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도조사] 풀피리 23

제4장 뜬소문과 재화욕심

※ 오리캐 주인공 BL 호러물입니다. 의성조, 소년조 위주.
지명을 포함하여 잘 모르는 부분은 지어냅니다. 원작자의 팬픽 규정을 준수합니다.
마도조사 소설과 드라마 진정령의 타임라인이 틀린 관계로 여기서도 사건 흐름이 뒤틀려 있습니다.



귀를 닫았는데도 바람의 소리가 들렸다.
눈을 감았는데도 밝은 햇살에 시린 느낌이었다.
어이가 없을 정도의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고된 철야 작업이 끝나 생체리듬이 무너진 상태에서 컵라면에 부을 뜨거운 물을 끓이며 녹초가 된 몸을 추스리는 기분이 들었다. 김치가 없다고 투덜거리며 둘로 쪼갠 나무젓가락을 입에 문 채 면이 다 익기를 기다리면서...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는 거다.
도대체 여기는 어디고,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막연한 기분이 드는 건 당연하다. 이곳에 올 적에 시체자루에 넣어져 효성진 도장 손에 운반되어왔으니 사방이 낯설어 생전 처음 와 보는 곳이나 마찬가지이고, 진법 안에 갇혀 - 비유하자면 5년간 감옥에 갇혀 썩고 있다 방금 출소한 셈이니 갈 곳을 몰라 두 다리가 얼어붙을 만했다.
그랬다. 나는 지금 급한 마음과 달리 엉거주춤 서서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냉기가 뚝뚝 흐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너, 움직이지 말고 얌전히 있는 것이 좋을 거다.”
아까부터 계속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는데요, 속으로 대꾸하며 상대를 향해 몸을 틀었다.
짙은 자색으로 옷을 입은 젊은 남자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수염 없이 턱과 뺨이 맨질거렸고, 머리를 단정하게 위로 묶어 올렸다.
표정이 방금 사람이라도 죽이고 온 것 같아서 - 실제로는 곰을 죽인 거였지만 - 여하간 살기를 풀풀 풍기고 있어 그럭저럭 준수한 외모가 완전히 빛을 잃었다.
‘곰도 죽였는데 너 같은 건 그냥 한 줌이지.’ 식의 눈빛을 하고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있는데 잔털을 다듬은 눈썹 이런 게 뭐가 중요하겠냐고.

나를 분석하듯 쳐다보던 사내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작고 왜소한 체구, 어깨 길이밖에 오지 않는 쥐 파먹은 머리, 속의도 없이 얇은 중의 한 장만 달랑 걸친 더러운 외견, 그런 주제에 걸맞지 않게 수행자들이나 쓸 수 있는 곤선삭을 들고 있고, 목덜미에 제법 깊어 보이는 상처가 있다. 인정한다. 나라도 수상하다 여겼다.

“수행자로는 보이지 않는데. 들고 있는 곤선삭은 훔친 건가.”
그의 음성이 매우 낮게 가라앉았다.
“괴이하군. 민가가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변으로 미로진까지 설치되어 있었는데 너 같은 어린애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이쪽에서 납득할만한 대답을 하지 않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베어버릴 기세다.
곰의 목을 꿰뚫었던 검을 오른손에 쥐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잘 생각하고 혀를 놀려야 할 것이다. 너는 누구냐.”
사내는 성격이 조급했다. 그가 검을 고쳐 쥐자 아홉 장 꽃잎매듭 장식술이 풀 먹인 것처럼 빳빳해졌다.

나는 채소가게 송씨의 조언을 떠올렸다.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과 마주치면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이 화를 내면 무조건 머리를 조아리고, 소인이 잘못했습니다, 나리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이렇게 빌어라.
배꼽으로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숙였다.
“나리 한 번만 잘못했습니다.”
빠르게 내뱉고 보니 어색하다. 고개를 갸웃거린 뒤, 바로 잡았다.
“소인이 용서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콩글리쉬로 말하는 느낌인데. 워째 더 이상해졌다.

“외숙부, 잠깐만요!”
저만치 앞에서 금릉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녀석은 죽기는커녕 두 다리로 멀쩡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잠시 표정이 복잡해지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며 떼쟁이 어린아이로 변해 울그락불그락 화를 내던 남자의 소매를 붙잡았다.

“왜 왔느냐! 내가 안전한 곳에서 얌전히 목을 닦고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니!”
“목을 닦을 수건을 안 주셨잖아요. 그게 제 잘못이에요?”
“금릉!”
“알았어요, 알았어. 목 닦는다고요. 하지만 그 전에 제 말을 먼저 들어보세요. 저건 그냥 바보예요!”
그러니까 때려봤자 이쪽이 손해라며 말렸다.
“저 멍청한 얼굴을 보라니까요? 자기가 뭘 말했는지도 모르는 표정이잖아요.”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이도 제대로 셀 줄 몰라 저한테 자기가 스물하나라고 하더라고요.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요. 수상한 게 아니라 머리가 잘못된 놈이라고요.”

외조카가 말리자 살기등등하던 사내의 기세가 약간 누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누가 누굴 때린다고.”
그러면서 엉뚱한 방향을 보며 흠흠 헛기침했다.
보아하니 말보다 주먹이 빠른 양반이면서 아니라고 발뺌하는 거였다.
와, 나 하마터면 맞을 뻔했네? 그것도 무공을 배운 사람에게 털리게 맞을 뻔했네??

“종주님, 잠시 와보시지요.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때 마찬가지로 자색 옷을 입은 수사 무리가 다가와 두 손을 마주 모은 자세로 일반례를 올렸다.
높은 분이 눈짓하자 두 명이 따로 움직여 날 붙잡았다.
내가 빼빼 마른 소년이라는 점을 고려한 건지 세게 붙잡지는 않았다. 그저 어깨만 잡았다.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시신의 상태가 신선하다는 얘기다.
종주는 계속하라는 의미로 턱을 끄떡거렸다. 이에 무리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자가 침착한 말투로 자신이 보고 온 것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두 여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입니다. 검을 지녔으되 경지가 높아 보이는 이들은 없었습니다. 품에서 부적과 방울, 효능이 의심스러운 잡기들이 잔뜩 나왔습니다. 이곳에 보물이 있다는 소문에 끌려 근처까지 올라왔다가 미로진에서 길을 잃고 환각을 보는 중 자기네들끼리 다툼이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수행자가 아니면 그럴 수도 있지. 귀신을 봤다며 날뛰다 서로를 베어 죽인 모양이군. 하찮기는!”
“저어, 종주님... 그 죽은 사람들 중 저 소년의 부친이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제야 아차 싶었던지 높으신 분께서 입안 살을 오목하게 물어 깨물었다.
“아니면 짐을 들게 할 목적으로 데려온 머슴이었을 수도 있고요.”
쥐가 뜯어 먹은 내 머리 모양을 보고 수사가 얼른 하던 말을 바꿨다.
이곳 사람들은 여자고 남자고 머리를 허리까지 길게 길러 끈으로 묶거나 관을 써서 모양을 꾸몄으므로 돌칼로 멋대로 잘라내어 삐죽삐죽하게 튀어나온 내 머리 모양이 제법 충격적인 듯했다.
제 핏줄의 머리를 저리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리 없으니 하인이랍시고 험하게 부려진 아이가 아니겠냐는 것이 수사의 의견이었다.

“어른이 전부 죽자 저 혼자 살겠다고 도망쳐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섣부른 추측은 삼가라.”
말은 그렇게 해도 결론은 이미 그렇게 도달한 눈치다.
수사들은 쯧쯧 혀를 차며 ‘운몽에서는 그 누구도 하인을 저렇게 다루지 않는다’ 수군거렸다.
엄청 말랐다, 옷이 더럽다, 머리를 죄인처럼 꾸몄다, 다 떨어진 신발을 신었다, 바보라더라, 말도 들려왔다.

“시끄럽다! 운몽의 수사들이 쟁알쟁알 계집처럼 말이 많구나. 시신 수습이나 해! 여긴 음기가 가득하니 시변하지 않도록 조처하라. 거기 둘은 다른 무리가 더 있는지 찾아보도록 하고, 나머지는 나를 따라와. 산이 무너져내린 곳으로 가야겠다.”
“예, 종주! 그런데 이 아이는 어떻게 할까요.”
“갈 곳이 있는지 물어봐서 없다고 하면 연화오로 데려가. 있다고 하면 노잣돈을 충분히 주고 목의 상처를 치료해준 뒤에 보내줘. 금릉~!! 네 이놈. 또 어딜 가려는 게냐. 여기서 또 사고를 치면 네 다리를 분지르겠다! 그만 촐랑거리고 따라와! 네가 데려왔다는 하인들을 찾아야 할 거 아니냐! 금씨 수사 이것들은 널 내버려 두고 죄다 어디로 튄 거야! 내 돌아가면 금 종주에게 단단히 한마디 해야겠다. 널 호위하라고 붙여준 수사들 중 제대로 된 놈은 하나도 없고 전부 쓰레기밖에 없었다고!”

금릉은 내가 서 있는 곳을 한 번 쳐다보곤 얼굴색을 바꿔 얼른 외숙부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아이를 향해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줄까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참변을 당한 무리에서 저 혼자 살아남은 하인은 풀 죽은 표정으로 땅만 쳐다보는 편이 어울렸다. 금릉이 할 말이 있다는 표정으로 가끔씩 이쪽을 쳐다본다는 걸 알았어도 부러 고개를 들지 않았다.

지시를 받은 수사가 약초와 붕대를 가져왔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치료를 받았다.
갈 곳이 있느냐는 질문에 약양으로 가야 한다고 대답했다.
수사는 원하는 대로 하라며 무게가 묵직한 작은 주머니를 나에게 쥐어 주었다. 돈인 모양이었다.
그는 주머니를 잘 숨겨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충고를 하고, 그러고도 영 못 미더웠던지 날 가까운 마을 초입까지 직접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간 고생이 엄청 심했던 것 같은데 우리와 같이 가지 그러니. 운몽에선 하인이라고 굶기지 않는다. 밥은 많이 먹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만,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서요.”
“알겠다. 네 좋을대로 하렴.”
그는 길게 설득하진 않았다.

멀리서 펑 소리를 내며 신호탄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노란색이었고, 모란무늬였다.
“하여간 난릉 금씨들은 거북이를 조상으로 모시는 건지 느려 터졌어.”
날 데리고 가던 수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졸졸 물이 흐르는 냇가에 이르자 양해를 구한 뒤 정성스럽게 세안을 했다.
거기서부터 조금 더 가자 길 옆에 큼직한 돌이 세워져 있었다.
돌 표면에 지명일 것 같은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어 수사에게 저걸 어떻게 읽느냐 물어보았다.
수사는 ‘벽계(廦界)’ 라고 읽는다 알려주고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라 했다.
감사의 뜻으로 허리를 90도로 접으며 뒤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운몽 강씨의 수사를 배웅했다.

Posted by 미야

2021/11/14 20:38 2021/11/1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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