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지고 황량한 그 모습은 제시카의 장례식 직후의 샘을 연상시켰다.
『어째서냐.』
멍한 눈빛으로 비가 내리는 창밖을 응시하며 축 처지는 노래를 듣는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다. 울적한 마음의 틈새로 사악한 악몽이 한쪽 발을 들이민다. 상복을 입은 숙녀는 묘비에 엎드려 통곡하고, 냄새를 맡고 몰려든 까마귀떼는 시든 장미꽃을 부리로 남김 없이 물어뜯는다.
저주가 강림한 땅, 하프를 켜는 건 죽음의 나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님프.
뼈만 남은 앙상한 손가락이 음울한 가락을 자아내면서 결코 마르지 않는 눈물을 댓가로 받아간다.
『망할 똥강아지! 왜 내 앞에서 불행해 죽겠다는 낯짝을 하고 있냐고!』
딘의 외침에 붉게 젖은 눈이 스륵 감겼다.

머리를 쥐어싸맸다. 차라리 직불카드를 훔쳐 달아났다며 냉랭한 목소리로 힐난했음 좋겠다. 졸업식 날을 망치고, 남의 댄스 파트너와 대놓고 뒹굴었다고 야단을 쳐라. 우리는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거든. 추수감사절 같은 명절에나 가끔 연락할 정도에 불과하다고 - 누구라도 좋으니 딱딱한 얼굴을 하던 동생을 이리로 데려왔으면 한다. 사람을 찾는 전단지에 들어갈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짜증 덩어리 샘을 보신 분은 이리로 연락 바람. 후하게 사례하겠음.

주름진 미간을 꾹꾹 찔러댔다.
『그깟 키스 한 번 망쳤다고 우거지상? 새미... 살려줘.』
『그깟 키스라면서 왜 해주지 않는 거야. 딘의 말대로라면 고작 키스 따위야.』
『미안해. 내가 말을 잘못했어. 키스를 망쳤으니 세상이 아작났구나.』
『응. 끝났어.』
『망하긴 뭐가 망해! 거기서 낼름 동의를 하면 어쩌자는 거얏!』

발끈해서 키를 3cm나 크게 했다. 그래봤자 샘의 키는 이미 10년 전에 한 뼘 이상이나 추월해버려 그가 아무리 발돋음을 해봐도 올려다보는 각도는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키높이 구두가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었다. 머리 위를 차지하는 자가 싸움에서 승리한다는 건 상식이다. 엄마는 아이를 내.려.다.본.다. 선생님은 학생을 내.려.다.본.다. 총리는 장관을 내.려.다.본.다. 시선의 우위를 차지하는 자가 권력도 높은 법이다. 따라서 승리한다. 그런데 형님은 동생보다 키가 작아 효과적으로 윽박지르고 싶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서른이 내일 모레인 마당에 사과 상자에 올라가「이 형이 자기 전에 반드시 화장실부터 가라고 그랬지!」소리를 질러대는 건 모양이 우습고... 마땅한 타협점을 찾기 어렵다고 생각한 딘은 샘의 앞 머리카락을 세게 잡아당겨 고개를 숙이게 했다.

『자식아, 웃어.』
『딘, 아파.』
『웃으라고 했다, 샘. 내가 제일 싫어하는 표정 같은 건 짓지 마.』
『날 대머리로 만들려고 작정했으면서... 지금 나더러 웃으라고?』
푸념을 늘어놓긴 했어도 샘은 어떻게든 웃으려고 노력했다.
그가 하는 말은 뭐든지 들어주고 싶다. 딘이 요구만 한다면 번화가 한복판에서 무릎을 꿇고 그 신발에 입을 맞출 수도 있었다. 하늘의 별따기라던 월드 시리즈 결승전 입장권도 구해다 바치고, 인류 문화 유산이라는 스핑크스의 머리 꼭대기로「우리 사랑 영원히」문장을 낙서할 의향도 있다. 태양을 거꾸로 돌게 만들고, 바다를 거꾸로 뒤집어 육지로도 만들 것이다.

『뭐든지?』
『뭐든지.』
간신히 차분함을 되찾은 샘이 이마를 이마로 톡톡 찧으면서 속삭였다.
포근한 앙고라 코트에 푸근히 감싸인 듯한 감각이었다. 딘은 어쩐지 신이 났다.
『구멍난 양말을 꿰메줄거야?』
『바느질엔 소질이 없지만 딘이 하라고 하면 할게.』
『그럼 나는 네 옆에서 피투성이가 된 엄지손가락에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여야 해?』
『아니. 입으로 빨아주면 돼.』
『먹고 싶다고 하면 내가 좋아하는 애플 파이도 구을 거야?』
『기꺼이.』
『너... 요리 무진장 못 하지 않냐. 오븐 타이머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잖아.』
『물론 몰라. 결국 나 때문에 온 집안으로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차겠지.』
『그건 곤란해. 출동한 소방관이 집에다 불을 지르려 했다며 널 잡아가려 할 거야.』
『딘? 소방관은 불만 꺼. 체포는 하지 않아.』
『오, 물론 그렇겠지.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막 안심이 된다. 정말 고맙다, 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동작은 어느새 쓰다듬는 쪽으로 바뀌었다. 부드럽고 고운 머릿결이다. 손가락으로 차분히 빗질을 하며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청록색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늘 딘을 따라다니던 바로 그 시선이었다. 반쯤 울며 젖병과 엄마를 찾던 그 가엾은 아기 말이다.
애간장이 살살 녹았다. 이건 내 새끼다. 강하게 끌어안아서 달랬다.

『파이... 못 만든다고 헤어지자고 하는 거 아니지? 내 말이 맞지?』
덩치와는 맞지 않게 샘이 징징거리며 콧소리를 냈다.
『온 집안을 그을음 투성이로 만든다면 당연히 내쫓아 버릴테다.』
『나빠. 그럼 난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거야.』
『험악한 소리 지껄이고 앉았다. 벌레가 머리를 파먹었냐.』
『진짜야. 죽을 거야.』
『쇼부하고 있네. 어리광은 그만 피워.』
『어리광 부리는 거 아니야.』
그치만 손가락으로 옷깃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는 걸 봐선 어리광이 분명했다. 게다가 귀부터 목덜미까지 온통 분홍색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의 홍조는 가슴까지 번져있을 것이다.

절대로 응하지 않겠노라 결심했던게 송두리째 흔들렸다.
「겨우 키스일 뿐이야.」
주저하며 샘의 붉어진 목덜미를 끌어당겼다.
「간단한 인사 같은 거라고. 왜 있잖아. 별 거 아닌, 일종의 친밀함의 표시 같은 거.」
증명이라도 하듯 서로의 입술이 닿은 뒤에도 아무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딘은 내심 마음의 안도감을 느꼈다. 촉촉하게 포개어지는 얇은 피부 한 장 탓에 벼락이 수직으로 내리꽂는 일은 없었다. 평온하고 따스했다. 이불을 덮고 굳 나잇. 엄마가 말씀하셨어, 새미. 천사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불러왔다. 희미한 숨결과 익숙한 샴푸의 냄새가 코를 간질이려는 찰나 쪽 하고 과장된 소리를 내고는 샘에게서 떨어졌다.

분명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얼랍쇼.」
뭐가 잘못된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가위를 내겠다고 하고 보자기를 내밀었다. 습윤한 소리에 자극이라도 받은 건가, 무의식중에 혀를 내밀어 샘의 윗입술을 핥았다.
『으응...』
방문을 열기에 앞서 정중하게 노크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목이 빠져라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게 분명한 샘은 얼른 입을 벌리고 열성적으로 반응했다.
「아냐, 아냐. 이건 계획에 없었다고. 중지! 멈추라니까!」
그래봤자 츄웁, 하고 입안에서 미끌어지는 혀의 움직임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척추를 타고 민들레를 닮은 간지러움이 달려나갔다. 의식이 아득히 멀어지려 했다. 파도에 휩쓸려가는 모래처럼 팔과 다리, 그리고 형체라는 것 자체가 붕괴될 조짐을 보였다. 샘이 얼른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지 않았더라면 산산히 부수어졌을지도 모른다.

『샘.』
『응... 여깄어.』
갈증에 허덕이며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고 삼켰다. 그때마다 눌러 죽인 소리를 내는 그가 좋았다. 이름을 불렀을 적에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그가 좋았다. 금방에라도 끊어질 것 같은 투명하고 가느다란 실 하나에 체중 전부를 맏기고 그의 어깨로 팔을 둘렀다. 밀착되는 온기에 몸도 마음도 훨씬 편안해졌다.
「엑?! 편안하다고? 지금 편안하다고 그랬어?!」
소스라치게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얼마 되지 않았을 분량의 호흡을 샘이 전부 훔쳐냈다. 딘은 눈을 떴다. 샘은 더욱 더 깊게 빨아당기며 폐속에 든 공기, 혈관을 돌아다니는 산소, 세포 하나하나에 심어진 영양소 전부를 강탈해갔다. 여기서 난 꼴딱 죽는 거구나. 포기하고 눈을 감는 것과 같이하여 웃음을 머금은 손길이 턱 아랫부분의 민감한 장소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기뻐하며 허리가 튕겨올랐다.
「큰일났다!」
재난이었다. 결국 둑은 무너지고 마을에는 홍수가 닥칠 것이다.

마침내 입술을 떨어뜨리고서 샘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딘은 깊게 패인 보조개를 정신 놓고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음을 확인하면서 샘은 입고 있던 파자마 바지를 아래로 내렸고, 위태롭게 범람하던 물은 누런 진흙탕을 만들며 삽시간에 거리를 쓸어버렸다.

Posted by 미야

2008/01/23 22:39 2008/01/23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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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밤맛만쥬 2008/01/23 23:24 # M/D Reply Permalink

    10시부터 계속 들락거린 보람이 있네효!! 어머어머어머~너무 좋아라~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실실 웃고 있어요. 난 몰라, 잉.<;;

  2. oka25 2008/01/24 05:41 # M/D Reply Permalink

    엄머~엄머~어떻한데요~~ㅋㅋㅋ 딘은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으로~~
    으으~둘이 너무 예쁘게 닭살 돋아요~

  3. 소나기 2008/01/24 16:39 # M/D Reply Permalink

    여기가 현실인겁니다!!! 둘의 대화가 정말이지^^

  4. 2008/01/24 18:02 # M/D Reply Permalink

    나이스 지니!! >.<
    네가 비록 딘이의 은제 칼날에 스러져가더라도
    누님들은 널 잊지 않을끄다~~

  5. hoya 2008/01/28 12:02 # M/D Reply Permalink

    허헛..... ㄷㄷㄷㄷㄷㄷㄷㄷㄷ
    너무 재미있어요~ ㅋㅋㅋㅋㅋ

  6. 로렐라이 2008/02/21 15:01 # M/D Reply Permalink

    /ㅁ/ 엄머 어떻게 한대요 ~ 얼레꼴레~
    보기 좋네요(?) 와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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