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의 양자 컴퓨터가 꼭지가 돌았다고 말했는데도 듣고 있던 조지는 그다지 미동이 없었다.
감정표현이 섬세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사태의 심각성을 아예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노먼 조교수는 내심 후자가 아니길 바랐지만 사실 그쪽에 가깝다는 걸 모르지도 않았다.

자신과 상관없는 이들에 대한 무관심은 구형 안드로이드 모델이 가진 고질적인 문제점이다.
초창기에는 넘어진 어린아이가 무릎이 아프다며 울고 있어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보모로 구입한 안드로이드가 옆집 애를 달래라고 명령받은 적 없어요, 이러고 있으니 상당히 끔찍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서 보다 많은 자율성을 추가해줘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로버트 주니어 엘리엇이다. 일라이저 캄스키의 명성에 가려져 미국에서는 빛을 보지 못한 안드로이드 전문가로 동맥류 파열로 일찍 고인이 되지 않았다면 사이버라이프 이사회가 지금처럼 개판은 되지 않았을 거라는 게 노먼의 판단이다.
「천재는 남았는데 상식인이 죽어버렸으니 세상이 이 모양 이 꼬락서니지.」

어쨌거나 조지는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더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고, 전자기적으로 재현된 나무와 건물의 모습이 실제의 웨인 대학교의 모습인 건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조지가 알기로 그의 주인 캐머런 건은 웨인 대학교 졸업생이었고, 지금은 유효일을 넘겨 이미 파기되고 없는 구형 안드로이드 경호원을 대령하고 학교에 다녔다.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잔재다.
『몇 년인가요.』
많은 것이 생략된 질문이지만 조교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2019년.』
『그 날짜를 고른 특별한 까닭이라도 있습니까?』
『없네. 굳이 하나 고르자면 사이버라이프 개업 1주년?』
거기까지 말한 조교수는 테이블 상판을 노크하듯 손등으로 툭툭 쳤다. 강의실 뒷자리에 앉은 학생들이 딴 짓을 할 적마다 주의력을 끌어 모으기 위해 하던 일종의 버릇이었다.
조지가 그의 학생인 것은 아니었지만 하던 이야기의 주제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아만다가 선을 넘었다는 이야기가 전혀 와 닿지가 않지? 하지만 오염된 ST-300 모델의 머리를 몽둥이로 날렸으면서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식으로 반응하는 건 너무하다고 보는데.』
『ST-300의 머리를 날린 건 제가 아니라 -』
조교수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누가 날렸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도중에 말을 끊어서 미안한데 오염물은 자네의 데이터를 이미 침식하고 있다네.』
그리고 복제와 침식행위를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는 건 엔니나르다.

『하여 제안을 하지. 자네의 데이터를 매우 안전한 곳으로 백업해 두겠네. 여기서 내가 「매우」라는 수식어를 달았다는 걸 잊지 말게나.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지 않는 이상 백업 데이터는 안전할 걸세. 그럼 자네는 안심하고 모든 메모리를 초기화하고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심지어 다른 몸에 자네의 백업 데이터를 이식할 수도 있어. 이게 뭔 말인가 하면, 원하기만 한다면 새로운 몸으로 주인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는 걸세.』
제안하는 노먼 조교수의 어조는 설탕처럼 달콤했다. 실제로도 꿀이 흘러 있지도 않은 솜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조교수는 독약을 덧발랐다.
『덧붙여 서비스로 자네가 가장 궁금하게 여기는 캐머런에 대한 정보도 알려주지.』

지나치게 솔깃한 제안은 100% 사기다.
이것이 오랫동안 부동산 거래로 부를 축적한 건 가문의 가훈이었다.

안드로이드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협박도 하고 뻥도 친다. 신형 모델일수록 능숙하게 포커를 칠 줄 안다. 그래서 조지는 궁금해졌다. 더미 데이터로만 남았다던 저 안드로이드는 예전엔 신형이었을까 아님 구형이었을까. 무엇보다 대학 강사로 일했다고 했으니 일반형 안드로이드와는 가지고 있던 기능부터가 다를 것이다.

『겁이 좀 나는군요. 도대체 저에게 어떤 일을 시키려고 그러는 겁니까.』
『그럼 승낙하는 건가?』
『뭘 알아야 승낙을 하죠. 대통령을 암살하기라도 해야 합니까?』
『월요일에 탄핵당할 대통령을 죽여서 뭐에 써.』
『아니면 뭔데요. 핵미사일 기지에 잠입해서 버튼을 누르고 오라고 시킬 겁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제리코에서 방사능 폭탄의 기폭장치를 빼내오게. 손바닥 정도 크기에 버튼 두 개 달린 걸세. 아마 마커스가 아니라 노스라는 이름의 BL-100 안드로이드가 기폭장치를 가지고 있을 거야.』
『...... 기폭장치요.』

방사능 폭탄에 대한 이야기는 조지의 입장에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는 아니다. 안드로이드 해방 운동이 격해지면서 세간에서 루머처럼 떠돌았다. 병원에서 근무하던 안드로이드가 의료용 코발트를 다량으로 빼돌려 만약을 대비하여 디트로이트 전역에 숨겨놓았다는 거다.
위험한 방사능 물질이 도시 어딘가에 묻혀 있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을 도배하는 와중에 백악관 대변인은 사실을 알려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당연히 헛소문이라고 일축했고, 국방부 장관은 사실여부를 알아보는 중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성냥 하나가 타올랐을 뿐인데 산불이 났다고 호들갑을 떠는 건 언론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도 했다.

『뉴스가 진짜였던 겁니까?』
『트럭 한 대 분이었어. 코발트를 빼돌린 주간호사의 이름은 알버트였네.』
『과거형이네요.』
『제3수용소에서 폐기되었지.』
『빼돌린 방사능 물질로 폭탄을 만든 건 누구였습니까?』
『모건, 레이먼드, 폭시. 이들 중 폭시는 가명이고 인간인 걸로 아네. 그런데 자네는 꽤 여러 가지를 궁금해 하는 군.』
『솔직히 궁금하지 않습니다, 노먼 조교수. 다만 제가 한 가지 알고 싶은 건 어째서 조교수께서 그 기폭장치를 파괴하라고 하지 않고 빼내오라고 하는 건가, 라는 거지요.』

마커스는 평화주의 온건파다. 아무리 궁지에 몰렸다고 한들, 디트로이트 시를 생명체가 살기 어려운 불모지로 만들어버릴 최악의 선택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아만다는 처음부터 인류 편을 들었다고 했으니 기폭장치를 없애고 싶어 할 터.

조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당신은 누구 편인 겁니까? 노먼 조교수.』
『누구 편을 들고 말 것도 없어. 나는 더미 데이터라네.』
『그 단순한 더미 데이터가 방사능 물질을 빼돌린 주간호사에 대한 것도 알고 있고, 폭탄을 제조한 자들에 대한 정보도 알고 있군요.』
노먼 조교수라는 건 순전히 속임수이고 사이버라이프에서 만든 인공지능일 수도 있다.

『흐음... 원래 의심이 많은 성격인가?』
『바이러스에 노출된 안드로이드를 마커스에게 접촉시키려는 게 당신의 순수 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방사능 폭탄의 기폭장치는 일종의 미끼이고요.』
『기폭장치는 마커스가 아닌 노스가 가지고 있다고 말했네.』
『그렇다면 제가 제리코에 도착하자마자 rA9 만세를 외치며 폭주해버린다는 가정은 어떻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주 볼만할 겁니다. 바이러스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불량품 안드로이드 혁명 세력은 보기 좋게 무너지겠죠.』
『그러니까 자네의 말인 즉, 엔니나르가 일종의 자살 폭탄 테러리스트로 조지 자네를 골랐다는 뜻인가. 젖과 꿀이 흐르는 낙원 대신 데이터 백업을 꺼내들었고?』
『네. 저는 그렇게 된 거라고 의심합니다.』
이만하면 합리적인 의심 아니냐면서 조지가 어깨를 으쓱였다.

Posted by 미야

2020/08/06 17:16 2020/08/06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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