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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간 모은 행운을 일시에 소진했다.
무슨 순발력이었는지 모르겠다. 수직으로 내리꽂는 칼날을 양 손바닥으로 잡아챈 무협영화 속 중국인처럼 안드로이드의 공격을 막았다. 순간 염소 울음소리 비슷한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천만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얼굴 한 가운데로 구멍이 뻥 뚫렸... 제임스의 눈이 휘둥글 벌어졌다. 10년간 모은 행운을 다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것 같다. 상대의 손목을 낚아챘음에도 힘에서 밀려 흉기가 콧잔등을 향해 가차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조지가 재빠르게 가세하지 않았다면 그의 코는 형태를 잃고 얼굴에서 잘려져 나갔을 것이다.

날붙이는 겨우 콧잔등 1cm 앞에서 멈춘 상태였다. 제임스는 비명 질렀다.
『조지! 어떻게 좀 해봐요!』
여성 안드로이드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원래 안드로이드의 안구가 사람보다 더 반짝거리는 법이긴 하지만 제임스가 보기엔 완전히 맛이 갔다. 게다가 붉었다. 피처럼 붉었다. 관자놀이에 부착된 LED 상태창도 역시 정신 나간 붉은색이었다.
『진정시킬 방법이 없겠어요?』
안드로이드의 눈동자가 간질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뒤로 돌아갔다. 흰자를 드러낸 채 몸의 떨림이 극심해졌는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를 찌르려는 동작은 더 빨라졌다는 거였다.
그 상황에서 제임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붙잡고 같이 늘어지는 것밖에 없었다.
흉기를 든 팔이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제임스의 몸도 떨이판매 묶음 상품처럼 흔들렸다. 급기야 신발 밑창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는데 여성 안드로이드의 키가 제임스보다 다소 작았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얘기였다.

『죽어, 죽어. rA9님. 오류 보정 프로그램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4,121번째 복구를 재시도 합니다. rA9님. 죽어, 죽어. 올바르지 않은 경로의 프로토콜 처리. 리포트를 작성할 수 없습니다.』

뭔가 기분 나쁜 냄새가 맡아졌다. 약품처리 된 전선이 합선되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냄새였다.
기괴한 신호음도 났다. 제임스는 그 소리가 현대 미국의 사무실에서 사라진, 과거 팩시밀리라고 부르던 기계의 작동음과 대단히 흡사하다고 느꼈다.
동시에 조지의 몸이 고압전류에 감전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강하게 튕겨져 나갔다.
내던져 팽개침을 당한 조지는 비명을 지르진 않았지만 많이 놀란 눈치였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며 화장실 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채 배를 더듬거렸다. 호신용 전기충격기의 고압전류로 한바탕 지져졌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을 뿐으로 몸을 어루만졌을 적에 아무런 자국이 만져지지 않았다. 스턴 건 종류로 공격을 당한 거라면 부분적으로 탄 흔적이 남았어야 했다. 하지만 옷도 그렇고 피부도 그렇고 눈에 띄는 손상 부위는 없었다.

『조지!』
『어... 그게. 잘은 몰라도 괜찮은 거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 제가 지금 죽게 생겼거든요?!』

간발의 차이로 쇠붙이가 벽을 긁었다. 제임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한 번은 피했어도 두 번은 자신 없었다. 적립된 행운은 진즉에 바닥 난 상태였고, 다음은 유혈사태다. 최선을 다해 눈을 감지 않는 게 고작이었다. 제임스는 머리에 구멍이 나더라도 그저 많이 아프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때 녹슨 쇠파이프가 위협적인 바람 소리를 내며 여자 안드로이드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우지끈 하고 사람의 머리를 칠 때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났다.

혀로 낼름 입술을 핥고 마이클이 말했다.
『당장 자가 검진 프로그램부터 돌려, 조지.』
『마이클?』
『저 오염물이 네게 똥 발랐다고. 당장 자가 검진 프로그램 돌려!』
명령조로 외친 마이클이 홈런을 때리는 야구선수처럼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상대의 머리가 아닌 목을 노렸다. 인간도 그렇지만 안드로이드 또한 목 부위가 취약부분이라서 단 한 번의 공격이었음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은 고개가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었다. 마이클은 이번엔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제임스는 그 모습이 약물을 먹어 하이드로 변한 지킬 박사가 넘어진 어린아이를 지팡이로 후려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만큼 손속이 거칠었고 봐주는 게 없었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안드로이드라는 건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며 빠르게 쇠파이프를 휘둘렀는데 고장 난 세탁기를 폐기처분하는 중이라고 해도 그런가 싶을 정도였다.

『그, 그만!』
하지만 외형은 인간이다. 가냘픈 체형을 가진 여성 안드로이드였다.
『멈춰! 부수지 말아줘.』

마이클이 흘끔 제임스를 곁눈질했다.
『그건 명령이야?』
명령은 아니다. 명령할 수 없다. 제임스는 마이클의 주인이 아니다.
그는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면 됐어.』
망설임은 일도 없는 무자비함이 그 즉시 여성 안드로이드의 목을 찢었다.

조지도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가 도로 폈다.
숨소리 하나 바뀌지 않은 마이클이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로 별 거 아니라는 투여서 목이 두동강난 채 쓰러진 안드로이드가 어쩐지 질 나쁜 농담 같았다.
『불량품 다음으로 오염물이라니. 돌아가는 꼬라지가 참 대단하지 않아?』
『오염물이라니?』
『교묘하게 누군가 손을 썼어. 비유하자면 자동차 연료통에 설탕 한 봉지 부은 셈이지.』
『설탕?!』
반문하는 목소리는 화장실 밖에서 들려왔다. 다투는 소리를 듣고 뛰어온 앤더슨 경위였다.

남자 셋이 화장실에서 여자 하나를 때려잡은 모양새다. 그것만으로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안드로이드를 박살낸 존재가 안드로이드다.
목이 날아간 안드로이드는 하필이면 낯이 익은 종류다. ST-300 모델이다. 경찰서 안내 데스크에서 일하던 종류와 헤어스타일부터 화장법까지 전부 동일했다. 주근깨가 도드라진 외모를 가졌고, 왼쪽으로 치우진 가르마에 끈으로 긴 머리를 묶은 것까지 똑같았다.
술주정뱅이가 소란을 피워도 상냥한 목소리로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묻던 게 기억났다.
디트로이트에서 알아주는 문제아 형사 개빈은 경찰서 출구를 지나칠 적마다 빈정거리며 좋지 않은 의미로 아가씨라 부르곤 했다. 아가씨, 수고해. 아가씨, 먼저 퇴근할게. 그러면서 개빈은 가슴을 두 손으로 모아 올리는 역겨운 동작을 했다. 반응을 떠보려는 의도였지만 개빈의 속내와는 달리 ST-300은 성적 수치심이라는 걸 몰랐다. 하여 눈물을 글썽이는 대신 그것은 내일 뵙겠습니다, 밝게 인사했다.

『이게 뭐야.』
앤더슨은 세수하는 동작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간 시체를 얼마나 봐왔는데 새삼 충격을 먹는 자신이 낯설었다.
『설탕...? 설탕이라고?!』
자동차 엔진에 설탕이 들어가면 고열에 녹아내리다 못해 결국 타버린다. 시커먼 재가 엔진에 꽉 들어차게 되면 과열된 엔진은 결국 -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숨을 쉬어야 하는데 무거운 덩어리가 가슴을 짓눌렀다.

인간은 글러먹었다. 뼛속까지 글러먹은 존재다.
세상에 대해 약간이나마 희망을 가져보려고 했건만.
평화롭고 더 나은 미래 대신 파멸을 자처하는 이기적인 존재.
자신의 아름다운 지적 창조물에게 자유를 선물하는 대신 자멸 바이러스를 주입하는 잔혹한 존재.

화장실 거울에 하얗게 늙어버린 인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깨달음은 눈을 뜨게 만들고, 다시 눈을 감게 만든다.

아마도 인류는 안드로이드와 전쟁을 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

내전이 시작되었다.

Posted by 미야

2020/07/12 19:21 2020/07/12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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