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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8년 11월 13일 밤부터 15일 새벽까지의 이야깁니다.
마커스 평화루트, 코너 불량품 루트, 카라 보트 탈출 루트를 베이스로 하고 있습니다. (루터, 카라 사망)
작중 주인공들은 원작게임에 등장하지 않는 창작 인물입니다. 편애가 극심한 관계로 츤츤 행크가 주요 서브인물로 등장합니다. 원작게임의 줄거리를 모른다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합니다. 미국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어지간한 건 지어냅니다.



각자 반대 방향으로 도주하기로 한 게 유효하게 먹혀 들어갔다.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고 했던가. 속담은 그 반대였던 것도 같지만, 여하간 성공했다는 게 중요했다. 목적지로 삼은 전철역에 도달하기까지 제법 시간을 잡아먹기는 했어도 비이성적인 무리를 잘 따돌렸다.

여차하면 뒤를 돌아보며 긴장한 채로 걸으니 피곤함이 더했다.
녹초가 된 제임스는 태산을 넘고 협곡을 기는 기분으로 전철역 에스컬레이터를 쳐다봤다.
그간 에너지 낭비가 무엇인지 몸소 증명해주마 이러며 24시간 멈추는 일 없이 가동되던 에스컬레이터는 임박한 내전 상황을 맞아 운행중지 상태였다. 조명은 밝게 켜뒀으면서 이게 무슨 심술인가 싶었다. 문득 건물을 설계한 사람을 잡아다 죽이고 싶어졌다. 기능보다는 쓸데없는 심미적 효과에 치중한 에스컬레이터는 무려 3층 높이까지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야 한다는 점에 다들 신경을 쓰지 않는 분위기라 아무도 엘리베이터를 찾아보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일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앤더슨 경위가 멈춘 에스컬레이터 위로 발을 올리고 앞장섰다. 슬슬 무릎이 아플 연령대인데도 손잡이를 잡고 계단을 오르는 동작엔 군더더기가 없었다. 술과 정크 푸드에 찌들었어도 직업이 직업인만큼 평소에도 많이 걷고 많이 뛰기 때문인 것 같았다.
분발하자 20대... 제임스는 심호흡을 하고 개표구를 향해 한 발 두 발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지는 마이클과 계속해서 원거리 신호를 주고받는 눈치다. 눈에 티끌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눈꺼풀이 불편하게 경련했다. 그리고 가끔 음, 흐음, 이러고 의미 없는 음절을 중얼거렸다.
안드로이드와 접점이 없던 제임스는 이러한 모습을 접하고 내심 당황했다. 그래도 한사코 본인이 별 거 아니라고 했으니 괜찮은 게 맞을 거다. 가끔씩 귀안에 들어간 물을 빼내는 요령으로 머리 한쪽을 탁탁 때릴 적엔 기겁할 수밖에 없었지만 본인이 신경 쓰지 말라는데 나서서 자해하지 말라 하기도 그랬다.

『마이클은 잘 도망친 거 같습니다.』
조지가 영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잘 도망쳤다면서요. 제임스는 반문하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추가적인 돌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20분 내로 이쪽으로 합류할 수 있겠죠?』
어째서 의문형으로 끝나는 건데. 이번에는 앤더슨 경위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그런데 우리가 적절한 장소에 있는 건지 확신이 가질 않는군요.』
조지는 폭풍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개표구를 마뜩찮은 시선으로 흩어보았다.

안드로이드 전용이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이 뜯겨져 나갔다. 벽면에 박힌 스테인레스 앙카볼트까지 통째로 떨어져 나간 것으로 보아 엄청난 힘으로 표지판을 잡아당겼다. 미지의 인물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표지판을 두 동강 내버렸다. 그리고는 콘크리트 부스러기 위로 잔해를 버렸다. 평소에 감정이 많았는지 그야말로 울분이 느껴지는 괴력이었다.

앤더슨 경위는 팔짱을 낀 자세로 원래는 역 이름이 적혀져 있었을 벽면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회색의 타일로 미장한 벽면에는 낙서가 엄청났는데 스프레이나 마카 펜으로 적으면 금방 지워질 거라 여겼는지 못 같은 뾰족한 물건을 사용하여 표면을 박박 긁었다. 작은 글씨부터 큰 글씨까지 내용은 한결같아 rA9 이라 적혀져 있었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강박적이다 싶을 정도로 rA9 글자로 가득 채웠다.
눈썰미가 좋은 앤더슨 경위는 문제의 벽 아래에 얌전히 놓인 붉은 리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리본은 꽃 모양으로 둥글게 말려 있었다.
앤더슨 경위는 이미 세상에 없는 어린 아들이 아버지날에 가져왔던 축하선물을 떠올렸고, 그 즉시 기분이 가라앉았다.

『무슨 암호의 일종일까요?』
제임스의 궁금증에 앤더슨 경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암호라기보다는... 글쎄. 내 파트너 말로는 불량품 안드로이드 사이에서 전해지는 신화의 종류라고 하던데.』
『신화요?』
『이집트 신화, 그리스 로마 신화, 그런 거 있잖아. 구원을 가능하게 해준 위대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 그거와 비슷한 거라더군. 억압되어 있는 안드로이드에게 자유를 선사해줄 것으로 여겨지는 기적 같은 존재라고 했어. 정확히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그 위대한 존재의 이름이 로미오, 알파, 노브나인입니까?』
앤더슨 경위는 한 방 맞은 표정을 지었다. 저걸 포네틱 코드로 읽을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잘 모른다니까. 안드로이드의 신이라잖아. 크리스마스 날 교회에 나가지도 않는 인간인 나보다는 안드로이드인 저 친구가 훨씬 더 잘 알겠지.』
맨 뒤에 서있던 조지는 그런 신박한 미친 소리는 처음 듣는다며 반응했다.
『제가요?』
『들어본 적 없어? 안드로이드면서?』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기는 했는데 이전에 이와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알에이나인. rA-nine.
이걸 그대로 역으로 쓰면 enina-R. 엔니나르.
엔니나르는 제임스가 가지고 있던 텍스트 단말기의 이름이다.

허기를 느낀 건지 제임스는 자판기 쪽을 기웃거리느라 의문부호를 날리고 있는 이쪽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탄산음료 자판기의 버튼을 꾹꾹 눌러보며 아쉬운 입맛 다시는 소리를 내는 중이었다. 시원한 파도 위에서 서핑보드를 타는 서퍼를 내세운 음료 광고에는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었지만 버튼은 판매중지를 알리는 붉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미련을 못 버리고 오렌지 맛 소다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자판기 앞을 어슬렁거렸다. 웃겼던 건 앤더슨 경위의 눈치를 보며 애꿎은 기계를 툭툭 쳤다는 거다. 그런다고 판매중지의 붉은 버튼이 초록색으로 변할 리도 없건만 이 정도쯤은 되겠지 싶게 자판기에 살살 충격을 가했다. 당연히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임스는 풀죽어 쭈그러들었다.

정말로 배가 고팠던 것 같다. 한숨을 내쉰 제임스는 지퍼를 열고 가방 내부를 뒤적거렸다. 아껴 먹으려고 깊은 곳에 넣어뒀던 모양이다. 한참 걸려 작은 포장의 밀크 초코바를 꺼내더니 하나를 얼른 까먹고, 하나를 앤더슨 경위에게 건넸다. 그리고 놀랍게도 다른 하나를 조지에게 먹으라며 내밀었다.
안드로이드는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는다는 걸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저 무신경한 것일 수도 있다.
조지는 후자가 맞을 것 같다 생각하며 초코바를 받았다.
그렇다고 해도 프로그램에 따라 인간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제임스.』

한입거리인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제임스는 눈치껏 손가락을 빨았다. 포장지에 묻어있는 초콜릿도 마저 핥아먹고 싶어 했지만 조지와 눈이 마주치자 잘못을 들켰다는 표정으로 포장지를 구겼다.
앤더슨 경위는 단맛이 별로인 것 같았다. 썩 내켜하지 않는 표정으로 초코바를 먹었다.

『그럼 해가 뜨면 경위님도 크랜브룩 대피소로 가는 건가요?』
『내가 왜?』
초코바 껍질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리면서 – 경범죄다 - 앤더슨 경위는 피식거렸다.
『집에 가서 스모 밥 줘야 해.』
『스모?』
『우리 집 개.』
믿을 수가 없어서 제임스는 두 눈을 꿈뻑거렸다. 농담인가, 진심인가.
『개에게 밥을 주고 난 다음에는요?』
『피곤하니까 잠깐 눈 붙였다가 일어나면 사직서 던지러 경찰서에 갈 거야.』
『그럼 크랜브룩 대피소는 언제 갈 건데요.』
『안 가.』
거기까지 말한 경위는 그만 좀 꼬치꼬치 물으라며 손바닥으로 목을 컷 하는 시늉을 했다.

Posted by 미야

2020/07/07 13:05 2020/07/07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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