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점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벤치에 앉아 막연히 버스를 기다리곤 했다.

홀로그램 노선표를 보며 목적지를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거웠다. 그곳은 고양이 사료 전문점일 수도 있었고, 우체국일 수도 있었고, 잡초가 우거진 강변 공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무작정 종점까지 가보는 것도 괜찮았다.
실제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은 흔치 않았으나... 반드시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저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면 체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정 중앙을 틀어쥐고 있던 묵직함이 가라앉았다.

《긴급조치 71조에 의거한 통금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긴급을 요하는 응급상황을 제외하고 20시부터 다음날 오전 6시까지 모든 거리의 일반 통행이 금지됩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조속히 안전한 실내로 이동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은 가볍게 씹고 차갑게 식은 사람 전용 벤치에 엉덩이를 내렸다.

캐머런 건 외에도 최근 엔니나르의 비밀 대화방에서 모습을 감춘 사람은 더 있었다.
닉네임 도비는자유에요, 모던타임즈, 스타스키와허치. 이들 세 명이었다.

할 일이 없어 무료했던 제임스는 고정 닉네임과 실제 이름과 얼굴을 떠올려 서로 연결시켜보고자 했다.
도비는자유에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은 간호사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다. 디트로이트에 거주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연령대는 40대로 추정된다.
젊은 시절에 캘리포니아 몬테시토 주에서 발생한 큰 규모의 산사태에 큰 피해를 입었다. 어머니와 동생이 사망했고 장례식을 치루고 곧바로 캘리포니아를 등졌다.
나중에 구글 검색으로 그게 2018년의 일이라는 걸 알았다. 2018년에 간호학과에 다니고 있었으니 단순계산으로 지금은 40대다.
이름은 불명.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불명.
어쩔 수 없이 제임스는 영화 해리포터에 나왔던 도비의 얼굴을 그와 대치시켰다.

닉네임 모던타임즈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던 친구다. 본명은 릭 도슨. 찰리 채플린을 숭배하여 영화 시티 라이트 포스터를 벽에 붙여두고 흑백 무성영화 동호회를 운영했다.
언젠가 독립 영화를 찍을 거라며 허풍을 떨었으나 그만한 재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졸업 후에는 채널16 방송국 비정규직으로 취직했고, 한때 영상 편집 쪽으로 빠졌다가 나중엔 비품실 담당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후로도 신세가 잘 풀리지 않아 엔니나르에 접속하면 그때마다 안드로이드와 업무 능력을 비교 당한다며 불평했다.

《모던타임즈 : 여기는 쓰레기통이야. 그리고 안타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주변에 가득하지.》

그는 항상 알록달록한 꽃무늬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한 손으로는 비행기 표를 거머쥔 채 다른 손으로는 상관의 얼굴을 향해 사표를 냅다 던지는 상상을 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해고를 당할까봐 전전긍긍해 했다. 한도 초과까지 사용한 신용카드 대금을 갚으려면 똥으로 막힌 화장실 청소라도 해야 한다며 울적해 했다.

《모던타임즈 : 팀장의 바지자락을 붙잡고 제발 자르지 말아달라고 애원했어.》
글자로 읽었음에도 풀 죽은 릭 도슨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모던타임즈 : 그때 지은 팀장의 표정을 네가 봤어야 했어.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져서 완전 끔찍했다고. 날 곰팡이 쓴 피자인양 쳐다봤어.》


고개를 숙인 채 정류장 벤치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제임스는 자조적으로 쓰게 웃었다.
그랬다. 오늘날 미국에서 실직자들의 처우는 말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 취급이었다. 비닐로 덮어 냄새가 밖으로 풍기지 않도록 감추어 놓기만 했을 뿐으로 비닐을 살짝 들추기라도 하는 날엔 썩는 악취로 난리가 날 터였다.
골치를 앓던 주정부는 세금을 써가며 탈취제를 정기적으로 뿌려댔지만 – 어쨌든 기본소득제라는 안전장치는 제대로 작동해서 아사한 시체로 발견되는 사람은 없었다 – 일단 썩기 시작한 쓰레기는 쓰레기일 뿐이었다.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남고 싶어 하며 공원에서 기타를 들고 노래를 해본들, 사회로부터 박리당해 밖으로 떨어져 나가면 다시 안쪽으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았다.

후우, 하고 길게 입김을 내뿜었다.
입안에서 서걱서걱 얼음이 씹혔다.

『실례합니다.』
30분 넘게 우두커니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기만 한 탓에 이목을 끌었던 것 같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회색 바탕에 초록색이 섞인 안드로이드 재킷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추위에 저딴 얇은 옷이 다 뭐람 – 제임스가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올린 건 그 부분이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거라면 집으로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모든 노선이 현재 운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WM450 모델명이 적혀진 부분이 파랗게 점멸하며 빛났다.
제임스는 이렇다 말을 꺼내기 전 꿀꺽 하고 침을 삼켰다. 재킷에 적힌 모델명을 한 번 쳐다봤고, 다음으로는 하얗게 눈이 내린 어깨를 쳐다봤다. 눈사람이라고 해도 수긍할 만큼 정말 많은 눈이 안드로이드 재킷에 묻어 있었다. 그런 안드로이드의 모습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이하여 하얗게 설탕가루를 뿌린 케이크처럼 보였다.
확실히 케이크 같다 – 제임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뭔가 특별한 것 같지만 공장에서 찍어내 전부 똑같은 외형이다. 심지어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적은 메시지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다. 기계가 크림을 발랐고, 초콜릿 파우더를 뿌렸고,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포장용기로 이동시켰다.
WM450 모델 안드로이드도 마찬가지다. 서비스 보조직으로 써먹기 위해 양산형으로 만들어진 저것들은 구분되지 않는 똑같은 외양과 똑같은 목소리로 가진 채 각종 현장에 배치되어 활약했다. 상점 직원으로 흔히 마주칠 수 있었고, 미술관 안내소에서, 아니면 박물관, 우체국, 도서관 도우미로 만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전부가 진부한 갈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하면 사람이 좋아할 거라 여겼는지 헤프게 미소를 짓곤 했다.

그래서 버스 정류장에서 그에게 말을 건 WM450 모델이 다소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점은 좀 의외였다.

제임스가 계속해서 별다른 말없이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안드로이드의 표정이 한층 더 딱딱해졌다.
신기했다.
미소를 짓고 있을 적의 그것들은 깡통 플라스틱으로밖엔 여겨지지 않았는데 긴장한 채 눈을 깜빡이고 있는 WM450은 어쩐지 진짜 사람 냄새를 풍겼다.

『혹시 곤란에 처했습니까? 도움이 필요합니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맹한 어조로 화장실의 위치를 안내하던 목소리와도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제임스는 도움이 필요하냐는 안드로이드의 질문에 엉뚱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불량품입니까?』

Posted by 미야

2020/06/03 13:47 2020/06/0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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