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증은 드라마나 영화에서 단골로 써먹는 소재다.
질병이나 사고, 혹은 약물, 극심한 스트레스, 기타 등등의 이유로 발생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곤 완전한 기억소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다.
어느 날 침대에서 일어나보니 여기가 어디이고 내가 누구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이런 건 결국 현실이 아닌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것도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에서나 써먹는 얘기다.

안드로이드에게는 기억의 소실이 제법 흔한 일이다.
물리적 장치의 손상, 그리고 인위적인 조작으로 얼마든지 그들의 기억을 사라지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안드로이드가 침대에서 일어나 「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외치는 장면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는다. 만약 드라마 작가가 이 장면을 넣겠다고 하면 그건 막장이 아니고 평범한 일상물이 된다. 모든 기억을 삭제당한 안드로이드는 중고품으로 시장에 나올 것이고, 팔리는 순간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새로운 일터로 보내질 것이다.
그렇다면 기억이 제거되기 전의 안드로이드와 공장 초기 값으로 되돌려져 중고품으로 팔려나온 안드로이드는 동일한 개체로 볼 수 있는가.
탑재된 프로그램에는 변동이 없다. 생산일자, 고유번호도 동일하다.

「제 이름은 코너이고, 당신을 돕기 위해 사이버라이프에서 파견되었습니다.」

앤더슨 경위는 모든 기억을 삭제당하고 말간 얼굴로 나타날 신참을 속으로 공상해보았다.
『그건 아니지!』
『저에게 아니라고 하셔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응? 분명 다른 방법이 있겠지!』

솔직히 말해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되묻는 경위의 표정이 너무 살벌해서 제임스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글쎄다. 조지가 나타나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를 해온다고 해도 그로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은 제임스 무어입니다, 라고 말하고 악수를 청하면 된다.
통성명을 두 번 , 세 번씩 한다고 하늘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물론 다른 게 무너져 내릴 수도 있지만... 앞서도 괜찮았으니 지금도 괜찮을 거라고 제임스는 생각했다.

《자가진단 프로그램 진행.》
한편, 조지의 눈꺼풀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괴해졌다.
오른쪽 눈꺼풀의 움직임은 완전 멈췄다. 왼쪽은 5분에 한 번꼴로 깜빡이는데 윙크라고 하기엔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인간이 윙크를 하면 뺨의 근육이 당겨져 올라간다. 심지어 입 꼬리까지 같이 움직인다. 그 결과 사랑이나 애교를 담은 묘한 비대칭 찡그림이 완성된다. 조지는 그냥 이도저도 아닌 쪽이어서 눈꺼풀을 열거나 닫도록 조작하는 선이 내부에서 끊어졌다는 느낌이었다.

『별 거 아냐, 조지. 티리움을 보충하면 나아질 거야.』
마이클을 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라는 식으로 반응했다. 시력은 양쪽 다 정상이었고, 멀리 떨어진 광고물의 문구를 제대로 읽었다. 새로운 시리즈, 새로운 뉴 라이프, 사이버라이프의 문구는 공격을 받아 검게 그을린 상태였지만 어쨌든 조지는 소리내어 글자를 읽어냈다.
마이클은 전부 다 괜찮아질 거라고 반복해서 말하며 특수용기에 든 티리움의 섭취를 권했다.
제안에 그다지 호응을 보이지 않자 용기의 뚜껑을 열고 입에 대주기까지 했다.
『아님 코로 부어버린다.』
비강의 구조가 인간과 다르다는 건 상관하지 않는 눈치다.
실제로 그렇게 하고도 남았기에 어쩔 수 없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다고 증상이 나아지는 건 없었으나 마이클이 크게 안도했으므로 다시 한 모금 더 마셨다.
출처가 불명확한 티리움에서는 오래된 술과 식초를 섞은 것에 유독성 방부제를 한껏 들이부은 것 같은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맛을 몰라 다행이라는 생각밖엔 안 들었다.

《광원 센서 재조정.》
밝고 어두움에 대한 해석을 내리기가 곤란해졌다. 사물을 보는 것과는 별개로 빛에 대한 인지도가 엉망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안드로이드인 그는 광량이 매우 적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글자를 읽을 수 있다. 그렇게 글자를 읽으면서 생뚱맞게 지금이 대낮인지 밤인지 구분을 못하는 거다. 글자는 눈에 보인다. 그런데 실내 조명등에 불이 들어와 있는지는 구분이 어려웠다.
문제는 이 마당에 진단 결과 모든 시스템이 정상이라는 거다.
손바닥으로 왼쪽 시야를 가리고 오른쪽 눈으로 주변을 관찰했다. 초점이 어긋나 근거리 사물이 오목하게 휘어져 보였다. 원통형 기둥에 사진을 오려붙인 느낌이다.
이번에는 오른쪽 눈을 가려보았다. 물체는 제대로 보이지만 대신 색이 거의 사라졌다.

『마이클, 혹시 비상시 긴급정지 방법을 알고 있어?』
『이론으로는 알지만 파워 오프 버튼을 누르는 건 인간만 가능하지.』
안드로이드에게는 감정이 없다. 그래도 대답하는 마이클의 목소리에는 흉내에 불과한 것이 아닌 많은 감정이 실려 있었다.
『만약 내가 이성을 잃고 난동을 부리게 된다면 몽둥이로 머리를 날려버리는 것밖에 해결 방안이 없을까?』
『그건 최악의 방식이고.』
조지는 가만히 손깍지를 꼈다.
『그렇다면 최선의 방식은?』
『일부 메모리 손실은 각오해야 하겠지만 사이버라이프가 소유자에게 부여한 고유 식별코드로 접근해서 안전 부팅을 해보는 거지. 그러는 게 가장 안전해. 문제는... 우리끼리는 할 수 없다는 거고, 기술자들이 있을 사이버라이프사의 고객센터는 일찌감치 문을 닫았다는 점이지.』
『그렇다면 플랜 B로 가야 할까?』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네 머리를 날릴 생각이 없어, 조지.』
『캐머런 님께 위해를 가하게 된다고 해도?』
『그때는 머리를 남겨두고 나머질 부수도록 할게. 맡겨만 줘. 나 부수는 거 엄청 잘 해.』
부수겠다는 얘기에 대놓고 안심이 되는 건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플랜 C는 어떤가.》
어쩌다보니 그만 유령에게 입이 붙었다.
다만 상대가 유령이기 때문에 목소리가 들려온 특정 위치를 짐작하기는 불가능했다. 그것의 음성은 머리 꼭대기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깊은 땅속에서 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먼 거리에서 지나가는 헬리콥터 비슷하기도 했다.

《우회 중계경로에 문제가 좀 있어서 그렇다네. 지구 반 바퀴를 돈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아서... 아만다가 눈치를 채지 못하게 움직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 덕분에 리소스를 많이 잡아먹었네. 그래서 자네 눈이 그 지경인 거고. 그 부분은 미리 사과하도록 하지.》
순간 온 세상이 독극물이 끼얹혀진 것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던 것들은 이내 고운 모래 알갱이로 분해되었고, 입자와 입자는 결합력을 잃고 떨어져 나갔다. 형태를 잃은 물질들은 태초의 먼지로 되돌아가고자 했고, 반짝반짝 빛을 내며 빠르게 부서졌다.
지독할 정도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어지러운 건 금방 끝나. 조금만 참게.》
시간의 지평선에서 몸이 강제로 잡아 늘려지고 있었다. 태양계 저편에 두고 온 발가락과 성간구름에 닿은 팔꿈치가 멋대로 펄럭거렸다. 그럴 리 없다고 조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지금 그의 몸은 온전한 형태를 잃어버려서 액체에 더 가깝다는 느낌이었다. 방울방울 흩어져서 안개처럼 퍼져갔다. 그 중에 섞인 미세먼지 수준의 파란 알갱이는 티리움이다.
《컵을 상상하게. 자네는 컵에 들어간 액체인 걸세.》
속삭이던 유령의 모습이 어느덧 또렷해졌다. 눈이 있고, 코가 달렸고, 입술이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돼.》
남자가 손바닥을 짝 쳤다.
《성공.》
그리고 조지가 서있던 공간이 거꾸로 훌떡 뒤집혔다.

Posted by 미야

2020/07/30 14:32 2020/07/3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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