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끝까지 갈 수 있으려나. 수정본입니다. 심각하게 말씀드려 빨간망토 레죠 캐릭터의 오리지널 성격은 잊으시길 바랍니다. 내용은 엉망진창, 만사 뒤죽박죽입니다. (도망간다)


생긋 웃으며 이쪽을 쳐다본다. 하여 제1단계 경계 경보령 발생.
로머디스는 알아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자고로 폭풍 영향권 안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그레이워즈 후작 가문의 녹을 먹고 산지 오늘로 만 10년, 그동안 뼈저리게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면 그의 주인은 기분이 좋아도 웃고, 기분이 더러워도 웃는다는 거였다. 그러니 일단 웃는다 싶으면 살살 피하고 본다. 점쟁이도 아닌데 저 작자가 기분이 좋아 웃은 건지, 아니면 개차반이라 웃은 건지 그걸 어떻게 아누.

속으로 오래된 격언 하나를 읊었다.
맑은 하늘에서도 천둥번개는 잘만 떨어진다. 날씨 좋다고 방심하다간 저승간다.
『각하?』
『(피식)』
어이쿠. 로머디스는 목을 움추렸다.
대답 대신 다시 살인적 미소가 날아온다.
단언할 수 있다. 주인 나리는 지금 대단히 저기압이다.

재빨리 머리를 굴려봤다.
그레이워즈 후작의 기분을 저리도 벅벅 긁어댄 원흉이라면 뭐가 있을까.
음, 그러고보니 최근들어 죽자 살자 따라다니는 여성 덕분에 심기가 불편한 주인이었다. 남자인 이상 여자에게 인기 많음을 싫어할 리는 없지만「레죠니임~!!」하고 스토커처럼 따라다녀서야 기분이 유쾌할 리 만무하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 산더미처럼 쌓이는 선물공세도 지겹고, 하루가 멀다하고 날아드는 애정 고백 편지도 지겹다. 연회장에서 맨발로 달려나와 두 볼을 붉히든 말든, 제발 화장실 갈 적엔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편한 마음으로 싸자. 뒷통수가 따가워서야 시원하게 볼 일도 못 마친다.

로머디스는 에리스 양의 머리카락만 보여도 후작의 얼굴색이 하얗게 변했던 걸 기억했다. 특유의 포커 페이스가 흐트러진다는 건 보통이 아니라는 거다.
드디어 한계점을 돌파했다. 여성에겐 절대로 손찌검을 하지 않겠다는 기사의 맹세가 드디어 깨어지려나 보다. 높으신 분의 명령이면 어쩔 수 없다. 때리라면 때리고, 땅에 묻으라면 묻는다. 후작은 여성이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 자기 기분에 거스르면 그걸로 끝이다. 특유의 웃는 얼굴로 화를 내기 시작하면 왕조차 눈치를 보고 달아나는데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같은 일개 기사는 알아서 기어야 한다.

『로머디스?』
『예. 각하.』
어떻게 할까요. 몰래 쳐들어가서 에리스 양의 다리 뼈라도 분지를까요.
『사냥 준비를 해두세요.』
짐작도 못한 예상 밖의 명령에 로머디스는 멀쭘거렸다.
에- 사냥입니까. 이 계절에요.
달력은 8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다. 밤바람은 제법 차갑지만 태양이 이글거리는 한낮에는 해골 타는 빠지직 소리가 들려온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엔 악마의 숨결이 녹아 있다. 이런 날씨엔 농부들도 밭 일을 하다 쓰러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장사치들도 오후 2시엔 가판대를 아예 치워버린다. 따라서 야외 스포츠는 미친 놈 아닌 이상에야 날짜를 훨씬 뒤로 미루는 법이다. 더워 죽겠는데 무슨 사냥이냐. 말을 타고 3시간만 가볍게 달려도 엉덩이가 땀으로 짓무를 터인데 무슨 개뿔 같은.

그래도 주인을 향해「당신 지금 돌았수?」라고 말을 못하니 신세가 서럽다. 후작은 자기 말에 토를 달고 늘어지는 걸 대단히 싫어한다. 뭣 모르는 신참이 천진난만하게「왜요?」라고 말했다가 반죽음 당했다는 이야긴 유명하다. 그러니 고개 숙인다. 얌전히 수긍하고 말씀 받들어 모실 준비를 갖췄다.

『솜씨 좋은 자 서른 다섯 정도를 준비시키세요.』
『에-』
『개는 풀지 말고.』
『에~?』
『일정은 한 사나흘 걸릴 겁니다.』
『에에~?!』
무슨 인원이 서른 다섯이나 됩니까. 개도 풀지 않고요? 구두 없이 무도회장에 나가라면 나갑니다. 하지만 개가 없어서야 사냥이 되지 않지요. 그것도 사나흘씩이나 걸려서 사냥합니까? 수상합니다, 수상해.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냥이 아는 거 같습니다만.

이렇다 말도 없이 가만히 있으니 그의 주인이 이를 드러내고 웃기 시작했다 - 성질을 부렸다.
『로머디스?』
『예!! 준비하러 갑니다!!』
이런, 내 주책 봤나. 저 인간을 긁어서 뭐하겠다고.
로머디스는 짧게 대답하고 꽁무니부터 내뺐다.
알게 뭐냐. 사냥이 아니라 무력 시위라고 해도 내 책임은 아닌데, 뭐.
문을 닫으면서 가만히 성호나 그었다.
그레이워즈 후작의 분노의 화살을 고스란히 얻어맞을 사람을 향하여 삼가 묵념이다.

한편, 로머디스가 물러나기가 무섭게 레죠 그레이워즈 경의 얼굴색이 확 변했다. 억지로 꾸민 가식된 미소를 들입다 집어던진 그의 표정은... 묘사는 생략하겠다. 그저 미친 호랑이처럼 살벌했다고만 적겠다. 지금은 그거 하나로도 충분하다.
서른 아홉 번째 여름까지 살아오면서 이토록 화가 치민 적은 처음이다.
『겁도 없이 감히 나에게!』
짜증이 치밀어 버럭 고함부터 질렀다. 이도 부득부득 갈아봤다.
시골 촌뜨기 귀족 - 그것도 돈주고 작위를 산 사꾸라 인버스 남작이 자신이 그.렇.게.나. 탐내하던 포도밭을 경쟁자인 제라스 백작부인에게 옳타꾸나 팔아넘겼을 적부터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었다. 물론 자유 시장경쟁의 원칙에 의하야 더 많은 낙찰가, 그것도 무려 세 배의 가격을 적어낸 백작부인이 옥션에서 유리한 위치에 서있었다는 점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애가 탄 나머지 손수 친서를 보내「반드시 나에게 그 밭을 파시오」라고 압력을 보냈던 걸 이 마당에 강조하려는 것도 아니다. 돈이라면 껌뻑 죽는 시골 귀족이 얌전히 그 말을 들을 거라곤 그다지 기대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어찌된 건지 다 이해한다. 팔을 벌려 하여간 수긍한다. 그래봤자 포도밭이다. 전국에서 가장 맛좋은 포도가 생산된다는, 황금 신의 축복을 독차지한 포도밭이면 또 어떠냐. 그러니까 기분만 약간 상했을 뿐, 더 이상「남의 것이 되어버린 훌륭한 포도밭」에 연연해하진 않는다. 그런 계집애 같은 짓을 할 것 같나. 안 한다.

그렇지만 말이다! 인버스 남작의 열 여섯된 아들이 자신의 조카 제르가디스의 면상에 스트레이트 펀치를 날렸다는 이야기엔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새까맣게 낮은 신분의 자가 감히 그레이워즈 가문의 사람에게 손찌검을?!
손톱으로 책상을 톡톡 두둘겼다.
슬레진 제국의 열 귀족 중 하나인 우리 가문을 얼마나 얕잡아 봤으면.
분을 참지 못해 눈앞에 펼쳐진 서류를 꾸깃 구겨버렸다.
더 열받는 사실은 조카 제르가디스가 인버스 남작 놈과 그 자식 놈으로부터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잘못했으니까 때렸다, 이런 안하무인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잘못? 무슨 잘못! 하!

「숙부. 맞은 사람은 나야.」
「물론 그렇지요.」
버르장머리 개차반 조카는 반말에다 눈까지 치켜떴다.
「그런데 왜 역정은 그쪽이 내는 거지. 난 아무렇지도 않아.」
한술 더 떠서 그의 바보 조카는 시큰둥한 얼굴로 여행이나 떠나버렸다.
여행이다. 이 마당에 여행이란다. 인버스 남작의 아들에게 결투라도 신청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넌지시 물어봤을 적엔 - 사실은 윽박지르다시피 해서 물어봤을적엔 - 웃었다. 세상에. 누가 그레이워즈 가문 사람 아니랠까봐 웃은 것이다.

조카 녀석이 말에서 낙마하여 팔이 부러져도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그레이워즈 후작이었지만 이번 만큼은 그 감상이 달랐다.
팔만 부러지면 억울하다. 기왕이면 녀석의 목도 부러졌음 좋겠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으르렁대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찍었다.
분풀이라도 하지 않으면 잠을 편히 잘 수 없다.
그의 모친 왈, 속 좁은 꿍얼쟁이라고 아들을 흉봤다. 본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지고는 못 산다.
그러니 인버스 남작의 위장에 스트레스성 구멍이라도 뚫어놔야...
『어디 두고 봅시다.』
전형적인 악당의 코멘트를 읊조리며 레죠 그레이워즈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Posted by 미야

2008/03/18 12:57 2008/03/18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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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kimmie 2008/03/18 15:13 # M/D Reply Permalink

    어머나, 너어-무 너무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미야님의 슬레팬픽을 보네요. 더군다나 이번건 제가 전부터 계속 보고 싶어했던 거라 더 기뻐요. 아무쪼록 이번엔 완결까지 보시기를...요즘 많이 힘드실 텐데 크게 화이팅 한번 외쳐드리고 싶네요.

  2. 엘리바스 2008/03/18 22:49 # M/D Reply Permalink

    아악! 드디어 제 마음 속 간절한 염원을 들으신건가요!!!
    안그래도 곧 슬레이어즈 다음 작품(?)이 애니화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다시 근질근질해진 참입니다.

    미야님의 글이 타들어가는 속을 시원하게 씻어내리는 듯 하군요.
    제발.. 제발 짧더라도 완결을!(묵념-_-)

  3. 애플밀크 2008/03/20 09:46 # M/D Reply Permalink

    미야님 ! 오오오, 미야님~♡
    그저 감격의 홍수 속에서 감사드릴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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