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4 : 풀무불의 노래 8

인공으로 키워낸 열대의 나무들이 더위에 비적거리고 있다. 장벽으로 보호받고, 지하 200m 아래로부터 끌어올린 지하수를 편하게 얻어 먹는 팔자라고 해도 사막의 열풍 공격이라는 건 가히 살인적인 법이다. 크기로 보아 다 자란 것이 분명한 나뭇잎들은 그리 파랗지 않았고, 얄팍한 모양이 튼실해 보이지도 않았다. 술집 앞에 장식용으로 세워둔 싸구려 모형 같다 - 그것이 칭송 자자한 이 기적의 오아시스에 대한 첫 감상이었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 튕겨보자 기운을 잃은 나뭇잎 몇이 안녕을 고하고 가지에서 떨어졌다. 아차 싶어 얼른 손을 거두어 들였다. 그렇다 해도 끝 부분이 누렇게 타들어간 잎사귀들은 어차피 회생 불가능으로 병색이 완연하다. 바람도 불지 않았는데 몇 개의 나뭇잎이 추가로 더 떨어졌다. 그것이 묘하게 마을 분위기를 설명해주는 것 같아 그라바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인기척도 없고, 개 짖는 소리도 안 나고, 개미 한 마리 안 보인다.
고개를 갸웃했다. 사막 썰매를 찾아 며칠 머물렀던 룬데긴의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고, 호객 행위를 하는 썰매 몰이꾼들의 아우성으로 귀가 따끔거렸다. 외지인들을 벗겨 먹겠다며 멀건 대낮부터 술을 팔았다. 와중에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번져 골목은 24시간 계속하여 호황. 바삐 걷는 짐꾼에 장사꾼에 정신 없었다.
그런데 그 룬데긴보다 인구 숫자만 두 배라던 테라는 어찌된 영문인지 절간, 내지는 물에 잠긴 무덤터를 연상시켰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더운 지방에선 살인적인 햇살을 피해 낮과 밤을 바꿔 생활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다. 아이들의 건강을 위해 달의 축복을 빌고, 심지어 결혼식도 밤에 한다고 했다. 해가 지는 것과 동시에 피로연은 끝~ 인 고향 풍습과는 정 반대다. 한술 더 떠서 일몰 시각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양치질을 하는게 일상이란다. 이른바 뱀파이어 라이프다.

『꼭 그 때문인 것 같진 않은데... 살펴보자.』
시험삼아 제일 가까운 집으로 접근해 봤다. 허락도 구하지 않고 남의 집을 엿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잔소리하는 그라바스는 그냥 찌그러뜨리고 출입문의 손잡이를 앞으로 당겼다.
놀랍게도 집 주인은 자물쇠 장치를 채워두지 않았다. 찰칵 소리가 나고 그대로 문이 열렸다.
안에 누구 없느냐 목소리를 내기 전, 유나는 벽쪽으로 주의깊게 몸을 붙이고 숨을 죽였다.
더위를 피하고자 지하로 땅을 깊게 파고 축대를 세운 탓인지 코로 축축한 내음이 올라왔다.
지상과의 기온 차를 설명해주는 축축함이었으나 결코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 집을 지은 사람은「서늘한 집 만들기」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환기 면에서는 실패한 것이 분명하다.

『유나. 그러면 안됩니다. 먼저 문고리를 두들겨야지요. 아님 초인종을 누르거나.』
『그럴 필요 없다. 안에는 아무도 없어.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생활 공간은 땅 아래로 자리를 잡았다. 삐걱이는 계단의 맨 마지막에 내려서자 눈앞으로 잔뜩 어질러진 거실이 나타났다. 당장 돈을 갚으라고 아우성을 치는 빚쟁이들을 피해 식구들 전부가 허겁지겁 달아난 풍경이었다. 의자는 죄다 엎어져 있고, 칠칠치 못하게 떨어뜨린 슬리퍼 한짝이 식탁 아래로 굴러다녔다. 접시가 한 장 깨졌고, 화덕용 불쑤시개가 그 옆으로 팽개쳐져 있다. 양초 그릇이 선반 아래로 거꾸로 뒤엎혀져 있는게 눈에 들어왔다. 집안에 불을 내지 않은게 천만 다행이었다. 바닥에 그을음을 조금 남기고 양초는 저절로 꺼졌다.

그 어수선함에 질려 그라바스는 뺨을 긁었다.
『야밤도주?』
『글쎄. 당장은 판단하기 힘들겠는데. 이웃 집을 더 보자.』
그녀는 턱짓으로 밖으로 나가자는 시늉을 했다.

『이봐요. 누구 없습니까? 이봐요?』
이번엔 제대로 현관 문을 노크했다. 그러나 집안에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문고리를 세게 잡아당기자 쇠붙이 긁히는 소음을 내고 출입 문이 활짝 열렸다. 이곳 역시 집 주인이 문단속을 하지 않았다. 기가 찰 노릇이다. 집 주인은 꽤나 듬직해 보이는 자물통까지 걸어두고 정작 중요한 열쇠를 채우지 않았다. 건망증 때문에 그런 거라면 치료를 위해 병원을 꼭 방문할 필요가 있겠다. 그라바스는 반질반질 빛이 나는 자물통을 쥐었다 놓았다 하며 눈썹을 한곳에 모았다.

『문단속을 하고 싶어도 못 했을 수도 있어. 저길 봐라. 모자가 떨어져 있군.』
집안으로 내려가는 계단 바로 앞으로 모자가 보였다. 그런데 그 모자 챙에는 도장으로 찍어놓기라도 한 것 같은 선명한 구두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나를 존경한다면 내 모자도 존경하라...』
굳이 오래된 격언을 읊조리지 않더라도 집 주인이 일부러 자기 모자를 밟아댔다고 보기는 어렵다.
허리를 굽혀 모자를 주워든 유나는 갑옷이라도 뚫을 듯한 눈빛으로 더러운 얼룩을 쏘아보았다. 사이즈로 보아 이 모자를 밟은 사람은 체격이 큰 성인 남자다. 밑창의 한쪽만 닳은 모양을 봐선 좌우로 건들건들 움직이며 걷는 습성이 있다. 모양이 망가지도록 밟은 걸 봐선 성마른 성격이다.
흠, 신음하며 모자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몸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예요. 봐요, 이 핏방울. 코피라도 떨어진 것 같네요.』
많은 량은 아니었다. 두어 방울의 피가 문설주에 튀어 있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던지 얼룩을 손톱으로 긁자 마른 피가 가루가 되어 떨어졌다. 그라바스는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찌꺼기가 달라붙은 손톱을 옷에다 문질러 황급히 닦아냈다. 예나 지금이나 피라면 질색이다.

『유나. 제일 가능성 없는 얘기지만 한 번 들어보실래요?』
『해봐.』
『남편과 아내가 부부싸움을 했어요. 남편은 여자의 모자를 보란 듯이 밟아댔고, 부인은 홧김에 남편의 얼굴로 커다란 주전자를 휘둘렀죠. 정면에서 얻어맞고 코를 다친 남편은「이혼이다, 이혼!」라며 한참을 악을 쓰다가 술집으로 가버렸어요. 여자는 가방을 꾸려 친구 집으로 떠났고요.』
『썩 괜찮았다만 가능성 제로의 얘기군. 그 첫째, 이 모자는 여성용이 아니라 남성용이다. 둘째, 코를 찌르는 홀애비 냄새로 보아 이 집엔 여자가 없었다. 셋째, 술집에 간다면서 뭐하러 식탁에 1인분의 음식을 차려둔 거지.』

정말이다. 유나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테이블 위로 나이프와 포크, 보리 빵과 스프 접시가 보였다. 빵은 이미 말라 쪼그라들었고, 접시에는 악취가 대단한, 초록색의, 외계인 콧물로 연상되는 무엇인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접시를 살짝 들어 기울이자 덩어리진 곰팡이가 하얀 벌레와 같이 해서 둥실 떠올랐다. 음식의 부패 정도를 보아 차려진지 사흘은 족히 지난 듯했다.
식사 준비를 다 끝마치고 수저를 들기 전, 갑자기 마음을 바꿔 밖으로 나가 이후로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그라바스는 코를 쥐고 웅얼거렸다.
『이거, 안 좋아.』
『맞는 말이다. 대단히 안 좋군. 냄새가 고약해.』
『아뇨, 유나. 제 말은... 휴우, 그러니까 냄새가 아니라 상황이 안 좋다는 거였어요.』
그는 옆으로 쓰러진 의자를 도로 일으켜 세우면서 말을 이었다.
『부부싸움이네 술집이네 하는 쓸데없는 소린 관두고 가장 가능성 높은 이야기만 하도록 하죠. 애시당초 가능한 이야긴 딱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난리가 싫어 자발적으로 떠났거나, 아님 강제적으로 끌려갔거나. 그런데 밥상을 차려둔 채 피난을 떠났다고 하면 아구가 맞지 않아요. 난리통에 도둑이 든 것처럼 어수선할 수는 있겠죠. 옷가지가 사방에 널려있고, 농기구가 죄다 쓰러져 있고... 하지만 사람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식탁에 빵을 올려둔 채로 떠나지 않아요. 도망치려면 먹을 것을 최대한 잘 챙겨야 하니까요. 보리 한 톨이 아까운데 스프를 그냥 썩게 만들었을까요. 아니죠.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딱 하나...』
『강제로 끌려갔다?』
『맞아요.』
『어디로?』
『그걸 알면 귀신이죠.』
『귀신은 아니더라도 마법사잖아.』

말문이 막혔던 것 같다. 그라바스는 항의조로 아, 하고 입을 열었다가 무어라 말은 못하고 멎적은 표정이 되어 머리통을 긁었다. 지금까지 이런 오해를 몇 번 받았더라. 하나, 둘 하고 손가락을 접으려다 관뒀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항구에 깔린 안개를 치워 배가 무사히 출항할 수 있도록 해달라 요청하기도 한다. 죽은 애완용 고양이를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고 하는 건 애교다. 심각해지면 화산폭발을 멈추게 하라고 명령한다. 난처해 하는 그 앞에서 빨리 주문을 외우라며 성화다. 주문을 외우는 바로 그 순간, 지진은 멈추고 폭우는 당장 그친다는 식이다.

『유나, 마법사는 만능이 아녜요. 마법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하느님 대신 그 자리에 마법사를 올려놓았을 겁니다. 하지만 하느님 자리에 마법사는 못 올라가죠. 그리고 이게 가장 중요한데... 전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런 마법사가 아니예요.』
이번엔 유나가 아, 하고 입을 벌렸다. 그리고 정색하며 눈을 똑바로 떴다.
『해골 밸트를 차지 않아서?』
그라바스는 순간적으로 미끄덩 하고 몸의 균형을 잃었다.
그러니까 마법사에 해골 밸트가 왜 세트로 따라 붙느냐니까! 도대체 누구야! 이 여자에게 잘못된 정보를 가르쳐준 인간이! - 망연자실하여 비명을 질렀다.
『그딴 것하고는 상관 없어요! 해골 목걸이, 해골 팔찌, 해골 귀걸이 몽땅 다 상관 없습니다! 그리고 불안해서 덧붙이는건데 검정색 망토 역시 상관 없어요.』
『하지만 카오스 워드를 사용하는 건 맞지?』
『맞아요.』
『그런데도 마법사가 아니라고?』
『슬프지만.』
그라바스는 애교를 곁들여 윙크했다.
『혼돈제어 구축문자, 일명 카오스 워드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 전부를 마법사라고 하면 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모두가 똑같은 인간이란 말이 됩니다. 그렇지만 형제 자매는 공통점이 많아도 결코 동일한 인물은 아니지요. 마찬가지예요. 비슷은 해도 같지 않습니다. 점술가와 점쟁이가 다르고, 마술사와 마법사가 다른 것처럼요.』
『어떻게 틀리지.』
『기술적인 면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주술의 완성된 최종적 형태도 다르고요. 최고급 웨딩 케이크나 장터 만두의 재료는 둘 다 밀가루지만 만드는 방법이나 그 맛은 차이가 나잖아요? 그런 거예요. 저 같은 정령술사는 찐빵이고 마법사는 제과점 빵이라 할 수 있죠. 전 보유한 마력도 그리 크지 않고, 지극히 제한된 조건 하에서 오로지 계약된 정령의 술만 사용할 수 있어서 마법사라고 하기엔 조금은 무리예요.』

다 듣고 난 유나는 시린 표정을 짓곤 팔짱을 꼈다.
『뭐냐, 그것은. 설명은 길었지만 결국「난 실력이 한참 부족해요」라는 거잖아.』
『욱!』
『간단히 말하면 지금의 너로선 마법으로 없어진 사람들을 찾지 못 한다는 거지? 그거 유감이군. 하는 수 없지. 직접 발품을 팔아 알아내야겠군.』

대단한 마법사도 그런 건 못 해요 - 라는 말이 목젖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봤자 사내답지 않게 변명한다며 오히려 면박을 당할 것이 뻔하다. 그라바스는 처량맞도록 어깨를 떨군 채 굴욕을 감수했다.
『하아.』
하는 수 없다. 마법사는 반드시 해골 밸트를 차고 다닌다고 굳게 믿는 인간을 상대로 더 이상의 것을 설명하는 건 무리다. 차라리「날 마법사로 만들고 싶으면 직접 해골 밸트를 사 주시구랴」라고 못 박는게 쉽겠다. 자포자기하고 넘어져 있는 의자 하나를 더 일으켜 세웠다. 아니, 세우려 하다 제지당했다.

『멈춰.』
『네?』
『움직이지 마.』

왜 말리는 거지? 의자에 폭탄이라도 달렸나, 아님 뱀이 붙어 있나. 영문을 모르겠다며 엉거주춤한 상태로 얼어붙었다. 유나의 심각한 표정으로 보아 장난은 아닌 것 같았지만 의자는 딱히 수상하다할만한 구석이 없었다.

『유나? 뭐가 잘못되기라도...』
『이런, 젠장. 숨어.』
『뭐요?』
『귀가 먹었나. 숨어! 빨리!』

동시에 집안으로 내려오는 계단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하나 드리워졌다.
쉬이이- 하고 어금니 사이로 썩은 숨 내음이 비어 나온다.
그라바스의 안색이 달라졌다.
데몬이다. 데몬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Posted by 미야

2006/07/05 13:51 2006/07/05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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