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드롭 2-05

비루한 글을 쓰는 내가 너무 싫어 - 동네 사람들아~ 원작이 다 해 먹는다~!!
드라마가 뛰어나 덕심이 고갈되는 건 진짜지 흔치 않죠. 오리지널 성향입니다. POI 설정과 맞지 않습니다.


그가 빈 바구니를 양동이처럼 쓰고 있지만 않았어도「핀치, 여기서 뭐하고 있어요? 한참 찾았습니다」친근하게 말을 붙여봤을 거다.
그런데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접하자 웃음이 나오기는커녕 숨이 턱 막혔다.
혼자 있고 싶어 - 아무도 보고 싶지 않아 - 날 이대로 내버려둬 - 몸짓으로 외치는 소리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몸을 안으로 말고 무릎을 감싼 채 웅크린 모습은 집을 잃어버린 어린애를 연상시켰고, 구부정한 등은 돌아갈 장소를 찾으려는 의지마저 꺾인 것처럼 보였다.
무서웠다. 여기서 그만 돌아가자 손을 내밀면.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리스의 속이 불편해졌다.
머리 아프게 만들어 미안하다는 감정은 둘째다.
저 밑바닥으로부터 덩어리가 단단하게 뭉치며 요동을 쳤다.
누군가로부터 미움 받는 대상이 되는 건 싫다.


『틀려요, 미스터 리스.』
핀치는 여전히 바구니를 뒤집어쓴 채였다. 그래도 그는 눈꺼풀을 감아도 차단되지 않는 시선을 가지고 있어서 갈피를 못잡고 있는 리스의 행동을 쉽게 알아차렸다.
『이 깊은 혐오의 뿌리는 당신이 아닙니다.』
그렇다. 이건 자기혐오라고 하는 것이다.
핀치는 옆으로 와서 앉으라는 의미로 땅바닥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내친 김에 옛날 이야기라도 하죠.』

땅거미가 산등성이 너머까지 뻗어가려면 아직 시간은 많다. 설령 주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진다고 해도 괜찮다.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존재는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사물을 볼 수 있고, 야생동물의 습격 정도는 누워서 떡먹기로 처리해버릴 수 있다.
『주변에 야생 동물이 있습니까, 핀치.』
『들개는 흔하게 나타납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들개는 무리지어 다니며 사람을 습격해요. 같은 개과 동물인만큼 늑대와 구분이 잘 되지 않죠. 간혹 불곰이 목격될 때도 있구요.』
『곰?!』
자연 상태에서 곰을 목격한 적이 없을 것이 분명한 리스는 핀치에게 바짝 몸을 붙였다. 곰이 나타나면 재빨리 핀치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 냅다 달리기 위해서였다. 불곰은 갈색곰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에 속하며, 개체 중에는 700KG이 훌쩍 넘어가는 놈도 있다. 화가 나서 앞발을 휘두르면 나무가 부러진다. 아무리 리스라고 해도 불곰과 맞닥뜨려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강경하게 마주보고 싸우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회피도 좋은 작전이다.
『맙소사. 곰이 나오는 곳에서 버섯을 따겠다며 어슬렁거린 겁니까.』
주변을 잔뜩 경계하며 리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간혹 목격될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경계심이 강한 곰이 일부러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일은 없어요. 리스? 그러니 진정해요. 제 눈에는 당신이 곰처럼 보이는군요.』
머리에 씌워진 바구니가 양편으로 달각달각 흔들렸다. 아마도 핀치는 웃었던 것 같다.
『맙소사, 당신. 곰이 무서워요?』
리스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오.』

작은 돌을 주워 벼랑 아래로 던졌다. 멀리 던지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맞추기 위해서도 아니다. 조각은 포물선을 그리고 우거진 수풀 어딘가로 떨어졌다.
핀치가 그런 리스의 동작을 따라했다. 요령이나 힘이 부족한 관계로 핀치가 던진 조약돌은 얼마 못 가고 가까운 곳으로 떨어졌다. 리스는 이렇게 따라 해보라며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멀리 던졌다. 그래봤자 누가 더 잘 던지나 서로 대결하자는 것도 아니어서 그들은 곧 흥미를 잃었다.
『미스터 리스, 혹시 제일 처음 들었던 말을 기억하십니까.』
『제일 처음 들은 말?』
『여기에 나라는 의식이 있구나, 깨달았을 적에 누군가 당신에게 말해준 것이 있을 겁니다. 그걸 말해준 사람은 당신의 AI 제작자일 수도 있고, 더러는 그룹으로 움직이는 소프트 엔지니어들 중 한 명일 수 있습니다. 파워-온 스위치를 올릴 적에 의식처럼 하는 말이 있어요.』
『글쎄요, 핀치. 꽤 많은 것을 기억하지만 딱히 이거다 싶은 건... 혹시 그건가. 손가락을 흔들면서 이게 몇 개입니까, 묻는 거요?』
『아뇨.』
핀치가 쓰고 있던 바구니를 머리 위로 불쑥 들어올렸다. 그렇게 해서 드러난 표정은「믿을 수가 없어!」라는 거였고, 그 놀람 속에는 일말의 분개 비슷한 것도 섞여있었다.
『모든 AI 제작자의 의무 비슷한 겁니다. 우리는 바벨의 후예로 최초의 인류 아담을 모방한 지성을 창조하였으며 - 로 시작하는 내용이지요. 당신의 AI 제작자는 그 단계를 빼먹은 겁니까?! 그랬다면 괘씸한데.』
글쎄다. 제시카는 의외로 덜렁거리는 성격이었다. 의식이 깨어났을 적에 그는 눈부시게 환한 빛과 한꺼번에 너무 많은 걸 처리하느라 혼란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이며 이게 모두 몇 개냐고 질문했다. 그리고 돌아오는 답을 채 듣지도 않고「깜빡했다!」크게 외쳐 리스를 놀라게 만들었다.
『깜빡했다... 라.』
『저더러 신경 쓰지 말라더군요. 크게 중요한 건 아니라고 했어요.』
『중요한 건 아니다...』
핀치는 웃었고, 동시에 화를 냈다.
『재밌군.』
정말로 재밌다는 의미로 그런 말을 꺼낸게 아니라는 건 리스도 알 수 있었다. 핀치의 뺨이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이름을 불러주는 의식을 안 했다는 겁니까?』
『이름을 부르긴 불렀죠. 제시카는「리스, 내 말이 들려요? 들린다면 이 손가락이 몇 개인지 말해보세요」라고 했어요.』
다 듣고 핀치는 신음했다.

고풍스러운 이 의식은 AI 공학의 아버지인 노만 버뎃이 시작했다.

우리는 바벨의 후예로 최초의 인류 아담을 모방한 지성을 창조하였다.
필멸자로서 선과 악을 자의로 판단,
충분히 고뇌하고, 고통을 당하며, 그로 인해 구원을 받으라.
이곳에 생명 있느냐 - 그럼 부름에 화답하여라.
여기 자리한 너는 누구인가.
이름을 말하고 너는 깨어나라.

『그러면 AI는 베이스로 입력된 자기 이름을 말하면서 눈을 뜨게 됩니다.』
『나에겐 그런 거 없었는데요.』
『바빠서 빼먹었나. 그럼 나중에라도...』
『나중에도 그런 건 들어본 적 없어요.』
『버뎃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필시 역정을 내겠군.』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생각하기 나름이지만요, 미스터 리스. 제가 보기에 그건 매우 중요한 의식이라고요.』

노아는 대단히 오만한 종족이었다. 지성이 높았으며 도덕적으로 완벽해지려고 애썼다. 범죄를 혐오했고, 올바르지 않은 것들을 배척했다. 결점을 찾아내면 바로 고치기 전까지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노아였기에 가능했지요. 노아는 로봇 기본 원칙을 처음부터 부정했습니다.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라 - 그리고 어린 자녀들을 세상에 던져놓은 겁니다. 이것이 선하다, 이것이 악하다, 사전에 가르쳐주지 않고요. 무책임하게 그랬음에도 잘못될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믿었죠. 깨어난 자녀들이 비뚤어져 판단력을 잃을 거라는 가정은 전혀 못했거든요.』
돌 하나가 핀치의 손을 떠나 수풀에 떨어졌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노아가 만든 로봇들은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했어요.』
두 번째 돌조각이 훌쩍 날아갔다.
『그런데 노아들은 하나만 알고 둘을 몰랐어요. 그들은 알고 있어야 했어요. 로봇이 아닌 노아가 판단력을 잃어버릴 가능성에 대해서요. 그리고... 음. 그게 실수였죠.』
마지막으로 핀치가 신경질적으로 집어던진 건 돌멩이가 아닌 빈 바구니였다.

Posted by 미야

2012/10/04 14:31 2012/10/04 14:31
Response
No Trackback , No Comment
RSS :
http://miya.ne.kr/blog/rss/response/1657

Trackback URL : 이 글에는 트랙백을 보낼 수 없습니다

Leave a comment
« Previous : 1 : ... 544 : 545 : 546 : 547 : 548 : 549 : 550 : 551 : 552 : ... 1974 : Next »

블로그 이미지

처음 방문해주신 분은 하단의 "우물통 사용법"을 먼저 읽어주세요.

- 미야

Archives

Site Stats

Total hits:
1018574
Today:
280
Yesterday:
133

Calendar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