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수십 겹의 이불 아래로 깔린 딱 한 알의 강낭콩이 거슬려 도무지 눈을 붙일 수가 없게 된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결국 취침을 포기하고 붉게 충혈된 눈으로「으아, 아침이잖아!」탄식한다. - 강낭콩 싫어. 내 침대에서 그거 꺼내서 없애줘, 형. - 이놈의 자슥! 무시하고 쿨쿨 자면 그만이잖냐! 딘은 그런 동생이 늘 못마땅했다. 예민하고 까탈스런 강낭콩 공주는 무덤덤하고 우직스런 텍사스 카우보이로 어떻게든 개조될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그는 동생의 성격을 바꿔보고자 나름 연구도 많이 해봤다. 아쉽게도 땅바닥에 네 발로 엎드려 말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밧줄을 - 정확하게는 면 소재의 커튼 끈을 던지는 놀이는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는게 문제지만.
아무튼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비난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나름 할 말은 있다. 결과적으로 샘을 그렇게 만든 사람은 딘이다. 샘을 힘들게 만든 강낭콩의 실제적인 정체가 바로 딘인 것이다. 다짜고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하는 사람을 옆에 세워두고「저 인간이 갑자기 왜 저러지」질문을 반복 3천만 번만 해보라지. 행여라도 말 실수를 했나, 불쾌한 행동을 저질렀나, 아님 어젯밤에 야참으로 먹은 참치 샌드위치가 상해 급성 배앓이라도 났나, 별별 가능성을 하나씩 곱씹다보면 부처님이 아닌 이상 겹겹의 비단 아래로 숨은게 강낭콩이 아닌 미세한 겨자씨 한 알이라고 해도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샘은 맑은 하늘에 대고 버럭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졌다. 무엇 때문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느냐고 물어보면「아무 것도 아니야, 새미」라는 대답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간 큰코 다친다. 딘은 뼈가 부러져도 별 거 아니라고 대답하는 말종 인간이니까. 뿐만 아니다. 메탈리카의 음악을 귓청이 떠나가라 크게 틀어놓곤 「피곤하니까 음악이나 듣자」라고 말하며 남들과 대화하려는 노력 자체를 회피했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는 진짜지 최악이었다. - 형은 괜찮지 않아. 우린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이야기를 해봐야 해. - 난 괜찮아! 괜찮다고! 나더러 괜찮냐고 또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맹세코 패버릴테야! 그래서 턱이 돌아가게끔 한 방 멋지게 맞았다. 언뜻 보기에 딘은 저속한 농담 따먹기나 즐기는, 행실이 헤프고 보푸라기보다 더 실속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술집에서 아가씨를 꼬실 적의 그는 한 없이 가벼운 입을 자랑했다. 하지만 그거야 꾸며낸 거짓을 줄줄 늘어놓을 때만 그랬고 성서에 손을 얹은 채 진실만을 얘기하겠습니다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는 180도 돌변해서 헌법이 보장한 묵비권을 철저하게 행사하고 보았다. 꼬집고, 달래고, 윽박질러도 소용이 없다. 그는 망할 대가리 윈체스터 가의 장남이었다. 한숨이 푹푹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가끔씩 샘은 같이 여행하는 사람이 한 배에서 나온 형제가 아니라 콘크리트 벽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지곤 했다. 그 벽은 두꺼웠다 그리고 단단했다. 높이 또한 이루말할 수 없이 높았다. 한참을 올려다 보고 있노라면 힘껏 당겨진 목이 아파왔다. 그래서 벽 너머로 숨은 딘을 찾는 일은 능숙한 헌터의 실력으로도 쉽지 않았다.
「비단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잖아. 지금은 사냥 중이야. 집중해야만 해, 샘 윈체스터.」 따지고보면 딘의 기분이 좋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애지중지해 마지 않는 그의 베이비는 끔찍한 오물을 뒤집어쓴 상태 그대로였고, 멍든 몸은 아프지, 머리는 구둣발에 밟혔지, 한숨도 자지 못해 눈은 깔깔하지, 억지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상황은 결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인상을 쓰는 것도 당연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것도 당연하다. 동생이 마치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당연... 이쯤해서 으득 소리가 나도록 어금니를 씹었다. 당연하긴 뭐가 당연하냐! 왜 나랑 시선도 안 마주치려고 하는 건데?! 샘은 탁 소리를 내며 들고 있던 지도를 무릎 위로 놓았다.
그걸 일종의 신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어둠이 깔린 도로를 좌우로 두리번거리던 딘이 겁나게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샘. 이번 갈림길에서 우회전이냐, 아님 좌회전이냐.』 『그놈의 망할 장난감 폭탄을 갖고 레몬이라 떠들어댄 이야긴 아무에게도 하지 않을게. 정말이야, 딘. 내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약속할 수 있어.』 『뭐?』 딘은 정말 놀랐다. 자애의 교회로 가는 길이 어느 방향이냐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이 레몬이다. 샘이 그토록이나 간절히 원한 것이 그저 형과 눈을 마주하는 거였다면 그렇게 말한 건 대박의 성공이었다. 다친 손목이 쓰라려 한 손으로만 핸들을 조작하던 딘은 사고의 위험성도 망각한 채 고개를 돌려 조수석에 앉은 동생을 빤히 쳐다봤다. 기가 막혔던지 입도 헤 벌려져 있었다. 『이놈이 지금 콜라 마시고 딸꾹질을 하고 있어! 어느 쪽이냐고. 왼쪽이야, 아님 오른쪽이야.』 『주리를 튼다고 해도 아무에게도 말 안 할게. 맹세해. 맹세한다고.』 『뭔지도 모를 맹세는 나중에 해, 인석아. 처음부터 지도는 네가 들고 있었잖아! 졸려서 눈 뜬 채로 꿈 꾸고 있냐?! 뚱딴지 같은 소리는 집어치우고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나 말해. 빨리!』 가짜로 화를 내는 척하는 거라고 하기엔 눈빛이 표독스럽다. 차를 세우곤 여기서 당장 내리라고 윽박지르지는 않을까 걱정스럽다. 이래저래 마음 상한 샘은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금 지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좌회전.』 『진작에 그럴 것이지.』
귀찮게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뒤로 넘겼다. 사흘 내내 비만 내렸다는 식의 우중충한 기분을 바꿔보자. 샘은 코피를 흘려가며 기말시험에 몰입하던 기억을 더듬었고, A+ 성적을 받았던 성취감을 떠올렸으며, 그때의 감각을 일깨워 자신이 알고 있는「뱀파이어에게 대항하는 법」을 하나하나 열거해 보았다. 햇빛에 강한 화상을 입지만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소설이나 영화에서처럼 마늘이나 십자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목을 베면 죽는다. 죽은 자의 피는 맹독과 같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있잖아, 딘. 형은 나에게 화가 나면 말수가 현저하게 줄어든다는 거 알아?』 『뭐?』 대학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았던 건 그저 재수가 좋아서 그랬던 거였다고밖엔 말 못 하겠다. 옛날에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 모르겠다. 새까맣게 손때가 탄 강의 노트를 열심히 들춰봐도 글자가 머리에 하나도 안 들어올텐데 말이다. 샘은 무의식중에 네 개의 손톱을 입에 대고 깨작거리기 시작했다. 뱀파이어가 다 뭐라냐. 고운 먼지가 된 지식은 하얗게 날아갔다.
이런게 제일 싫다. 딘은 덩치에도 어울리지 않는 강낭콩 공주를 연기하는 동생을 힘껏 노려본 뒤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bitch 같은 놈이라 욕했다. 이 마당에 싸움질이냐 - 뒷자석에 앉아있던 리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백미러를 통해 견제에 들어갔다. 그걸 모르지 않은 딘은 최대한 점잖케 동생을 나무랬다. 다시 말하자면 달리는 차밖으로 밉꼴맞은 동생을 뻥 걷어차진 않았다는 얘기다. 『이 자식이 진짜지 누굴 엿 먹이려고... 뭐가 불만이야. 너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이 몸이 좇 같은 수다를 떨기를 원해?』 『형... 제발.』 『좋아. 소원대로 해줄게.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딘 윈체스터입니다. 미모는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제 특기는 자물쇠 따기와 신용카드 사기입니다. 아참, 깜빡했군요. 은탄환 만들기도 참 잘 해요. 취미는 바닷가에서 해가 떠오르는 걸 보는 겁니다. 이때 C컵의 호리호리한 예쁜 아가씨가 맥주랑 육포랑 같이 해서 옆에 있어주면 금상첨화죠. DVD나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해요. 액션, 스릴러, 가족 드라마, 포르노, 가리는 것 없어요. 줄거리는 시시해도 배우만 잘 생기면 그만이죠. 어때요. 나랑 같이 맷 데이먼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갈래요? 대신 콜라와 팝콘은 그쪽에서 사요.』 『그만해, 딘.』 『남말하고 앉았네. 똑바로 앉고 손톱은 그만 깨물어!』
딘은 자신의 나쁜 버릇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동생이 미웠다. 날아드는 벼락에 머리카락을 태운 샘은 무릎을 쥐었다 폈다 했다. 표정이 시무룩하다. 『나는 그냥...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이야.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한데.』 『그건 나도 몰라.』 몰라? 지금 모른다고 말 했어? 딘의 눈이 더 커졌다. 『맙소사, 샘. 뭐가 미안한지도 모르면서 넙죽 사과부터 하냐?! 이거, 이거, 네 머리에 아무래도 회충이 들어갔나 보다. 잊지 말고 내일 아침에 약국에 들려 구충제를 꼭 사도록 하자. 알겠지?』 정말이지 나쁜 놈! 딘은 운전석의 창문을 적당히 내리고 새벽의 찬 바람을 맨 얼굴로 맞았다. 이러면 뺨이 일그러져도 바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머리가 차가워지면 홧김에 남의 집 거실에 차를 처박는 사고를 저지르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발치만 쳐다보던 샘이 개미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미안. 하지만 이 말만 할게. 나 때문에 형이 기분 나빠 하는 건 싫어.』 더는 못 참겠다며 딘이 말을 막고 나섰다. 『그게 바로 네 문제야, 샘.』 샘은 정확히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도 모른다. 다만 성격이 워낙에 예민하다보니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뿐이다. 그래서 착한 어린이는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합니다, 이러고 고개부터 숙인다. 그런데 빌어먹을 동생은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자기가 접시를 깬 건지 아님 금방 세탁한 바지를 찢어먹은 건지 구분도 못 한다. 그저 상대방이 화를 내는게 싫어서 어떻게든 그걸 무마하고 싶을 뿐이다. 결국 그건 죄의식을 모면하려는 궁여지책에 불과하다. 사과도 아닌 것이다. 『진정한 사과라는 건 말이다, 새미.「접시를 깨서 미안합니다. 빗자루를 나에게 주세요. 이걸 치우겠어요. 다음엔 이러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너처럼「뭐가 잘못되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나에게 화를 내는 건 잘못된 거니까 내 사과를 받고 빨리 기분 풀어요」라고 말해선 한참 틀렸다고 할 수 있지. 내가 하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가 가니?』
빌어먹을. 말을 내뱉고 나서야 후회가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한 것이 원흉이다. 딘은 손바닥으로 수염이 자라 깔깔해진 얼굴을 쓸어내렸다. 옆에서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샘도 싫었고, 뒤에서 철부지 어린애를 야단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리도 싫었다. 모든 걸 잊고 당장 쓰러져 팔베개를 하고 코를 골고 싶었다. 심호흡을 했다. 감정이 흔들리는 건 약해졌다는 증거. 아빠가 호되게 야단친다.
보다 안전한 도피처가 필요했다. 딘은 백미러를 쳐다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헌팅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교회 안으로 찌꺼기들이 많이 깔려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리.』 『어쩌긴. 쓸어버려야지.』 갑작스런 화제의 전환에 샘이 옆에서 움찔거렸다. 그걸 모르진 않았지만 딘은 일부러 무시했다. 다행이라면 리도 거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는 거다. 『도착하자마자 정면으로 들어갈 거지?』 『당연히 정면이지. 그럼 툼 레이더의 라라처럼 옥상에서 밧줄 감고 뛰어내릴까?』 『라라 흉내를 내기엔 언니 가슴은 보통이잖아.』 『시끄러! 내 가슴은 천연! 그 여자는 실리콘!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흥! 천연이라고 해도 원더브라 찼으면서.』 『@&#@)!_#(*!』 찢어지는 비명 내지는 항의에 딘은 짐짓 귀가 아프다는 시늉을 해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진정하고 가운데손가락은 그만 내려.』
이상한 일이다. 영양가 하나 없는 저속한 농담을 지껄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바짝 올라갔던 어깨가 도로 편안해지려 했다. 핸들을 쥔 손가락으로 전해져오는 차체의 덜컹거림도 더 이상 지옥의 품바야 합창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돌아왔다. 레몬 주스로 쓰여진 글자가 촛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게 선명해졌다. 딘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정면을 주시했다.
어두운 생각들은 매듭으로 잘 묶어졌다. 이제 다 괜찮아. 내일 아침엔 약국에 들려 샘에게 먹일 회충약을 살 거고. 그렇고 말고. 모든게 정상.
Posted by 미야
2007/09/02 14:17
2007/09/0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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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
『어쨌거나 말인데... 큼!』 존재가 불확실한 투명한 생선가시가 내부 점막을 자극했다. 몸에 해로운 담배 같은 걸 입에 달고 사니까 아무래도 목이 안 좋아지는 거다. 신경질이 나는 걸 느끼며 본론을 꺼내기에 앞서 까칠한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다 진실이 뭔지 깨달았다. 지금 맛보고 있는 이 껄끄러움은 니코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끔찍하게 싫어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암에 걸린 아이에게「넌 곧 건강해질 거다. 내년에는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같이 축구도 할 수 있을테니 기대하렴」라고 아무렇게나 둘러대는 것과 마찬가지다. 곧 건강해진다고? 웃기는 소리다. 3개월 뒤면 한줌의 가루가 되어 슬퍼하는 부모에게 돌아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방정맞은 입은 잘도 거짓을 나불거린다. 그렇게 해서 위통이 생기고, 만성 두통이 도지고, 스트레스가 커지고, 쓸데없이 군것질에 손을 대 다이어트에 실패한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일부러 금연을 각오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군 - 쓰게 웃으며 리는 살인 현장으로 파견나온 경찰관인양 바지 뒷주머니로 손을 꾸셔넣었다.
『이쯤해서 제안을 하나 하고 싶은데, 친애하는 로마 병정 씨. 총독 빌라도 말고 로마에 대항하는 열심당원 쪽으로 붙지 않으실라우?』 손을 뒤로 감추는 건 공격의 의사가 없음을 의미하는 행위다. 로마 총독은 뭐고 열심당원은 또 뭔지. 짐작도 못해본 행동에 덤으로 제안까지 더해지자 남자의 입술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오로지 서로를 죽이는 일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뱀퍼가 뱀파이어와 협상을 하려는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숫자로 따지면 비행기가 추락하는 100만분의 1이라는 확률보다 약간 낮다 - 남자는 최근들어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뉴스를 TV로 본 적이 있던가 하고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고보니 일주일 전인가 해서 어디선가 경비행기가 떨어져 4명이 죽었다고 들은 것도 같다. 따지고 보면 100만분의 1도 아주 작은 숫자는 아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미안하지만 어렵게 비유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돌려 말했나. 오케이.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우리에게 협조해.』 『이봐. 나는 뱀파이어야. 뱀퍼에게 협조라니, 그런게 가능할 리 없...』 『그쪽에서 보호하고 있는 미친 공주님은 누가 뭐래도 통제 불능이다. 당신은 가급적 일을 조용히 마무리 짓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은혜를 모르는 망할 년은 일부러 끝장을 보자는 식으로 일을 크게 키우고 있다고. 원수인 존 윈체스터의 가족을 처리하면 모든게 잘 해결될 거라는 바보 같은 생각은 버려. 지금의 상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니다. 끝장을 단 하룻밤 사이에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커졌어. 뚜껑을 그냥 덮기엔 냄비 속의 죽이 지옥의 불가마니인양 펄펄 끓고 있다고.』
일순 표정이 굳은 것을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미친 공주, 망할 년」의 표현이 리의 입에서 나온 순간 남자는 압정을 밟기라도 한 것 같은 날카로운 충격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왔으면서 자제력을 잃고 흐트러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남자는 재빨리 표정을 바꿔 생전 처음으로 에펠탑을 본 촌뜨기처럼 굴었다. 와, 저게 말로만 듣던 파리의 명물인가. 지나가는 사람더러 기념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야겠군. 그런데 내가 불어를 할 줄 알던가. 실례합니다, 마드모아젤. 아닌게 아니라 그는 천연덕스럽게 눈을 깜빡거리며 무슨 소린지 전혀 못 알아 듣겠다고 딴청을 부렸다.
『답답한 자로군! 다시 말해줄까. 돌았다니까!』 리는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여겼던지 맛이 간, 완전히 돌은, 제정신이 아닌 등등의 험악한 표현이 굵은 글씨체로 첨부되었다. 그걸 본 남자는 기분이 상한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리의 행동은 언뜻 봐선 지능이 모자란 멍청한 바보를 골리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표현력이 부족해서 그렇지 리는 어디까지나 진지했고, 곱절로 심각했다. 『내가 지금 개념 없게 장난이나 치고 있는 것 같아? 응?』 마약에라도 취한 것처럼 사고 능력을 잃고 바깥을 떠도는 마을 주민의 수가 단 하룻만에 무려 열 여덟을 넘어갔다. 그것도 트럭에 받혀도 절대로 죽지 않고 - 허리가 90도 각도로 뒤로 꺾어진 채 걸어다니고 - 때 이른 할로윈 분장치고는 너무가 기괴스러운 -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났음을 짐작한 마을 보안관이 탱크와 미사일을 동원해달라고 주 방위군에 연락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 - 광장 한 가운데로 장작더미를 하늘 가까운 높이로 쌓아두고 모조리 불질러버린다 해도 과연 해결이 될까 의심스럽고 - 원망. 원망하고 있다. 적의를 드러낸다. 분노. 모두 죽어버리길 바라고 있다.
『우물에서 썩은 쥐가 떠오를 거야. 수레엔 눈 뜨고 죽은 시체가 가득이고. 벌려진 입으로 튀어나온 시퍼런 혀를 벌레가 씹어대겠지.』 근처로 쓰러진 세 구의 시체, 내지는 시체로 짐작되는 몸뚱이를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이제 알겠어? 열 여덟에 다시 셋을 더해 스물 하나다.』 『잠깐. 이곳에 드러누운 세 명은...』 『도중에 말을 자르지 말고 들엇! 도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이런 경우는 금시초문이다. 아직도 모르겠나! 일이 이지경인데 다들 손가락만 빼물고 있을 것 같아? 장담하는데 외국에서까지 뱀퍼들이 장비를 챙겨 달려와선 얼씨구나 해가며 대규모 사냥을 준비할 거다.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가축의 피를 빨며 조용히 숨 죽이고 사는 뱀파이어들까지 모조리 잡아 목을 베어라 - 학살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로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를 악다물고 턱을 치켜올렸다. 실제로 남미쪽의 혈기왕성한 뱀퍼들이 미국행 비행기 티켓 가격을 흥정하기 시작했고, 소문은 이미 퍼졌다. 그들 중 하나가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치~즈를 외치게 되면 부러움과 질투심에 휩싸여 나도, 나도 소리를 지를 사람은 최소한 수 십 명에 이른다. 엎친데 덮쳤다고 콜롬비아나 멕시코 쪽의 뱀퍼들은 자비심이라는 걸 모른다. 맥거번이나 피어스, 고든 같은 소문난 강경파도 감히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거칠고 막무가내다.
남자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이미 씻어낸 듯 침착함이 사라져 있었다. 『기다려. 모두 열 여덟이라는 건 지어낸 거짓말이지?』 『열 여덟이 아니다. 피 값의 계산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해야지. 스물 하나야.』 『제기랄. 저기 있는 세 명은 빼. 그들은 원래부터 내가 부리던 종이다.』 그래봤자 열 여덟이나 스물 하나나 거기서 거기다. 대충 얼버무릴 숫자가 아닌 것이다. 지금은 화성으로 탐사선을 착륙시키는 2007년이고, 치명적 전염병 내지는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독소 운운하기엔 사람들 머리가 지나치게 똑똑해졌다. 세계 곳곳으로 연결된 인터넷은 또 어떻고. 예고도 없이 가까이 접근해오는 족쇄의 찰그당 소리를 들었다. 초조한 기색으로 손가락을 깨물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가 불현듯 답답하게 느껴졌다. 남미의 뱀퍼들이 살육의 냄새를 맡고 흥분했다는 리의 이야긴 단순한 허풍은 아닐게다. 하룻밤 사이에 열 여덟.
- 책임을 져줘. - 나에겐「앞으로」가 없어. 왜냐하면 내 미래는 동생 루더와 같이 죽고 없으니까. - 괜한 분풀이가 아니야. - 두고 봐. 귀가 아플 정도의 정적을 선사해 주겠어.
그녀가 말한 정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깨닫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는 눈꺼풀을 누르며 쥐어짜는 어조로 간신히 대답했다. 『앞으로 사흘의 시간을 벌어주게. 그러면 협조하겠어.』 리의 눈매가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72시간은 어려워. 남미쪽 뱀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개인 플레이어들이야. 내가 아는 인맥을 총동원해봤자 그렇게까진 시간은 못 벌어줘. 약속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38시간이다.』 『38시간... 맙소사. 그건 너무 짧아!』 『모두에게 경고를 보내기엔 부족하다 싶겠지만 나로서도 그게 한계야. 자, 어떻게 할래?』 『알았다. 그녀는 이곳으로부터 10km가량 떨어진「자애의 교회」에 있다.』 『오케이. 그럼 그 약속의 증표로 당신이 부리는 종 세 마리를 내가 데려가겠다.』 『맘대로 하시게.』
리는 빠르게 움직이며 총에 맞아 널부러진 세 구의 시체들을 살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활력 저하에 빠진 뱀파이어지만, 어쨌거나 얼굴 정면으로 총을 세 방이나 맞은 여자는 쇼크가 커서 호흡이 완전 정지된 상태였다. 되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고, 설령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해도 턱 아랫부분이 완전히 날아간 상태로 얼마나 버틸지는 의문이다. 그녀는 번득이는 스네이크 나이프를 꺼내들었고, 짤막하게 아멘을 외친 뒤에 목을 깊게 베었다. 남자는 배에 총상 두 발. 하나는 폐를 관통한게 분명하고 다른 하나는 출혈의 양을 봐선 내부 장기를 단단히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의식은 멀쩡해 눈을 빤히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위로 바짝 당겨올렸다. 차가운 칼날이 목에 닿자 남자의 동공이 확 좁아졌다. 싫다고 저항하는게 느껴지자 힘이 더 들어갔다. 귀 아래로부터 칼날을 깊게 쑤셔넣고 쇠고기를 도마에 올려놓고 으득으득 썰 듯이 해서 잘랐다. 귀로 들리는 비명은 없었지만 그 몸이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넋 놓고 보고 있기엔 그리 썩 좋은 광경은 아니어서 샘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치만 이것이 그녀의 직업이다. 그리고 일이다. 샘은 잠시 생각해봤다. 다른 사람도 샘을 보면서 이런 기분을 느끼곤 할까. 그러자 마음이 착잡해졌다. 헌터라는 직업은 정말이지 엿 같다. 『딘...』 슬그머니 형의 어깨에 기대려고 했다. 딘은 조용히 그 몸을 빼고 동생으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형이 왜 그러지 걱정하며 팔꿈치가 닿도록 다시 형에게 바짝 붙어 섰다. 이번에도 딘은 또 옆으로 한 걸음 옮겨갔다. 그가 피하고 있다 - 그걸 깨닫자 샘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이제 리는 쓰러진 아이에게로 접근했다. 그러다 멈칫했다. 어린아이여서 목을 베기를 주저한게 아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뭔가 이상하다. 「뭐야. 총에 맞은 것도 아닌데 상태는 셋 중에서 제일 나쁘잖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손으로 머리를 잡고 이리저리 돌려봤다. 세게 얻어맞은 자리엔 선명하게 피멍이 들어 있었다. 그래봤자 피멍 정도로 뱀파이어의 맥이 끊길 리 없다. 그런데도 이 아인 사흘간 땡볕에 노출되어 푹 곪은 고기처럼 완전히 맛이 갔다. 코와 턱을 덮은 다량의 피도 마음에 걸렸다. 삼킨 건지 뱉은 건지 모호하다.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자 입안에 고여있던 피가 벌려진 입을 통해 주룩 흘러나왔다. 이가 부러져 흐르는 피라고 하기엔 양이 많다. 거기다 코로도 약간의 피가 흘러나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어 손가락을 넣어 아이의 입을 크게 벌려봤다. 그러자 제 기능을 잃은 송곳니가 먹다 남긴 박하사탕처럼 아래로 와르르 떨어져 내렸다. 아하, 그런 거였구나. 리는 인상 쓰던 걸 풀고 손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리다고 내심 얕봤는데 아주 엉터리는 아니잖아.』 『응?』 『잘 처리했어, 딘 윈체스터.』 무거운 가방을 들어올리자 다친 팔목이 욱씬거렸다. 딘은「내가 뭘-」이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채 캐묻기도 전에 리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설명이란 단계를 여차하면 생략하곤 했던 존 윈체스터와 너무나 흡사하게 닮아 있었다. 익숙하니까 그게 왜 나쁜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편하기까지 하다. 이따금씩 자신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 입에 집어삼키던 질문 - 그게 뭔대요, 아버지 - 를 자연스럽게 혀 밑으로 잡아당긴 딘은 다시금 어깨를 으쓱였다. 뒤에서 샘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까 - 그는 이런 식으로 앞뒤를 뒤섞는 것이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걸 아직 모르고 있었다.
Posted by 미야
2007/08/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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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배경은 2시즌 중반 무렵으로 샘은 아버지 유언이 뭔지 아직 모르는 것으로 설정이 되어 있어요. ※
동생의 호흡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자 팔뚝으로 소름이 돋았다. 잠자는 미녀처럼 조용한 샘은 무섭다. 너무 흥분했거나, 반대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끔 꼭지가 돌았다는 의미다. 젠장, 그러고보니 이거나 저거나 둘 다 똑같은 얘기잖아! 입술을 질끈 깨문 딘은 최대한 뒤통수 쪽으로 눈알을 굴려 동생이 뭘 어쩌려는 건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샘!!』 제발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줬으면 하고 빌고 또 빌었다.
샘은 평소엔 장례식을 집전하는 천주교 신부처럼 점잖케 행동하는 녀석이었지만 일단 날뛴다 싶으면 레몬즙이 콧구멍에 잘못 들어간 사람처럼 구는 경향이 강했다. 미친 강아지가 벽에다 머리를 쾅쾅 박아대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심각해지면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를 몰고 가파른 언덕 아래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질주해 내려간다. 도로가 끝나는 절벽의 마지막에선 힘찬 도움닫기를, 찰라이긴 해도 허공에 붕 떠서 만세를 불러댄다. 무거운 고철 자전거 앤드 수직으로 낙하하는 철부지 사내 자식을 두 팔로 고스란히 받아내야 하는 사람 입장에선 환장할 노릇이다.
딘은 가끔씩 대학 친구들이라던가, 동아리 선후배 기타등등이「으아, 미친 레몬이다!」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가 매우 궁금했다. 폭풍우에서 구조되기 위해 난간쪽으로 기어가는 선원처럼 굴었을까, 아님 만사 포기하고 제 생명을 주님께 온전히 맏기겠습니다 기도를 올렸을까. 「그게 뭔 소리야. 내가 무슨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도 되는 줄 알아?」 재주껏 술까지 먹여가며 넌지시 떠보았지만 샘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식으로 웃기만 했다. 「숨기지 말고 말해보렴. 이 형은 그저 네가 사고를 쳤는지 안 쳤는지만 알고 싶을 뿐이야.」 「사고를 왜 쳐. 아빠와 형, 세상에서 딱 두 가지라고. 날 화끈하게 돌게 만드는 폭탄은.」 술에 취한 샘은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가 어랍쇼 하고 다시 하나를 접어 둘로 만들었다. 그 두 가지 모두 근처에 없었으니까 나의 축복받은 대학 생활은 끝내주게 밋밋했다고 - 딸꾹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동생은 목이 꽤나 말랐던지 답답한 표정으로 물을 찾았다. 졸지에 폭탄이 된 딘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물병을 테이블에서 감춰버리는 심술을 부렸고, 무울~ 하고 한참을 칭얼대던 샘의 눈동자는 토끼처럼 붉게 핏발이 섰다.
그래, 나는 폭탄이다. 내가 전혀 모르는 너의 평범했던 대학 생활을 위하여 건배.
그치만 딘의 우려처럼 콧구멍으로 레몬이 들어가거나 하진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얼음 알갱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샘은 냉기가 솔솔 뿜겨져 나오는 머리로 철저하게 계산을 해봤다. 남자는 딘을 밟고 있다 = 다리를 움직이지 못 할 것이다 = 핸디캡이 있으니 이쪽에서 덤벼볼 가치는 충분하다. 팔 하나 정도는 잃어버릴 각오는 해야겠지만 까짓 것, 관자놀이의 핏줄이 불끈 섰다. 샘은 날이 잘 손질된 단검을 꺼내들었고 이것은 언제나처럼 분명 가치있는 노력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샘! 제발~!!』 귀가 쫑긋 섰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딘의 목소리가「살려줘, 동생아!」로 번역되어 들렸다. 잔뜩 갈라졌고, 당황한 것처럼 보이는 형의 목소리는 샘으로 하여금 아드레날린이 들끓게 만들었다. 겨드랑이의 털이 한올한올 곤두섰다. 출산한 젖먹이 어린애를 생판 타인에게 빼앗긴 어미처럼 숨구멍이 열렸다 도로 닫혔다. 파도와도 같은 감정이 노아의 홍수를 일으키려 했다.
『하아! 그게 과연 올바른 판단일까.』 손에 쥐어진 번득이는 칼날을 본 남자가 침착한 어조로 물었다. 자신의 발치를 짐짓 내려다보는 사내의 동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것은 경고였다. 『허튼 짓은 관두게. 그러다 인식표가 발가락에 매달린 시체를 돌려받을 수도 있어.』 입이 타들어갔다. 혀를 내밀어 바짝 말라붙은 입술에 침을 발랐지만 극심한 가뭄으로 고통받는 대지에 겨우 물 한방을 끼얹는 것에 불과했다. 샘은 꿈틀거리는 딘의 허리를 쳐다봤고, 다시 남자를 노려봤다. 『아니. 나는 지금의 당신 말이 허풍이라는 걸 알아. 보험이라고 했잖아. 딘을 시체로 만들어선 보험으로 써먹을 수가 없지. 당신은 싫든 좋든 지금 이 자리에선 딘을 죽이지 않을 거야.』 뱀과 같은 눈동자가 옆으로 기우뚱 움직이면서 도화지에 그린 웃는 입을 가위로 오려 붙인 듯한 괴상한 표정이 한층 더 요란해졌다. 『음... 확실히.』 남자는 어디까지나 진지했고, 샘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거짓말은 하지 않겠네. 자네 말대로야. 아직은 존 윈체스터의 아들을 계속 살려둬야 할 까닭이 있으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고 해도 함부로 손을 대선 안 되겠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딱 하나군. 그.쪽.이. 대.신. 시.체.가. 되.게.』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가 별처럼 반짝였다. 샘은 그것이 암을 유발시키는 기분 나쁜 형광색 물질처럼 느껴졌다. 죽음이라는 종착역으로 인도하는, 죽기 직전까지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성분 = 공포였다. 등이 뻐근해졌다. 단 3초면 모든게 결정될 것이다. 샘은 자신이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는 위험부담을 충분히 인식했다. 샘은 이것만이 최선책이라는 듯이 팔을 안으로 구부려 팔꿈치와 칼날이 각각 수평을 이르게끔 했다. 처음 호흡은 준비. 두 번째 호흡은 각오. 투우사가 붉은 기를 들면 황소는 뛰어나가는 거다. 튕겨나가면서 동시에 친다. 세 번째 숨은 가슴 안쪽으로 깊숙이 삼켰다. 하나, 둘, 셋... 멀리뛰기 도약을 준비하는 요령으로 다리 근육을 움츠렸다.
『하지 마!』 딘은 이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지를 반신반의하며「아버지의 명령」투로 외쳤다. 그리고 기억해냈다. 그의 동생은 여드름이 나면서부터 항상 아빠에게 반항했다는 것을. 무기력증이 솟구쳤다. 싸움을 당장 멈추게 해야 했지만... 어떻게? 자전거를 탄 소년이 겁도 없이 절벽을 향해 질주해간다. 손잡이에 붙들어 맨 장식용 바람개비가 윙윙 소리를 내며 돌아간다. 아... 도로의 끝. 떨어진다. 허공에 붕 떠오른 자전거 바퀴가 흡사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딘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본다. 그러나 닿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그러면 안돼!』 속이 메스꺼웠다. 하늘을 나는 탈 것들은 뭐라고 할 것 없이 모조리 질색이다. 비행기, 행글라이더, UFO, 열기구, 자전거, 수퍼맨 할 것 없이 소금에 버무려 구덩이 속에 파묻어야 한다. 왜냐면 중력이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땅바닥으로 패대기질을 쳐버릴테니까. 놈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예외라는 걸 두지 않는다. 예쁜 동생을 피투성이로 내동댕이치곤 나 몰라라 한다. 딘이 그 나쁜 놈과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도구는 아무 것도 없다. 자연의 법칙이다. 올라가면 아무튼 언젠가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오늘도 딘은 그놈의 망할 고물 자전거와 무섭게 곤두박질치는 깡마른 몸뚱이를 보았다. 빌어먹을, 다신 자전거에 올라타게 만드나 봐라. 절망하며 흙을 움켜쥐었다. 『샘! 홧김에 엉뚱한 짓 하려는 거 아니겠지? 내 말이 맞지?! 야! 인석아!』 그렇다. 이건 엉뚱한 짓이다. 샘이 해야 할 일은 딘을 구하는게 아니다. 이것은 옳지 않다. 『장난이 아니란 말이야!』
바로 그때, 정말로 장난처럼 타원형의 쇳덩이가 코 앞으로 툭 하고 떨어졌다. 뭐야 이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그중에서도 확실한 반응을 보인 사람은 땅바닥에 엎드려 있던 딘이었다. 『으아악! 망할!』 그것 보라니까. 레몬이다. 레몬즙이 동생의 콧구멍에 들어갔다. 딘은 이성을 잃고 팔과 다리를 심하게 버둥거렸고,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히 바보스럽고 흥분된 상태로 빠져들었다. 살아있는 개구리가 스프 접시에서 튀어나왔으니 식탁은 거꾸로 뒤집어져야 옳았다. 국자가 날아갔고, 촛대가 글렀다. 식탁보에 휩쓸려 의자가 쓰러졌다. 바닥을 뒹구는 접시가 모조리 깨져나갔다. 찢어지는 비명에 덩달아 질겁을 한 뱀파이어 남자가 다섯 걸음이나 폴짝 뛰었다. 드디어 속박이 풀린 딘은 그보다 약간 더 빠르게 해서 한 번에 열 걸음이나 후다닥 기어갔다. 수류탄 투척시 대처 요령이 뭐더라.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던 것도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쥔 딘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대로 외쳤다. 『레몬이다아~!!』 외치고 보니 뭔가 틀린 것도 같다. 하지만 지금 와서 그게 뭔 상관이람. 딘은 걸음마를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혼비백산하여 바닥을 기기 시작했고, 차가운 11월의 혹독한 칼바람을 헤쳐나가는 뉴요커처럼 어깨를 움추렸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비행기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고, UFO에서 수상한 광선을 쏘아보냈고, 자살 폭탄 테러가 벌어졌고, 압둘라인지 빈라덴인지 하는 이름의 사내가 비디오 테이프에서「미국이여 각오하라. 레몬이다!」라고 손짓을 섞어 말했다. 놀란 딘은 그저 뿌옇게 먼지가 일어나도록 발버둥치고 또 발버둥쳤다.
『딘! 진정해, 진정하라고!』 『진정?! 진정?! 나한테 진정하라고 말한게 누구야.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눈과 코와 입으로 대단히 뜨거운 숨이 불어닥쳤다. 딘은 눈을 질끈 감은 채 다시금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이 자신을 와락 끌어안은 동생의 호흡이라는 건 까마득히 몰랐던 그는 정말로 가까운 곳으로 수류탄이 터졌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 메카가 있는 방향을 향해 넙죽 엎드렸다.
『지리멸렬한 것들. 웃기고 있네.』 여자는 바지 주머니에서 빨간색과 흰 색으로 줄이 나있는 담뱃곽을 꺼내들었다. 치익 하고 종이로 만들어진 성냥개비가 노랗게 황을 태웠다. 『아주 쇼를 해라, 쇼를 해.』 조용하고 어두운 공간에서 빨간색 담뱃불이 깜빡깜빡 점등했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회색의 연기로 얼굴을 감춘 리는 싸늘하게 식은 말투로 모두를 한꺼번에 바보로 만들어 가난한 제3세계에 덤핑으로 묶음 판매했다.
이마에 20% 파격 세일이라는 문구가 적혀졌다는 것도 모르고 딘은 끙끙거렸다. 『리! 큰일! 폭탄!』 『주둥이 닥쳐! 2달러 주고 장난감 가게에서 구입한 장난감이다! 진짜와 가짜도 구분 못하는 그놈의 쓸데없는 눈깔은 뭐 하러 달고 다녀. 그냥 후벼파버렷!』 장난감? 장난감! 그제야 빼꼼 눈을 치켜 뜬 딘은 머뭇거리며 하늘로 치켜올린 엉덩이를 도로 내렸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보니 플라스틱 고무 모형에 조잡하게 색을 칠한, made im china 애들 장난감이 맞았다. 자세히 봐야 이게 진짠가 가짠가 구분이 가는 정교한 물건도 아니어서 착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스울 지경이다. 딘은 지독한 코감기에 걸린 환자인양 얼굴이 새빨개졌고,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세상에. 애들 장난감에 놀라 사람 살려 난리 굿을 쳤다는 거냐. 자기가 던진 수류탄 모형을 손가락질을 하며 리가 꽥꽥거렸다. 『거기다 뭐? 레몬? 네 눈엔 저게 맛있는 과일로 보이든?!』
모양이 레몬 비슷하긴 하잖아요 - 정신 나간 형을 대신하여 늘어놓는 샘의 억지 변명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타이어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흐흐흐 웃음이 터져나왔고 딘은 죽을 때까지 평생 놀림거리가 될 문제의 에피소드가 방금 탄생했음을 깨달았다. 이걸 어쩌면 좋노. 동네방네 소문이 쫙 돌 거다. 나는 너의 비밀을 죄다 알고 있다 빙그레 웃으면서 맥주를 마실 바비와「수류탄이 뭔지 모르니? 진짜 수류탄을 내가 보여줄까?」라고 진지하게 제안할 애쉬 및 앨런의 모습이 상상되자 구덩이라도 파고 싶어졌다. 아니, 그 전에 믿지 못 하겠다는 식의 다소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리가 당장 문제다. 이래서는 도움을 받고도 고맙다고 말도 못 붙인다. 이제 딘은 귀까지 새빨개졌다. 무릎이 시큰거리는 통증은 당장 잊었다.
『세상에. 나까지 감쪽같이 속았어.』 뻘쭘해진 건 뱀파이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속으로 모래를 채운 장난감 폭탄을 발로 톡톡 건드려보곤 가뜩이나 혈색이 없는 하얀 뺨이 1mm 두께로 썬 비누처럼 한층 더 투명하게 변했다. 어처구니 없어하는 모습이 난잡한 욕설들로 도배된 담벼락을 눈앞에 둔 성직자처럼 보였다. 한 손엔 비누를, 다른 한 손엔 쑤세미를 쥐었다. 범인을 잡아 족치는 건 나중이다.「보지」라는 단어를 지우기 위해 일주일동안 씨름할 생각에 이마에 팬 주름이 깊어졌다.
『이거, 이거. 또 만났군, 뱀퍼 리?』 리를 쳐다보는 그 시선은 죽은 동물을 먹어치우기 전에 부패하길 기다리는 무자비한 하이에나처럼 살기등등했다. 『칼리아나 술집에서 인사를 나눈 걸로는 부족했던 건가. 이건 완전히 악연이로군.』 『누가 할 소리. 팔은 괜찮으신가, 뱀파이어 양반. 재생 능력이 뛰어나도 아직 다 낫지 않았을텐데. 그쯤하면 데웠다고 생각하고 얼른 꽁무니를 뺐어야지. 뭐가 잘났다고 어디다 대고 상판을 또 들이밀어.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심심했나.』 『미안. 난 또 피투성이 자동차를 길가에 아무렇게나 세워두었길래 일부러「난 포기할테니 얘네들 빨리 잡아가시오」광고하는 거라 생각했거든. 난 그래서 당신이 은화 30개를 받고 좋아라 하면서 밭을 사러 갔다고 여겼지. 그런 내 생각이 틀린 거였나?』 『당연히 착각이지. 나로 하여금 예수를 팔아먹게 만드려면 은화가 아닌 금화가 필요하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리는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던졌다.
Posted by 미야
2007/08/19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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