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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저는 시카고에 바다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체력이 모자라 국내 여행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입니다. 이게 아니다 싶어도 가뿐히 넘겨주는 센스~ ※


고통은 늘 가까이에 있어 때로는 그것이 자신의 분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마니암은 뱀파이어도 고통을 아느냐고 코웃음을 쳤지만 그 길이가 무려 30cm에 이르는 송곳으로 등과 어깨를 사정없이 찔러대면서 그런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 옳지 않았다. 그녀는 목이 쉬도록 비명을 지르던 날들과 참기 힘든 갈증, 발목에 채워진 족쇄, 마른 나뭇가지를 닮은 노인의 피부와 창백한 박하 냄새를 기억했다.
- 그대는 사탄의 시민이며, 불온한 오류다. 회개하라!
그는 두 여자의 시체를 뜯어먹고 피를 마셨던 이탈리아의 빈센트 베르치니가 그녀의 사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굴었다. 마찬가지로 1878년에는 에우세비우스가 여자 여섯 명을 도륙하고 피에 탐닉하자 그 책임이 전부 그녀에게 있다는 투로 물푸레나무로 만든 십자가로 밤새 두둘겨 패기도 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부위를 촛대로 찌르고 참회를 강요한 적도 있었다. 망할 놈의 성직자는 강간만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1897년, 교황 레오 13세는 성서공회에서 발행한 모든 성경을 금지시켰다. 같은 해 교황청에서는 프랑스 파리의 대자선 바자회를 축복했지만 우습게도 5분이 채 못되어 바자회는 저주받은 불바다가 되었다. 유럽의 왕족과 150여명에 이르는 상류층 인사들이 한순간에 화마에 당했다. 사실상의 종속 맹약이나 다른 없던 대 뱀파이어 협정을 주도했던 아나그노리시스 주교는 재가 되었다. 사절단 임원이었던 로마의 잡종견 그마니암도 끔찍한 화상을 입고 쓰러졌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심판. 하느님의 섭리.
게지나는 부드러운 어둠에 몸을 맏기고 차분한 마음으로 성경을 펼쳤다. 그리고는 태고적 목소리로 시편 143편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었다.
-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다 멸하소서
원한을 품은 오리진의 목소리는 땅을 진동시켰고 마침내 상황은 역전되었다. 새디스트였던 그마니암은 숨이 붙어있는 채 구더기에 살을 뜯겨먹히는 바알세붑의 형벌을 받았고, 1899년 봄엔 결국 죽어 선별된 묘지에 묻혔다.

게지나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무사히 달아났다. 기적적으로 딸을 되찾은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긋지긋한 유럽을 떠나자고 마음을 먹었다. 미국과 스페인이 한참 전쟁을 치루는 중이라서 밀항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은 배에 올랐다. 빈털터리였으나 행복했고, 식구가 온전히 모였다. 그들은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새 삶을 찾았다.

세인트루이스에서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1904년엔 엡실링이라는 이름의 골동품 상점을 열고 훔쳐낸 출생신고서로 사람처럼 살았다. 세금도 내봤다. 어머니는 햇빛 가리개와 모자로 무장하고 은행에 가는게 신기한 경험이라고 자랑스레 말하곤 했다. 사는게 재밌다고도 했다. 고통은 잠시 그녀의 가족에게서 멀리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럭저럭 행복했다. 인간들처럼 돈으로 물건을 사고 파는 조촐한 유희는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곧 시들해졌지만 1915년에 가게를 정식으로 처분하고 나서도 어머니는 암시장에 뛰어들어 톡톡히 재미를 봤다. 사람들은 단 한 푼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는 깐깐한 그녀더러 잔혹한 흡혈귀라고 불렀는데 그건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정말로 뼛속까지 뱀파이어였으니까!

막내 루더가 떠돌이 집시처럼 굴던 카밀과 눈이 맞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에브는 카밀의 신분이 낮다고 흉을 봤다. 카밀은 술을 잘 마셨고 언행이 남부의 흑인 계집종 같았다. 유럽의 귀족들과 종종 사귀던 에브의 눈엔 카밀은 종잡을 수 없는 쌍 것이었다. 그치만 섹시했다.
형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영 미더워하자 루더는 카밀을 데리고 달아났다. 이후로 소식이 없다가 1975년이 되어서야 어머니 날에 축하 카드를 보내왔는데 우체국 소인이 루이지애나였다. 에브는 그 다음 날로 기차를 타고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즈로 날아가 우물쭈물해 하는 루더의 귀를 때렸다. 형제는 이후로 다시는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다.
「그 녀석, 시커먼 흑인들 사이에서 재즈를 연주하고 있더군.」에브는 씩씩대며 말했다.
게지나는 사람들 틈새에 당당히 섞여 암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웃었다.
아버지 역시「나는 재즈가 좋아」라고 말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키 세프의 색소폰 연주를 좋아하던 아버지가 젱킨스에게 살해당했다. 1979년의 일이다.
시신은 수습도 못했다. 젱킨스 일족이 임의로 들판에 눕혀두고 불태웠기 때문이다.
젱킨스는 순전히 망자를 모욕하기 위해 아버지를 발가벗겼다. 성기를 잘랐다는 말도 들렸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탄식했다.
아담이 그 권리를 상속받은 땅에선 뱀파이어는 머리를 누일 장소를 찾을 수 없다 - 그때부터 고통은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그들 가족에게로 다시금 돌아왔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보복으로 젱킨스의 누이동생 둘을 죽였다.
꼭지가 돈 젱킨스는 히틀러마저 어찌해보지 못한 어머니를 붙잡아 대들보에 매달았다.
에브는 젱킨스의 사촌 다섯을 붙잡아 옷을 벗기고 성기를 잘랐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젱킨스는 허벅지에《DOOM》이라는 네 개의 문자를 새겼고, 에브를 십 년에 걸쳐 따라다녔다.
안달이 난 뱀퍼들을 그럭저럭 잘 따돌리는 것처럼 보이던 에브도 결국 1996년에 목이 잘렸다.
가족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게지나는 울먹이며 다시금 시편 143편의 말씀을 암송했다.
내 영혼을 괴롭게 하는 자들을 다 멸하소서, 멸하소서, 멸하소서!
어째서일까. 인간도 가축의 피와 살을 먹는다. 돼지와 소, 그리고 양을 죽인다.
그렇다면 뱀파이어도 인간을 먹고 살 권리가 있지 않은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이 오로지 아담에게만 이르렀다면... 그 나머지 생명들은 살육당하고 멸망당해야 한다는 건가! 그것이 신의 섭리던가. 틀리다! 그럴 리 없다. 세상은 이름다웠고, 반대로 인간은 추악했다. 혐오스러웠다. 그들에게 발판을 만들어주기 위해 궁창이 갈라졌다는 그마니암의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이 없었다. 인간들의 창세기는 왜곡되었다. 낙원 에덴은 모든 생물과 정령들에게 공평한 삶을 약속했을 것이다.

여자는 갑자기 분노에 휩싸여 주먹을 쥔 손을 높게 들었다.
『너희는 날 죽일 권리가 없어! 그 누구도 나와 내 가족을 해칠 권리는 없었다고!』
딘의 멱살을 움켜쥐고 똑바로 그 눈을 쳐다봤다.
가슴이 타들어갔다. 독이다. 그녀가 삼킨 건 무엇보다도 쓴 포도주였다.
죽은 자의 피.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피. 저승의 냄새가 나는 음료.
여자는 사악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 무례하고 이기적인 인간아! 신을 멸시하고 악마의 재주에 신나게 놀아난 인간아! 그릇된 방법으로 파멸당할 영혼을 가까스로 보전한 주제에... 주제에! 내 말이 맞지?! 악마와 계약하고 머잖아 지옥으로 떨어질 놈아! 너야말로 악의 씨앗이고, 불온한 오류가 아니더냐!』
『되게 시끄럽네. 입 닥쳐, 잡년아!』
같이 데굴렁 쓰러지면서 딘은 무릎으로 게지나를 짓눌렀다. 그리고 환각 상태에서 외쳤다.
『누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거야. 뒈지기 전에 우리집에서 당장 나갓!』

소금 결계는 대단히 강력하지만 무적인 건 아니다. 아버지 존은 제법 많은 종류의 악령들을 가르쳐 주었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주의를 주었다. 꾀가 있는 것들은 돌이나 나뭇가지를 반복하여 던져 단단한 소금 결정들을 흩뜨려버리곤 했다. 심지어 개과 동물을 닮은 파탈룹스 같은 녀석들은 뜨거운 커피를 식히는 것처럼 숨을 후후 불어대기까지 했다. 그렇게 결계가 깨지면 마물은 안으로 쉽게 침범해 들어올 수 있었고, 이는 곧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의미했다. 다수의 마물들은 인간을 먹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들에겐 금기라는게 없었다. 본능에 충실했고, 그렇기에 자신과 같은 힘 없는 어린이들은 차려진 밥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딘은 얼굴에 묻은 거추장스런 피를 닦아냈다. 목숨은 그리 아깝지 않았다. 허나 침실에 누웠을 코흘리개 동생을 생각했자 머리가 뜨거워졌다.
『그냥 당할까보냐! 내가 네년 혼구멍을 내줄테다!』
그리고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우리 아빠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 세상에서 제일 강해! 암염탄으로 귀신을 잡는다고! 아빠가 이 일을 알면 널 가만 안둘 거야. 죽일 거라고!』
그 강하다던 존이 이미 고인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딘은 자신이 존의 자랑스런 에이스라는 것만 기억했다. 게지나는 계속해서 토혈하며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딘은 두손으로 그녀의 양쪽 어깨를 단단히 움켜쥐고 힘을 가했다. 꿈틀대던 팔꿈치가 방향을 잃은 나머지 그의 턱을 강타했고, 그 즉시 눈앞에서 태양계의 도표가 춤을 추며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아니, 사실 그놈의 망할 도표는 진작부터 딘의 코앞에서 뱅글뱅글 돌며 난리 굿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딘은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초현실적인 침입자를 붙잡고 늘어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노력은 하고 있었으나 그가 벌 수 있는 실제적인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고, 체중으로 게지나를 깔아뭉겠다. 그것이 최선이었고, 한계에 임박하자 아랫배를 잡아당겨 큰 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다.
『동생아~!! 달아나! 명령이다! 힘껏 달아나!』

샘은 딘이 소리를 질러대는 걸 들었다. 그러나 그의 명령대로 할 수는 없었다. 기침이 터져나왔고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듬더듬 바닥을 매만지며 앞으로 전진했다. 죽을 똥을 싸도 같이 싸자고 다짐했다. 이 상황에서 혼자 나 몰라라 달아날 거라면 법학 공부를 때려치고 헌터 생활에 발을 담구지도 않았다.
『딘! 어딨어!』
눈이 무용지물이 되면 다른 감각을 동원하라고 배웠다. 샘은 새카만 방안에서 숨박꼭질을 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냄새와 기척, 그리고 육감이라는 걸 사용해 계속해서 예배당 안을 흩었다. 그러다 쾅 소리를 내고 종아리로 나무 의자를 걷어찼다. 욕지기가 나왔다. 이번에는 장애물을 피해 왼쪽으로 방향을 틀고 허리를 구부렸다. 아니다. 서로의 옷을 잡아당기며 밀어대는 소리가 멀어졌다. 그럼 다시 반대편으로 가서...

『샘!』
얼굴이 파랗게 변한 리가 샘의 어깨를 붙잡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그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터뜨렸고, 숨이 막혀 죽기 전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콜록! 아직 딘이 저 안에 있어요!』
『나랑 같이 나가자. 불이 더 번졌어! 더 이상 머뭇거리면 죽어!』
『알아요. 하지만 혼자서는 갈 수 없어요!』
리의 손이 샘의 가슴에 닿았다.
『알아! 그치만 넌 그래야만 해.』
『뭐요?!』
『나는 지금 당장 여기서 널 데리고 나갈 거야, 샘 윈체스터. 네 형은 나에게 네 보호를 의뢰했고, 나는 그 일을 승낙했어. 둘 중에 하나만 살릴 수 있다면 딘이 아니라 널 살리겠다고 사전에 약속했다.』
『뭐요?!』
『어린애처럼 굴지마! 지금이 퇴장할 시간이라는 거다! 멍청아!』

샘은 이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싫어! 딘은 어쩌고~!!』
리는 딱딱한 표정이 되어 뒷걸음질 치려는 샘을 단단히 잡았다.
『미안하다. 네 형의 일은 유감이다.』
『아냐! 이런게 아냐!』
『이 자식! 나로 하여금 네 갈비뼈를 부수게 만들지 마.』
『이러지 말아! 난 갈 거야! 형에게 갈 거야! 그리고 일러바칠테야! 두고 봐! 딘! 딘!』
『제기랄... 샘 윈체스터! 그래도 여자인데 나에게 이런 중노동을 시키다니!』
칼날처럼 예리한 어둠이 그의 시야를 스쳐갔다. 샘은 숨통이 꽉 막히는 감각에 숨을 훅 들이켰고, 거짓말처럼 그의 두 다리가 번쩍 들렸다. 리는 이런 것쯤이야 문제 없다며 레스토랑용 대형 냉장고를 머리에 이고 가는 공룡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반쯤 감겨진 눈에서 흘러내린 뜨거운 물방울이 목덜미에 닿아 화상을 입을 지경이었다.
망할. 기분이 찝찝하다.
리는 짜증이 치솟았고, 단돈 100달러에 이런 부탁을 당부한 딘이 조금은 지나쳤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Posted by 미야

2007/10/07 23:54 2007/10/07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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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List

  1. 지니 2007/10/08 02:10 # M/D Reply Permalink

    자기전에 잠시 왔는데..ㅎㅎ 글이 올라왔네요..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오늘도 엄청 감동받고 돌아갑니다~

  2. 고고 2007/10/08 09:41 # M/D Reply Permalink

    대체 딘은 샘을 왜 저리 코찔찔이로 만들어버리는지....이제 정신 차렸군요. 다시 돌아왔어. 우리아빠 운운한건 역시.....조금 제정신이 아닌 듯 하지만요. 뱀파이어 일대기도 멋지고 잘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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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본문 중에 그리 심각한 건 없지만 노파심에 안내문 들어갑니다. 취향이 아니다 싶으면 어떻게 한다?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여 익스플로러 창을 닫는다. 눈이 썩는다 싶으면 어떻게 한다? 마우스를 붙잡아 고양이 앞에 던진다. 오케이? 오케이. ※


흑백 영화속의 흡혈귀는 박쥐를 많이 닮아 있었다.
숱이 적은 머리카락은 포마드 기름을 듬뿍 발라 뒤로 넘겼다. 당시에는 끝내주는 신사들의 최신 헤어스타일이었겠지만 유행이 지난 오늘날에 보기엔 대단히 어색했다. 얼굴과 손바닥엔 가는 주름이 졌고, 눈빛은 야광으로 번들거렸으며, 손목은 막대기처럼 야위었다. 쿵쾅대는 시끄러운 배경 음악이 불길한 죽음을 암시하는 가운데 비단으로 만들어진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면 그때마다 분칠을 한 여자들이 픽픽 쓰러졌다.
딘은 단 한 번도 그것이 무섭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곧 아침의 눈부신 태양이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마늘을 끔찍이 싫어하던 백작의 가슴으로 굵은 말뚝이 박힐 터였다. 영화의 결말은 시대를 초월하여 한결 같았다. 어딘지 모르게 아빠의 모습을 닮은 영웅은 십자가를 높이 들었고, 그러면 흡혈귀는 바로 끝장났다. 주인공들은 기뻐하며 서로 입술을 포갰다.
버터에 튀긴 팝콘을 하나 가득 입에 꾸셔넣은 채 TV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던 딘은 키스씬에 매우 흡족해하며 이불 속에 숨어 오돌오돌 떨고 있는 어린 동생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봤냐, 새미. 마늘을 싫어하면 저 아저씨처럼 가슴에 말뚝이 박힌다. 알겠어? 편식은 나빠. 그러니까 먹기 싫다고 접시 밖으로 얌체같이 골라놓으면 나한테 죽을 줄 알아.》
샘은 발끈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딘! 내가 오늘 저녁에 먹기 싫다고 한 건 양파였지, 마늘이 아니었어!》
《흐음. 그랬던가. 그럼 마늘은 먹을 수 있다는 거군. 좋았어.》
《뭐, 뭐가 좋다는 거야?》
《내일 아침을 기대해라, 샘. 이 형아가 마늘 범벅 스페샬 팬케이크라는 걸 만들어주마.》
《형, 미워!》

여전히 겁이 나서 이불에서 눈만 빼꼼 내어민 주제에 샘은 형의 목을 조르려 했다. 그런다고 해봤자 샘의 손은 고사리 사이즈였고, 반대로 동생의 옆구리를 간질거리는 딘의 손은 파리채 정도는 되었다. 덕분에 호흡곤란으로 죽어가는 까르륵 소리가 약 5분간 이어졌고, 새미는 참다 못해 소파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걸 능숙하게 엉덩이로 깔고 앉은 딘은「어랍쇼, 내 동생이 갑자기 안 보이네. 이 자식이 갑자기 어디로 숨었지?」능청을 떨며 계속해서 팝콘을 주워먹었다.

그런데 샘의 걱정은 자신을 묵직하게 누르고 앉은 형이 이대로 영원히 안 일어나면 어쩌지 하는게 아니었다. 저급한 패스트푸드를 좋아하던 딘이 결국은 펑퍼짐한 궁댕이를 고민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 역시 아니었다. 새미의 근심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다. 아기는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끙끙거렸다.
《있잖아, 딘.》
《오냐.》
《흡혈귀에게 물린 다른 여자들은 어떻게 돼? 몇일 밤 자고 나면 도로 괜찮아진대?》
《음?》
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중한 드레스 차림새로 밤마다 묘지 주변을 배회하던 가엾은 희생자들은 과연 안식을 찾았던가? 글쎄다. 주인공들의 달달한 키스 장면에 정신이 팔려 그런 건 생각도 못해본 딘은 말 꼬리를 흐릴 수밖에 없었다. 십자가와 마늘로 무장한 영웅의 행보를 감상하던 그에게 온몸의 피를 빨려 죽어간 희생자들의 뒷 이야기를 묻는 건 반칙이었다. 죽어라 역사 과목을 공부했더니 오늘의 쪽지 시험은 수학이다? 염병할.

《그 여자들, 어떻게 되냐니까. 응?》
알게 뭐람! 당황하여 동생의 몸에서 서둘러 내려온 딘은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콜라를 찾는 척하고 주방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혀~엉. 어떻게 되냐고.》
《시끄, 시끄! 인석아, 저건 그냥 영화일 뿐이라고. 감독이 컷, 소리를 지르면「아아, 연기하느라 힘들었다」이러면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주문한 피자를 먹어댈 거다. 저 여자들은 네가 걱정한다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원래부터 죽은 것도 아니야. 저것들은 죄다 가짜란 말이야. 특수 효과라고.》
그런다고 해봤자 누구보다 영리한 동생이 뒤로 물러설 리 없었다.
《물론 저건 영화지, 딘. 누가 그걸 모를까봐. 하지만 우리 둘은 어딘가에 저런 나쁜 놈이 있다는 걸 잘 알잖아. 아빠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저런 놈들을 잡고. 안 그래?》
그리고 샘은 콜라를 홀짝거리는 칠푼이 형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불안한 듯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마치 냉장고 속으로 흡혈귀 한 마리가 몰래 숨어들었다는 식으로 말이다.

《형, 창틀에 소금 뿌렸어?》
《뿌렸어.》
《문가에도 소금 뿌렸어?》
《응, 거기도 뿌렸어. 덧붙여 우리 새미 얼른 잡아가라고 우편함에 쪽지 붙여놨어.》
《아, 그 쪽지? 내가 먼저 보고「딘을 먼저 잡아가세요」라고 고쳐놨어.》
《하하하! 보기와는 달리 약싹빠른 걸. 역시나 내 동생!》
그래봤자 재미라곤 하나도 없는 농담이었다. 샘은 딘의 허리를 끌어안고 칭얼거렸다.
《그 여자들, 도로 건강해졌음 좋겠어. 정말이야.》
딘은 떼쟁이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걱정 마. 네가 염려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여자들은 예전처럼 혈색 좋은 모습으로 돌아갈 거야. 통통한 비둘기처럼 사방을 뛰어다니다가 나처럼 잘 생긴 남자 친구를 만나는 거지.》
《그걸 딘이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알긴. 그렇게 되지 않으면 그 영화 속편을 다시는 못 만들잖아.》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는 걸 알면서도 딘은 샘의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 영화 속편... 진짜로 만들어지긴 했던가.

여전히 어려보이는 동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냉장고에 흡혈귀 숨었다고 끙끙대던 모습 그대로여서 딘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맨날 코흘리개 취급한다고 발끈하지만 저렇게 물벼락 맞은 강아지 표정을 지으면서 한 사람 몫을 하는 남자 취급을 해달라 졸라대는 건 넌센스다.
딘은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여전히 애 맞잖아. 조금 있으면 이불 뒤집어쓰고 덜덜 떨겠구먼.
그래서 딘은 시시껄렁한 공포 영화는 그만 보는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새미. 내가 리모컨을 어디에 두었는지 아니? TV는 이제 그만 끄자.』
딘의 그 말에 샘은 이마를 찡그리며 전혀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리둥절한 건 오히려 이쪽이다. 시야가 여전히 흑백이다. 거기다 비오는 하늘처럼 뿌옇게 흐려져 있기까지 했다. 집안 청소를 게을리 하는 편이었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잊지 않고 걸레질을 했다. 저 정도로 텔레비전 화면이 흐릿하려면 짐작컨대 10년은 넘게 먼지가 쌓여야 할 터다. 허나 윈체스터 집안의 남정네들은 한 장소에 그렇게 오래 머무른 적이 없다. 짧게는 1개월, 아무리 길어봤자 2년이었다.
턱으로 손을 가져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설마, 이사를 와서 단 한 번도 청소를 안 했을 리는 없고...
아항, 그렇구나.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깨달음의 미소가 입술을 타고 희미하게 번져갔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텔레비전은 누군가 내다버린 고물이었고, 돈 벌었네 좋아하며 옳다꾸나 주워왔더니 고장난 흑백 TV였다.
『뭐야, 간단한 거였네.』
납득하고 나니 졸음이 쏟아졌다.
딘은 꾸벅꾸벅 졸면서 이놈의 꼬진 전자제품의 전원 스위치가 어디에 붙었는지를 잠시 고민했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번쩍 들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손바닥 탁탁 털고 느긋한 기분으로 침대로 돌아가는 거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했다. 몇 시나 되었을까. 아버지는 오늘도 집으론 돌아오지 않는다.

도둑은 물럿거라. 악령은 썩 달아나라. 대천사 미카엘의 수호를 구하는 간단한 라틴어 기도문을 외우며 창문의 걸고리가 제대로 잘 닫겼는지를 확인했다. 로즈마리 부적을 창틀에 올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단속을 마치면 동생더러 잠자리에 들기 전에 화장실에 가라고 단단히 일러두어야 할 것이다. 그놈의 골칫덩이가 한밤 중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와 도움을 구하는 건 정말이지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형. 흡혈귀에게 물린 사람들은 어떻게 돼?》
하얀 여자... 딘은 눈앞으로 보이는 거짓말 같은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문 밖으로 웨딩 드레스 차림새의 여자가 목 놓아 흐느끼고 있다. 아까 봤던 영화 속 장면이다. 신랑을 맞지 못한 신부의 베일이 밤이슬로 축축히 젖어들었다.
딘은 표정을 달리하고 재빨리 소금으로 만든 결계가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아빠에게서 받은 암염탄을 어디에 감춰두었는지를 하나 둘 헤아렸다. 서둘러야 했다.
언제부터 워싱턴 슬럼가의 골목길이 공동묘지로 바뀌었을까.
검은 새의 둥지 속으로 마른 뼈가 가득하다. 누렇게 죽은 잔디 위로 누운 비석들이 차갑다.
《몇일 밤 코~ 자고 나면 도로 괜찮아져?》
괜찮다. 저 망할 것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못 한다. 절대로 못 들어온다.
《그 여자들, 건강해질 수 있어?》
설령 결계를 뚫고 들어올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마지막까지 싸울 것이다.

결혼식을 맞이하지 못한 신부가 축복받지 못할 부케를 높게 던졌다.
저승에서부터 날아든 꽃이 그가 서있는 유리창에 탁 소리를 내고 부딪쳤다.
피처럼 빨간 장미... 피처럼 빨간...
퍼득 현실로 돌아왔다.
몸이 허공 위로 붕 떠있다. 아니, 떠있다기 보다는 옆으로 드러눕는 중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쿵 소리가 나면서 어깨부터 바닥에 부딪쳤다.
『크흑!』
아픔은 나중이었다. 딘은 방금 전에 장미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로맨틱한 종류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둥근 모양새로 사방으로 신선한 핏방울이 번져 있다. - 부탁이니 저게 내 몸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고 좀 해라. - 진땀이 눈으로 흘러내렸고 숨이 가빠졌다. 뜨겁고도 굵은 바늘로 찔린 목덜미가 활활 달았다. 저릿거리는 통증이 급격히 어깨를 타고 가슴까지 내려왔다. - 하느님! - 딘은 여자에게 실연당한 머저리처럼 울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 여기까지 와서 쪽팔리게 울 수는 없단 말입니다! - 그치만 이미 그의 눈은 눈물로 범벅이었고, 전혀 감춰지지 않은 신음소리가 벌려진 이 틈새로 새어나왔다. 통증이 어찌나 격렬하던지 머리가 몸통에서 분리된 건 아닌가 걱정이었다. - 정말로 그런 거라면 어쩌지. - 손가락을 까딱거리려 노력하며 눈을 아래서 위로 굴렸다. 가느다랗게 기침이 터져나왔고, 배가 아팠다.

그 못지않게 고통스럽게 콜록이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새미...?』
딘은 동생이 감기에 걸린 건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샘? 괜찮아? 너 어디 아파? 지금... 어딨니? 화장실에 있어?』
옆으로 누운 딘은 자신의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점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또 텔레비전이다. 누가 리모컨 버튼을 자꾸 만져대는 건지 모르겠다. 화면이 바뀌었고, 레드삭스 팀이 나오는 야구 중계를 보고 싶었던 딘은 슬슬 신경질이 났다.
『너어~!!』
손가락이다. 하얀 손가락이다. 이번에도 무덤가를 방황하는 신부다. 여자는 고개를 숙여 입으로 피를 한웅큼이나 뱉어냈다. 그때마다 머리가 흔들렸고, 얼굴에서 모든 활력이 씻겨나가 버렸다. 발작하듯 걱걱대며 가슴을 움켜쥐자 콧구멍에서도 핏덩이가 쏟아졌다. 큰일났다 싶을 정도로 많은 피였다.
『아파! 아파! 내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 네놈! 이 피는 도대체 뭐야! 콜록!』
기침소리는 더욱 격해졌고 그때마다 깨알처럼 작은 붉은 반점들이 딘의 얼굴로 튀었다.

아아, 시끄러워 죽겠다.
딘은 잠이나 실컷 자게 누군가 작은 친절을 베풀어 텔레비전의《음-소거》버튼을 지긋이 눌러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Posted by 미야

2007/10/03 21:46 2007/10/0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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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고 2007/10/06 00:52 # M/D Reply Permalink

    딘은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ㅜ.ㅜ....마이 아프구나...다음편이.궁금해서 죽어가는 한사람 여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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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체스터 브라더스의 퇴마 여행기 드라마 Supernatural 팬픽입니다. 돌이켜보니 무모한 짓거리였습니다. 3시즌이 시작하기 전에 끝낸다는 원대한 포부는 물거품으로 사라졌고... 딘은 점점 리나 인버스가 되어가고 있고... 몰라. 어떻게든 완결이다 아자아자인 겁니다. ※


샘은 좀처럼 방아쇠를 당길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뱀파이어의 머리를 제대로 겨냥했다고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딘의 등이 시야에 가득찼다. 흠칫하고 놀란 그는 총구를 아래로 내리고 자신이 명 사격수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했다. 담장 위로 빈 맥주 깡통을 죽 진열해놓고 화약을 당기면 딘은 열 개 가운데 열 개를, 샘은 기껏해야 여섯 개를 맞추는 실력이다. S자로 유연하게 휘는 마법의 탄환으로 퍼레이드 중인 존 F 케네디를 암살하는게 아니라면 쓸데없는 모험은 하지 않는게 낫다.

『빌어먹을!』
평소에 사격 연습을 열심히 할 걸 그랬다는 때늦은 후회는 쓸데없다. 그런 여유로운 행동을 할 짬은 있지도 않다. 이제 딘은 뱀파이어에게 가까이 붙어 훅을 날리고 있었고, 주먹을 날린 횟수의 정확히 그 두 배를 고스란히 얻어맞고 있었다. 샘은 도리질을 했다. 완전히 미친 짓이다. 으르렁대는 늑대인간에게 살아있는 고양이를 집어던질만큼 원래부터 무모한 인간이었지만 뱀파이어와 주먹다짐을 할 정도로 정신이 나갔을 거라고는 미처 몰랐다. 설마, 저 인간은 학교에서 호모 파베르 -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 라는 단어를 배운 적이 없는 건가. 아님 교과서를 덮자마자 시험 범위가 아니라는 말만 믿고 뇌리에서 죄다 삭제시킨 건가.
『칼은 왜 안 쓰는 거야! 총은 뒀다 뭐해! 수족관에서 펭귄을 찾을 멍청이 같으니!』
이건 말이 안 된다. 도구의 사용을 잊고 오로지 맨주먹만 갖고 덤비는 형은 낯설다. 딘은 상대에 따른 적절한 무기 사용이라는게 뭔지 제대로 꿰고 있었고, 그들이 숙지하고 있는 뱀파이어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는 사람의 주먹따위가 결코 아니었다.

여자가 기회를 잡고 딘의 목울대를 후려쳤다. 외마디 비명을 지른 딘이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위험이라는 글자와 같이 해서 머리로 빨간 불이 들어왔다. 샘은 각도를 다시 잡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래봤자 매순간 목표물의 위치가 변하고 있으므로 빗나갈 가능성은 높았고, 어쩌다가 운이 좋다보니 식의 기적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확신이 들지 않자 총구가 흔들렸다.
하는 수 없었다. 샘은 보다 나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를테면 나사의 인공위성 시스템을 해킹한다던가, 마피아 두목의 여자 친구와 스트립 포커를 친다던가, 주유소 앞에서 라이터를 들고 가스통을 터뜨린다던가 하는 식의...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판단이 서자 몸을 돌려 여기까지 들고 왔던 가방의 소재를 찾기 시작했다.

그 정신 없는 와중에도 리가 앙칼진 목소리로 버럭 고함을 질러댔다.
『샘! 옆을 봐!』
『안다고! 알아요, 리! 나도 안다고요!』
무릎으로 미끌어지며 가까이 접근하는 사내를 향해 세 발의 총을 쏘았다. 탄환 한 발이 목덜미 정 중앙을 관통했고, 두 발의 탄환은 팽창하는 우주 어디론가로 깨끗하게 증발했다. 1/3의 확률이었지만 남자는 온몸을 비틀며 옆으로 나동그라졌다. 검고도 작은 구멍에서 생명이 탈출을 시작했고 사내는 몸을 굴려 어떻게든 일어서려 발버둥을 쳤다.
「무시해. 이제 저건 더 못 움직여. 그러니까 찔끔거리며 쳐다볼 것 없어. 침착해야 해!」
의자 아래로 몸을 끼워넣으며 재빨리 탄창을 갈아끼웠다. 호흡! 호흡! 샘은 커다란 갈색 곰인형을 껴안는 감각으로 무거운 가방을 꿰찼다. 성부, 성자, 성령, 그리고 라마즈 호흡법의 이름으로! 훅 하고 숨을 들이키는 것과 같이 하여 좁은 의자 틈새로 피투성이 팔이 튀어나와 샘의 엉덩이를 덥썩 쥐었다. 샘은 조금은 다른 의미로 비명을 지르며 - 이것아, 지금 너의 행동은 명백히 말해 성희롱이닷! - 허겁지겁 손길을 뿌리치고 반대편 의자 밑을 향해 기어갔다.

가방 안에는 갖은 종류의 쇳덩이 말고도 포도니 오렌지 같은 과일 그림이 그려진 음료수 병이 너 댓개 가량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목이 마를 때를 대비해서 냉장고에서 무작위로 적당히 꺼내온 주스 같은게 아니었다. 샘은 제일 먼저 보라색 포도 그림을 골랐고, 노랑과 주황색의 오렌지와 망고 그림의 병은 예비품으로 양쪽 주머니 속에 찔러넣었다. 뚜껑이 제대로 잘 닫겨 있었음에도 휘발유 특유의 싸한 냄새가 코를 찔러댔다.
무척 먼 거리였음에도 액체가 찰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하다. 양손에 칼을 쥐고 깍뚝썰기에 열중하던 리가 매운 고추를 입에 잔뜩 넣고 씹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금 전에 신속한 동작으로 뱀파이어의 목을 친 뒤라서 얼굴 절반이 핏물로 세수한 몰골이었다.
『새~앰!』
『지나가는 똘똘이 부르듯 하지 마요! 바빠요!』
『이 망할 자슥아! 틀려! 성수는 안 통해. 뱀파이어에겐 성수는 안 통한다고!』
『누가 그걸 모를까봐! 이건 성수가 아녜요.』
『뭣?!』
『성수가 아니라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자마자 엎드려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텅 비어있는 성가대석을 향해 주스 병을 높게 던졌다. 유리로 만들어진 병이 박살나는 쨍그랑 소리가 먼저였는지, 아님 샘이 발사한 총성이 먼저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건 불꽃이 치솟으면서 화염이 예배당 안의 공기를 탐욕스레 빨아당기기 시작했다는 거였고, 화학섬유로 만들어진 얇은 장식용 커튼이 순식간에 오그라들며 시커멓게 타들어갔다는 거다. 예배당은 소방관이 눈살을 찌푸릴 만큼 광택이 나는 바니쉬로 마감질을 한 나무들 천지였다. 유독가스와 화염으로 눈이 따가워졌다. 1초도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곧게 발기한 불기둥이 천장까지 닿으려 했다.

맙소사. 불! 리는 경악에 가득차 머리로 손을 올렸고 샘은 어딘지 모르게 나사가 두 개는 빠진 듯한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불덩어리는 이제 여러 줄기로 나뉘어져 벽을 타고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 모습은 밝게 빛나는 수만 마리의 벌레가 무리를 지어 일시에 날개짓을 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벌레들의 동작은 척척 손발이 맞았고, 자기네들만의 신호를 주고 받으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것들은 열대지방의 햇살처럼 지독했고, 뜨거웠다.

『이 병신 낯짝이 지금 무슨 짓을! 뱀파이어만 불에 타는게 아니야! 우리도 불에 탄다고!』
『알아요.』
『정말로 뭘 알긴 아는 거니?! 콜록!』
벌써 시야가 흐릿해지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는 어디까지나 둘째고 이러다 호흡곤란으로 죽게 생겼다. 연기가 차오르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리는 발작적으로 기침을 터뜨리며 허리를 구부렸다. 그녀는 뱀파이어를 죽이는 일엔 그 누구보다 도사였지만 소화기를 작동하는 법이라던가 불을 끄는 일엔 관해선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귓청이 떠나가라 화재 경보기가 울렸다. 불똥이 날리기까지 하자 이젠 진짜지 장난이 아니게 되었다.

『케엑! 켁켁! 목 아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잘 들어요, 리!』
『뒈져 죽어. 이 석탄 곰국아.』
『잘 들으라니까!! 봐요. 이 예배당은 입구가 하나예요. 출구를 지키고 서서 녀석들이 밖으로 못 나오게 막기만 하면 된다고요. 그럼 깨끗하게, 나중에 머리 아파할 일 없이, 완벽하게 끝나요.』
『말은 쉽지! 쿨럭...!! 벽지에 불 붙었잖아! 자칫하면 우리도 휘말리게 된다고! 이 정도의 건물이 전소되는 건 순식간이야! 인석아! 난 베리 웰던으로 구워지는 건 싫엇!』
『내 말을 믿어요. 우린 모두 안전할 거예요. 자! 이걸 갖고 문쪽으로 가요!』
샘은 리에게 망고 그림이 그려진 병을 던져주며 입구를 향해 손가락질 했다.
『가요!』

그녀는 전국을 순회중인 사기꾼 부흥사를 쳐다보듯 샘을 봤다. 비록 순백의 양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알맹이도 없이 무조건 믿으라고 말하는 건 똑같았다. 그리고 불쑥 내어미는 것이다. 커다란 연봇함을. 리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지갑을 털어가는 강도를 쏘아보며 치를 떨었다.
『이놈이 지금 나더러 뭘 믿으라고?』
『제발, 리...』
지금은 잘 했네, 잘 하지 않았네를 두고 논쟁할 때가 결코 아니었고, 샘은 다시 고함을 질러댔다. 홍해는 갈라져라! 반석은 깨질지어다! 개구리의 비는 내려라!
『가요!』
리는 코를 찌르는 땀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갑자기 뛰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그녀의 입이 딱 벌어졌다. 미치광이의 냄새다.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가 굳어 썩어가고 있다.

코를 쥐고 부리나케 입구를 향해 뛰어가는 리와는 달리 샘은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너무나 많은 자료를 한꺼번에 연산 처리해야 하는 컴퓨터가 그러하듯, 필사적인 마음과는 정 반대로 속도가 느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덧붙여 일시적인 오류 현상마저 일어나 오른팔과 오른다리가 동시에 앞으로 나갔다.
불은 싫다. 엄마가 죽었다. 제시카도 죽었다. 시뻘건 불길에 휩싸인 그녀들은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다. 미래는 송두리째 삼키워지고, 그녀들의 아름답던 육신은 연기로 화했다. 샘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슬립 차림새의 그녀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아파서, 괴로워서, 신음을 흘리는 엄마도 거기에 있었다. 피는 붉고, 불꽃도 붉다. 몹시도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들은 숨을 크게 들이킨 뒤, 최후의 기력을 쏟아부터 짧은 한 음절의 단어를 뱉는다.
「샘.」
불은 싫다. 아무리 없애버리려 해도 검게 그을린 자국이 사라지지 않는다. 얼룩은 - 오래되어 말라붙은 핏자국을 닮은 그것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오늘도 그의 엄마는, 가엾은 여자 친구는 뜨거운 화염 속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재앙의 원흉이 누구인지를 고발한다.
「샘...」
그런가. 샘은 묘하게도 납득할 수 있다. 이곳은 법정이다. 그러니 죄인은 자신이 지은 죄를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샘은 혀를 내밀어 입술을 축였고, 어쩔줄 모르는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리기 전에 그녀들을 향해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새미~!!』
환청이 아니었다. 호령하며 부르는 목소리에 배가 가로로 갈리워진 그녀들이 똑같은 동작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망할 자식! 염소 똥! 맨날 계란 후라이만 먹다 콜레스테롤에 중독되어 죽어버릴 자식!』
샘은 그가 은빛의 후광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착각했다. 높은 산에서 폭풍우가 칠 적에 가끔씩 보인다던 성 엘모의 불빛처럼 딘의 머리둘레는 번쩍번쩍 빛이 났다. 샘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고 미소를 지었다. 아아, 천사다. 변호인이다. 유일하게 그의 무죄를 주장해주는 듬직한 아군이다. 연기와 먼지를 배경으로 하고 등장한 그는 날개를 여섯 장이나 가진 미카엘 대천사처럼 씩씩했다.
『망할! 맹세코 앞으로 3개월동안 계집애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소변 보게 해주겠어!』
매운 연기에 콜록대며 기침을 터뜨린 딘은 허공에 대고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입이 걸걸하다는 것만 빼면, 그리고 협박의 내용을 절대로 잊지 않고 실천에 옮길 위인이라는 점만 빼면 그는 모든 걸 맏기고 의지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샘은 그 사실이 기뻤고, 안심이 되었다. 매일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워도 형만 옆에 있어준다면 이 모든 혼돈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다. 자신이 짊어지고 갈 것의 무게로 인해 압사당하지 않을 자신이 생겼다.

아아, 웃는 엄마가 불속에 있다.
웃어주는 제시카 또한 불속에 있다.
그녀들이 딘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콜록! 샘. 나랑 약속했잖아! 일을 전부 마무리짓고 나서 불을 지르자고! 이놈의 썩은 무우 대가리가 왜 벌써부터 설치고 지랄이야!』
『약속 못 지켜서 미안. 하지만 형이...』
『설명은 나중에 듣자, 동생아. 뜨거워 죽겠다! 바비큐! 젠장! 바비큐!』

그는 불이 싫었다. 불은 늘 딘에게서 소중한 걸 빼앗아가곤 했다. 매일밤 천사에게 보호를 부탁하던 엄마가, 환하게 웃어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빠가 그날 밤의 불과 함께 사라졌다. 한 번 사라진 것들은 두 번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딘은 집을 잃었고, 미소짓는 가족을 잃었다.
딘은 자신에게 마지막 하나 남은 행복을 으스러져라 붙잡았다.
불은 짜증난다. 머리카락으로 재앙이 붙기 전에 서둘러 동생을 데리고 피해야 했다.

『그 여자는? 형이랑 주먹질하던 뱀파이어는 어딨어.』
『게지나? 알게 뭐람. 너 때문에 뒤로 밀치고 그냥 나왔다. 하여간 너란 녀석은 내가 눈만 뗐다 하면 이때다 하고 사고만 치...』
거기까지 말하고 딘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영문을 몰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건 뭘까, 샘은 곰곰이 생각했다.
딘의 목덜미로 뭔가가 들러붙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다. 굉장히 크다. 그리고 어쩐지 무시무시하다.

싫은 느낌.
하얗게 번득이는 날카로운 송곳니.
힘주어 아득 씹는 소리... 굉장히 멀리서 들려왔다.

Posted by 미야

2007/09/30 17:45 2007/09/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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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고 2007/09/30 23:45 # M/D Reply Permalink

    앗싸......덩실덩실. 드디어 딘이 물리는군요. 시즌 3에도 요런 장면 나와주면 정말 고맙겠는데요. 잘 읽고 갑니다.

  2. 이즈 2007/10/01 16:25 # M/D Reply Permalink

    정말 딘이 물린걸까요?? +_+ 왠지 샘의 긴 팔이 딘 목을 감싸을 수도...
    그럼 샘이??...+_+;;; 다음편이 궁금하옵니다...ㅠ0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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