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쥐고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부근에서 공중전화가 울렸다.
신호를 받고 길을 건너려다 도중에 멈춰섰다. 1초, 2초, 3초. 반복하여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입술에 종이컵을 가져갔다.
과거지향적인 소음이 귀를 따갑게 만들었지만 저마다 개인 휴대폰을 소지한 행인들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다. 여자는 흘러내린 가방을 고쳐 메고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나아간다. 배달 중인 남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심지어 시끄럽다 눈썹을 찌푸리지도 않는다. 택시 운전기사가 신경질적으로 눌러대는 경적보다 취급이 더 형편없다.
근방의 CCTV 카메라를 흘깃 바라보던 리스는 장갑을 낀 손으로 수화기를 냉큼 집어 올렸다.
《자연과학, ㄹㅗ미오, ㅇㅏㄹ파. 삐익 - 요리. ㅋㅏ메라, ㅇㅗ스터...》
이쪽에서「시작!」을 외치지도 않았건만 기계의 음색을 띈 목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날아들었다.
리스는 주의 깊게 들은 정보를 재빨리 암기하곤 손때가 묻은 수화기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할 말이 있다는 투로 빨간색 불이 점멸하는 CCTV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핀치가 납치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을 적부터 기계는 리스에게 연락을 취해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사전에 입력된 매뉴얼인 듯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돕도록 - 비유가 아닌 말 그대로 혈관에 피 한 방울 흐르지 않는 기계는 프로그램 된 내용대로 냉정하게 움직였다. 망할 쇳덩이는 핀치의 안전을 우선시하지 않았다. 쓰고 버리는 헌신짝도 그렇게 취급하지 않는다며 리스는 격분했지만 이진법으로 구축된 프로그램이라는 건 태어날 적부터 온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체온이 없는 녀석이 인간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마음이 없었고, 영혼이 부재된 괴물이었다.
『너, 정말 마음에 안 든다.』
핀치가 무사히 돌아오고 난 뒤부터는 두 사람 모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는가, 리스는 늘 이 점이 고민이었다. 그를 구했다. 제자리를 찾았다. 루트로부터 기인한 비상 사태는 종결되었다. 그런데 기계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는 마치 기계가 핀치의 귀환을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 작전 중 죽어버린 사람 취급을 하고 있다, 그런 몹쓸 기분이 든다.
아니면 기계는 누구와는 다르게 핀치의 생사에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핀치?』
서둘러 도착한 도서관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옷걸이는 텅 비었고, 의자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화장실에 간 겁니까. 베어?』
허리를 구부려 베어가 애용하는 깔개에도 손을 대고 온기를 확인했다. 이 또한 차가웠다.
미루어 짐작하자면 한 사람과 개 한 마리는 최소한 30분 이전부터 출입을 하지 않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공중전화가 귀 따가운 따르릉 소리를 내고난 뒤로부터 대략 20여분이 흘렀다. 연락은 아마 비슷한 시간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니, 0.1초도 안 틀리고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하는 일이니 그렇게 하고도 남는다. 째깍째깍 움직이는 초침을 응시하며 잔 흠집이 가득한 시계의 유리판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렇다면 때마침 핀치는 먼 곳에 있었고, 나는 근방에 있었다고 판단해도 되는 걸까? 만에 하나 그런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시쳇말로 염통이 쫄깃거렸다.
걱정을 담은 두 번째 신호음이 끝나자마자 고용주가 반응했다.
《네, 미스터 리스.》
존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행이다. 납치당한 건 아니다. 그는 몰래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에는「스코티, 나를 전송해줘」라고 안 해요?』
스타트렉 농담 따먹기에 핀치는 어중간하게 대응했다.
《미안합니다. 그리로 당장 워프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 어디에요?』
《그게... 곤란합니다.》
『곤란하다뇨. 그게 무슨 뜻이죠.』
순식간에 나쁜 쪽으로 상상력이 발동하려 한다. 그는 의자에 결박당해 있다. 손목이 케이블타이로 단단히 묶여있고, 목덜미에는 진정제가 주사된 흔적이 있다. 리스는 주먹을 쥐었다가 도로 펴는데 애를 먹었다.
『당신, 괜찮아요?』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내렸다. 너무 앞지르지 말자. 아무 일 없다. 그럴 리 없다. 핀치의 목소리엔 약에 취한 떨림 증상이 없다. 긴장한 건 확실하지만 모종의 위험인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건 아니다. 그럴 거라 짐작한다. 아아, 젠장. 알게 뭐람. 펴졌던 손바닥이 도로 오그라들었다. 목소리만 가지고는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내장이 뱃가죽 안쪽에서 파도치며 출렁대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왼손이 권총을 찾아 헤매고 돌아다녔다.
『핀치. 설명을 해요.』
그 요구에 고용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지는 건 엉뚱한 해명이다.
《번호가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도움을 드릴 형편이 되질 않네요. 이 상황이 당혹스러울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리스 씨... 이번에는 혼자서 번호를 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왜요.』
《아, 그리고 베어는 동물병원에 맡겼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틀렸습니다. 그건 제가 들어야 할 답이 아닙니다, 핀치.』
당신 지금 어디야, 누구와 있어, 무슨 일이야, 도대체 나 몰래 뭘 하려는 거야. 비명을 닮은 고함이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그걸 초인적인 힘으로 참았다. 정분이 나서 도망간 마누라를 추궁하려는 것도 아닌데 참 잘 하는 짓이다 - 몸을 빙글 돌려 가상의 적을 세차게 노려보았다. 그래보았자 그가 마주한 벽에는 오래된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제작된 세계지도가 걸려 있는게 전부다.
『설명해요.』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이 방금 전 아메리카 대륙을 불살랐다.
『설명해요!!!』
이성의 끈이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잡아당겨졌다.
그게 뚝 끊어지기 전에 하느님이 보우하사 제3자가 힌트를 제공해줬다.
《선생님, 여기서 핸드폰 통화를 하심 안 됩니다. 다른 환자분들께 좋지 않아요.》
《미안합니다. 중요한 업무 관계 때문에...》
《것보다 그렇게 혼자 일어서서 돌아다니심 안 돼요. 통증이 악화될 겁니다.》
《곧 자리로 돌아갈게요.》
핀치는 리스가 아닌 간호사로 추측되는 여성에게 미안하다 얼른 사과하고 눈치껏 전화를 끊었다.
『다른 환자? 병원?』
맥이 풀린 리스는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간호사가 태도 불량한 환자의 핸드폰을 강제로 압수한 모양이다.
공중전화로 추측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다시 걸려온 건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뒤였다.
『어느 병원이죠, 핀치.』
그의 고용주는 취조를 닮은 질문을 대단히 싫어한다.
질문에 대답하기 싫으니까 속사포처럼 자기 할 말만 떠들었다.
《당신은 번호에 온전히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입원한 병원을 찾느라 시간을 낭비하진 마세요, 미스터 리스. 나는 교통사고를 당하지도 않았고, 지갑을 요구하는 거한에게 얻어맞지도 않았습니다. 창피하게도 음. 카프카가... 아니, 카프카는 무시하세요. 실수로 허리를 삐끗했는데 증상이 나빠요. 4-5번 추관판 탈출증 같다면서 수술을 받아보는게 어떻겠느냐 의사가 겁을 어찌나 주던지 검사를 받고 있는 중입니다. 결과가 나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거구요, 일단은 사흘 예정으로 입원했습니다. 미리 경고하는데 번호를 구하는게 먼저입니다. 내 상태를 확인하러 오기만 해봐요. 해고 통지서를 코앞에서 날려버릴 겁니다. 그러니 빨리 가서 그들을 도와요. 아울러 몸조심해요. 당신이 다칠까봐 걱정하기 싫군요. 형사님들께 적극 도움을 구하세요. 여기서 덧붙이자면 퇴원할 때까지 리스 씨에게 연락을 하지 않을 겁니다. 도움이 될 것도 아닌데 제 호기심과 가치도 없는 외로움을 이유로 당신의 시간을 빼앗는 건 옳지 않으니까요. 명심하세요. 가서 번호를 도와요.》
그의 수중에 동전이 넉넉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싶다. 지폐와 동전은 종류가 다르니까.
핀치는 이쪽에서 네, 아니오 대답을 하기도 전에 자기 마음대로 휙 사라졌다.
『맙소사, 핀치...』
쓰게 웃으며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툭툭 건드렸다.
《무서워 죽겠다. 미스터 전자사전은 어디로 갔는데 나에게 묻고 그래. 설마?!》
『아니야, 그는 무사해. 그런데 사정이 있어서 이번엔 나 혼자 움직이게 되었어. 그러니까 라이오넬? 방금 내가 불러준 SSN 번호는 받아 적었나.』
땅딸보 형사는 실수로 뜨거운 물에 빠진 강아지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댁 혼자 움직인다고?! 그럼 나도 빠지겠습니다. 라이오넬 푸스코에게 전화를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럼 안녕히 들어가세요!》
『어이.』
《싫단 말이오~ 싫다고!》
앙탈(?)을 부리는 형사의 울부짖음은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우울한 얼굴로 혼잣말했다.
싫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 친구야.
Posted by 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