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45

제8장 어린아이는 사고를 쳐야 어른이 된다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운심부지처가 그 자체로 산이었다면 금린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성이었다.
서울로 올라와서 여의도 63빌딩 처음 보는 시골뜨기가 되어 입을 벌렸다. 건축기술의 한계로 하늘을 찌르는 높이까지 지붕을 올리지 못한 관계로 규모를 옆으로 늘려 크기가 무지막지했다. 화려하고도 웅장한 기세가 그냥 한 나라의 왕궁이었다.
무엇보다 사람의 기를 꺾는 건 정문의 모양새였는데 정문 입구까지 계단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며 세어보면 무려 108개나 된다던데 이건 사람의 무릎 뼈를 갈아버리는 미친 지랄이었다.
질려하는 내 반응을 곡해하고 길을 안내하던 수사가 기뻐했다. 감탄이 그 감탄이 아닌데 아무튼 좋아했다.

어쨌든 수사는 내가 정문 계단으로 올라갈 신분이 되지 못했기에 이참에 실컷 구경이나 하라며 이곳저곳을 끌고 다녔다. 멀리서 보니 계단을 오르내리는 손님들의 모습이 확실히 장관이기는 했다. 비단 옷을 입고 다들 강제 유산소 운동 중이었는데 근엄한 척하고 있어도 겨드랑이에 땀이 차고 있었다.
수사의 말로는 청담회처럼 중요한 모임이 있는 날엔 가마를 사용한다고 한다. 염방존이 친히 입구에 나와 손님을 맞이하고, 황금 가마가 훨훨 날아다니고, 금색으로 옷을 입은 수사들이 주변을 엄호하여 장관도 그런 장관이 없다나.
아무튼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였고, 수사는 나를 데리고 별관처럼 생긴 옆 건물로 들어갔다.

“눈에 붕대는 왜 그런 건데.”
“다쳤습니다.”
“어쩌다?”
“강도에게 당했어요.”
궁예처럼 한쪽 눈을 붕대로 가렸더니 거리 감각이 떨어져 걷는 게 힘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헛디디고 주룩 미끌어졌다. 난간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할 뻔했다. 한쪽 눈으로만 사물을 보는 훈련을 더 해야겠다 생각하며 이쪽을 흘깃거리는 사람들을 향해 목 인사를 했다.
안내역할의 수사는 그런 식으로 하다간 해가 져도 끝나지가 않을 거라며 발걸음을 독촉했다.
한참을 빙빙 돌아 호텔 로비 같은 곳에 당도하자 지배인 분위기의 남자가 나를 맞았다.
배가 많이 나와 스스로 발을 닦을 수 없는 풍채의 사내였는데 몸집이 비대해도 동작이 재빨랐다.

“그래서 누구라고?”
“안선준입니다.”
“어디 안씨인가.”
“죽산 안씨입니다.”
“죽산이 어디야. 들어본 적도 없군.”
접힌 종이를 펼쳐 뭐라 적힌 글귀를 읽더니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며 끙 소리를 냈다.
이어지는 건 형식적인 주의사항이었고, 앞으로 당분간 간단한 잡일거리를 하게 될 거 말하며 파리를 쫓는 시늉을 했다.
“유수관! 나는 바쁘다. 나 대신 얘 좀 데려가!”
그러더니 연회용 소반 2천개를 창고로 옮기는 일에 다짜고짜 날 투입했다.
그렇게 금린대에서의 첫날은 짐 나르기로 시작해서 짐 나르기로 막을 내렸다.
다행히 무거운 걸 번쩍번쩍 드는 내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신입 갈구기는 딱히 없었다.

“그래서 누구라고?”
“죽산 안씨 안선준입니다. 먼 시골에서 왔습니다.”
“숫자는 셀 줄 알아? 자루 마흔둘을 가져가면 된다.”
다음 날에는 식자재가 든 자루를 주방까지 옮기는 일을 했다. 무가 가득 들어 제법 무거웠는데 다섯 번을 왕복하기도 전에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요령부리지 마.”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다시 자루 운반을 시작했다.
“무가 마흔둘이라고? 너는 무가 그렇게 좋디? 내일도 모레도 뭇국 먹고 싶어?”
자루가 너무 많이 왔다고 한다. 그러더니 주방으로 옮겨놓은 자루 마흔 둘에서 열다섯을 빼고 나머지는 제자리에 돌려놓으라고 했다.
“뺄셈은 할 줄 알지?”
어제 연회용 소반 나르던 일은 순전히 맛보기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후임 갈구기였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양손으로 자루를 하나씩 들었다. 전생에서 쓰던 빨간색 고무코팅 장갑이 너무나 그리웠다. 뒤에서 음흉하게 쿡쿡거리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왜 이렇게 굼떠!”
어제 봤던 사람이었다. 유수관... 그게 직책 이름인지 사람 이름인지 알 재간이 없었다.
“너, 그리고 너! 따라와라.”
그가 나 말고도 다섯 명의 하인을 데리고 연무장 같은 곳으로 데려갔다.
저 앞으로 활 과녁이 있고 풀을 베어 단정하게 정리한 모양이 더도 말고 연무장이었다.
여기서 돌을 주우라는 건가? 나 혼자 어리둥절해 하는데 다들 과녁으로 뛰어가 꽂힌 화살을 뽑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발선에서 과녁까지의 거리가 한참 되었기에 쉬운 일은 아니었다. 크고 무거운 화살을 품에 안고 세 번 왕복하니 진이 빠지려 했다.
한 시진 뒤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될 무렵이 되자 다들 개처럼 헐떡거렸다.
나 또한 힘이 부쳤는데 모두가 단합하여 눈치를 줘서 마지막 왕복은 오롯이 내 몫으로 남겨졌다.
“걷지 말고 뛰어!”
악마 교관이 따로 없었다. 유격, 유격, 구호를 붙이면 딱이다 생각하며 보다 빨리 걸었다.
한쪽 눈을 가린 상태라 뛰는 건 무리였다. 거리 감각이 둔해진 상태에서 뛰면 십중팔구 넘어질 거다.
“못 봐주겠네. 엉덩이 흔들며 뒤뚱거리는 거 봐라.”
소리죽여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참 성격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든 말든 과녁으로 가서 화살을 뽑았다. 실력이 좋은 사람이 쏘았는지 박힌 간격이 일정했다.

다섯 개의 화살을 품에 안고 돌아서는 순간 쇄애액 공기를 찢는 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사람이 과녁 앞에 서있는데 어느 미친놈이 활을 쏘았다.
“아, 미안. 미안.”
말로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표정은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 소년이 어서 비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는 다시 활에 화살을 걸고 줄을 당겼다. 내가 비키지 않아도 바로 쏠 기세였다. 실제로도 망설이지 않고 쐈다.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명쾌한 탁, 소리가 나면서 과녁 한 가운데로 화살이 박혔다.

“도련님, 그러다 사람이 다치겠습니다.”
유수관이 필요 이상으로 굽실거리며 소년을 만류했다.
“무슨 소리냐. 내가 실수라도 할 것 같으냐?”
“도련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놈은 실수를 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이게 무슨 일요일 저녁 시트콤인가 싶었다. 유수관은 비굴할 정도로 손바닥을 비비며 ‘저놈이 놀라 화살 앞으로 뛰어들기라도 하면 낭패다.’ 라고 말을 덧붙였다.
지금껏 별 거지 같은 말을 다 들어봤어도 저 주장은 정말이지 신박했다.
“조금만 기다려주신다면 얼른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금린대에서의 두 번째 날, 금씨 가문의 방계 도련님 금목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어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나, 하는 짓 없이 미움 받는 부류인가.”
《글세. 운심부지처에 있을 때보다 취급이 더 안 좋은 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밥은 여기가 더 맛있어. 반찬 가짓수도 많고.”
《밥 먹으려고 금린대에 온 것도 아니면서.》
“아냐. 반찬이 맛있으니 섭섭하던 것들이 다 용서가 된다. 간이 알맞게 잘 들었어.”
온서염과 대화를 나누며 버섯조림을 입에 넣자 옆에 앉은 하인이 ‘이런 미친놈을 보았나!’ 이러고 쏘아봤다. 모르고 보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이니 미쳤다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하룻밤이 지나기도 전에 눈만 다친 게 아니라 머리도 다쳤다는 소문이 돌았다.
빗자루 질을 하면서 온서염과 대화를 나눴더니 소문은 한층 더 빠르게 퍼졌다.

“야, 얼굴에 붕대 감은 놈!”
금목현이 자기를 닮은 사촌들을 데리고 나를 콕 찝어 괴롭히러 왔다.
다들 금색으로 옷을 입었고 미간에 붉은 단사를 찍은 소년들이었다.
나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무슨 용무이신가요.”
“연 날릴 줄 알아?”
“아니오.”
“어릴 적 뭐하고 놀았기에? 됐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 거기서 연을 날려봐.”
그렇게 말하며 각자 활과 화살 통을 챙겼다. 훈련을 하는 김에 이번에는 연을 날려 움직이는 표적으로 삼을 생각인 것 같았다.

금목현의 실력이라면 빗나간 화살에 맞을 염려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같이 온 사촌이라는 녀석들은 어쩐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슨 놀이라도 하는 분위기로 왁자지껄 떠들며 깔깔 웃느라 바빴는데 무기를 다루면서 집중하지 않는 태도만 봐도 앞날이 구만리였다.
“나란히 쏴서 누가 먼저 연을 떨어뜨리는지 내기를 하자.”
“내기가 되겠어? 여기서 활솜씨가 제일 좋은 사람이 누군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척 봐도 제일 실력이 떨어질 것처럼 생긴 소년이 입술을 내밀고 툴툴거렸다.
“난 아직 움직이는 건 맞추기 힘들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 움직이는 걸 맞추기 힘들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활을 다루는 것 자체가 서투른 아이였다. 시험 삼아 줄을 당겨본다면서 뺨에 붉은 세로줄을 긋는 걸 봐선 확실하다. 잘못 튕겨나간 줄에 얻어맞고 악! 비명을 지르자 금목현이 웃겨 죽는다고 난리를 쳤다.
“웃지 마! 재미없어!”
“알았어. 더는 웃지 않을 테니 넌 거기서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나머지 소년들이 제각각 활을 걸고 연이 떠오르기를 기다렸다.

벌레를 형상화한 것 같은 연이었다. 바탕이 짙은 녹색이었고 가슴에 붉은 점이 찍혀 있었다.
활쏘기 연습용으로 쓰기엔 가격이 있어 보였다.
그런 연을 들고 바람을 등진 채 이리저리 뛰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은 아니나 연을 다루려면 나름 요령이 필요했다.
“느려 터졌어!”
참을성이 부족한 소년이 발을 동동 굴렀다. 발을 구르는 데 멈추지 않고 위협조로 한 발 쐈다.
근처에도 오지 않고 멀직히 떨어졌기에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비신사적 행위였다.

‘더 늦어지면 표적으로 내 머리를 맞추려 들겠군. 거 참.’
바람을 타고 연이 본격적으로 날아오르기도 전에 금목현이 활을 들고 목표물을 조준했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눈 먼 화살에 맞겠는데?’
금목현을 따라하는 소년들을 보고 있자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아닌 게 아니라 집중하지 못한 소년이 제대로 자세를 잡지도 않고 줄을 놓았다.
폼은 엉망이면서 힘은 펄펄 솟는지 화살은 제법 멀리까지 날아갔다.
《뒤로 한 걸음 물러서.》
온서염의 경고와 거의 동시에 발치 앞에 푹 소리를 내며 화살이 박혔다.

Posted by 미야

2021/12/21 17:11 2021/12/21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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