 내 동생 관둬라 명령을 할 수가 없다.

『강신술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샘.』
『당연히 알고 있지. 촛불 하나 켜놓은 어두운 방에서 영매를 중심으로 둥근 테이블에 모여 앉아 손을 붙잡고「이리 오너라~」주문을 외우는 거잖아. 테이블 위에는 수정 구슬이 하나 있고, 싸한 향료를 피워대고...』
『흐음, 취향이 아니라고 말했으면서 싸구려 B급 영화를 많이도 봤군.』
『그럼 아니야?』
딘은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실은 그만하면 매우 정확한 묘사야.』

다만 보통 사람들이 미처 알지 못하는 사실 한 가지가 있는데 영매의 검은 테이블 위로 올라가는 커다란 수정 구슬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점이다. 손바닥으로 수정구를 어루만지며 워우예 신음하는 건 순전히 소설과 영화에서 굳어진 이미지다. 영업용으로 놓아두면 그럴싸 해보이니까 가져다 놓는 경우가 태반이다. 있어서 나쁠 것은 없다 - 치과 병원에 걸린 프리스턴 대학 졸업장 비슷한 거라면서 마담 라바는 웃곤 했다. 손님에게 신뢰감을 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라는 것이다.
대신 절대로 빠져선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불러올 망자(亡者)의 정확한 이름이다.

『은행하고 똑같아. 계좌 번호와 예금주를 전표에 정확히 적어 창구에 내밀어야 금고가 열리게 되지. 계좌번호가 맞지 않으면? 금고 - 저승은 절대로 안 열려. 때로「이 자리로 아무 영혼이나 불러보겠습니다」하고 쇼를 부리는 영매들이 있는데 십중팔구 가짜야. 하얀 백지를 지폐 크기로 오려서는 그게 마치 현금이라도 되는 것인양 사기치는 은행 창구 여직원인 셈이지. 죽고 나서도 현세를 멋대로 떠도는 악령이라면 모를까, 저승에서 편히 쉬는 영혼을 불러내려면 제법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야만 해. 그 첫 번째 관문이 부모가 내려준 진짜 이름을 호명하는 거야.』

이것을 살짝 비틀어 보자.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은 절대로 영매의 테이블 위로 올라가선 안 된다.

샘의 눈매가 혼란을 담아 살짝 일그러졌다.
『잠깐만 기다려, 딘. 솔직히 그 부분은 이해가 잘 안 가는데.』
무엇보다 영매의 테이블 위로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 올라갈 까닭이 없다. 마이클 잭슨이 아직도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건만「팝의 황제의 영혼을 이리로 불러주세요」라고 할 정신병자가 과연 있겠느냔 말이다. 혹시라도 그렇게 해달라 요청했다 해도 거기에 응할 영매가 없다. 대신 놀란 목소리로 이렇게 반문할 거다.「지금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와 착각한 거겠지?」그리고는 뒤돌아 마이클 잭슨이 죽어 해외 토픽감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달랑 자기 혼자만 모르고 있는 건 아닌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할 거다.

『샘? 마이클은 팝의 황제가 아니야. 지랄 육갑하는 아동 성추행범이지.*』
『법은 상황 증거만으론 유죄를 인정하지 않아, 딘. 거기다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지방 검찰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 자체를 취소했다고. 그러니까 마이클 잭슨이 진짜 아동 성추행범이라고 섣불리 단정지어선 곤란해. 아니지, 내가 지금 뭘 떠들고 있는 거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말인데... 강신술 자리와 살아 있는 사람의 이름이 무슨 상관이라는 거야?』

샘의 의문에 딘은 대단히 불편한 기색으로 축농증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크응. 그건 말이다... 영매가 다스리는 테이블은 저승과 현세의 교차점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그 위에서 부모가 지은 이름이 불리워지면 불려온 유령은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버려. 자칫하면 유령에게 홀리기 딱인, 차려진 밥상이 되는 거지. 이게 대충 무슨 줄거리인지 너는 알겠지? 샘.』
머리가 좋은 샘은 형의 시큰둥한 말투에서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달았다.
『아이고, 설마?』
『맞아. 내가 미끼가 되었어. 아빠의 의견이었지. 나는 반대할 이유를 전혀 못 느꼈고.』
딘은 불편한 듯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어루만졌다.

미끼가 된다는 점에선 별 불만 없었다. 아빠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안전을 확신했다.
단, 존이 새롭게 딩딩이라는 이름을 지어불렀을 적엔 피를 콸콸 토하고 죽어버리는 줄 알았다.
「그래도 혹시라는게 있으니 출생 신고서에 적혀진 네 이름은 여기선 아껴두도록 하자꾸나.」
존은 어딘지 모르게 즐거운 시선으로 입을 벌리고 경악해 마지 않는 아들을 내려다 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아들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즉석에서 지은 아들의 새 이름을 불렀다.
「자, 그럼 가볼까? 딩딩 윈체스터.」
싫어어~!! 딘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신음을 토해냈다. 차라리 토마토 윈체스터라고 불러줘어~!!

이제 이불이 필요하다. 딘은 초췌한 모습으로 어슬렁 일어났다. 잠이나 자자. 지금이 오전 11시라고 해도 상관 없다. 실컷 자고 내일 아침에 다시 일어나자. 밥도 필요 없고, 자장가도 필요 없다. 푹 곯아 떨어지고 나서 맑은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아직도 그를 딩딩이란 이름으로 기억하는 미친 할망구는 깨끗이 털어버리고 침대로 가서 눕자. 전화기에 대고 우는 소리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어차피 이번에도 그렇고 그런 일일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안녕, 나는 지금부터 잠자는 숲속의 공주다. 백마를 탄 왕자가 다가와 빨리 일어나라 키스하면 주먹으로 걍 패버릴테다.

『디~인.』
샘은 팔을 뻗어 트라우마에 빠져 허우적대는 형을 수면 위로 끌어당겼다.
『형은 남자니까 죽었다 깨어나도 공주는 될 수 없어. 허리도 굵어서 드레스도 못 입잖아.』
눈으로 딘의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근육을 주욱 흝었다. 깊게 파인 드레스의 앞자락으로 납작한 가슴이 살짝 드러났다고 상상하자 머리카락이 삐죽 곤두섰다. 탄탄한 근육으로 도배된 복부와 좁은 엉덩이는 어쩌고? 그러고도 분홍 레이스로 허리 아래를 장식한 채 침대에 드러누워「왕자 사절, 수면 방해 금지,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의 조속한 실천 촉구」를 주장하시겠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샘은 다리를 벌리고 서서 십자가로 흡혈귀를 위협하듯 아빠의 핸드폰을 딘 앞으로 들이밀었다. 그가 만약 이대로 계속해서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연기하려고 한다면 헌팅 명가 윈체스터의 이름을 걸고 형을 처치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장을 한 형의 가슴으로 말뚝을 박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체온이 3℃ 가량 곤두박질 쳤다.

『도움을 청하는 이 사람은 어쩌고.』
『자기가 판 무덤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신경을 쓸 가치를 못 느껴. 보나마나 강신술을 한답시고 설치다가 이번에도 또 성질 나쁜 유령에게 빙의되어 된통 당하고 있는 걸 거야.』
『그렇게 쉽게 판단하는 거 아니야, 딘. 여러 사람의 목숨이 걸렸다고 하잖아. 나름대로 심각한 상황일게 분명하다고.』
『물론 자기 입장에선 꽤나 심각하겠지. 저번에도 그랬으니 이번에도 비슷할 거다. 하지만 그게 어떻다는 건데. 자기가 어질러놓은 건 자기가 치우라고 그래. 왜 그 할망구는 자기가 먹은 그릇의 설거지도 못 해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만드는 거야, 정말!』

대놓고 짜증부리는 형을 보고 샘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그 뺨이 설탕처럼 부드러웠다. 동시에 속임수가 들어있는 마술사의 모자를 들고 시골 처녀를 능숙능란하게 꼬시는 도시 청년 같았다.
『물론 형은 도와주기 싫다고, 그런 사람은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거 알아? 진짜 그랬다간 딘의 실력으론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하는게 되어버려.』
딘이 엑- 하는 얼굴로 동생을 쳐다봤다.
『그건 또 무쉰 소리야?!』
『내가 틀린 소리 했어? 여기서 형이 안 가겠다고 버티면《딩딩은 라바의 말 그대로 아직 어려요. 그래서 곤란에 처한 할머니를 도와드릴 수 없어요》가 되는 거야.』
딘은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샘은 이때다 하고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놀리듯 말했다.
『그렇게 되고 싶은 거야?』
견디다 못해 형이 징징 우는 목소리를 냈다.
『그, 그건 싫어!』
『싫지?』
『으으...』
『그럼 가자, 라스베가스!』
딘은 형의 체면도 말아먹고 무릎을 꿇었다.
동생을 멋대로 질질 끌고다니는 형이라고? 하지만 그 질질 끌려다닌다는 동생이 실상은 형을 가지고 쥐락펴락 하고 있음이다.

샘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며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라스베가스! 심장이 살짝 두근거렸다.
대학 진학 문제로 집을 뛰쳐나온 이후로 늘 금전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그다. 남들이 여행이네, 쇼핑이네, 음주도락이네 하며 신나게 청춘을 만끽하는 동안 도서관에서 책이나 파고 야간 창고 정리 아르바이트로 근육을 불렸다. 덕분에 스탠포드 대학 구내에서 사흘 떨어진 거리를 벗어난 기억이 거의 없을 지경이다. 오죽하면 제시카를 포함하여 그의 친구들은 샘이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중증의 방콕족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다. 가벼운 캠핑을 떠났을 적에 보여준 그의 야생 적응력을 보고 다들 눈이 휘둥글 벌어졌던 건 다 까닭이 있다. 도서관에서 엉덩이가 굳느라 버너에 불 붙이는 법도 모를 것 같던 샘이 텐트를 혼자서 치고 나뭇가지를 주워와 모닥불까지 피웠으니 놀랄 노자였을 거다.

「넌 알다가도 모를 놈이야, 샘.」
같은 학년이자 같은 장학금을 두고 경쟁하던 사이였던 리처드 드렉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 같이 라스베가스로 놀러가자고 했을 적에 여행은 싫다면서 거절했던 건 도대체 뭐냐. 무인도에서 1년은 살아본 듯한 손놀림으로《여행은 적성에 맞지 않아》라고 말하는 건 앞 뒤가 안 맞잖아.」

적성이 맞지 않긴! 그건 거짓말이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샘은 여행을 좋아하는 편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빠와 형을 따라 전국을 방랑했던 것이 버릇이 된 것 같다. 생판 모르는 낯선 도시에서 어둠을 밝히는 가로등을 보는 걸 아주 좋아한다. 불빛은 그를 행복하게 만든다. 돌아갈 집으로 안내하는 이정표의 느낌이다. 그립고도 따스하다. 기회만 닿으면 캐나다나 멕시코에도 다녀오고 싶다. 그곳의 야경도 분명 멋질 것이다.
하지만 여행에는 돈이 든다. 샘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자신의 방랑벽을 협박, 벽장에 가두어 놓고 그 문짝으로 대못을 박아버렸다.「무전 여행이라는게 있잖아요」라고 말하지 말기 바란다. 매일 밤 코피 쏟아가며 법학을 공부했던 몸으로 퍽이나 그런 걸 할 수 있었겠다.

라스베가스! 샘은 손바닥을 비볐다. 리처드가 나중에 여행에서 돌아와 그에게 보여준 사진은 창자를 단단히 뒤틀리게 만들었다. 특히나 1999년에 세워졌다던 베네시안 호텔의 정경은 그의 호기심과 이국에 대한 열망에 불을 질렀다. 세상에, 사람들이 곤돌라를 타고 운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유럽의 베니스를 그대로 모방한 작은 도시는 너무도 감쪽같아서 사진 속에 보이는 짙은 초록색의 바닷물이 실상은 대형 수조에 채워진 수돗물이라는 걸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샘을 향해 리처드는「이런 촌뜨기를 다 봤나」식으로 씨익 웃어보였다.
「이것이 현대 미국이란다, 샘 윔체스터.」
그리곤 장학금 쟁탈전에서 패배한 원한을 이때다 하고 풀어버렸다.

너만 가냐. 이젠 나도 간다! 눈에 힘을 주고 샘은 신나라 했다. 베네시안 호텔! 카피된 유럽 속에서 곤돌라를 타고 파란 줄무늬 셔츠를 입은 사공이 부르는 멋진 노래를 감상해 볼란다. 읏샤 소리를 내가며 순식간에 무거워진 가방을 침대 위로 던졌다.

『샘... 넌 이 형이 FBI 공식 수배자라는 걸 깜빡한 모양이구나.』
원한에 사무쳐 딘이 그렁그렁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거긴 사람들 많은 관광 도시잖아. 라스베가스로 가려면 케니 로저스처럼 수염을 듬뿍 달아야 할 거야. 그것도 아니라면 산타클로스 옷을 입고 아이들을 향해 메리 크리스마스~ 이래야 할 걸.』
『그런 끔찍한 분장까지 할 필요는 없어. 괜찮을 거야, 형. 나무 조각을 숨기려면 숲속에 숨기라는 말도 있잖아. 사람들이 무지 많은 동네니까 어쩌면 눈에 더 잘 안 보일 수도 있다고.』
『어쩌면~?!』
좌절감 탓에 딘의 음성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여보세요, 샘 윈체스터! 내가 체포되면 그땐 어쩌려고 그래?!』

그런 걸 짐짓 무시하고 샘은 빙긋 웃어보였다. 형이 이렇게 웃는 자신을 제일 좋아한다는 걸 알기에 가지런한 이를 살짝 드러내고 나긋나긋한 표정을 지었다.
『가방 안 챙겨? 딘.』
거 봐라. 대륙 침몰이다.
앙 다문 입술이 귀엽다. 찍 소리 한 번 못한 채 돌아선 딘은 동생이 하는 것처럼 자신의 겉옷을 챙겨 가방에 꾸셔 넣기 시작했다.

Posted by 미야

2006/12/31 10:04 2006/12/31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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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크림베리 2008/12/26 01:17 # M/D Reply Permalink

    요금 납부는 사라졌네요 ㅋㅋㅋㅋㅋ 샘의 머리는 정말 비상해요~형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자나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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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demption 02

부고장을 정식으로 내지 않았지만《퇴마》쪽으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사이로 입소문은 빨랐다.
존 윈체스터가 죽었다 - 영웅의 반열에 올라 마침내 70명의 처녀들로부터 시중을 받게 되었다며* 쓸데없이 아는 체를 해오는 업계 사람들 때문에 윈체스터 형제들은 한동안 대인 기피증을 앓기까지 했다.「아가리 닥치고 가지고 있는 총의 실린더 청소나 계속 하시구려」- 한 번은 앨런 아줌마의 술집에서 정보를 얻으려던 딘이 참다 참다 못해 냉소적으로 쏘아붙인 적도 있다. 비록 겉모습은 건달 분위기의 청년이라 해도 나름대로 예의을 존중할 줄 알던 그가 유감을 표시한 사람을 한 방에 무안하게 만든 일은 매우 드물다. 그만큼 극한으로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섰다고 보면 될 것이다.

『70명의 처녀들이라니! 망할 것들!』
그날 저녁, 자기 위장으로 술을 3리터나 퍼부어댄 딘은 가로등을 상대로 싸움을 걸었다.
(* 이슬람 종교를 폄하하고자 쓴 표현은 결코 아닙니다 ^^)

아무튼 여기서의 요점은 소문이 돌고 돌아 존 윈체스터가 죽었다는 사실을 다들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처음 한 달은 존의 도움을 구하는 전화가 꾸준히 걸려왔다. 다음 한 달은 어쩌다 걸려왔다. 그 다음 한 달이 되자 거짓말처럼 벨소리가 뚝 끊겼다. 배터리를 정기적으로 충전하는 행동 자체가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기억해내려 하지 않는 전화를 뭐하러 살려둬야 하느냐는 소리가 그래서 나왔다. 소모품은 쓰고 버리면 그만이라는, 그런 면에선 묘하게 부친을 닮은 딘은 더 이상 벨 소리를 내지 않는 핸드폰에서 관심을 껐다. 때문에 샘이 신주단지인양 모셔두던 아빠의 핸드폰을 꺼내 앞으로 공손히 내밀었을 적에도 그의 얼굴엔 감정이라는게 실려 있지 않았다.

『왜.』
정확히는「나에게 뭘 더 바래」이다.
『거기다 핸드폰 악세사리라도 새로 달고 싶어졌어?』
형의 냉소적인 반응을 이미 예상했던 것 같다. 이유를 설명하는 샘은 의외로 침착했다.
『전화가 왔어.』
『뭐?』
『어제 오후에 아빠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었어. 모르고 받지 않았더니 음성 사서함으로 바로 넘어갔더라. 녹음된 메시지가 있는데 들어볼래?』
모양만 질문이고 실상은 명령이다. 이쪽에서 듣겠다고 미처 긍정을 표시하지도 않았는데도 샘은 단축키를 누른 뒤, 딘의 오른손에 핸드폰을 쥐어주었다.
그게 꼭 코흘리개 어린애에게 수저를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느낌이라 딘은 이마를 찌푸렸다.
아니, 그것보다 아직까지도 존의 죽음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는게 희안하다.

『누군데.』
『여자야.』
『그건 너무 막연하다, 야.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그게... 잘 모르겠어.』
『알면 아는 거고, 모르면 모르는 거지. 무쉰 대답이 그 따위야.』

불평하며 핸드폰으로 바짝 귀를 가져갔다. 딩동, 신호음이 끝나고《음성 사서함에 메시지가 1건 녹음되어 있습니다. 재생을 원하시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여 주십시오》라는 기계적 안내문이 흘러나왔다. 폰맹이라는 누명을 하루라도 빨리 벗기 위해 딘은 엄마와 아빠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날의 날짜를 능숙한 손놀림으로 입력했다.
맙소사, 손아귀로 땀 난다. 보통은 결혼 기념일이라던가, 소중한 사람의 생일을 써먹는 거 아니었던가. 아버지에 대해 모르는게 없다고 생각했던 건 순전히 착각에 불과했다. 번호를 입력하면서 딘은 자신이 아버지 존에 대해 절반도 알지 못 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최소한 해병대 시절 군번이기만 했어도 이런 식의 당혹감과는 마주치지 않았을 터. 많고 많은 비밀번호 중에 하필이면 첫 데이트를 한 날짜라니. 장미 향기 가득한 사나이의 순정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진다. 괜히 부끄러워져서 헛기침을 하고 싶어진다. 존이 엄마 메리와 처음으로 키스한 날... 9월 17일. 그래서 비밀번호는 0917이다.

딩동~ 하고 재차 연결음이 이어졌다.
《존, 미안하네. 6년 만인가... 그보다 더 오래된 것 같기도 하군. 잘 있었는가.》
잔뜩 쉬어빠진, 걸걸한 목소리의 나이 많은 여자였다. 담배를 너무 피워서 성대에 이상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 어둡고 탁한 떨림은 목안에 가득찬 누런 가래를 연상시켰다. 그 느낌이 너무나 더러운지라 딘은「이게 뭐야」라는 시선으로 귀에서 떼어낸 핸드폰을 노려봤다.

어쨌든 녹음된 메시지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날세, 라바... 마담 라바 애브리일세. 다시는 날 찾지 말라고 경고했던 말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부탁을 할 사람이 존 자네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네. 염치 불구하고 또 한 번 부탁함세. 이 늙은이를 도와주면 안 되겠나. 죽을 날이 내일 모레이니 알아서 관 뚜껑 닫으라는 말은 하지 말아주게. 나야 가면 그만이겠으나 나 말고도 다른 사람의 목숨이 여럿 걸렸어... 존? 제발 부탁이야. 이리로 와주게. 곤란한 일이... 카악.》
여기서 노인의 호흡이 잠시 끊겼다. 딘은 으이그 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만졌다. 이 할머니, 덩어리진 가래를 뱉고 있다.
《미안, 미안. 요즘 내가 몸이 좋지가 않아서... 의사 말대로 진작에 담배를 끊었어야 했는데.》
폐가 꽉 막힌 듯한 마른 기침 소리가 잠시 뒤를 이었다.
《콜록... 아무튼 급한 일이 있으면 자네 아들 딩딩에게 연락하라고 그 애의 전화번호를 남겼더군. 하지만 난 자네가 직접 와줄 수 없을까 하고 바라고 있어. 여보게, 존. 자네 아들 딩딩은 아직 어려. 그 아이에게 이런 일을 부탁할 순 없네. 이건 엄살이 아니네. 딩딩은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야. 아들이 아니라 자네가 필요하네. 옛날에 내가 살던 집을 알고 있겠지? 사람 살리는 셈치고 이곳 라스베가스로...》

채 듣지 않고 폴더를 탁 소리가 나도록 접어버렸다. 딘은 씩씩거리며 아빠의 핸드폰을 부숴버리려 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양쪽 눈자위가 뻘겋게 변한 것이 심상치 않았다.
『이 망할 할망구가~!!!』
『형! 제발 진정해! 핸드폰이 망가지겠어!』
『딩딩이라니! 아직도 날 딩딩이라 부르다니!』
그리곤 애꿎은 동생의 멱살을 와락 붙잡았다.
『미리 경고하는데 샘... 너까지 날 딩딩이라 불렀다간 그 날이 네 제삿날이다. 알겠냐!』

샘은 내심 형을 딩딩이라고 불러보고 싶었다. 여리고 귀여운 느낌이다. 딩딩... 혀를 움직여 입속으로 그 단어를 가만히 굴려봤다. 음, 버릇이 될 것만 같다. 비눗방울의 상큼함이다. 이거 무지 좋다.
순간 딘의 눈초리가 사납게 휘어졌다.
『지금 목 부러지고 싶은 거지? 그렇지?』
하여 일단은 잘 알았다고 대답하며 혈압 오른 형을 달랬다. 화난 딘은 힘이 곱절로 세진다. 잡힌 목덜미가 대단히 아파왔다. 그래서 샘은 남의 얼굴 위로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고 있는 형을 향해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가까운 의자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우리, 앉아서 얘기합시다. 그러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정 뭐하면 차가운 물이라도 한 잔 드시면서...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형은 잘 아는 사람인가봐? 그 마담 로바인가 하는 할머니 말이야.』
『라바.』
그 자리에서 이름을 정정해주고 팔짱을 꼈다. 딘의 짙은 초록색 눈동자가 증오를 담아 새카매졌다.
『Shit! 라바는 우라질 놈의 관광 도시에서 강신술로 장난하며 돈이나 벌던 노친네야. 우리완 완전히 극과 극을 달리는 존재라고 할 수 있지. 누구는 뼈 빠지게 유령을 헌팅하느라 죽을 맛인데 누구는 유령을 불러내어 사람들에게 모자 씌워주듯 하고 있으니 세상 참 불공평하지 않냐? 그래서 아빠도 화가 치밀어 다시는 자기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던 거야. 멋대로 귀신을 불러놓은 주제에 자기 똥구멍을 닦지 못해 뒤로 넘어가버렸으니 상당히 꼴불견 아니냐. 남이 싼 똥을 치우는 기분이어서 아빠도 나도 일하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어.』

샘은 살짝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 저어... 그런데 난 마담 라바에 대한 건 기억이 없거든?』
어쩐지 바짝 약이 오른 말투다. 딘은 차디 찬 냉동고 속에서 생선 궤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15분간 찬 바람을 맞기라도 한 것 같은 샘의 태도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그때 겨우 열 여섯이었거든? 여드름으로 한창 고생했을 때니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
그 당연히 모를 거라는 표현이 귀에 거슬렸다. 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바르락 대들었다.
『그때 내가 헌팅에 끼어들기엔 어렸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집으로 돌아와서《오늘은 이런 일이 있었단다》하고 말을 해줄 수는 있잖아. 이럴 수 있어? 생각해보니 난 내가 어렸을 적에 형이랑 아빠가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녔는지 아는게 거의 없어.』
『얼씨구? 그래서 불만이라고? 이봐, 새미 넌《나는 어제 가게에 가서 I♡NY 라고 글자가 적혀진 검은색 셔츠를 하나 샀습니다》하고 시시콜콜 말하곤 하니? 그렇게 안 하잖아.』
『헌팅과 셔츠 사는 일이 똑같아?』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거야.』

딘은 경고를 담아 손가락으로 동생의 가슴을 눌렀다.
『그리고 이거 한 가지는 분명히 하자꾸나. 넌 아빠와 내가 헌팅을 하러 나가는 것도 싫어했고, 헌팅을 하고 돌아온 우리도 싫어했어.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돌아서선「다녀오셨어요」인사 한 번 안했잖아. 식탁 앞에서조차 제대로 말도 않고 말이지. 그런 네게「어제 우리들은 고약한 톨퍼를 둘이나 처리했단다」라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었을 것 같아? 언제는 기말 고사 시험 준비 중이라며 나랑 눈도 마주치지 않았으면서, 이제는 헌팅에 대해 왜 말을 안 해줬느냐며 불평이야? 너, 지금 대단히 억지 쓰고 있다는 건 알고는 있냐. 형은 허탈해져서 마구 웃고 싶어졌다. 내 동생이 아니었어봐. 진작에 맞아 죽었어.』
맞받아치는 샘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올라갔다.
『그럼 웃어! 멋지게 한 방 날리라고! 형이랑 아빠가 맨날 다쳐서 돌아오니까 그게 싫었어. 멍들고, 찢어지고, 잔뜩 부운 얼굴로 돌아와서 속상했어. 혹시라도 이러다 영영 안 돌아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해야 하는데 잘도 인상을 펴고 있었겠다. 형이야말로 알고 있어? 이번에야말로, 다음에야말로 정말로 외톨이가 되어버릴 거라고 생각하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고! 난 진짜 힘들었어, 딘.』
『Stop.』
이제 의자에 앉아야 할 사람은 샘이 되었다.
기절하기 전에 진정하고 호흡을 가다듬도록 하십시다. 딘은 의자를 손가락질하며 동생을 떠밀었다. 샘은 흥분하면 키가 곱절로 커진다. 평소에도 올려다 보기가 마뜩찮은데 가뜩이나 커다란 녀석이 발돋음을 한 채 지랄까지 하면 자기 같은 평균 사이즈의 인간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 되어버린다. 곰이 두 다리로 벌떡 일어나「어디 죽어볼겨?」라고 하는 것 같아 가끔은 생명의 위협마저 느끼곤 한다. 곰이 휘두르는 앞발에 맞으면 목뼈가 동강이난다 - 아빠의 친구였던 케일럽 아저씨는 우스개 소리랍시고 그런 말을 한 적도 있다.

바들바들 떠는 동생을 강제로 의자에 앉혀놓고 딘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좋아. 새미. 진정해라. 숨을 가라앉히고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지금에 와서 다시 할 얘기 따위가 어딨어, 딘. 난 이미 열 여섯 살 시절에서 졸업했다고.』
『그래도 난 너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하고 싶어졌어, 새미.』
『기억도 나지 않는 옛날 일이잖아.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 사과하는 건 바보 같으니까 그만둬. 대신 왜 마담 라바가 형을 딩딩이라고 부르게 됐는지에 대해 설명해봐.』
『.......... 야!』

뒷공작을 꾸미는 동생에게 한 방 멋지게 맞았음을 깨달은 딘은 다섯 박자 늦게 숨쉬었다.
금성에서 목성으로 워프하는 것까진 괜찮다. 멀미가 약간 나지만 그럭저럭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화성에서 들입다 안드로메다 성운으로 진출하는 건 반칙이다. 우주 패트롤이 출동, 겁나게 과속한 초광속 우주선에 벌금 딱지를 부과해버릴 것이다. 이럴 수는 없다. 딘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봤다가 다시 발잔등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가까운 곳에서 석탄이라도 타고 있는지 이글이글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타고 있는 것은 그의 머리. 양동이로 물을 붓는다고 해서 그놈의 불길이 쉬이 꺼질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샘... 이 겁 나는 자식. 처음부터 그걸 노린 거지?』
『노리긴 뭘 노려.』
『이게 누구 앞에서 딴청부리고 있어!』
샘은 순진한 표정으로 벌컥 화를 내고 있는 형과 가만히 눈을 맞췄다.
『왜 딩딩이야?』
『으이그~!!』

6년 전, 딘은 쌀쌀맞게 안부 전화를 끊어버린 동생을 원망하며 불평을 꺼낸 적이 있다.
「아빠, 방금 전에 난 세상에서 제일 치사하고 지독한 악당의 이름이 뭔지 알아버렸어요.」
「그게 누구냐. 닉슨 대통령?*」
역사 시간에 맨날 졸기만 했던 딘은 워터게이트에 대해선 잘 몰랐다.
「닉슨이 아녜요, 그건 샘 윈체스터예요.」

6년이 지난 오늘 날, 유감스럽게도 그 이야길 반복해야겠다.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악당.
동생이었다.

Posted by 미야

2006/12/29 21:36 2006/12/29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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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리엘 2006/12/30 03:17 # M/D Reply Permalink

    ㅋㅋㅋㅋ 우리 빅 브로 딘에게 딩딩이란 깜찍한 별명을...! 모니터 부여잡고 하트빔 날리고 있었답니다..ㅋ 역시 우리 슈뇌 형제들은 티격태격하는 게 정말 딱인듯!

  2. 써니 2008/02/11 19:33 # M/D Reply Permalink

    딩딩.. 크크크 차마 회사에서는 웃지는 못하겠고 고개숙이고 계속 주문만 걸었다는..
    지금집에서 읽고 엄청 웃고있어요.. 미야님 작명센스.. 크크크 진짜 딩딩이..
    어쩜 입에 쩍쩍 달라붙는 별명이에요.. ^^

  3. 크림베리 2008/12/26 01:10 # M/D Reply Permalink

    딩딩이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쓰러져요 ㅋㅋㅋ 아우~ 저도 왜 그런별명이 생겨났는지 너무 궁금합니다 ㅋㅋㅋㅋㅋ 딩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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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fanfic] redemption 01

※ 회개 다음엔 구원이라... 무쉰 제목을 저 따위로? 그 다음이 심판이니 이건 센스의 문제야, 센스의 문제! 정전사고 및 데이터 베이스 에러와 전쟁하며 작성했습니다. 덕분에 퇴고 상태가 평상시보다 안 좋습니다. 모쪼록 이해해 주세요. 어쨌거나 연말과 연초엔 업무의 량이 곱절로 증가합니다. 따라서 redemption 2편은 많이 늦겠습니다. 하악질 레벨은 믿거나 말거나 건전을 지향합니다. ※


갗난아기가 배 고프다고 앙앙대는 듯한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건너방 유아 침대에 뉘여진 동생이 밥 달라며 빽빽 울고 있다. 미리 맞춰놓은 자명종이 왜 울리지 않은 걸까 짜증부리며 반사적으로 다리로 이불을 찼다. 젖병을 데우고 서둘러 동생을 먹여야 한다... 그러다 아차 싶었다. 속옷에 오줌을 흥건히 싸고 짜증에 겨워 울음을 터뜨리던 동생은 어느새 고릴라처럼 덩치가 커져 한참을 올려다 봐야 한다. 딸랑이를 던지고 장난감 불자동차를 입에다 넣고 우물거리던 샘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이다. 그가 아끼던 유아 침대는 이제 텅 비었다.
자신이 착각했음을 깨달은 딘은 안도의 호흡을 내쉬며 모래가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깔깔한 눈을 도로 감았다. 아무래도 옆방으로 아기를 데리고 있는 젊은 부부가 잠시 쉬어가는 모양이었다. 편치 않은 자동차 여행 탓에 탈이 난 아기와, 아픈 아이를 어르느라 기진맥진한 엄마를 상상하며 몸을 뒤척였다. 하여간 얇은 합판으로 칸막이를 댄 싸구려 모텔은 이래서 문제다. 대형 트레일러 운전사들이 창녀와 섹스하면서 내지르는 교성도 듣기 싫어 죽을 지경인데 이젠 애까지 울고 있... 어랍쇼.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간편한 어린이 해열제, 토로펜 시럽~!》
딴따라 음악에 맞추어 신나서 상표명을 외치는 여자 목소리에 반응,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올려떴다.
뭐야, TV 광고였냐. 사람 헷갈리게 만들고 있어.
갑자기 기운이 좍 빠지려 했다.
딘은 이불 속에서 고개만 삐죽 내밀고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샘? 지금 TV 틀었니?』
『아아, 미안. 소리를 줄인다는게 실수로 반대쪽 버튼을 눌렀어. 지금 볼륨을 다시 줄일게.』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도대체 지금 몇 시야. 새벽 2시?』

도대체 누구 동생이 이런 또라이 짓을 하는 거냐. 딘은 투덜대며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일부러 커튼을 열고 바깥을 내다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아직 세상은 진흙과도 같은 새카만 어둠에 잠겨 있다. 모텔 지붕에 달린 조명등이 무광의 백금을 연상시키는 빛을 내뿜었어도 쥐죽은 듯한 적막을 내쫓기엔 역부족이다.
퉁퉁 부운 눈꺼풀이 도로 닫기려는 걸 참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새벽 2시 12분이다. 그가 눈을 붙인지 딱 1시간 지났다. 덕분에 머리가 멍한게 아주 죽을 맛이다. 솜뭉치에 물을 잔뜩 붓곤 그 위로 무거운 돌멩이 덮개를 눌러놓은 듯하다. 입안이 짜고 텁텁했다. 딘은 하품과 함께 배를 긁었다.

『무슨 문제 있어? 샘. 왜 아직도 안 자는 거야.』
『아무래도 낮에 커피를 너무 마셨나봐. 졸음이 오질 않아.』
『많이 마시길 뭘 마셔. 점심에 나랑 같이 에스프레소 커피를 딱 한 잔만 먹었잖아.』
『그랬던가... 글세. 잘 모르겠네.』

보풀이 일어난 낡은 소파에 앉아 등을 둥글게 말고 있던 샘은 딘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채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광고가 끝난 텔레비전 화면으로 다시 웃는 소리 요란한 연예인 좌담 프로가 재방송되기 시작했다. 남자 둘에 여자 하나가 소파에 앉아 자기네들끼리 킬킬거리면서 무어라 떠들었다. 한 남자가 대단히 짖궂은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여자가 웃으면서 자신의 미니스커트를 거꾸로 뒤집는 시늉을 했다. 치마 안으로 속옷을 과연 입기는 입었는지 걱정된다. 드러난 허벅지가 끝장으로 아슬아슬하다. 조잡한 웃음 효과가 터지면서 방청객들이 죽는다고 박수를 쳤다. 이제 소파 위로 올라가 원숭이처럼 방방 뛰기만 하면 되겠다.「다들 맛이 갔구만유~」탄식하며 남성 게스트 중 한 명이 의자에서 미끌어졌다. 사회자가 손사레를 치며 구두를 벗어 던졌다. 감청색의 양말이 실수로 허공으로 날아올랐고, 방청석은 재차 뒤집어졌다.

저런 걸 무표정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대단히 기괴하다. 병맥주를 리모컨 대신 손에 쥐고 있는 샘의 표정은 오히려 지루해 보였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말라빠진 하이에나가 들판을 가로지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다면야 또 모르겠다. 내일은 하루종일 비가 온다는 일기 예보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동생은 느릿한 동작으로 맥주를 들이키기만 했다.
딘은 눌린 자국이 선명한 베개를 주먹으로 툭툭 치며 쓴웃음을 지었다.
토크쇼의 연출가가 지금의 샘의 표정을 봤다면 자신의 무능함에 열불이 나서 사표 쓰고 울었겠다.

하여 이것은 형의 의무이다. 샘의 목을 쥐고 흔들면서《웃어! 웃어!》협박을 해보자.
『인석아, 재미 없는 걸 왜 억지로 보고 있니. 차라리 야한 걸 보자.』
자리에서 일어난 딘은 동생 옆으로 가서 풀썩 앉았다.
속옷 차림으로 엉덩이를 붙여오는 형을 보고 샘이 인상을 찡그렸다. 모양은 2인용 소파가 맞았으나 덩치가 산만한 성인 남자 둘이 나란히 앉기엔 어쩐지 좁은 느낌이다. 샘이 구석으로 도망갔다. 딘도 서로의 몸이 꽉 끼는 걸 피하고자 오른쪽 다리를 사이드 테이블 위로 올려 놓았다. 음, 조금은 낫다.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리모컨을 찾아 손에 쥐었다.

샘이 퉁명스레 말했다.
『형. 야한 채널은 유료야.』
『나도 알어, 샘. 하지만 우리가 돈을 내는 것도 아니잖아. 신용카드 회사가 대신 내주는데 뭐 어때. 그러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멋진 누나들을 감상하도록 하자꾸나.』
숫자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자 화면이 살색으로 변했다. 때마침 그렇고 그런 장면이 시작되어 갈색 머리카락의 여성이 반라의 몸을 흔들며 색정적인 신음을 토해냈다. 침대가 삐걱거리면서 카메라의 각도가 외설적으로 변했다. 립스틱을 바른 빨간 입술이 남자의 체모를 거침없이 흝어 내려가면서 붉게 채색된 기다란 줄을 만들었다. 쪼옥 하고 피부를 빨아들이는 소리가 낯간지러웠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봉긋 솟은 여자의 유방을 쥐었고 헐떡거림이 한층 더 커졌다.

『딘.』
손바닥을 마주 부비며 샘이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커다란 남자 둘이서 이러고 있는 건 청승맞아서 싫어. 변태 같아.』
『싫다고? 알았어, 새미. 그럼 넌 침대로 돌아가서 자. 난 혼자서 이거 볼래.』
『양쪽 눈을 다 감고 있으면서 보긴 뭘 본다는 거야. 형은 콧구멍으로도 볼 수 있어?』
『시끄러. 소리는 열심히 듣고 있으니까 그걸로 됐어.』

말도 안되는 딘의 대꾸에 짜증이 났던 것 같다. 샘이 형에게서 리모컨을 빼앗아 들었다. 화면은 다시 별 재미도 없는 토크쇼로 돌아갔다. 카메라가 박수치는 방청객들을 따라가면서 하얗게 빛났다. 갑자기 밝아진 화면에 눈이 시렸던지 샘이 마른 눈꺼풀을 연신 깜빡였다. 이래서 어둠 속에서 불을 다 끄고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건 그다지 좋은 습관이 아니다. 눈이 충혈되는 느낌이다. 쏘면서 아파왔다.

『있잖아, 딘.』
『오냐.』
『아빠의 핸드폰 말이야... 내일 모레까지 처리하지 않으면 서비스가 중지되어버려.』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발언에 딘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갔다.
『샘? 그건 일주일 전에 이미 끝낸 얘기잖아.』
『맞아. 끝낸 얘기지.』
『그런데 왜 지금와서 그 이야길 다시 꺼내는 건데?』
『그냥.』
샘은 맥주를 입에 물고 어깨를 한층 더 구부정히 했다.

존은 유품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남은 거라곤 오래된 일기장과 핸드폰, 뭔지도 모를 열쇠 꾸러미 같은 사소한 잡동사니들이 전부였다.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던 얇은 지갑 속에는 자녀들의 사진조차 들어가 있지 않았다. 가짜 신분증과 위조된 신용카드 몇 장, 약간의 지폐... 너무나 그 답다고 딘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평소에도 물건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 걸 끔찍이 싫어했던 사람이었다. 시신마저 불태우자 남은게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자식들은 그저 기가 막혔다.
《이래선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 같잖아》- 콧물 눈물 범벅으로 울면서 샘은 그 사실을 슬퍼했다. 아빠의 핸드폰을 두손으로 부여잡곤 창피한 것도 모르고 엉엉 울었다.

사이드 테이블로 올려놓은 발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가며 딘은 인상을 찡그렸다.
『새미. 아빠에게 남겨진 음성 메일은 모조리 확인했잖아. 가뜩이나 수입도 편편치 않은데 우리가 사용하지도 않는 핸드폰을 계속 가지고 있을 까닭이 없어.』
『그건 나도 잘 알아.』
『아니, 넌 하나도 모르는 것 같다.』
가렵지도 않은 이마를 긁으면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댔다.
아아, 역시나 의자가 좁다. 몸이 편안해지긴커녕 엉덩이가 꽉 껴서 되려 불편해졌다. 딘은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가며 적당량의 면적을 차지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동생쪽으로 몸이 더욱 밀착되는 느낌이었다. 가벼운 차림새로 오랫동안 소파에 앉아있던 동생의 피부는 이불 속에서 뒹굴던 자신과는 달리 차가웠다. 서로의 팔뚝과 팔뚝이 쓸려 오도도 하고 소름이 돋았다. 젠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조만간 결정을 봐야 할 것이다. 곰 덩치의 동생을 발로 차서 떨어뜨리던가, 아님 다른 보조 의자를 끌어오던가. 어느 쪽이 괜찮을지는 졸려서 반 미칠 것 같은 머리론 판단이 쉽지 않았다.

『정리할 건 정리해야지.』
손바닥으로 동생의 튼실한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아빠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핸드폰 따위가 아니야.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사람들을 돕는 것...』
『유령들을 헌팅하고.』
『바로 그거야, 새미. 아빠는 그걸 너와 나에게 가업으로 물려주고 가셨어.』
샘의 단단한 근육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가며 딘은 강조에 강조를 더했다. 그깟 핸드폰이 정지 먹는다고 시무룩해져 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아빠의 전화번호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그의 사명과 이념까지 짜부라져 없어질 성 싶은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딘은 주먹을 쥐고 법정에 선 재판관처럼 동생을 탕탕 때렸다.

『아울러 고백하자면 말이지, 새미. 어제 내가 아빠 핸드폰 요금을 이미 처리했거든?』
샘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쩍 벌어진 입이 감히 다물어질 생각을 못 했다.
『뭐? 하지만 형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미안하다. 용서해라. 네 형은 변덕이 죽 끓 듯 한다.』
놀란 샘의 눈을 마주보면서 딘은 입술 양끝을 살짝 올려 웃었다. 기분 좋게 웃자 눈가에도 자글자글 주름이 졌다. 그게 너무나 환한지라 샘은 어둠 속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쏘아봤을 때보다 더욱 눈이 시렸다.

『자, 이제는 침대로 가서 푸욱~ 잠들 수 있는 거지? 새미 어린이.』
딘의 질문에 이렇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형의 어깨를 와락 감싸고 그 따뜻한 곳으로 머리를 박았다. 다 알고 있다며 툭툭 치는 손길이 얄밉지 않다. 딘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장난을 걸어왔어도 샘은 움직이지 않았다.
『어때. 역시 형이 최고지?』
『그래도 미리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최고는 아니야.』
『거 되게 야박하네!』
말로는 불평했어도 안도감과 편안함이 순식간에 어깨를 덮어왔다. 아주 천천히, 동시에 빠르게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그래서 샘은 졸린 표정으로 눈을 비볐고, 텔레비전 속의 사회자가《그럼 잠시 후에 다시 뵙겠습니다~》라고 떠들며 차렷 자세를 취하는 것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 했다.

동생이 고른 숨소리를 내는 것과 비슷하게 하여 다시 광고가 시작되었다. 투박한 비닐 장화를 신은 남자가 계곡에서 낚아올린 커다란 송어를 들어보이며 활짝 웃었다. 저 멀리서 송어 사냥의 강적을 만났다며 곰이 울부짓었다. 즐거운 휴가, 낚시의 천국. 희생되는 지렁이!
국방색 모자를 살짝 비틀며 배우가 상호명을 외쳤다.
《당신도 대어를 꿈꿀 수 있습니다. 첼리시아 낚싯대!》
딘은 후 하고 한숨 쉬며 리모컨 버튼을 눌러 TV 전원을 껐다.

그럼 서둘러 궁리해보자.
아직 내지도 않은 아빠의 핸드폰 요금을 동생 모르게 처리하러 가려면 무어라 거짓말을 하면 좋을까. 배가 아파 약국으로 소화제를 사러 간다고 해볼까, 아님 거시기에 바를 연고를 사러 간다고 해볼까.
먹다 남긴 맥주병을 원샷하며 눈을 감은 동생의 등으로 팔을 둘렀다.

기쁘다.
그가 아끼던 유아 침대로 오랜만에 동생이 돌아왔다.

Posted by 미야

2006/12/27 11:57 2006/12/27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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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야 2006/12/27 15:00 # M/D Reply Permalink

    왕년에 활활 불탄 적이 있어 이 또한 실사를 빙자한 에를릭 형제가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보입니까? 그러고보니 딘의 말투가 에드워드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 갑자기 덮치는 패닉. 나의 취향은 곰덩치 동생과 땅콩 형이었던가!

  2. amille 2006/12/28 08:39 # M/D Reply Permalink

    Supernatural은 전혀 본 적 없는데도, 미야님 팬픽은 포스에 끌려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강철 형제 이미지랑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네요? ^^

  3. 써니 2008/02/11 18:02 # M/D Reply Permalink

    슈내도 잼있지만 미야님의 글도 잼있어요.. 지금 회사에서 일은 안하고 요로코롬 미야님 글만 주궁장창 읽고 있답니다..
    저희 사장님 아시면 아마도 저 짜릴지도.. ㅠㅠ
    근데 딘이 어떻게 새미볼래 핸드폰 요금을 낼까? 심히 궁금하군요.. ^^

  4. 크림베리 2008/12/26 01:04 # M/D Reply Permalink

    ㅋㅋ 딘이 거짓말한거였군요~ 납부를 샘몰래 어케 할런지 기대됩니다~ㅋㅋㅋ

  5. doll 2010/06/16 17:12 # M/D Reply Permalink

    딘샘 찾다가 들어왔어요~ 저완달리 아주 오래전부터 슈내를 보셨나봐요 픽이 2006년도부터....ㅎ 시즌2때부터네요
    잘보고있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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